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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를 가로막는 5가지 반反선교적 사고방식

pastorjay 2020. 5. 5. 20:14

 

<1. 대형교회 신드롬>

 

: 기성교회는 왜 제자화에 올인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5가지 반 선교적 사고방식들의 방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대형교회 신드롬이다. 

 

(1) 대형교회 신드롬이란 무엇인가? 

 

대형교회 욕하지 마라. 

대형교회는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교회의 한 형태일 뿐이고, 

덩치 만큼이나 문제도 조금 더 많을 뿐이다. 

 

그러나 

대형교회 "신드롬" 

즉, 교회는 무조건 

성도가 많아지고 커지는 것이 사역의 목적이다라는 병적 생각은 

문제가 크다. 

 

예전에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Church Planting Korea​ 에서

CPC (교회개척학교의 한 과정)를 진행 중

위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이 사진 보시니 어때요?"

 

목사님들이 대답하셨다. 

"너무 멋져요!" "부러워요!" "부흥했네요!"......

 

내가 물었다. 

"이게 무슨 사진인지 아세요?"

......

 

"이 사진은 자정 넘은 시간, 

술마시고 춤추고 원나잇 스탠 찾는 남녀들의 

세속적인 클럽 모임을 찍은 사진입니다." 

 

......

 

 

 

(2) 대형교회 신드롬이 왜 제자화에 방해가 되나? 

 

긴 예기 않겠다. 

대형교회 신드롬이 제자화에 방해된다. 

 

왜냐면, 

대형교회 신드롬은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데 반해,  

 

제자화 사고방식은 작게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제자화 사고방식에서는 한 영혼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토대로 한 신앙 공동체가 

유기체적이고 자연 발생적으로 

제자화를 통해 배가 되는 것과, 

 

야망을 토대로 한 어떤 지도자가

신앙 공동체를 이용하여 

어중이 떠중이들을 덧붙여 모아 교인이 많아지는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대형교회 신드롬"이라는 

그 병적 사고방식이 

 

제자화 사역에 방해가 된다. 

 

사람 많이 모으고 싶나?

홍대가서 근사한 클럽을 시작해라. 

직빵이다.

 

 

 

 

 

 

 

 

 

 

 

 

<제자화를 막아서는 5가지 반선교적 사고방식들>

 2. 전문가 신드롬

 

: 기성교회는 왜 제자화에 올인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5가지 반 선교적 사고방식들의 방해가 있다. 

 

그 중 두번째는 

"전문가 신드롬"이다.

 

(1) 제자화 전문가를 고용한 교회 스토리.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한 교회에서 제자화 사역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회의를 했고 그 결론은... 

"제자화"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었다. 

 

얼마뒤 그들은 수소문 끝에, 

관련 학위를 가진 

유학파 목사님을 모셔왔다. 

 

그리고 1년 뒤

본인들이 잘못된 결정을 했던 것을 

깨달았다. 

 

왜냐면, 

실제 사역의 현장에서 

제자화에 관해 기대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학위가 있는 사람 한명 데려다놨다고

교회 전체에 제자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것을 

그 리더십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2) 전문가 교회?

 

병이다. 

 

은혜받고 사역하려고 불타오르고 있는 성도들 제껴놓고 

전문가를 외부에서 찾는 달뜬 열정도 병이고,

 

전문가 한 사람만 있으면 전체가 바뀔꺼라는 

게으른 기대감도 병이고,

 

작고 어리숙한 사람들 무시하는 사고방식도 

병이다. 

 

설교방송에 대해 자문해보라. 

병이다. 

 

언제부터 교회에 방송국이 필수였나?

눈앞에 설교자 얼굴 아랫입술 뭍은 밥풀도 보이는데

왜 강대상 뒤 목사님 얼굴을 

거대한 모니터 두대로 정면에 또 틀어놨는가?

 

음향 시스템에 대해 자문해보라. 

병이다. 

 

언제부터 교회가 수억원대의 음향 장비들이 필수였나?

속삭여도 들리는 설교 소리

왜 8대의 마이크와 

수천만원짜리 스피커들에 꽂아 두었나?

