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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공간/글쓰기 북트캠프

새벽 기도 끄적 끄적

 

누가 깨우고 있는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108:1-2)

 

"기도하는 일이 널뛰기하듯 요동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의무적인 기도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롭다. 그래서 틀에 박힌 일과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방식으로 정기적으로 기도한다......기도를 하나님과 진정으로 친교하는 훈련으로 삼고 싶어하면서도 그저 틀에 박힌 기도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실망하고 어쩌면 격려를 받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이유로 그렇게 한다.

틀에 박힌 기도는 효과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틀에 박힌 기도를 함으로써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교도들과 다를 바 없게 되어버린다.... 틀에 박힌 기도는 실제로 영혼이 피곤할 때 드리게 된다. 기도를 매일 해야 할 일 목록 중 하나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영혼이 피곤하면 몸이 피곤할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자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따라서 틀에 박힌 기계적 기도를 아무 생각 없이 드리면서, 거짓된 영적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과 의도적으로 친교를 나누기 위해 특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 것 역시 이런 함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기도 생활은 식사와 같이 정기적이고 일상적인 과정이 되어야 한다. 좋은 의미에서 일상적 과정으로서의 기도는 기계적이거나 앵무새처럼 기도를 되뇌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살아가는 지혜로운 부부가 하루의 삶이 어땠는지 나누고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기 위해 하루의 시간을 계획하는 것과 비슷하다. 의미 있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미리 계획하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다는 것을 안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어떤 사람의 방해도 받지 않을 곳으로 함께 산책할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다. 부부는 함께 검토해 보아야 할 것도 많고, 두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제임스 패커, 기도)

 

 

 

1. 새벽 기도 습관 만들기 관련. 

* 금 대접, 성도들의 기도 향기, 하늘 보좌에 올려지는 기도 - 계 5:7-9, 6:1......

 

*습관의 기도(막 1:35) = 하나님 독대는 사역의 일상이라는 뜻. 

 

*성경의 기도 요청 = "항상" = 어떤 일을 "항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예) 어머니. 그녀는 항상 엄마의 일을 했다. 깨있을 때 뿐 아니라, 꿈에서 조차 그녀는 엄마의 일을 했다. 그녀를 보면, "항상"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더 확실해진다. 기도가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 바로 "항상 기도"의 의미일 것이다. 사랑하면 "항상" 가능하다. 

 

(1) 전에 행하던 대로 (단 6:10)

다니엘의 하루 세번 기도 이야기 - 사자굴 형벌을 알지만,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던 이야기 - 예수님의 습관기도 이야기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방안에 찬 바람이 들이쳤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새벽기도 나가시는 뒷 모습을 나는 매일 잠결에 봤다. 

 

(2) 데이트 하던 예.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주일 밤 8시 30분이 되면 나는 그녀의 교회로 찾아갔다. 하루 사역을 마치고 나오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기 위해서였다. 일주일중 한번, 그 시간은 우리의 유일한 데이트 시간이었다. 이 일은 나의 우선순위였다. 다른 약속이나 업무가 그 시간을 방해할 수 없었다. 결혼에 골인하기 까지 어떻게 해서든 나는 시간을 지켜 그녀를 만났다. 

 

(3) 특별한 일은 평범한 일상의 반복으로 이뤄진다. 

날마다 하나님께 나가는 일이 쌓여야, 새로운 습관이 된다.  

새로운 습관은 새로운 인격을 준다. 

 

"긴급한 일"에 매여 사는 습관이 있다면, "중요한 일"은 뒷전으로 밀려날 뿐이다. 

더욱이 새벽기도는 일과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 

하루 하루 급급히 사는 습관으로는 기도는 불가능하다. 

 

긴급한 일에 치여 기도를 미뤘던 예시들...

쉬는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계획 없이 보내는 하루는 기도 영성에 방해된다. 

기도는 거룩한 일이다.

거룩한 일은 기존 습관과 어울리지 않아서 선뜻 실행이 어렵다.

습관화 하기도 중요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뜻을 정해야 한다. 

예) 다니엘의 뜻

 

어제까지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오늘의 기도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는 것의 중요성

 

 

2. 왜 새벽에 기도하지 않는가? 

(1) 그정도로 특별한 관계는 아니니까

(2) 그냥. 왜 새벽에 기도하느냐고 반문하지만, 정작 낮이든 밤이든, 다른시간에라도 정기적으로 기도하지 않음. 

(3) 새벽기도를 하려면 미리 기도를 계획해야 하는데, 나는 주어진 상황에 휩쓸려 다니며, 그때 그때 일처리를 하는 나쁜 습관이 있기 때문.

예) 다니엘의 하루 3번 기도 습관 =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다. 죽음도 뛰어넘는 관계. 약속 하나 해도, 그것 떄문에 목숨을 걸 정도의 특별한 관계. 

 

3. 왜 새벽기도인가?

(1) 기도의 습관을 가져야 하므로 (영적 이유, 심리적 이유, 육체적 이유)

(2) 성경적이므로 (근거 제시, 예화 제시, 확언 정리)

(3) 영성 관리 유익하므로

(4) 새벽기도는 꼭 해야 하는 기도임으로. 

--새벽기도란 가벼운 기도가 아니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기도가 아니다. 새벽기도는 진지한 기도다. 사활을 걸고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이다. 하나님과 만나야만 하겠다는 사랑 표현이다. 미리 뜻을 정하고 계획을 해야 진행할 수 있는, 거룩한 습관이다. 

