7. 선지서1:예수님은 왜 심판하실까?(헤브론성경통독 초안 작성중)
헤브론 성경통독
프롤로그
헤브론에 처음 가게 된 이야기. 교장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 성경통독 제안과 진행에 대한 이야기. 성경통독의 추억과 미래. 이 책에 대한 기대감등.
[목차]
Part1. 오리엔테이션
1장. 성경통독이란 무엇인가?
2장. 성경 통독을 왜 해야 하는가?
3장. 성경 통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Part2. 구약성경
4장. 율법서: 예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5장. 역사서: 이스라엘에게 왕은 누구였을까?
6장. 시가서: 우리가 힘들어할 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
7장. 선지서1: 예수님은 왜 심판하실까?
8장. 선지서2: 예수님은 왜 구원하실까?
Part3. 신구약 중간사
9장. 하나님은 왜 침묵 하셨을까?
10장. 로마 제국은 어떻게 말씀 전파에 기여했을까?
11장.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Part4. 신약 성경
12장. 사복음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13장. 사도행전: 예수님은 교회를 왜 세우셨을까?
14장. 서신서1: 예수님은 교회를 어떻게 세우고 계실까?
15장. 서신서2: 예수님은 어떤 믿음을 원하실까?
16장. 요한계시록1: 예수님은 교회들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17장. 요한계시록2: 예수님은 어떻게 심판하실까?
18장. 요한계시록3: 예수님은 어떻게 구원하실까?
19장. 에덴에서 새예루살렘까지 성경 전체를 스토리 텔링하기
20장. 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에 우리는 어떻게 순종할까?
[7장. 선지서1: 예수님은 왜 심판하실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말은 단지 입으로 전하는 말이 아니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짊어졌다. 그 마음은 때때로 심판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 심판의 바깥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었다. 죄를 미워하면서도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 돌아오지 않는 백성을 향해 분노하면서도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 마음은 아프고 무겁고, 쉽게 꺼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신 분이다.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스스로 안고 오셨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결과를 자신의 몸에 직접 끌어안으신 분이었다. 이 장은 그런 예수님을, '선지자'라는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시도다. 하나님의 심판이 왜 복음인지, 왜 좋은 소식인지, 그 깊은 마음을 함께 따라가 보고자 한다
1. 선지자란 누구인가 – 하나님의 말씀으로 쪼개진 존재
선지자의 말은 입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에서 나온다. 그들은 말하는 자가 아니다. 들은 것을 견디지 못해, 온 몸으로 토해내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사람의 귀는 열리고, 입이 열리기 전 심장 부터 쪼개진다. ‘나비(נביא)’—부름받은 자, 하나님의 입김이 그의 인생을 쪼개고 지나가는 것을 경험중인 사람.
선지자는 자기 말이 없다. 그는 자기 생각이 없다.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숨을 쉰 적이 없다. 그의 폐에 가득차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입김이다. 그의 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 꽂아 두신 것이다. 그의 몸을 관통하며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다.
예레미야. 눈물의 선지자. 그는 성읍 안에서 도망칠 수도, 떠날 수도 없었다. 말씀이 몸속에서 불처럼 타올랐다. 그는 거기 있었고, 말씀을 견디지 못해 말했다. 에스겔, 성전에 관한 환상과 말씀에 사로잡혔던 선지자. 그는 자신의 몸을 말씀 도구로 삼아야 했다. 벙어리처럼 입을 닫아야 했고, 벽에 구멍을 뚫고 포로처럼 짐을 메고 나갔으며,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 나누어 불태우고 바람에 날려야 했다. 말씀이 선지자들의 삶을 박살냈다.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들의 삶에 담긴 문장들은 때로는 고통, 때로는 수치, 때로는 외로움이었다.