 

그런 것들이 

전문가 신드롬이 만든

어색한 장면들이다. 

 

 

 

 

(3) 전문성과 실행의 관계?

 

제자화 사역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만 교회 사역을 할 수 있고, 

전문가들만 제자화 사역을 할 수 있다는

병적 사고방식이

제자화 사역을 막아선다. 

 

물론, 

이론이 없는 실천은 위태위태 하고 

지식이 없는 실행은 불안불안 하다. 

 

하지만 동시에,  

실천이 없는 이론은 회의적이고 

실행이 없는 지식은 허무할 뿐이다. 

 

무슨 말이냐고? 

예를 들어.... 

 

신학교에서는 

학생들 사이에 이런 공공연한 농담이 있다. 

 

"설교학 교수는 설교를 못해서 설교학 교수가 되었고

전도학 교수는 전도를 못해서 전도학 교수가 되었다." 

 

 

 

 

 

(4) 누가 제자화 전문가인가?

 

성경이 말하는 제자화 전문가는 

전문가 신드롬이 말하는 전문가와 다르다. 

 

그들은 

"학문 없는 범민" (행 4:13)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고전 1:27)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 (고전 1:28)

이었고 

 

그들은 

여자들, 아이들, 어부들,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이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6)

 

예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비전문가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천국열쇠를 맡기시고 

제자화를 맡기셨다. 

 

성경은 말한다. 

 

"전문가"에 대한 비밀은 

학위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위임에 있다. 

 

 

 

 

(5) 그러므로 비전문가들의 제자화 사역을 막지 마라. 

 

전문가 교회 신드롬에 빠진 교회에서는 

이제 막 신앙생활 시작한 새신자가 

제자화 사역을 하는 것을 막아선다. 

새신자를 "비전문가"로 보기 때문이다. 

 

전문가 교회 신드롬에 빠진 교회에서는 

어린이나 노인이나 뭔가 약한 구석이 있는 성도들이 

제자화 사역을 하는 것을 막아선다. 

그들을 "비전문가"로 보기 때문이다. 

  

전문가 신드롬에 빠진 사람들에게 물어라. 

 

"제자화 전문가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화 학위가 있는 사람은 모두 제자화를 하는 사람입니까?"

"제자화 학위가 없는 사람은 모두 제자화를 못하는 사람입니까?" 

 

이제 막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불신자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제자화 한다. 

 

왜냐구?

비전문가들이라서 그렇다. 

 

난생 처음 

창세기 1장 1절 펼쳐 본 사람은

성경 한번 읽어보지 않은 친구들에게 

그 구절 소개한다. 

 

왜냐구?

비전문가라서 그렇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처음 경험한 사람은 

아직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희생과 사랑을 전하고 가르친다. 

 

왜냐구?

비전문가라서 그렇다. 

 

제자화는 

학위가 있는 없든 

예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다. 

 

 

 

 

 

(6) 전문가 신드롬 반대하면 쫓겨날수도 있다. 

 

중세 카톨릭 교회가 

"천국열쇠" (마 16:19)를 교황만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성경적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 했다. 

많이 죽었다. 

 

오늘날의 전문가 신드롬에 빠진 교회들은  

그 "천국 열쇠" (마 16:19)를 전문가들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성경적이다. 

그러니 개혁하라.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며.

 

 

 

 

 

 

 

 

 

 

 

<제자화를 막아서는 5가지 반선교적 사고방식들>

3. 행정교구적 사고방식

 

: 기성교회는 왜 제자화에 올인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5가지 반 선교적 사고방식들의 방해가 있다.

 

그 중 세번째는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이다.

 

(1) 그것은 중세적인 것이다.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이란, 

한 지역, 한 구획당 단지 하나의 교회만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중세적인 사고방식이다. 

 

중세 카톨릭 국가에서 교회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제도였고 

국가가 운영했던 관료중심 그리고 건물 중심의 기관들이었고, 

그 아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행정교구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 리더십이 원하는 형태의 단일 교회가 존재했고, 

그 때문에 행정교구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역사적으로 가까운 예를 들자면, 

 

1~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은 

공장화에도 반영되었다.  