 

4. 기도란 무엇인가? - 무엇이 기도가 아닌가? 

(1) 홀로 하는 명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
(2) 우상에게 올리는 종교적 간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되어 드리는 것 (요 16:24)
(3) 일방적 소원 청구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더욱 깊어지게 만드는 대화임 (요 15:7)
(4) 기도는 예배때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나누는 밀회의 일 (마6:6).
(5)기도는 중언부언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화 (마6:7)

*밤엔 일기, 새벽엔 기도문을 써보기: 왜? - 중언부언 피하려면...

 

5. 기도하지 않을때 일어나는 일들

(1) 기도 하지 않는 것은 죄다 (삼상 12:23-25)

(2) 전쟁에 패한다. 

(3) 일상의 죄에 위험 천만히 노출된다 -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상태 - 죄의 유혹에 취약한 상태

(4) 

 

6. 기도는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왜 가장 시급한가? (챗 지피티)

(1) 기도할 때 이기니까 - 우린 전쟁중이다... 아말렉 전투를 기억하는가?

(2) 

(3) 

(4) 

(5) 

 

7. 새벽기도자는 겸손하다. 

*자만 금지

새벽기도의 자리는 교만금지구역을 제공한다. 

그는 죄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 유혹 앞에서 단호하다. 죄를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은 전혀 없다. 스스로 섰다고 말하는 순간 넘어질 것을 알고 미리 기도한다. 

 

매일 동트기 전, 첫 시간을 하나님과 홀로 보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기댈 줄 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살지 않는다. 

 

*새벽기도는 기도의 일상으로 길을 낸다. 

 

8. 새벽기도자는 용감하다 (담대히 사명감당한다). 

*무서울땐 새벽까지 철야기도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날 이렇게 말씀 하셨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 22:39-43)

 

습관 기도의 이유 - 예수님 때문 - 예수님은 왜 그런 모범을 보이셨을까? - 우리의 죄성 때문에 - 마음대로 기도 성공 불가능. 기도는 습관과 규칙이 될 때, 배워갈 수 있는 것임. 

 

9. 질적 새벽기도와 양적 새벽기도

습관을 통해 양을 채우다보면, 기도의 질을 높여나가게 된다. 

(1) 습관적으로 규칙을 따라 기도하다 보면 기도가 잘 안될 때가 있음. 

(2) 그럴때는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보기도 하고, 기도가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기도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기도 함. 

(3) 그 과정에서 기도를 배우게 됨. 

(4) 배울수록 기도가 깊어지고, 기도 친화적 마음 상태가 됨. 

(5) 기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임. 

(6) 부담감을 해결하려면, 액션을 취해봐야 함. 기도 해 봐야함. 하루 이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아무 시간대나가 아니라, 새벽시간대에...

(7) 질적 기도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음: 하나는 하나의 주요 기도 제목으로 끈질기게 기도하는 상태가 되는 것 ; 다른 하나는 수 많은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양적 기도), 모든 기도제목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 

 

 

10. 무엇이 새벽기도를 방해하고 있는가? 

(1) 색다른 피곤감. 찌뿌둥한 오전

(2) 밤에 일찍 잘 수 없는 상황들과 밤에 대한 인간적 욕심(정욕)들

(3) 잘못된 습관(시급한 일들 중심적 반응 습관) - 소명 없는 게으름

(4) 예) 가나안의 풍습을 쫓지 말라... 

 

11. 새벽에 올리는 말씀기도

 

 

12. 새벽에 올리는 중보기도

 

 

13. 실패했다면. 

어제 새벽기도를 실패했다면, 오늘부터 다시 시작

예) 광야의 되돌이표... 실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동행.... 은혜.... 

 

행 7:57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 

 

 

 

14. 성경은 왜 여리고성 함락을 새벽에 했다고 굳이 시간보고를 하고 있을까? 

 

15. 예수님은 왜 한적한 곳에서 새벽에 기도? 

-외로운 장소, 고독한 장소... 사람이 안찾아오는 시간과 장소, 방해받지 않으려고...

-일과 사람으로 부터의 자유 @새벽 유일. 

-기도의 장소도 구별. 

-그러므로 구별과 집중이 새벽기도의 핵심이다. 

-기도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이놈의것, 40년을 기도해왔는데, 난 아직도 기도의 초보다. 기도가 기도할 때 마다 어색하고 하기 싫다. -바쁜 일을 만나면 반갑기까지 하다... 

 

15. 성경에 등장하는 새벽의 사람들과 새벽기도...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 46:5). 

(1) 여리고성 함락 = 새벽에 무너진 여리고 = 새벽에 싸우시는 하나님 (수 6:15)

(2) 절망의 밤을 경험해 봤는가?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공격 앞에, 밤새 기도... 승리의 새벽...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왕하 19:14-19, 35)

(3) 심판의 새벽인가 구원의 새벽인가 - 롯 (창 19:23)

(4) 홍해를 가른 새벽 (출 14:27-28) - 새벽 세례 (고전 10:2)

출애굽기 14:27-28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5) 결핍이 해결되던 새벽 (출 16:13-14) - 말씀이 임하는 새벽

(6)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시 119:147)

(7) 막달라 마리아 (요 20:13)

(8) 베드로 (요 21:15)

 

 

 

 

 

홍대에서 교회 개척을 하던 시절이었다. 교회에서 비밀연애 하는 커플을 숱하게 봤다. 그들중 누구도 비밀을 성공적으로 지킨이는 없었다. 사랑하면 사람들이 금새 알아본다. 연인은 들통난다. 

