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와 맘몬 숭배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1. 염려의 시대
몇달째 매스컴이 떠들썩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어디서 몇 명인지 매일 보도중이다.
누군가는 살았지만 또 누군가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세계적 변화상을 통과하며 건강한 사람들도 매일 두려움 가운데 있다.
언제 어떤 경로로 자신도 감염될찌 염려다.
동시에 경제 상황도 급변했다.
자영업자 대부분이 가게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는 극적 지원금 정책도 내놨지만 망해가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적 대안은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될찌 모를 일이라 불안하기는 매한가지다.
부동산은 얼어붙고 석유가격은 내렸다.
주식은 오르고 인터넷 기반 비대면 컨텐츠들은 호황을 맞이했다.
잘되든 안되든 불안했다.
경험한 적 없는 변화를 맞이해서 그랬다.
변화에 직면했는데 대처할 근거 데이터가 없으니 불안하다.
코로나 사태는 이전에 없던 변화상을 주었다. 전 지구적 현상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따져볼 만한 과거 사례가 딱히 없다.
그 전에도 질병의 위기는 있었으나 그때는 지금과 같은 전지구화 네트워크 환경은 없었다.
한 나라의 경제가 다른 나라들과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으며 21세기를 맞이해서 모두가 모두와 서로 연결되는 것 자체도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조금 데이터를 축적하게 된 이 시대에 대한 지식마저 코로나 앞에서 무용했다.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염려다.
이전에 없던 전체적 변화.
죽음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상황이다.
꼭 코로나 때문만도 아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도처에 있다. 가난, 질병, 기근, 전쟁, 실직, 이혼, 사별,……끝도 없다. 직,간접으로 죽음을 연상케 하는 문제들 투성이 세상이다. 직면해도 큰일이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은 징후만 보여도 “염려”가 찾아온다.
죽음을 뛰어넘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죽음을 엿보게 하는 온갖 문제들 앞에 염려가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염려는 숙명처럼 인생마다 따라붙는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저 평안한 상황이란 없다. 사고 싶은 물건이 많아지면 가난이 걱정이다. 같은 지역의 누군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자신의 건강이 불안하다. 자연이 오염되어가는 세상을 보면 지금 먹고 마시는것들도 염려된다.
2. 돈 염려는 돈을 사랑함에서 온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염려꺼리는
단연
돈 문제다.
돈이 없어서도 그렇지만, 반대로 있어도 염려다.
아이들 학비를 더 쓰지 못해서도, 자신의 노후 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아서도 걱정이다.
갑자기 사업이 잘되거나 일확천금이 들어와도 어떻게 유지하며 관리할지도 염려다.
늘든 줄든, 염려할 일 가득이다.
우리에게는 데이터가 있다. 그래서 염려가 없다.
새로운 변화앞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변치 않는 근거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 함께 보았던 출애굽 백성들의 모습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구원하시는 하나님 대신 염려를 더 섬겼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같았다.
꼭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야만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것은 무엇이든 우상이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죽는다.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멀어지는 행위의 꼭대기에 바로 우상숭배가 있다. 그 모양도 가지가지다.
그 중 하나는 “돈을 사랑함”이다. 다른 말로는 “탐심”이다 골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6:10).
이에 의하면 돈 그 자체는 악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악할 때 돈이 악해진다.
그 태도는 바로 “돈을 사랑함”이다.
한 신학자는 돈을 사랑함으로 염려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민수기에 나오는 선지자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 대가로 얻을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모압을 향해 가다가 나귀에게 책망을 받았지만(민22:21-33), 끝내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범죄의 길로 이끄는 책략을 제공했다 (계2:14).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여리고 성에서 취한 노획물을 뺴돌려 자기 집에 숨기는 죄를 지음으로써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패전으로 이끌었다(수7:21). 아합 왕은 나봇이 소유한 포도원을 탐하여 거짓 증거로 그를 죽게 하고 결국 그것을 탈취했다(왕상21:1-16)…… 선지자 엘리사를 들먹여 나아만 장군에게 재물을 받았다가 나병에 걸린 사화 게하시의 이야기(왕하5:20-27)도 빼놓을 수 없다”
신원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IVP, 138~139.