 

 

 

(2)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은 공장형 사고방식과 연결되어있다.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은 

그 실행적 측면에서 “공장형 사고방식”과 닮았다. 

 

공장 라인을 모두 거치고 나면 

단 한 종류의 제품만이 존재한다. 

 

그 제품은 메뉴얼화 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 통용될 수 있는 똑같은 부품들을 

아웃소싱 (외주)을 통해 찍어낸다. 

 

이들은 서로 같아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폰 5와 

당신의 아이폰 5는 

같은 제품이다) 

 

공장형 사고방식은

같은 생산품을 찍어내기 위해 

최적화 된 철학이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와 안맞다. 

시대적으로 안맞고

성경적으로도 틀리다. 

 

 

 

(3)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의 시대적 문제

 

이제는 3차 산업혁명의 시대이다. 

하나의 메뉴얼이 시장을 지배할 수 없는... 

소위, 개성의 시대이다. 

 

"개성만큼의 직업이 존재하는 시대이며

모두가 모두와 연결되는 시대이다" (클레이 셔키). 

 

"무수한 분량의 개별 소비자 코드를 

일일이 읽어내지 못하면 

생산자가 망하는 시대이다" (데이브 그레이). 

 

규격화된 이력서를 통해 사람을 뽑으면

인사 실패가 보장된 시대이다. 

 

오늘날은 더이상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은 중세로 부터 한참 멀어져 있는 시대다. 

 

 

 

(4)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의 성경적 문제

 

게다가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은 

교회와 그 사역에 있어서 비성경적이다. 

 

은사는 하나일 수 없고 (고전 12:4)

직분도 하나일 수 없고 (고전 12:5)

사역도 하나일 수 없다 (고전 12:6)

 

“하나”여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뿐이고

나머지는 다 다르다 (고전 12:12)

 

이 다양성을 한 성령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하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교회이며 

교회 사역이다 (고전 12:6~12)

 

 

 

(5) 제자화 사역에서의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의 방해1: 권한위임 안해줌

 

제자화 사역은 권한 위임을 요구한다.

제자는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딤후 2:2).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극단적으로 와 닿는다. 

 

그래서 

세례와 주일예배 설교를 예로 들어보겠다. 

 

마 28:19-20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고 하신 명령은 담임목사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다. 

 

그러나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은 

교회 안에서 리더 목사 한 사람만이 세례를 줘야 한다는 행정 결과를 낳았다. 

 

제자화에 방해된다. 

행정교구적 사고방식 때문에 위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 예를 들어, 

마 28:19-20에서 예수님은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 역시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다. 

 

그러나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은 

교회 안에서 목사만 설교 해야 한다는 행정 결과를 낳았다. 

 

제자화에 방해된다. 

행정교구적 사고방식 때문에 위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6) 제자화 사역에서의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의 방해2: 제자화를 상품처럼 규격화 함

 

사람은 규격화 될 수 없다. 

사람의 숫자 만큼의 개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종 성격 심리검사? MBTI? 것들두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에서 나왔다.

사람은 그렇게 규격화 될 수 없다. 

가끔 누군가 내게 MBTI 유형 물으면 나도 김정운 교수처럼

"나는 TGIF요!" 라고 대답한다.)

 

제자도 규격화 될 수 없다. 

각자의 은사가 다르고 

관계의 연결망이 다르고 

사용하는 문화 코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은 

단 한 종류의 제자만 찍어 낼 것을 요구한다. 

 

교실 기반의 각종 제자화 수업들에서 그렇다. 

커리큘럼 중심의 각종 제자화 훈련들에서 그렇다. 

 

제자화는 단일 제품으로 찍어낼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제자화는 그런 식으로 왕창 찍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제자화는 개별 관심과 사랑을 무수한 시간에 담아

삶으로 동행하며 보여주고 섬겨야 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7) 그러므로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모두가 모두를 제자화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며 다양한 개별 사역들을 허락 하라. 

 

딤후 2:2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여기에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은 전혀 없다. 

왜냐면,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에게 

모든 제자화 권한을 위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 카톨릭은 

행정교구를 나누어 통제했다. 