하나님 앞에서 맞이하는 새벽도 그렇다. 

 

 

 

 

16. 하나님은 영이시다. 새벽엔 용도가 있다. 새벽은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맺는 시간이다.

예) 비밀연애 해 봤자다. 사랑하면 알아본다. 연인들은 금새 들통난다. 

기도란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방식으로 얻어내는 미신적 주술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동거한다. 

기도하면 주님의 뜻을 알게 된다 (예, 성구들, 부르짖으라...크고 비밀한.../ 말씀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이루리라)

정욕적 기도 (야고보서 요절)는 기도할때 바뀐다. 주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알면 바뀐다.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거울 앞에 섰을때, 내가 낯설었다. SNS때문이다.

SNS에 올려둔 내 사진들에 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면 나는 사진을 그냥 올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핸드폰에는 여러 보정 어플들이 있었고, 보정을 거친 내 사진들은, 실물의 내가 아니었다.

가짜에 익숙하니, 거울이 보여주는 진짜가 어색할 수 밖에.

그런데 기도에도 이런 기능이 있다.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기도하면 하나님을 더 알고, 그 지식이 곧 하나님이 아시는 나, 실체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준다. 

기도하기 전과 후의 내가 내게조차 다른 이유가 이것이다. 

 

"기도"는 히브리어로 "테필라"( תְּפִלָּה )이다.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살펴본다"는 의미다. 

테필라는 거울과 비슷한 면이 있다. 

빛이 비추어 들어와 내가 다 드러난다. 

 

 

17. 기도 정의부터 내리고, 새벽 기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것.

기도란 무엇인가? - 기도란 무엇이 아닌가? 

미라클 류의 자기 암시를 통한 성공 성취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하는 것이다. 

미지의 신에게 두려움으로 드리는 종교적 제사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아버지 자식 관계로 이뤄지는 사랑의 동거다. 

신적 존재를 향해, 나약한 인간이 일방적으로 구하는 설득이나 타협이 아니다. - 쌍방 대화다. 

기도중 깨닫는것들 -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나의 실체가 다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앞도하는 것을 경험하는 영적 성숙이 곧 기도의 능력이다. 

하나님과 충분히 교제하면, 영적 상태 뿐 아니라, 생각과 기도제목역시 바뀐다. 존재가 바뀐다. 

기도는 혼자 올리는 독백이나 명상이 아니다 -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도자를 굴복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 4:8),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꼐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 4:10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고후 7:1

 

18. 기도는 집중해서 해야 한다. 

-언제 집중을 위해 노력하는가? - 하고자 하는 일의 중요성. 시의 적절함, 이때!!!
예) 도서관 책상 칸막이 벽 - 유대인들의 탈릿 쓰고 기도 습관(시 104:1-2 암송하며 시작하는 탈릿 기도) - 둘 다 집중과 관련.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시 62:1-2

어떻게 하나님만 바람? = 집중해야 함. 언제 집중 가능? = 예수님의 새벽기도 모범대로... 따로 구별... 

 

한 설교자는 집중하는 기도란 곧 "말씀에 충실한 기도"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인격과 성품과 인자하신 모습 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것은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바 되었다.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기억하면서 그분을 신뢰할 때 나타나는 것이 참된 집중이다... 기도의 집중은 곧 그분이 하신 일과 성품에 대한 집중으로 모든 것이 그분으로 부터 시작되고 종결됨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말씀의 집중이다" (이대희, 내 인생을 바꾼 기도습관, 70쪽)

 

하나님은 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구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주신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에 나온다.

기도에 집중할 때, 기도가 변한다.

변화된 기도를 통해 후히 주시고,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라. 

 

19. 성령에 사로잡힌 기도자, 성령 충만과 기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제목들이 있었다. 

(엡 1:17-19, 3:14-21)

기도제목을 나열한 후.... 

그러나 그들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을 기도를 통해 인정하고 있었다. 

기도는 성령의 일이다. 몸으로 하는 일임에도 영적인 행위다.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 성령의 일들이 기도자를 통해 나타난다. 

기도는 성령께서 역사 하셔야 가능한 영적인 일이다. 

성령의 개입으로 기도가 기도가 된다. 

 

20. 정직한 자의 기도 (잠 15:8)

 

21. 단순한 기도 = 친밀한 기도

친할수록 말이 짧다. 

예) 중언 부언 말라. 마 6:7-8

 

22. 단순한 기도 = 위급한 기도

위급할수록 말이 짧아진다. 

예) 베드로 물에 빠져갈 때 기도가 짧아짐. 가나안 여인도 기도가 짧아짐.

단순한 기도는 구원의 요청이며, 믿음의 순도가 높다. 

 

23. 새벽기도 순종의 축복

우리는 아무때나 아무렇게나 기도하지 않는다. 

하루의 첫 시간을 따로 구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에 집중하는 기도를, 성령의 간섭과 역사 가운데 드린다. 

말씀 순종의 축복. 기도 순종의 축복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24. 새벽기도의 정해진 시간과 장소의 중요성

롬 12:1 - 산 제물.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던 곳은?

요 18:2 감란산. 예수님이 제자들과 모이셨던 곳. 

눅 22:39 감란산 겟세마네 동산. 

