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스토리/ 도입
(1) 60-66절. 한절씩 읽으며, 당시 상황을 스토리 텔링하기.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0-66)
(2) 오늘 설교의 촛점 설명하며 도입하기.
저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66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났다"는 보고 뿐 아니라,
이후로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는 확증까지 추가 되어 있는 것이
왠지 남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2.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
"떠나가다" (ἀπέρχομαι)
(아페르쏘마이)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마 8:18)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군중에서 많은 제자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여기서 끝장내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 상태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질문은 등장합니다.
(다음 주 말씀이긴 하지만...)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7)
예수님은 군중 속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시며, 12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7)
떠났던 이들은 누구였다구요?
66절.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the 12제자 외의, 군중 속에 있던 또 다른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했고, 병고침도 받았고, 귀신이 내쫓기는 것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눠 먹고도, 정작 예수님을 떠나버리는 죄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거부하는 죄일 것입니다.
복음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 복음을 거부하는 죄일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죄인의 가장 악한 죄보다 더 끔찍한 범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떠나가는 배교자들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0:26)
모든 죄는 "믿을 때" 용서받습니다.
불신이 죄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죄를 계속 짓는다면,
다른 말로... 진리에 대한 지식과,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교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의 삶을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계속하는 것은 배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우리 죄를 대속하는 유일한 희생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다른 희생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죄를 사하는 다른 조항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대속, 그 한가지 뿐입니다.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 그 한가지 뿐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면, 더이상 의지할 다른 희생 제물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 10:27)
예수님 이외에는,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면,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 10:28)
모세의 율법을 어긴 사람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때, 단 두세명만 증언을 서도, 자비 없이 죽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증언 앞에서 누가 심판을 면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발 아래 짓밟는 이가 어떻게 심판을 면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구별된 유일한 제물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찢겨진 살점을 무시하고 거부하고 떠나는 사람이 어떻게 심판을 면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구원을 모욕 한 사람은 어떻게 심판을 면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29에서 우리에게 이미 알려 주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 10:29)
그 형벌은 또 얼마나 가혹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직접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이 직접 원수를 갚겠다고, 그러니까, "보복"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 10:30)
불신앙, 복음에 대한 거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떠나는 것은, “이것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범죄입니다.
이 범죄자는 하나님의 손에 넘겨질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예수님을 떠난 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란, 무서운 일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지옥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을 받을 정도로 참혹한 죄입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는 이런 구제책이 나옵니다.
32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복음의 빛을 받았던 지난날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처음 복음으로 변화받았던 그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 복음 앞으로 나왔을 때 그 메세지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웠던지를 기억해내야 합니다.
내 죄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앞에 회개했던 날을 떠올려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받았던 천국의 약속, 천국 상속자의 확신,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에 대한 확신을 기억해내야 합니다.
또다른 복음의 선후배, 동역자들과, 예수 사랑으로 하나되어 서로 중보하며, 함께 울고 웃고 땀흘리던 순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나서, 성경말씀이 너무 달콤했던 때가 있지 않았나요?
기도와 말씀과 교회와 전도와 선교... 모든 것들이 너무나 멋지고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웠던 때가 당신에게도 있지 않았나요?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리려고 기도하고 몸부림쳤던 때가 당신에게도 있지 않았나요?
복음을 위해 사는 것 외에는 내 인생, 어떻게 되도 상관 없다고 실제로 믿었던 때가 있지 않았나요?
저도 한때는 그랬지요.
저도 한때는 또다른 신자들과 충분히 연결되어 함께 한 영 안에서 동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생을 걸고, 함께 숱한 고통과 억울한 일들을 견뎠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난과 고난을 당하며, 거리에서 대중의 구경거리와 손가락질꺼리가 함께 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요?
지금은 그들도 저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난 일들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 희생, 그 살과 피를 믿음으로 먹고 마시는 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35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우리, 그 시절을 기억합시다.
담대함과 복음의 인내를 버리고 값싼 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반복해서 선택해왔음을 회개합시다.
담대함을 회복합시다.
인내를 회복합시다.
예수 충만, 예수로 가득한 크리스천으로 돌이킵시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떠나가는 심각한 죄와 싸웁시다. 이 싸움에서 더욱 인내 합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이 머지않아 오실 분이 오실 것이며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반드시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죽을 때 만나든지, 재림때 만나든지, 우리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않습니까.
그러니 조금만 견디면 됩니다.
약속된 소망이 눈 앞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때 당연히 받게 되는 어려움들을 견디십시다.