제도가 교회를 통제했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들이 일어나서 

목숨을 걸고 개혁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지 국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국가의 통제를 받는 기관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는 제자들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이 틀리다면, 

계속 제자화 권한을 

몇 사람의 리더만 꽉 틀어쥐고 있는 상태에 대해 침묵하라. 

 

내 말이 틀리다면, 

계속 제자들을 상품처럼 

찍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침묵하라. 

 

그러나 

 

내 말이 맞다면, 

 

개혁하라. 

 

예수님을 대신해서  

교회를 좌지우지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행정교구적 사고방식에 빌붙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언뜻 보면

우리의 왕 되신 예수께 충신 같지만, 

결국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 왕을 이용하는 간신일 뿐인 

교회 리더들에게나 

 

행정교구적 사고방식가운데 

그들 인간 리더들에게 고개숙이느라 

선한 목자 예수를 잊은 사람들에게도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라. 

 

당신도 제자를 삼아라. 

당신도 세례를 주라. 

당신도 설교를 하라.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1-2)

 

 

 

 

 

 

 

 

 

 

 

<제자화를 막아서는 5가지 반선교적 사고방식들>

4. 응급처치 접근

 

: 기성교회는 왜 제자화에 올인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5가지 반 선교적 사고방식들의 방해가 있다.

 

그 중 네번째는 

“응급처치 접근”이다. 

 

(1) 응급처치 접근이란? 

 

새로운 제자를 삼는 것 보다 

교회 안에 있는 죽은 성도, 혹은 

교회 안의 죽어가는 성도들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제자화 사역자들의 에너지를 

교회 내부로 돌려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쉽게 말해, 

"지금 교회 안에 시름 시름 앓으며 죽어가는 

어중이 떠중이성도들이 넘쳐나는데 

그들을 잘 돌봐야지 

굳이 새로운 제자를 삼을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새롭게 제자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제자화 대신 교회 내부의 어떤 사역들을 하도록 

독려하게 된다. 

 

그런데, 

잠깐만… 

 

응급처치 접근은 왜 잘못인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제자화 하면 좋은 일 아닌가? 

 

맞다. 

 

교회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만약, 

“제자화”를 한다면 문제 없다. 

 

좋다. 

 

하지만, 

응급처치 접근이라는 사고방식은 

 

제자화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사용하도록 

 

교묘히 

이끈다. 

 

그 다른 곳이란, 

“현상 유지”라는 

허울 뿐인 비성경적 사역이다. 

 

응급처치 접근의 가장 큰 문제는

제자화를 안하는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화를 하려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현상유지에 쏟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잘못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본다면… 

 

 

 

(2) 왜 응급처치 접근인가? 1. 갭 이론

 

웨이쳐치Way Church의 James Lynch 목사는 

최근 CGNTV에서 “갭 이론”에 대해 말한적이 있었다. 

 

그는 조지바나 그룹의 통계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갭 이론을 펼쳤다. 

 

통계적으로 

교회 주일 예배에 100명이 참석한다면

그중 50명만이 소그룹에 참여하고,

그중 10명만이 제자화 된다. 

 

이런 통계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일예배 참석자 숫자 성장 곡선과 

이 후 제자화 된 인원의 숫자 성장 곡선 사이의 

갭이다. 

 

다시 말해, 

교회 오는 사람 숫자에 비해 

제자화 되는 사람의 숫자는 너무 적다는 것이 

린치 목사가 말한 갭 이론의 핵심이다. 

 

여튼, 

갭 이론에서의 그 10명은 다시 

제자화 되지 못한 90명의 어중띄기들을 위한 

사역에 투입되는데, 

 

이때, 

그 10명의 열정과 에너지는 

 

제자화 사역이 아니라 

제자화 되기를 거부하는 90명의 미온적인 종교 소비자들을 

 

주일 예배라는 헌금 근원지에 계속 담아내기 위해 

허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작 이 10명은 회의를 느끼게 되고 

교회에 불만을 갖게 되는데, 

 

교회는 그러한 10명을 격려하기 위해 

 

오히려

한 영혼을 돌봐야 하지 않겠냐며

성경을 가지고 (예를 들면, 마 18:13) 설득하려 든다. 

