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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처치 설교및 강의/웨이설교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마10:16~23)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 10:16~23)

 

1. 도입

내가 좋아하는 노래중에 윤종신의 [오르막길]이 있다.

가사는 이렇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

이제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지 몰라

 

한걸음 이제 한 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 줘
그러면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오른다면
한 걸음 이제 한 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 줘
그러면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여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크게 소리쳐
사랑해요
저 끝까지

 

결혼 직전인듯 한데... 왜 행복한 미래상이 아닌, 어려울 것 예고를 할까?

이것은 비이성적인 내용인데, 뜨거운 사랑고백이다. 

"너와 함께라면, 그 오르막길 내가 꼭 간다." 

이런 이야기다. 

 

2. 우리는 사자가 아니예요? 양이라구요?!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과거 경험에 없던 일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말씀해주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마 10:16 앞부분)

이 말씀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움이 커질법한 말씀이었다. 

예를 들어, "사자를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라고 하셨다면 더 용기 백배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양"to"이리"라고 하셨다.

고대 그리스어로 "이리"(늑대)는 "루코스"(λύκος)다. 

그런데, 위 성구에는 이리가 복수, 루콘 (λύκων)으로 나온다. 

복수임을 강조해서 직역 하자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 한마리를 이리소굴로 들여보냄과 같도다" 

이다. 이것은 안심을 주시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안심하다가도, 두려워질 법한 말씀이다. 

 

▶개인 묵상 나눔

이 세상을 "이리떼"의 세상이라고 비유하는 것은 좋다. 나도 동의!

그러나 내가 "양"으로써 들어간다는 것은 싫다!

나는 "사자"이고 싶다!

그래서 세상에 들어가서 압도하고 싶다!

예) 십자군 전쟁. 

예) 비즈니스 전쟁.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내 생각과 다르시다. 

 

 

3.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사자가 되어 세상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압도하고 싶다는 것은 내 생각이고 내 정욕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생각이 들어있다. 

예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다르시다. 한~참 다르시다.

 

"양" to "늑대소굴" !!! 이 말씀은 먼저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이고,

예수님은 자신의 길에 제자들을 초대하시는 것이었다.

 

늑대 소굴로 양 한마리를 들여보내면 어떻게 되겠나? - 뜯어 먹힐 것이다. 

그런 길을 가야만 한다면,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사랑. 

들여보내는 분을 진짜 사랑한다면 들어가지 않겠나? 자발적으로? 

 

예)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길로 갔다. 바울을 보라. 

(성경통독 클럽에서 규영자매가 했던 질문도 떠오르는 대목이다)

사도행전 20-21장에서 성령님이 사도 바울이 당할 핍박과 큰 환란을 미리 알려주신다. 

이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답했을까?

"알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미리 피할 길을 주신 줄 믿고, 안가겠습니다!"

그랬을까?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행 20:23-28

 

바울이 이렇게 목숨을 바치는 위협 속으로 담대히 걸어들어간 것은

예수님을 향한 마음 때문이었다. 

예) 바울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에서는 이렇게 보이고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전 16:22-24

 

 

4.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을 왜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 정말 그럴까? 내가?

나는 자주 영권을 구한다. 그러면서 상상한다. 압도적인 파워로 지옥권세 꺾고 세상을 정복하는 꿈을 꾼다.

하지만 나를 보내시는 예수님의 명령은 내가 구하는 것과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의 그림을 보여주신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 같이 보내신다"고 하셨다. 

 

양 = 나  

나는 이 부분이 내 본성에 맞지 않아서, 바뀌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사자를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이렇게 바뀌기를 간절히 원한다.

가서 압도해버리고,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며, 군림 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같은 생각을 했던 제자가 있었다. 둘이나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면....

53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4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5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6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7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눅9:53-56)

 

그러나 모두 변화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죽음 권세 이기셨을 때,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을 때, 제자들이 변했다. 

이때 그들은 늑대 잡아먹는 전략을 버렸다. 

그 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전략을 취했다. 

 

 

▶ 우리도 자문해보자. 

예수님의 뜻은 내 욕구와 다를 때, 나는 무엇을 더 따르겠는가?  

크리스천 =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우리는 복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싶어하는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대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이게 본성에 안맞고, 정 안되겠으면, 예수님의 모범을 바라보라. 