평소에 자주 가던 곳. 

유다도 의례 거기 계실것이라고 병사들을 안내할 수 있었던 곳. 

기도를 쉬지 않겠다던 사무엘. 정시기도 다니엘. 사도들의 정시기도. 다윗의 정시 기도 (시 55:17)

 

25. 일상의 기도로 연결되는 새벽기도

하루를 지배하는 시간이 새벽이다. 

새벽을 기도를 위한 시간으로 따로 떼어두면, 하루를 기도가 지배하게 된다. 

일상 전투는 골방에서 지휘한다. 

 

도입: 언제부터 새벽기도 앞에 "특별"이 붙었을까? 

특별히 기도하는 주간이라는 인식이 생겨버림.... 

 

월급 받아보니 맛있더라... 상상. 월 천 받으면 새벽기도 안 할 사람?

 

 

 

"삶이란 우리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삶을 성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소유권이다" (아브라함 헤셀 Abraham Heschel).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이들의 삶은 언제나 신비롭다.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하고 우연한 일 속에서도 특별한 기적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한없이 단순한 설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화, 박학과는 거리가 먼 책,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힘입어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 된다. 그들이 똑똑한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부스러기까지 정성 들여 줍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소중하며 양분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장 피에르 드 코사드 Jean-Pierre de Caussade). 

 

"

 

26. 하나님과 연합하는 일의 성스러움 - "성스러움을 보려면 걸음을 늦춰야 한다" (켄 가이어)

 

 

27.  기도의 스승=예수 그리스도 (주기도문 가르치신 스토리)

(1) 주기도문 가르치신 스토리

(2) 사마리아 여인 만나신 스토리 - 알고 드리는 예배(요 4:22), 지적인 예배(요4:2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4:23) - 기도도 그렇다. 알고 드리는 기도, 지적인 기도, 영적인 기도가 있다. 

영적 기도의 때는 "곧 이때"(요 4:23)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때다. (요 16:24)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기도 = 영적 기도

 

마 6:6.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8.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28. 구찾두. 마음껏 기도하라. 

마 7:7-11. 

 

29. 기도전도 (에드 실보소)

"당신만 지쳐 쓰러진 것이 아니라 사탄도 지쳐 쓰러져 있다. 먼저 일어나는 자가 승리를 거둘 것이다" (에드 실보소). 

사탄이 나보다 더 상처 투성이다. 나는 이미 승리자다. 

"왜 우리 크리스천은 늘 깨어서 사탄을 대적해야 하는가? 사탄이 복음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우리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 고후 4:4

 

행 26:17-18

 

"기도전도는 이웃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이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Ed Silvoso). 

기도전도의 4단계

1. 평안 구하기

2. 교제 가지기

3. 필요를 채우기

4. 복음을 전하기 

눅 10:5,8,9

 

30. 기도란 무엇? (마 7:7-11) (김준곤)

(1) 크리스천의 호흡

(2)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 기도를 통해 이뤄짐

(3)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4) 필요를 이뤄주시는 하나님의 채널

 

31. 

훈련없이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은 없다. 

새벽기도는 몸, 마음, 머리의 훈련이다. 말씀훈련이자, 자아 깨뜨리는 훈련이다. 

 

기도없이는 응답도 없다. 응답이 없으면 ......악순환.... 

 

새벽에 부르짖어라. 

 

새벽기도를 위한 저녁일정 - 핸폰, 낮잠한계, 기도와 묵상으로 취침

 

하나님을 향한 전적 의탁의 기도, 새벽기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키우는 기도, 새벽기도. 

 

32. "무릎학교" 앤드류 머레이

-기도의 완전한 교사는 예수님

-성경의 약속은 기도로 성취된다. 

-예수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다 (지금도 기도하고 계심)

-예수님은 기도는 가르치셨어도 설교를 가르치신 적은 없으셨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영과 진리로 기도하게 되기를 갈망하라. 

-골방기도, 주기도문기도, 

-응답받는 기도 - 구하라! (마 7:7-8)

-구하는 자녀, 주시는 아버지!  ( ------예: 나 어렸을 때, 아버지와 새벽 산책하던 이야기)

-사랑의 응답 (마 7:9-11)

 

33. 새벽에 말씀대로 구할 것 목록

(1) 성령충만(눅 11:3)

(2) 아버지의 뜻( 내원대로 마옵시고...)

(3) 질문 기도

(4) 노트 기도

(5) 예수님을 묵상하는 기도

(6) 산책 기도

(7) 앤드류 머레이의 성령님의 여러 이름들 (은혜의 성령, 믿음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입증하시는, 진리의, 기도의, 판단의, 거룩함의, 능력의, 영광의 성령님)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성령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앤드류 머레이)

(8) 성령을 믿음으로 취하는 믿음의 기도

마 7:8의 "받으라" = 같은 단어를 마 26:26& 요 20:22에서 (만찬 먹으라고 하실 때 &성령 받으라고 하실 때) 말씀하셨다.

예) 받아먹으라고 들고 있는데... 아무 반응 안한다면? - 불신.  

 

(9) 친밀한 간구 (눅 11:8) - 어려운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

 

(10) 일꾼을 구하는 기도 (마 9:37-38)

="일꾼의 공급이 우리의 기도에 달려있다" (앤드류 머레이)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 9:37-38

 

(11) 자신을 살피는 기도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막 10:51). = 구체적인 기도. 