 

교묘하다. 

제자화를 막기 위해, 제자화 관련 성구를 인용하다니…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마 18:13의 잃어버린 한마리 양은 

양 우리 바깥에 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10명은 하나 둘 교회를 떠나게 되고, 

 

교회는 더욱 더 

예수께 열정적인 “제자들”이 아닌 

예수께 미적지근한 “종교 소비자들”로 넘쳐나게 된다. 

 

 

 

(3) 왜 응급처치 접근인가? 2. 주일성수

 

교회가 종교 소비자들을 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돈과 명예를 주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리더십에게 종교적 명예가 생기기 때문이고, 

 

많은 사람이 모이면 

그 헌금의 합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억측이라구? 

 

제자화 보다는 주일성수를 더 강조하는 세태에 대해 

몇 분만 진지하게 생각해봐도 

내 생각에 동조하게 될 껄? 

 

더 많은 사람이 주일 예배에 모여야 

더 많은 헌금이 모이게 되고

 

더 많은 헌금이 걷혀야 

더 많은 미적지근한 사역들을 할 수 있게 되고, 

(진짜 제자화 사역은 그렇게 천문학적인 돈이 들지 않거든?!)

 

더 많은 미적지근한 사역들을 할 수 있어야 

더 많은 미적지근한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게 된다. 

(미지근한 사람들은 미지근한 사람들끼리 모이거든?!)

 

갭 이론에서의 10명은 여기서,

고작 그 미지근한 생산품을 생산/유지하기 위해 쓰고 버려지는 

일종의 "교회 소모품들"일 뿐이다. 

 

 

 

 

 

(4) 왜 응급처치 접근인가? 3. 예수님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

 

응급처치 접근을 선호하는 교회와 사람들은 

비성경적이며 

예수님과 관련없다. 

 

응급처치 접근은 

뜨거운 사람들을 교회 안에 

일시적이나마 가두어 둘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훌륭한 거짓말일 뿐이다. 

 

주일성수라는 면죄부와 

헌금이라는 면죄부를 남발하는 리더들이

다른 진실한 사람들 까지도 싸잡아 

언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계~에~소~옥 사역하게 하는

거짓말일 뿐이다. 

 

거짓말쟁이들의 거짓 철학일 뿐이다. 

 

주일성수?

그것은 결코 

미적지근한 한줌의 종교소비자들을 위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이다 (마12:8, 눅6:5, 마 11:29). 

 

주일 성수 만큼이나 

월요일 성수, 화요일 성수, 수요일 성수, 목요일 성수…… 

일주일 내내 매일 매일이 예수와 함께 있는 

안식일이다. 

안식일이어야 한다. 

 

매일 매일이 예배의 날이며

매일 매일이 사역의 날이며 

매일 매일이 거룩한 날이다. 

날이어야 한다. 

 

십일조? 

그것도 결코 

미적지근한 한줌의 종교소비자들을 위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주일성수가 

왜 그리 월요일 성수나 화요일 성수보다 훨씬 더 강조되나? 

 

십일조를 주로 주일예배때 걷기 때문이다. 

각종 헌금을 주로 주일예배때 걷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수요예배때”만” 걷는다면 

주일성수 대신 수요성수를 주장할껄?

 

아닌것 같나? 

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주일예배 만큼이나 수요예배도 중요한지” 당신의 리더에게 물어보라. 

“주일예배 만큼이나 가정예배, 구역예배도 중요한지” 당신의 리더에게 물어보라. 

“주일예배 만큼이나 새벽예배도 중요한지” 당신의 리더에게 물어보라. 

 

만약, 

차별적으로 중요하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이니 

그들이 성경에 의해 정죄를 당할 것이고, 

 

만약, 

둘 다 중요하다고 대답한다면 

주일성수만을 강조하는 행태에 대해 

뭔가 납득이 갈만한 변호를 

해야 할 것이다. 

 

 

 

 

 

(5) 그러므로 응급처치 접근을 멈추고, 뜨거운 소수의 개별 제자화 사역에 자유를 줘라. 