신명기 18장의 약속은 모세를 닮은 또 하나의 선지자를 기다린다. 백성은 그 소리를 두려워했기에,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리니 그의 말을 들으라”(신 18:15). 그는 누구였을까? "나와 같은 선지자"란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였을까? 신명기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신 34:10). 이 예언은 여전히 미래를 향해 열려 있었고, 신약은 그 기다림에 답한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예레미야 23장은 거짓선지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한다. 거짓 선지자는 말한다. “평안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 적 없다. 참 선지자는 말하지 않는다. 보았기 때문에 말한다. 말씀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에 말한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말은, 반드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성취된다. 그것이 말씀의 무게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분이 명하신 그것을 말하노라.”(요 5:19, 12:49)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다. 문장이 걷고, 숨 쉬고, 피 흘리셨다. 십자가는 종이 위에 적힌 문장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찢으신 자리다. 그 파열음이 우리를 구원했다.
2. 이사야와 예레미야 – 눈물과 소망 사이에 선 대언자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어떤 이는 기록했고, 어떤 이는 울었다. 또 어떤 이는 그 말씀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도록 몸을 내어주었다.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외로웠고, 오랜 시간 그 부르심을 감당해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가장 오래도록 하나님의 심장을 붙들고 있었던 자들이다.
이사야.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그는 왕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혼란의 시대를 통과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끝까지 말해야 했다. 그는 멀리 있는 심판도, 곧 닥칠 회복도 함께 보았다. 그래서 그의 예언은 언제나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갔다. 1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탄식으로 시작해, 35장에서는 사막에 물이 흐르고, 맹인의 눈이 열리고, 저마다 다시 걷게 될 날을 노래한다. 그 희망은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그들 가운데 임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예레미야. 그는 말보다는 울음이 먼저였던 선지자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지만, 그 말씀은 너무 무거워서 말할 때마다 그의 뼛속이 깨어지는 듯 했다. 백성은 듣지 않았고, 거짓 선지자들은 정반대의 말을 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맞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멈추지 않았다. “너희가 그 땅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 그 성읍이 평안하면 너희도 평안할 것이다”(렘 29:7). 포로된 백성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심판 안에도 평안을 위한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았던 사람이다.
두 사람은 선지자였고, 선지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통째로 안고 살았다. 이사야는 메시아를 예언했다. 그가 찔림을 당하고 징계를 받으며 우리를 대신할 것임을 예고했다. 예레미야는 새로운 언약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새겨질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신약은 그 모든 기다림의 중심에서, 예수님을 보여준다. 그분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고난받는 종이셨고, 예레미야의 언약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신 분이었다.
눈물과 희망, 심판과 구원이 이 두 사람의 입술에서 함께 나왔고, 그 균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그 예언들의 중심에 서 계셨던 하나님 자신이셨다.
3. 심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 멈추지 않는 사랑
선지자들의 입술에서 심판의 말씀이 터져 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라고 여겼다. 실제로 선지서에는 무너짐, 멸망, 칼, 기근, 포로와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든 말들 뒤에는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마음이 숨어 있다. 그 심판은 죄를 향한 분노이지만, 동시에 죄인에게 돌아오라 외치는 호소다.
선지자들을 통한 심판 선포에는 목적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회복과 구원이었다. 멸망은 경고였고, 진노는 흔들어 깨우는 손과 같았다. 이사야의 예언이 1장에서 심판으로 시작되지만, 같은 장 안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고 말씀하신다.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하겠다는 선언. 책망은 끝이 아니라, 끝을 준비하게 하는 호소이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다. 그는 바벨론 포로를 예고했지만,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말했다.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하나님은 고통을 지나 다시 데려오시는 분이시다.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다시 세우시는 분이다.
선지자들의 심판 메시지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든 멈추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인간의 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은 더 애타게 울렸다. 그 애타는 마음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대신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셨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을 단지 벌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경고와 부르심, 탄식과 기다림,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안아주는 품. 선지서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심판의 대상이 된 죄인들을 회복하시는 것이다.