새벽에 엎드려 스스로에게도 물어보라. =나는 주님께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 그것을 나는 믿음으로 구하고 있는가? 

 

(12) 

 

 

 

 

 

 

프롤또다른 버전...  새벽기도의 추억에 대해 쓰고, 현재는 왜 새벽기도를 못하고 있는지, 다시 새벽기도를 회복하면 어떤 일들(첫사랑 회복의 소망)이 벌어질찌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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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1. 왜 나는 새벽기도가 안될까?
1장. 자식 등록금도 없는데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1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 4:6

중년 아저씨들의 고민
과거가 만든 오늘이다. 오늘들이 모여 또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다. 이것은 국가 인구 통계 뿐 아니라, 내 소명 현장에서도 진실이다. 
현재 인구 통계상으로 장/중년 인구 수가 가장 많다. 내가 참여중인 제자 모임들도 그렇다. 내가 아저씨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자모임마다 중년 아저씨들이 대세다. 
거기서 함께 대화하며 성경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다보면, 그들의 고민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공통점은 “은퇴 이후에 대한 염려”다. 

예를 들어 제자화 모임 중 53세의 김이삭 형제(가명)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 노년 준비는 커녕, 자식 등록금도 없는데, 어머니는 쓰러지셨어요. 요양시설을 알아보고 있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커서 엄두가 안나요. 다른 옵션으로 방문 요양 보호사도 알아봤는데, 그것도 너무 비싸요. 아직 주택대출금도 다 못갚았는데, 빚을 어디까지 더 얻을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어려움은 이삭형제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힘입어, 모임에 함께였던 다른 아저씨들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6중고
현재 중년 아저씨들의 고민은 “6중고”로 요약된다. 
(1) 시대가 급변하고, 일에서 뒤처지니, 가족 봉양이 만만치 않다. 
(2)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데, 부모님도 모셔야 한다. 
(3) 더 큰 문제는 내 노년이다. 최다 사망 연령까지만 살아도, 나는 퇴직후 20~30년은 더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4) 이런 상황에서 고민중인 가장의 마음을 가족들이 몰라준다. 그래서 외롭다. 
(5) 교회에서는 청년과 주일학교 사역에 집중하느라 중년의 고민은 뒷전이다. 그래서 더 외롭다. 
(6) 문화가 너무 다르다. 바쁘게 일하느라 직장인들을 제외하고는 친구가 없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나는 꼰대일 뿐, 소통할 수 없다. 

이들의 고통당하는 마음은 마치 선교지 같다. 그들을 볼 때 내 가슴에 복음의 불이 붙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지금껏 내가 만난 청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더 가난하고, 더 연약하고, 더 흔들린다.


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고
나는 그분에게 빌립보서 말씀을 계속 전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이 말씀과 그분의 현실 고민은 서로 충돌했다. 그분은 



사역 현장의 고민을 품고 성경을 펼친다. 사도행전 6장이 눈에 띈다. 
첫 교회, 예루살렘 교회에 돈 문제가 생긴다. 이때 “구제 사역 경영”의 필요가 나타난다. 교회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집사들을 선출한다 행 6:1-6. 
궁금하다. 왜 사도들이 직접 이 일을 해결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은가. 처음 교회의 리더십은 사도들이었고, 돈 문제 역시 그들이 직접 해결하면 될 일 아닌가. 그럼에도 돈 문제 전담 리더십을 따로 뽑은 이유가 뭘까?  
왜 그래야 했는지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행 6:4.

그렇다. 돈 관리와 구제 사역 그 자체는 사도들의 업무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일은 “기도와 말씀”이었다. 사도들은 사명에 충실해야 했다. 
교회 리더십은 모든 일을 다 하지 않기로 한다. 그대신 기도와 말씀을 선택해 집중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교회 전체가 기도와 말씀 사역만 한 것도 아니었다. 교회는 구제를 잃지 않았다. 교회는 복음 전파와 함께 육적 필요를 채우는 일도 잃지 않았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니 예수님의 전통을 따른다. 예수님은 기도만 하시거나 말씀만 전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가난하고 배고프고 아픈 자들을 치료하고 먹이고 양육하셨다. 예수님의 삼중 사역인, “치유, 설교, 가르침”은 초대교회를 거쳐 교회와 선교의 전통이 되었다. 
(치유와 설교와 가르침의 삼중 사역은 20세기 선교의 방법론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를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사역”이라 불렀다. 혹은 “빵과 복음을 동시에 나누어 주는 선교”라고도 했다) (출처 - 국민일보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95191) 
선교적 교회 개척자라면, 복음 전파와 가르침뿐 아니라, 현재의 중년을 6중고로 부터 구제하는 문제를 함께 다뤄야 할 것이다. 