“돈을 사랑함”은 돈을 하나님 보다 더 섬기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우상숭배다.
3. 맘몬 숭배란 무엇인가?
돈 자체는 신이 아니다. 그저 도구다.
단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며 섬기게 되면 그 태도가 돈을 신으로 변신시킨다 딤전6:10.
이 신의 이름이 “맘몬”이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3.
여기서 “맘몬 숭배자”란 “돈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말한다.
돈을 하나님 보다 더 섬김으로써 죽어가는 자들은 어딜 가나 흔하다.
웨이처치는 이 영역 전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살려야 할 사람들 중에서도 더더욱 살려야 할 사람들이다.
맘몬 숭배자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1) 맘몬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우상숭배다.
(2) 우상숭배는 성경이 금지하는 죄다 출20:3.
(3) 죄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롬6:21.
(4) 죄를 섬기면 죄의 종이 된다 롬6:16.
(5) 맘몬을 섬기면 맘몬의 종으로 살다 간다 요8:34.
(6) 그 끝에는 “죽음”과 “심판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히9:27.
이들의 특징은 “염려”다.
돈의 많고 적음이 평안과 염려를 가르지 않는다.
돈을 사랑함이 염려를 만든다.
맘몬 뿐 아니라 어떤 우상에게든 마음을 바치면
염려와 불안이 먼저 찾아온다.
마땅히 경배받고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그분을 예배할 때는 평안하다.
담대함과 기쁨이 넘친다.
모든것이 제 자리에 있다.
반면, 우상을 예배하면 불안하다.
두려움과 염려가 넘친다.
모든 것이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한다. 분주하다.
돈을 선하게 대할 능력이 없으니 아예 가난하기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비성경적이다.
예) 성을 하나님 뜻때로 쓸 자신이 없으니 결혼을 안하겠다는 논리나,
예) 탐식 절제가 안되니 아예 굶어 죽겠다는 태도나 같다.
다시 말하지만 돈 그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돈이 적다고 맘몬 숭배를 안하는 것이 아니다.
적은 돈일찌언정 마음에 돈 때문에 일어나는 “염려”만 있어도 맘몬 숭배를 의미한다.
내가 만난 사역자들과 크리스천은 대부분 가난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거룩한 것도 아니었다.
가난은 거룩의 필요충분 조건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내가 만났던 가난한 이들은 하나같이 돈 문제로 “염려”중이었다.
평안이 예배의 효과라면, 염려는 우상숭배의 효과다.
가난하고 말고가 맘몬숭배 진위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돈에 대한 염려의 태도가 맘몬 숭배인지 아닌지를 엿보게 한다.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다.
4. 돈에 대한 염려
염려와 우상숭배는 한통속이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셨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이야기로 시작하셔서 마음의 문제로 연결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19-21).
우리가 “보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쌓는 장소가 달라진다.
마음의 문제다.
마음 방향에 따라 재산 모아두는 창고가 하늘 혹은 땅이 된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면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된다.
반면 땅을 향하면 땅에 쌓는 꼴이 된다.
만약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상태라면 그는 재물로 우상숭배자가 된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 하셨다 마6:24.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앞서 말씀하신 “보물”을 “재물”로 바꿔 표현하셨는데 성경 원어를 보면 “맘몬μαμωνᾶς”이다.
이는 우상숭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다.
주님은 추가로 맘몬 숭배자의 마음에 대해 더 말씀하신다.
맘몬을 섬기려는 그 마음의 모습은 “염려”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6:25.
맘몬 숭배와 염려가 이렇게 연결되어있다.
땅에 보물을 쌓는 “마음”은 “염려”고, 그것은 맘몬숭배에서 나왔다.
예수님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염려의 출처는 “두 주인”을 섬기려는 태도다 마6:24.
한 아내가 두 남편을 가질 수 없듯, 우리 영혼은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이렇게 자문해보라.
나는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한가?
혹은 재물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염려 때문인가? 아니면 예수님 때문인가?
만약 이에 “염려때문”이라고 답한다면,
그는 우상숭배중이다.
5. 염려 대신 예수님
우상숭배와 신앙이 종이 한장 차이다.