특히 그리스도를 떠나고자 하는 죄의 정욕들과 싸우십시다.
매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믿음으로 받아 먹는 일에 충성 하십시다.
38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절.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혹시라도, "내가 이만하면 됐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큰일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내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진짜로 당신의 죄를 포기하고 회개할 마음이 있습니까?
어떤 중요한 결정 앞에서 예수님을 진짜로 온전히 의지할 마음이 있습니까?
보세요.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진짜 생명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걸 못받아들이고 다들 떠났잖아요.
우리는 다릅니까?
지금 예수님께 가장 기대하고 있는 문제 해결 요소는 무엇인가요?
그 부분에서 예수님 그분 자체로 답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 상태를 회개하시겠습니까?
오늘 그런 상태로부터 살려달라는 회개를 하시겠습니까?
3. 나는 믿고 있는가?
교회 개척을 해온 지난 12년간, 참된 신앙인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반면, 그동안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제가 헤어질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헤어짐들마다 제 마음에는,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슬픔과 상처가 많이 남았습니다.
저는 제 마음이 슬픈지도, 아픈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얼마전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님과 교제하다가 알게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교회에 대한 대화중, 제 마음을 들여다 보시곤,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송 목사님, 예수 교회는 예수님으로만 하셔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씀인지 잘 와닿지도 않았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몇번 반복해서 듣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교회가 정말, (제가 그동안 교회개척학교에서 가르쳤던대로) 예수님의 것이라고,
제가 그것을 진짜 믿는다면....
왜 예수님도 아니고,
저와 헤어진 사람들때문에, 제가 심리적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또, 지금까지도, 그런 류의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겠습니까?
사역을 오래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지요~"라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말은 절대적으로 사실이지만,
사역을 하면 할수록 떠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그때 인간적 슬픔이 있고,
과거의 슬픔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저의 슬픔은 저의 불신을 반증해주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교회를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100%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떠날 때마다 슬픔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 교회를 예수님으로만 하셔야 합니다"라는 그 선교사님의 말씀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때 그것은 참으로 불신이었습니다.
제가 무언가 예수님과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마치, 도마가 예수님께 길을 물었을 때와 같고,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거듭남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와 같았습니다.
또한 저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으라는 말씀을 이해 못하는 제자들 같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떠나는 슬픔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슬픔이 바로 저의 불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실것을 믿지 않고, 무언가 다른, 인간적인 소원이 따로 있는 상태의 불신이 바로 저의 상태였습니다.
저의 슬픔에 대해 예수님은 진짜로 슬퍼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라고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교회 사역때문에 떠나는 것은 아니었을까... 라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이때, 웨이빌리지 교회 시작할 때, 어땠는지, 솔직히 나누고 기도 부탁)
4. 용두사미
요한복음 6장.
1년 이상 지속되어온,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끝나는 장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사역 시작점부터 여기까지 살펴보면,
그야말로 용두사미 같습니다.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대단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계속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께 매혹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에 흥분해서 그랬습니다.
그들은 진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라는 이름만 있는 가짜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이적 능력과 유명세에 사로잡혀 몰려들었을 뿐입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갈릴리 지역에는 200개 정도의 마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1년간 이 모든 마을들을 다 돌아보셨을 것입니다.
그 200개의 마을들 중에는, 가장 적게는 30명 정도의 작은 마을도 있었고, 또 가장 많이는 1만명이 사는 도시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40만명 정도가 갈릴리 지역에 있었을 겁니다.
갈릴리 지역은 로마 식민지 건설에 중요 도시였고, 그래서 인구 밀도가 높았죠.
예수님의 공생애 3년중, 1년은, 갈릴리의 모든 마을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곳을 통과하셨고 군중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너무너무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대부분이 떠납니다.
66절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은 일종의 사역 평가 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이 모았던 많은 제자들이 떠나고, 물러나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걷지 않았떠라... "
이런 식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비춘 예수님의 사역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끝났다고요.
군중은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지었고 말 그대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갈릴리 사역에 대한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주에 보게 되는 것은, 명확히 드러나는 두 그룹입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제자와 떠나지 않는 제자, 그렇게 두 그룹이요.
떠나는 거짓 제자, 떠나지 않는 참 제자요...
설교를 마무리 하며,
우리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며 기도 하십시다.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0-66)
5. 기도회
(1) 말씀을 통해 감동 되는 대로 기도.
(2) 교회에 대한 고민 나누고 기도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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