필요를 채우는 삼중사역의 출발점
미래가 보인다. 우리는 노인사역의 필요성을 곧 피부로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구 통계가 예측하는 노인층의 숫자는 곧 현실화 될 것이다. 그들은 현재 중년층을 이루고 있다. 반복된 과거가 오늘을 결정했듯, 오늘이 쌓여 미래가 된다. 현재 중년들의 6중고는 몇년 뒤 노인문제의 근원이 된다. 
만약 이 예측을 가지고 현재를 바꿔준다면, 그러니까 중년 6중고 구제 사역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나는 예측과 다른 미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6장에 근거해, 진정한 변화를 위해 오늘 내가 집중해야 할 일은 기도와 말씀이다. 나는 교회 공동체의 그 누구보다 앞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관련된 말씀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른 구제 사역자들을 따로 세워 주실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미래의 노년층이 될, 현재의 중년 6중고를 다룰 제자화 사역자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의 필요를 예측하되, 현재의 제자 모임 진행을 위해 나는 기도와 말씀에 전무한 리더십이 되어야한다. 문제가 피부로 와 닿기 까지, 현재 중년층을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문제 해결안은 기도와 말씀에 있다. 
삼중사역을 위해 처음 했던 생각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내게 시대상을 읽는 창업자의 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중년 아저씨들을 위한 창업 모임이라도 인도해줄 수 있을텐데. 아니면, 내게 많은 자본이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그들을 위한 펀드 기관이라도 세울 텐데……”
그러나 이를 위해 기도하던 중, 사도행전 6장을 통해 방법을 찾았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핵심 리더십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나 미래의 구제사역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붙들고, 중년의 6중고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하실 것이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아저씨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분들에게 강조해야 할 부분은 인구통계가 아니다. 기도와 말씀이다. 기도 훈련과 말씀 훈련으로 5~10년 준비된 영성이다. 그때에 노년 사역의 길도 열릴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들이 하나님의 방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소망이다. 현재의 중년 6중고에 이어 터져나오게 될, 미래 노년 문제들의 구제책은 가까이 있다. 오늘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된 사람들이 그들이 될 것이다. 



중년은 누구보다 바쁘다.
6중고를 겪는 중년들에겐 시간이 없다. 바쁘다. 그들은 일주일 내 짜투리 시간조차 없다.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대고 있다. 일터에서는 기술 변화를 따라잡느라 더 일하고 또 공부한다. 일이 끝나면 노년을 대비해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기술들을 익힌다. 집에 가면, 남녀 평등의 시대에 걸맞게 가사를 돕는다. 
부족한것은 시간뿐이 아니다. 사명감도 희미하다. 그들은 순간 순간 위기의 벼랑끝에서 일하는 감정으로 수십년씩 일해왔다. 그 과정이 중년의 뇌력을 떨어뜨렸다. 마치 환경이 이끄는대로 움직이는 곤충뇌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잔다. 가끔씩 염려가 밀려오지만, 생각은 커녕, 아플 여유도 없다. 대부분의 중년 남자들에게 유일한 낙이라고는 퇴근길 찬맥주 한잔 정도가 다다. 
시간도 사명감도 부족한 이들이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겠는가? 또 나는 이들을 어떻게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도록 돕겠는가? 



새벽 순종에 대하여
시간과 사명감 부족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새벽기도다. 
대부분의 중년들에게 추가로 낼 수 있는 시간은 새벽 뿐이다. 그리고 사명감을 회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출근 이후로 퇴근까지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퇴근 후에 잠시 주어지는 시간은 자기계발과 가족 돌봄이 기다리고 있다. 늦은 밤 시간은 더이상의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결국 새벽이다. 새벽 말고는 시간을 따로 낼 수 없다. 
또한 사명감은 기도로 회복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후, 누구나 사명자다. 예수의 영, 성령님의 임재가 있는 모두가 사명자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신앙이다 롬 6:1-11.  


성도의 영적 호흡은 기도에 있다. 
어떤 일이든 시간을 내야 할 수 있다. 
일단 물리적으로 

대부분의 중년들에게 유일한 시간은 해뜨기 전 새벽 뿐이다. 사명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기도 뿐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이 책을 쓰는 동안 내 노트북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들은 중년의 아저씨들이다. 그들은 직장인이고 가장인데, 아래로는 자식봉양, 위로는 부모 봉양의 짐을 진 사람들이다. 그 무게를 견디며 하루하루 일하면서도, 정작 마음은 자신의 은퇴 대비에 가 있는 이들이다. 
이 책은 그들을 위한 책이다. 
6중고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답이 기도와 말씀에 있다. 
함께 한장씩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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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2안.

 

1장. 자식 등록금도 없는데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중년 아저씨의 고민

아카시아 향기가 시작된 5월이었다. 교회 모임중이었는데, 54세의 아저씨 한분이 말했다. 

 

“제 노년 준비는 커녕, 자식 등록금도 없는데, 어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요양병원을 알아보고 있는데, 엄두가 안나요.  빚내야 할 처지예요.”

 

중년 아저씨들은 특별하다. 이들은 한국의 인구 통계상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고민에 대해 정리한 자료들도 많다. 요약하자면, 다음 “5중고”다.

 

(1) 경제적 어려움: 시대가 급변하고, 일에서 뒤처지니, 가족 봉양이 어렵다. 

(2) 가중된 책임감: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데, 부모님도 모셔야 한다. 

(3) 노년 대비의 어려움: 더 큰 문제는 자신의 노년이다. 최다 사망 연령까지만 살아도, 퇴직후 20~30년은 더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4) 심리적 고립감: 이런 상황에서 고민중인 가장의 마음을 가족들이 몰라준다. 그래서 외롭다. 

(5) 소통의 어려움: 문화가 너무 다르다. 직장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그는 꼰대일 뿐, 소통이 잘 안된다.

 

교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는 주로 청년과 주일학교 사역에 집중하느라 중년 사역은 뒷전이다. 그들의 고민은 상대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중년층은 영적으로도 소외 되어있다. 이 문제를 더하면, 중년 “5중고”가 아니라, “6중고”다. 