돈을 쳐다보는 마음의 관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갈린다. 믿음은 한마디로 관점이다.
무엇을 보느냐가 신앙 전체를 결정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6:22.
성경 인물들은 죄다 남다른 관점을 가지고 살았다 히11:1-40.
노아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경고를 받아들여 방주를 지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해도 믿음으로 나아갔으며, 이삭도 바쳤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믿음으로 행했고, 모세도 라합도, 사사들도, 다윗왕도, 선지자들도 모두 그랬다.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죽을일로 염려하는가?
아니면 죽을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가?
이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모습이 결정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존재가 되고 말고가 정해진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우리를 애워싼 모든 문제상황의 최악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 그들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10:28.
하나님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 하는 이는 눈이 죽음을 향하지 않는다.
그 시선은 하나님께 간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다. 그러면 평안이 온다.
평안한 자들은 염려에 대해 이렇게 디펜스를 한다.
“나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보다 하나님께 더 귀한데?” 마6:26, 29.
염려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진정한 해결책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만이 살리실 수 있다.
믿음이란 살리시는 하나님께 먼저 꽂히는 시선이다.
죽음보다 먼저 하나님께 눈이 가는 것이다.
만약 죽을 상황에서 우리도 염려한다면 그것은 세상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2.
우리는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사람들, 보는 눈이 다른 사람들, 시선이 다른 사람들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과 차이가 난다.
그 차이는 염려다.
이제 염려 이야기는 기도로 마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 34
돈 염려와 맘몬숭배를 연결하셨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돈 염려를 기도에 연결하셨다.
다시 말해, 돈 염려로 우상숭배중이라면, 같은 염려에서 출발해서 기도하면 된다.
어떤 식이든 상관 없다. 염려라도 좋다. 그것은 우상숭배니 죽을 일이긴 하지만, 살리는 기도는 힘빼기의 아이러니를 통과하니 죽을 일로 시작해도 괜찮다.
죽을 일로 기도하면 산다. 돈 염려가 돈 쌓기로 이어지도록 두지 말고
그 대신 기도를 시작하면 된다.
내 염려는 네 염려든 똑같다.
살리는 기도 출발점으로 삼으면 그만이다.
예) 학비로 염려중인 학생
“주여, 다음 학기 학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염려가 됩니다. 하루씩 납입일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하길 원합니다. 이 염려가 혹시라도 원망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대신 주님 명령 따르길 원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하셨으니 그대로 기도합니다. 제 염려 대신 주님의 나라가 임하길 원합니다. 학비조차 못내서 염려하고 있는 이 지혜없고 능력없고 믿음없는 자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런 무능력한 저를 통해서 능력 많으신 주께서 일해 주소서. 제 인생을 관통하여 주님의 나라를 이뤄 주소서. 저를 맘껏 써 주소서. 이 학비를 내서 공부하게 되든 못내서 못하게 되든, 제 인생 전부를 주께서 주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시는 일에 써 주소서. 저를 빚어주소서. 그 나라와 의를 이루기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저의 염려가 맘몬을 향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이루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 주소서……”
예) 생활비 때문에 고민하는 가장이라면...
“주님! 제가 무능력합니다. 저는 경제력이 없습니다. 무능한 남편이자 아빠입니다. 저를 도우소서. 염려가 많이 됩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과 의식주를 제공하지 못해 염려가 됩니다. 어디에 돈이 있으며 이 불경기를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 염려가 됩니다. 아니 염려가 넘치고 있습니다. 저를 용서하소서. 염려 중인 저를 용서하소서. 이 염려 때문에 맘몬 숭배자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주님 명령대로 제 기도제목을 바꿉니다.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소서. 이 무능력한 가장에게 믿음의 관점을 주소서. 주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고 입히시듯, 저희 가정도 돌보실 것을 믿게 하소서. 아니 믿습니다. 제가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말씀이 제 느낌보다 우선인 것이 당연합니다. 다시 기도합니다. 제가 말씀대로 이뤄질 줄 믿습니다. 또 반복합니다.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 아내를 먹이실 것입니다! 주님꼐서 제 자녀들을 키우실 것입니다! 저희 가정의 진정한 가장이 당신이십니다! 저는 주님 대신 이 가정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주님이 저희 가정을 이끌어주고 계심을 보는 믿음의 눈을 주소서. 저희 가정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저희 가정에 주님의 의가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나라와 의를 저희 가정에게 주소서! 제게 있는 알량한 경제력이나 무능력으로 이 가정이 좌우되지 않게 하소서! 오직 주님의 나라, 주님의 통치가 저와 제 식구들의 마음 마음에 가득해지게 하소서!……
6.죽음보다 더 무서운것
염려와 돈을 연결 시키는 말씀은 뒤에 또 등장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10:28, 29.