 

응급처치 접근은 

갭 이론에서 보여주는 어색한 사역 행태 속에서 

소수의 뜨거운 사역자들을 미온적인 사역에 낭비하기 위한 

임시방편 거짓말일 뿐이다. 

 

누군가는 두려워하며 반문한다. 

"제가 리더로써 응급처치 접근을 버린다면 

아마 당장 

교인의 반 수 이상이 

주일성수를 하지 않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멀리보라. 

그렇게 가짜들을 내 보내는 것이 제자화에 더 도움되지 않나?

 

어중이 떠중이들이 잔뜩 모여 

제자화 사역의 사기를 뚜욱 떨어뜨리는 것 보다, 

 

진짜가 남아 진짜를 위한 진짜 사역을 하도록 

조직 문화를 바꿔 가는 것, 

 

그런 것이 더 성경적이지 않겠나?

 

……

 

최근에 실제 있었던 스토리를 하나 소개하며 

4번째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최근 한 유명한 교회에서 

4주 씨리즈 설교를 했다. 

설교 주제는 “한국의 희귀한 새들”이었다. 

 

강대상에 4주간 선 설교자는 

유명한 조류학자였다. 

 

그 조류학자는 

매우 신기한 새 소리를 

매주 새롭게 들려주었다. 

 

그 과정에서 

제자화를 원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계속 미적지근한 사람들을 독려해서 

새 소리를 듣고 헌금을 내도록 교회 리더십에 의해 

요구 받았었고,

 

새 소리 씨리즈 후 

그들 대부분이 번아웃상태에 빠졌다. 

 

일이 힘들어서라기 보다, 

의미가 없어서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대했지만 

새소리만 듣고 돌아가야 했고

 

그 일에 자신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써야만 했던 

많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회의감에 빠졌다. 

 

그러나...

 

종교서비스를 바라는 미적지근한 성도들은 

예배 중 설교자에게 

새 소리 들어서 

좋았다. 

 

그들에게 새 소리라는 응급처치를 했던 리더들도 

그들이 좋아하니 

좋았다. 

 

의미없는 사역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은 

고작 10%도 안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불편한(?) 말씀 대신

편안한 새소리를 들어서 좋아했다.

좋았다. 

 

헌금도 더 많아졌고, 

새 소리도 더 많아졌다. 

좋았다. 

 

"나는 죽어가며 좋아하는 개를 살리느니 

새로 하나 분양 받겠다" (Ed Stetzer).

 

<제자화를 막아서는 5가지 반선교적 사고방식들>

5.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함

 

 

: 기성교회는 왜 제자화에 올인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5가지 반 선교적 사고방식들의 방해가 있다.

 

그 중 마지막, 다섯번째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에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이며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미 제자화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뭐하러 또 제자화 이야기를 꺼내냐는 생각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뭐하러 더 힘써서 제자화를 하느냐는 생각이다. 

 

진짜 그럴까?

진짜 다 알고 있을까? 

 

(1) 대부분의 교회들은 제자화 사역에 대해 모르고 있다. 

 

2리터 짜리 콜라를 쪽쪽 빨며, 

다른 한 손엔 1Kg짜리 빅버거를 뜯어먹으며, 

동시에

“아… 저는 정말 다이어트의 중요성을 알고 있어요.”

 

라고 말하고 있는 흑인 청년을 

유투브에서 본 적이 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니 웃겼다. 

사실, 웃기라고 올린 영상이었다. 

웃었다. 

그런데 내 웃음에서 의미를 느꼈다. 

의미심장했다. 

제자화에 대해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전도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교회가 

전도하지 않고, 

 

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교회가 

기도하지 않고, 

 

말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교회가 

말씀연구 안하는 것 처럼, 

 

제자화를 강조하는 교회가 

제자화를 하지 않는다. 

 

누굴 웃기려고 그러는 걸까? 

 

A: “왜 제자화 사역을 안하세요? 

 

B: “어? 무슨 말씀을? 우리 제자화 하고 있는데요?”

 

A: “누굴 어떻게 제자화 하고 계신데요?”