 

중년 아저씨들을 볼 때, 내 가슴에 복음의 불이 붙는 것만 같다. 그들은 다른 연령대의 누구보다 더 가난하고, 연약하고, 갈급한 심령들인 것 같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오늘의 중년은 내일의 노년

“중년 6중고”는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구 통계상, 10년 뒤 이들은 노년층이 된다. 그때 이들은, 현재의 “6중고”가 10년간 진행된 문제들을 또 직면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인구수가 가장 많은 연령층을 무시하고 복음 사역들을 진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무시 되고 있는 중년층은, 곧 노인 사역 대상으로 드러날 것이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목회데이터 연구소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2023년 기준으로 10년 후의 인구 증감률을 살펴보면, 총인구는 1.3% 정도만 감소하지만 유소년 인구는 33%가 줄어들고, 고령인구는 무려 51%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교회에 적용해 본다면 노인 교인의 비율이 급속하게 증가하여 고령 친화적 교회 운영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된다” 

(목회 데이터 연구소, 222호, 10년 뒤 인구 변화).

 

미래는 뻔하다. 우리는 노인사역의 필요성을 곧 피부로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의 중년이 내일의 노년이다 

만약 우리가, 오늘의 “6중고”를 끌어안고, 중년 타겟의 복음 사역을 진행한다면?

100년지 대계까지 갈 것도 없다. 10년만이라도 내다보며, 오늘 주어진 문제를 생각해본다면?

 

반복된 과거가 오늘을 결정했듯, 오늘이 쌓여 미래가 된다. 내일 직면할 문제의 원인이 오늘 우리 주변에 뻔히 살아 숨쉬고 있다. 100년지대계 까지는 아니더라도 좋다. 10년지 대계만 해도 어딘가! 

 

현재 중년들의 “5중고”+ 영적 소외의 어려움, “6중고”는 몇년 뒤 노인문제의 원인이 될 것이다.

중년의 6중고는 몇년 안에 노년층의 고민으로 이어질 것이다. 

오늘의 중년 사역이 내일의 노인 사역 준비가 될 것이다. 

인구 통계가 예측하는 노인층의 숫자는 곧 현실화 될 것이다. 

그들은 현재 중년층을 이루고 있다. 

 

만약 이 예측을 가지고 현재를 바꿔준다면, 그러니까 중년 6중고 구제 사역을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미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기도없이 사는 아저씨들

한편, 내가 집중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기도와 말씀이다 행 6:4. 진정한 변화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나는 교회 공동체의 그 누구보다 앞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말씀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른 구제 사역자들을 따로 세워 주실 것이다. 

미래의 노년층이 될, 현재의 중년 6중고를 다룰 제자화 사역자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의 필요를 예측하되, 현재의 제자 모임 진행을 위해, 나는 기도와 말씀에 전무한 리더십이 되어야한다. 이를 통해 현재 중년층을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문제 해결안은 기도와 말씀에 있다. 

“만약 내게 시대상을 읽는 창업자의 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중년 아저씨들을 위한 창업 모임이라도 인도해줄 수 있을텐데. 아니면, 내게 많은 자본이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그들을 위한 펀드 기관이라도 세울 텐데……”

그러나 이를 위해 기도하던 중, 사도행전 6장을 통해 방법을 찾았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핵심 리더십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나 미래의 구제사역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붙들고, 중년의 6중고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하실 것이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아저씨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분들에게 강조해야 할 부분은 인구통계가 아니다. 기도와 말씀이다. 기도 훈련과 말씀 훈련으로 5~10년 준비된 영성이다. 그때에 노년 사역의 길도 열릴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들이 하나님의 방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소망이다. 현재의 중년 6중고에 이어 터져나오게 될, 미래 노년 문제들의 구제책은 가까이 있다. 오늘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된 사람들이 그들이 될 것이다. 

 

 

중년은 누구보다 바쁘다.

6중고를 겪는 중년들에겐 시간이 없다. 바쁘다. 그들은 일주일 내 짜투리 시간조차 없다.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대고 있다. 일터에서는 기술 변화를 따라잡느라 더 일하고 또 공부한다. 일이 끝나면 노년을 대비해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기술들을 익힌다. 집에 가면, 남녀 평등의 시대에 걸맞게 가사를 돕는다. 

부족한것은 시간뿐이 아니다. 사명감도 희미하다. 그들은 순간 순간 위기의 벼랑끝에서 일하는 감정으로 수십년씩 일해왔다. 그 과정이 중년의 뇌력을 떨어뜨렸다. 마치 환경이 이끄는대로 움직이는 곤충뇌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잔다. 가끔씩 염려가 밀려오지만, 생각은 커녕, 아플 여유도 없다. 대부분의 중년 남자들에게 유일한 낙이라고는 퇴근길 찬맥주 한잔 정도가 다다. 

시간도 사명감도 부족한 이들이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겠는가? 또 나는 이들을 어떻게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도록 돕겠는가? 

 

 

새벽 순종에 대하여

시간과 사명감 부족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새벽기도다. 

대부분의 중년들에게 추가로 낼 수 있는 시간은 새벽 뿐이다. 그리고 사명감을 회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출근 이후로 퇴근까지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퇴근 후에 잠시 주어지는 시간은 자기계발과 가족 돌봄이 기다리고 있다. 늦은 밤 시간은 더이상의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결국 새벽이다. 새벽 말고는 시간을 따로 낼 수 없다. 