이 구절들에 의하면 염려는 두려움에서 온다.
돈에 대한 염려는 돈이 없는 상황이 만들어낼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일들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죽음과 그 그림자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그분이 생명을 다 만드셨고, 죽을 영혼들도 살리셨다.
그분이 죽음보다 강하시다. 앎과 믿음은 연결된다. 그분을 죽음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이자 신앙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흔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거쳐 염려로 나타난다.
반면 믿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다르다.
죽음이 아니라 죽음보다 크신 하나님을 향한다.
대상이 달라도 죄질이 같다.
출애굽 백성들의 불평이나 우리의 염려나 둘 다 죽을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원리도 같다. 두려움이 염려를 만들고 우상숭배로 안내한다.
돈 문제만 봐도 그렇다. 돈 그자체는 우상이 아니다. 오히려 돈을 사랑함이 돈을 맘몬으로 바꾼다 딤전6:10.
맘몬 우상을 숭배의 죄를 짓는 것은 마음의 관점이 결정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죄를 만들고 살 길을 막는다.
문제가 같은 만큼이나 해결책도 같다.
우리 중 누군가는 모세처럼 믿음의 시선을 먼저 가지고 기도하면 된다.
그는 두려움의 시선 방향이 다른 자다. 그는 염려대신 기도하는자다.
언발에 오줌누기식의 일시적 본능충족 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원하는 자다.
죽음 앞에서 죽음보다 크신 하나님을 쳐다보는 자, 살리는 기도자다.
마무리 하겠다. 말씀은 깊은데 전달자가 얉다.
짧은 지면이었지만 글 쓴 이유는 하나다.
당신이 살리는 기도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서다.
누구도 내일이 약속된 인생은 없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을 보라. 성경 65권이 다 이뤄졌다. 이제 딱 한권 남았다.
그것도 틀림없이 이뤄질 것이다. 당신의 죽음보다 더 큰 세계가 당신 안에 들어와 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주님 다시 오실 날은 지금이 가장 가깝다. 그 앞에 생명의 유예기간은 오늘도 하루 더 줄었다. 당신은 또 하루만큼 더 죽어가고 있다.
풀위의 이슬처럼 짧은 인생이다. 게다가 사방에 죽을일에 애워싸여 산다. 거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 염려하며 하나님을 떠나 죽어가며 산다. 가장 생명력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이 죽을일 때문에 죽음으로 더욱 내달리며 사는 세상에서 당신은 소망이다.
누가 죽음 앞에서 조차 두려워 하지 않겠는가? 누가 진정한 생명력의 근원인 하나님을 먼저 만났는가? 누가 세굴라이며, 누가 구원 받은 자인가?
당신이다. 당신 뿐이다. 세상에 주께서 모세를 보내셨듯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보내셨다. 당신 차례다. 살리는 기도자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의 소명이다.
살리는 기도자가 되어 죽음에 무력한 세상에 생명을 뿌려라.
나와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말씀 보고 놀랐습니다. 염려하지 말라셔서요. 염려의 출처는 생명을 위협하는 삶의 모든 문제들이었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출애굽 백성들은 죽을까 염려했습니다. 목말라서도 배고파서도 힘들어서도 늘 불평했습니다. 자그마치 40년이나 가르쳐주고 살려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우리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우리도 지금 죽음에 애워싸여 염려중입니다.
염려하지 않기를 말씀 따라기도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는, 살리는 기도자 되게 하소서.
온갖 종류의 죽음들 앞에서 남다른 믿음의 시선을 주소서. 어떤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 보게 하소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 진정한 생명력의 소유주 예수님처럼 기도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4, 25.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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