4. 몸으로 예언한 사람들 – 에스겔과 다니엘
에스겔은 행동으로 보이며 대언했다. 말씀이 그의 몸을 빌려 세상에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벙어리 처럼 말을 하지 않았고(겔 3:26, 27), 낮에는 포로처럼 이삿짐을 싸고, 밤에는 벽을 뚫고 포로처럼 나가기도 했다 (겔 12:1-16). 수염과 머리카락을 불에 던지고 바람에 날려야 했고(겔 5장), 왼편으로 390일, 오른편으로 40일을 누워 지내기도 했다(겔 4:4-8). 그의 기행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삶이 곧 메시지였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온 몸으로 전했다.
그는 본래 제사장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성전은 무너졌고, 그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대신 그는 환상을 통해 무너진 성전의 회복을 보았다. 에스겔 47장의 환상은 무너졌던 성전에서 생명의 강이 흘러나오는 장면이다. 죽은 땅을 살리고, 바다를 회복시키는 그 강물은,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이 얼마나 크고 실제적인지를 보여준다. 심판은 성전을 무너뜨렸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 성전을 회복하실 분이셨다.
에스겔의 환상은 단지 성전 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강물은 생명을 회복하고, 죽음을 거슬러 흘러가는 복음의 이미지다. 죽었던 것들이 살아나는 그 광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이시며(마 12:6), 무너진 성전과 같은 인류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에스겔이 본 그 생명의 강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배에서 흘러나올 생수의 강으로 다시 이어진다(요 7:38). 에스겔은 예수님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그의 눈은 분명 그분을 향해 열려 있었다.
에스겔의 예언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메시지였다면, 다니엘은 조용한 내면에서 말씀을 붙들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그러나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몸으로,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을 보여주셨고, 다니엘을 통해 그 뜻을 해석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외침과 침묵, 상징과 기도, 환상과 말씀을 통해 동일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다. 그는 예언보다 기도로, 행동보다 인내로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삶은 정결했고, 그의 시선은 늘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었다. 다니엘 9장에서 그는 예언을 해석하며 기도한다. “주는 의로우시고 우리는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포로된 백성을 대신한 회개의 기도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신앙의 외침이었다.
다니엘서의 후반부는 마지막 때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하다. 칠십 이레 예언은 단순한 연대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도래와 죽음, 그리고 남은 한 이레—곧 미래에 올 심판과 구원의 순간들을 가리킨다. 다니엘은 이 모든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분을 바라보았다. 기름부음 받은 자, 끊어질 것이나 다시 오실 그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에스겔과 다니엘. 그들은 말보다 깊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전했다. 에스겔은 몸으로, 다니엘은 기도로. 하나는 환상 속에서, 다른 하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붙들었다. 두 사람은 예언자였고, 그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려는 하나님의 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결국 십자가 위로 향했다. 하나님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기 위해, 자기 아들을 허물의 자리에 세우셨다.
5. 예수, 선지자의 완성으로 오시다 – 말씀이 육신이 되다
예수님은 선지자중의 선지자셨다. 그분은 완전한 선지자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를 넘어서, 그 말씀 자체가 되신 분이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이자, 모든 선지자의 궁극적 성취였다.
신명기 18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약속하셨다. “너희 가운데 너희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신 18:15). 신약은 이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증언한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요 6:14)라 말했고, 히브리서는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히 1:1-2)고 선포한다.
예수님은 오셔서 선지자의 사명을 완성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살아내셨다. 그는 회개를 촉구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고난받고 버림받은 자들 가운데 머무르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다 이루었다”—는 단지 죽음의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을 끝까지 감당하셨다는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뜻, 선지자의 사명, 구속의 계획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모세와 같지만 모세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는 다니엘이 보았던 그 시간의 중심이며,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난의 종이며, 에스겔이 그리던 회복의 성전 그 자체이시다. 모든 선지자가 예고했던 그 길 위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길 위에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말씀은 단지 기록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