 

B: “아… 특별히 제자화 하는 대상은 없지만, 우리는 모두 제자화가 무엇인지 깊이 알고 있답니다.

 

A: “아하! 그렇군요! 하하하하~! 재밌습니다~! 하하하하하~!”

 

안다고 생각하니 더 문제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2) 제자화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왜 문제인가? 

 

모르면 배우려고나 할텐데, 

안다고 생각하니 배울수도 없어 문제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 

 

제자화 하기 싫은 사람은 

제자화를 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변명을 만들고

그것을 합리화 한다. 

 

그중 최고의 변명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어!”라는 생각이 

“나는 이미 하고 있어!”라는 말로 인식된다. 

합리화다. 

 

제자화에 대해 읽은 책 몇권과 

제자화에 대해 진행한 설교 몇편으로  

합리화한다. 

 

그러면

제자화 하지 않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모든 삐걱꺼리는 교회 문제들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나는 제자화를 이미 알고 있으니 제자화가 문제일리는 없어!”

라는 내면의 자기 합리화가 이미 존재하는데다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죄성까지 겹쳐서, 

 

항상 제자화를 제껴놓고 

어떤 문제를 해결해보려 한다. 

 

제자화 하지 않으면 

어떤 교회 모임이든 

썩는다. 

 

그런데, 

그 썩어가는 얽힌 상태를 

제자화는 배제하고 

풀어보려고 한다. 

 

안다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3) 그렇다면 제자화를 모른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  

 

제자화 하려면

소수의 사람을 향해 

사랑을 시간에 버무려 

죽기까지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다 겨우 제자가 탄생하면

위임하고 떠나야 한다.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선배들이 다 그랬다. 

 

예수님의 제자화 사역은 성경에 나온다. 

성경을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제자화가 예수님의 것과 비교된다. 

 

기준은 분명하다. 

 

사도들의 제자화 사역도 성경에 나온다. 

사도들은 성령강림 이후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며 한번에 한 사람씩 제자화 해 나갔다. 

 

기준은 분명하다. 

 

신앙 선배들의 제자화 사역은 역사에 나온다. 

성경의 터 위에 서서 

우리의 선배들은 순교하기 까지 제자화 했다. 

 

기준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기준이다.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역사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님을 따라 제자화 사역하는 것. 

 

그것이 기준이다. 

 

상대평가는 없다. 

예수님이 완전하고 유일한 제자화의 기준이며, 

예수님의 기준으로 평생을 살았던 

역사속 신앙의 유산이 그 기준이다. 

 

아는 것은 실행을 통해 증명된다. 

실행은 아는 것을 반증한다. 

 

(4) 씨리즈를 마치며. 

 

나는 장로교 목사라 성결교 선배들을 잘 몰랐다. 

하지만, 최근 한분을 만났다. 

 

가족여행을 남해의 증도로 다녀오면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묘비 앞에 서서 

한 없이 울었다. 

 

한번에 한명의 제자를 얻고 키우기 위해 

평생을 바쳐 자신이 살고 있는 증도의 11개의 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수많은 각각의 마을들을 

조각배 타고 자비량으로 찾아다니며 

11명의 제자들을 키워 

각 섬의 제자화를 위임하고 떠났던 선배.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11개의 섬 90%의 주민들을 복음화 했던 

자랑스러운 신앙의 유산. 

 

백문일답을 통해 내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임을

뼈에 새겨주셨던 김준곤 목사님도 

문전도사님에게 복음을 들었다더라. 

 

제자의 제자가 또 제자를 낳고

그 제자가 또 교회가 되는

제자화의 사역은 

 

그렇게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사랑을 통해 사회에게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잠식되어왔다. 

 

나도 너도 

누군가의 제자화의 결과물이다. 

 

멈추면 안된다. 

피가 서리고 땀이 서린 천국일이다. 

 

포기하면 안된다. 

생명 버리며 우릴 낳아주신 선배들이 구름같이 허다하다. 

 

힘드냐?

세속에서만 아니라 

교회사회에서도 제자화 반대해서 힘드냐?

 

그래서 뭐? 

 

힘들다고 안할꺼냐? 

힘들다고 똑같아질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