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속지 맙시다 (요 2:13~25)
가나 혼인 잔치 VS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둘러 엎으심
성전 청결 사건은 시간 순서상 다른 복음서에는 모두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쯤 나온다. 마21, 막11, 눅19
요한복음에는 다분히 우리가 보고 알고 깨닫길 원하는 의도가 있다.
일단 두 사건은 행사의 본질은 같다.
(같은 점 - 예식, 기쁨, 성대함,)
(다른 점 - 혼인잔치는 축하와 밝음, 제사는 무겁고 엄숙하지만 죄사함의 기쁨이 있다)
이 두 행사에 꼭 있어야 하는 것 - 음식, 포도주 / 흠 없는 제물과 피
혼인 잔치에는 그런데 포도주가 없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에는 없는게 없다.
다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는 포도주가 있게 하셨다.
반면에 성전에는 없는게 없는 그 모든 걸 다 걷어치워 버리셨다.
그리고는,
19~22절에 성전의 주인으로써 성전의 참된 제물로써 친히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참된 제물이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요한복음의 맥락을 잠깐 복습하면...
1장 창조, 말씀이 육신이 되심,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심(그 어린 양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
2장 가나 혼인 잔치, 텅 빈 혼인 잔치가 가장 좋은 포도주의 축제가 됨
구약은 제사이지만, 예수님의 오심은 혼인 잔치입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 역시도 죽음을 통과한 부활의 능력과 기쁨으로 바뀐 잔치입니다.
결혼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죽어야 한다. 서로 죽어야 새로운 한 가정이 탄생된다. 억울하지 않다. 그게 비밀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보여주는 한 장이 바로 2장.
죄에 대해 죽고, 예수 신랑을 맞아 다시 사는, 물이 포도주가 되고, 아무리 드려도 끝이 없는 제사가 단번에 어린양 제물되셔서 온전한 제사가 이루어지게)되는…. 요 3:16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 주 말씀
완전한 순종 -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의 믿음과 하인들의 온전한 순종에 대해 들었습니다.
완전한 순종은 누가 하셨는가?
=> 예수님께서
어떻게 순종하셨는가?
1 말씀이 육신이 되심,
2 우리의 피흘림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죄 없으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해서 죽으시기로 순종하심
3 단순히 도살되어 죽는 어린양이었는가? 멸시와 천대, 침뱉음과 채찍에 맞는 것에 대해 순종하심
그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는데 가짜들이 있는 걸 보고 분노하신 겁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 절차상의 문제는 없다. 멀리서 흠 없는 재물을 드려야 하는 율법을 따른 최선이었습니다.
뭐가 문제였는가?
17절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 69:9> 제자들이 깨달았다고 나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 열심의 뒷편을 예수님은 보고 계십니다.
(25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심)
순종의 동기, 순종의 목적, 순종의 의미를 보고 계십니다.
모르는 것도 여기서는 죄가 됩니다.
깨닫지 못하고, 용기내어 들여다 보지 못한 나의 못난 자아, 나의 잘못된 동기와 본능에 가까운 자기의와 자기사랑(애)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잘못된 동기라는 겁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와
혼인 잔치에는 그런데 포도주가 없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에는 없는게 없다. 다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는 포도주가 있게 하셨다.
반면에 성전에는 없는게 없는 그 모든 걸 다 걷어치워 버리셨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말씀의 두 가지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첫번째는 두 사건 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
물 떠온 하인들의 “믿음”이 주인공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아무것도 아닌 무가 유가 되게 하셨다.
그냥 물을 잔치에 가장 중요한 꼭 필요한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
굳이 주인공을 찾자면 예수님과 포도주입니다.
성전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입니까?
제사를 만드신 분이 원하는게 뭐냐는 말입니다.
성전의 주인께서 성전을 뒤 엎으신 것처럼 성전을 헐라고, 당신께서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8절 말씀을 통해 보면 당신이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져묻고 있다.
(니가 뭔데?)
누가 주인공이냐, 누가 주인이냐는 문제입니다.
내게 좋고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예수님께 좋고, 예수님께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이렇게 고백하는 그 속 사람이 진실하냐는 겁니다.
나의 나됨, 나의 이 태어남, 나의 이 성장과 현실, 나의 과거와 나의 지금과 미래가 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지배와 통치 안에 있는거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지배와 통치 아래 신실된 순종을 하고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와 성전의 주인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시편 51편 16~17절입니다.(합독)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51:16)
하나님게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이스라엘, 제사장,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지금 예수님은 바로 그 제사의 본질이 번제나 화목제가, 흠 없는 짐승이나 곡식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한 심령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깨어진 마음은 내가 수습을 할 수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몸은 상해도 방법이 있는데, 마음이 상한 건 방법이 없다고들 합니다.
상한 마음은 포기한 것이고, 소망이 사라진 것이고, 절망적이고, 비참함 입니다.
머리를 들 수 없고, 수치스러우며, 손을 내밀 수 조차 없는 마음입니다.
상한 마음은 완전한 어두움이며, 결혼식에 맹물을 내놓는 것과 같은 것은 민망합니다.