그분이야말로 늑대소굴 한복판에 던져진 순한 양이셨다.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 묘사를 보라.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 53:2-8)

 

예수님이 순한 양처럼 끌려다니며 사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나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양이 들어가서 뜯겨 먹히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십자가 죽임 당하지 않으셨으니, 그분을 따르는 한

우리도 희생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 브레헨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아무땐 찾아와서, 시간 맞겨놓은 것 처럼 군다. 나도 할 일이 많다. 하지만, 말씀을 따라, 그사람들에게 나를 내어주고 시간을 내어주고, 선약도 내어주고,... 그러면서 친구가 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예) 외부 설교 다닐때, 푸대접 자주 받는다. 속상하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고 나면, 전혀 다른 태도로 바뀌는 것을 매번 본다. 그렇다면, 자기를 주장하기 보다는 양처럼 끌려다니며 속상하더라도 말씀 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예) 교회 개척. 우리의 사역과 인생 - 이게 다 누구를 위함인가? 

 

 

5. 늑대가 양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게 하자. 

양처럼 끌려가 죽으신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셨다.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리 가운데 들어가는 양들이지만, 이리로 변질되면 안된다. 비둘기 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뱀들 사이에서 지내면서도, 뱀들의 생각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자신을 지키고, 부활 생명을 경험해야한다.

뱀들(이리들) 사이에서 비둘기(양)의 순결을 유지하면서 지내야 한다.

그때 복음이 전해진다. 

 

 

 

말씀은 이어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뒷부분)

 

그렇다면, 뱀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은 어떤 것일까?

그 내용은 뒤이어 등장하는 말씀에 나오고 있다.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우리가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임을 알고 전한다면?

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기뻐하거나, 성공기준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일조했던 백부장이 바뀌는 것을 보라. 

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던 사람의 변화

마태복음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양이 이리들에게로 가면 뜯어먹힌다.

그러나 뜯어먹은 이리가 양으로 바뀐다.

복음은 이런 식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져왔다.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또한 이 사실을 기억하며 미리 대비한다면, 위와 같은 핍박의 순간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큰 위로와 담대함으로 계속 복음 증거하는 존재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뱀 같은 지혜의 한 모습은 재림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핍박이 심할 때, 이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해다니다보면, 

마지막엔 더이상 피할 곳이 없어지는 때도 온다. 

그러나 그 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 까지 견디는 소망의 인내가 뱀같은 지혜며 비둘기 같은 순결이다. 

끝날때 까지 신앙 지키는 것이 뱀같은 지혜며 비둘기 같은 순결이다.

복음 전파를 위해 들어가서 뜯어 먹히면서도 끝까지 견뎌내는 것이 뱀같은 지혜며 비둘기 같은 순결이다. 

 

 

나는 예수님이 너무 좋다. 

그분은 "다이노소어"나 "사자"나 "맹수"로 오셔서 세상을 정복하시지 않으셨다.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오셔서 죄인의 친구로 지내시다가, 그들에게 죽임 당하셨다. 

그 이후 부활 권세로 죽음을 정복하심으로써 죄의 세력 이기시고, 우리에게 평안이 되셨다. 

다음 말씀 대로 되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마10:16

이 요절만 보면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있다. 

 

(1) 출1:15-2:10

여기서 히브리 산파들은 죽임 당하러 끌려 다니는 양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죽지 않고, 희생을 통해 부활 생명력으로 자신도 살고 타인도 살렸다. 


(2) 보살권사님?스토리

나는 이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보고 들었다.

자랑스럽고 신기하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양을 이리떼에게 들여보내시며, 그때 복음이 전파 되는 줄 믿는다.

또한 핍박의 상황이 되면, 성령께서 할 말씀을 주시리라!

 

(3) 성민 집사님의 자멀텐 모임 전도 이야기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60명의 후배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중에 10사람과 정기 모임을 하면서,

결국 3사람의 제자 그룹이 생겼다.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다. 

그분이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 승리하셔서, 그분을 죽인 나같은 죄인도 구원 받았다. 

이제 내 안에 그분의 영이 살아 역사하시며 동행하신다. 

나도 그분을 따라야겠다. 

나도 이리떼에게 잡아 먹히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어린양처럼 살아야겠다. 

우리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하자. 

 

이제 기도하자.

보냄받은 자의 모습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은 모습이다. 

그들은 줏대가 없고, 순결하고,

그 신앙 순결을 지킬 정도로 지혜로우며,

또한 죽어도 살고 살리는 부활 능력의 소유자다. 

이번 한주간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 처럼 온유한 존재로

복음 증거하며 살도록 도와 달라고 함께 기도하자. 

 

 

 

마무리 기도.

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