상한 마음은 나의 깊은 곳의 속 마음이 녹음되고, 녹화되어 모든 사람 앞에 틀어져버린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이런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습니까?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아픔 때문에 아니라
나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 사랑 앞에 너무 부끄럽고 한량없는 은혜만이,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한 줌과 같은 긍휼이 아니고서는 다시 설 수 없는 치가 떨리는, 진절머리나는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직면한 적이 있습니까?
바울은 그런 자신을 직면하면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자신을 마주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자기 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지난 주 예화 중에 “40일 금식기도와 자기 죽음”이 마음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40일 금식의 자기 죽음은 곡기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
안 죽는다.
그래서 성령충만했던, 말씀충만했던 바울은 이렇게도 자신을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상한 심령이란 날마다 주 안에서 죽는 삶이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두 가지 오늘 말씀의 목적을 정리해보면,
인생의 주인, 선택의 주인, 상황의 주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 태어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늙어 죽는 생사화복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다. 나는 예수님꺼다.
인정하십니까?
그 주인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상하고 통회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이고, 충만한 가운데서도 더욱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매일 마주하며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어떤 걸까?
당장이라도 계좌 비우고 선교사로 헌신해야 하는 건가?
도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하라는 건가? 고민이 되실 겁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삶의 모델 요셉
요셉 잘 아시지요?
팔렸습니다.
잘난 척 하다가, 형들에게 미움받아 죽을 뻔 하다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편애하는 아버지 밑에서 아주 버릇 없이 자랐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보디발에 집에 종으로 갑니다.
돌아보니 은혜지, 애굽의 가장 권세 있는 다시 말해 조금 만 잘못해도 목이 날아갈 엄중한 집에 간 겁니다.
그냥 좀 적당한 능구렁이 같은 관원이나, 아니면 아예 선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부자집에 가면 너무 좋았지 않을까요?
하루 아침에 종된 요셉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요셉의 순종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냥 자신이 맡은 종의 일이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물 떠오는 하인들 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 일을 탁월하게 해 내는 것이 순종이었습니다. 그 하찮은 일을, 별 볼일 없는 일을 탁월하게 해내는 겁니다.
왜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니깐….이 말도 안되는 일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아마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결과는 뭡니까?
보디발의 온 집을 맡는 종이 됩니다.
살떨리는 사명을 받았는데 그런데 왜 하필 그 아줌마는 요셉을 찍어서….
세상 말로 하면 팔자가 이만저만 사나운게 아닙니다.
그래서 왕의 감옥에 갑니다. 여기는 무서운 곳입니다. 형들한테는 그래도 잘못한게 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쳐도 이번일은 너무 억울 합니다.
사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게 감옥에 간 요셉이 한 건 무엇입니까?
옥살이 하는 요셉의 순종은 모범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간수장의 행정병이 되어서 감옥에서 다른 죄인들을 돌보는 일을 했고, 성경은 요셉이 맞는 것에 대해서 간수장이 살펴보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창39:23)
왕의 술 맡은 관원장, 떡 맡은 관원장 꿈 해몽해줍니다. 그리곤 2년을 더 감옥에 죄인으로 있습니다.
그러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성공입니까?
7년 풍년에 7년 흉년….애굽 말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다 죽어나갈껄 아는데,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데…특히 자기 백성, 히브리 사람들에게라도 미리 귀뜸해서 풍년동안 잘 모아 놓도록 해야 하는데….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지혜와 이 노력과 수고는 누구를 위함인가? 바로와 애굽을 위한 겁니다. 성경에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 만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요셉 자신은 그냥 거기에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이방인 총리입니다. 정치적 견제와 음모와 시기를 또 이방인으로서 얼마나 받았을까요?
요셉은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탁월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했습니다. 모세처럼 분에 못 이겨 사람을 때려 죽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일, 곡식을 모이고, 기근 때 애굽과 바로가 모든 땅과 짐승을 다 소유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요셉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힘이 올라갑니다. 요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자기 죽음과 탁월함, 마음이 청결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성전의 제물되어 향기를 올리드린 삶**
그는 매일 매 순간 자신을 죽여야했고, 운명처럼 자신에게 주어신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죽을 힘을 다해 탁월하게 그 일을 해냈습니다.
어떤 면에서 자신의 생각, 자신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인이 다 아신다. 주님이 다 기억하신다. 주님이 다 정산하신다는 심정으로 오늘 하루 물을 떠왔고 마당을 쓸었고, 옷을 갣고, 잘 갇혀 있었고, 다른 죄인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와 애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14년을 창고지기를 했습니다.
**#기도**
상한 심령이란 날마다 주 안에서 죽는 삶이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 내 삶의 바로 그 현장, 바로 그 일에 탁월함으로, 물을 아귀까지 채우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겸손함과 진실함으로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 그것은 실력과 능력에까지 적용됩니다. 너무나 하찮은…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하는 거기까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며 배우며, 순종하며, 탁월하게, 진실하게 오늘 그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손을 드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함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예수 공로 의지 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보혈을 지나(존귀한 주 보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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