또한 사명감은 기도로 회복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후, 누구나 사명자다. 예수의 영, 성령님의 임재가 있는 모두가 사명자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신앙이다 롬 6:1-11.  

 

성도의 영적 호흡은 기도에 있다. 

어떤 일이든 시간을 내야 할 수 있다. 

일단 물리적으로 

 

대부분의 중년들에게 유일한 시간은 해뜨기 전 새벽 뿐이다. 사명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기도 뿐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이 책을 쓰는 동안 내 노트북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들은 중년의 아저씨들이다. 그들은 직장인이고 가장인데, 아래로는 자식봉양, 위로는 부모 봉양의 짐을 진 사람들이다. 그 무게를 견디며 하루하루 일하면서도, 정작 마음은 자신의 은퇴 대비에 가 있는 이들이다. 

이 책은 그들을 위한 책이다. 

6중고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답이 기도와 말씀에 있다. 

함께 한장씩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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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보니,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셨다. 

 

 

 

 

3장. 시간의 첫 열매는 새벽이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첫 열매와 예배

우리가 쉽게 잊는 진리가 하나 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 24:1. 바람도 달도, 해도 바다도, 나무도 동물도, 땅도 사람도. 어느 것 하나, 내 것은 없다. 모두 하나님께 속했다. 저마다 하나님께 임시로 받은 것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소유권에 대한 진실은 쉽게 잊혀진다. 대부분이 하나님을 잊고 살기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망각을 안타까워 하며, “소유권” 출처를 분명히 해준다. 그 중 하나가 구약의 첫 열매에 대한 말씀이었다 출 23:16, 34:26, 15:20, 21, 28:26.

첫 열매는 거룩한 것, 구별된 것, 그래서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한 것이었다. 첫 열매는 소유의 일부였다. 일부를 드릴때, 전부가 보였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신앙 고백이 첫 열매와 함께 하나님을 향했다. 

 

 

첫 열매와 십일조

첫 열매 사상은 구약 예배자들의 핵심 철학이자 신앙이었다. 첫 열매 드림에 예외는 없었다. 사람도 첫째 아들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중 한 지파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드려야 했다 민 3:12, 13, 8:16, 17.

이렇게 첫 열매를 바치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축복이었다. 바침으로써 소유권의 진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것이 누구의 것인지 확신 한 사람은 진정한 부富를 누렸다 말 3:10-12. 물리적인 부와 정신적인 부 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부도 누렸다 약 1:18.

첫 열매는 곧 십일조 사상과 직결되었다.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내게 있는 10개 중 가장 좋은 첫 번째 것을 드리는 행위였다.

드릴 때 마다, 소유권 질서가 제 자리를 찾았다. 드릴 때 마다, 에덴에서 죄로 잃었던 본래의 부가 다시 기억났다. 

첫 열매와 십일조는 예배때 같은 위치에 있었다. 둘은 신학적으로 하나였다. 하나님께 드릴 때, 소유권이 분명해졌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한 부를 누렸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있는, 거룩히 구별된 예배의 일이었다.

 

 

영적 청지기의 시간

진정한 부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다. 부자 주인의 모든 소유를 일시적으로 맡아 관리해 드리는 것이 부의 본래 모습이었다 눅 19:16.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신약은 청지기라고 불렀다.

청지기는 지혜가 필요했다. 지혜란 올바른 지식을 몸으로 행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맞게 맡은 재물을 관리하는 지혜가 있어야 했다 눅 19:22-27. 만약, 어떤 청지기가 소유물에 대해서든 주인의 소유권을 잊게 된다면, 그는 악하고 게으른 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허무한 인생으로 전락한다 마 25:26, 눅 12:20. 

청지기가 임시로 주인에게 받은 것 중에는 시간도 있었다. 청지기에겐 시간도 자기것이 아니었다. 시간은 주인의 것이었다. 이 역시 임시로 맡아 지혜롭게 관리해드려야 하는 대상이었다. 

모든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주인 삼은, 영적 청지기다 고전 7:22.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염려 금지를 선언한다 마 6:34. 염려의 출처는 망각이다. 소유권 출처를 잊을 때 염려가 찾아 온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 소유권이 그리스도께 있다. 영적 청지기인 우리들 역시 인생의 모든 시간을 주인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혜롭게 쓴다. 

 

 

시간의 첫 열매로써의 십일조

용서받은 죄인들인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도 잘못된 소유권을 주장하기 쉽다. 

자기 인생에 주어진 모든 시간이 마치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고 행하며 산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 하나까지도 하나님이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마 6:30. 온 세상 어디에도 내것이란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일 일에 대해 염려한다. 그 이유는 본성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고후 5:17. 그러나 죄의 경향성에 따라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본성으로 돌아가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시간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내일 일을 염려치 말라 마 6:34. 

 마 6:25-34. 

 

 

 

 

 

 

 

 

 

 

 

왜 새벽기도여야 할까?

 

 

 

 

기도가 쉬운 사람이 있을까? 

기도의 대가 조차 기도가 어렵다고 했다. 

“기도는 거룩한 일이라서, 죄인인 나는 기도가 항상 어렵다” (E. M. Bounds). 

기도는 어려운 일이다. 

한 선지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선포했다 (호세아). 

 

 

성경이 새벽기도에 대해 말하는 새벽 기도란 무엇인지가 있다. 왜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아닌, “새벽 기도”가 성경에 나오는지가 있다. 

언제 어떻게 하는 기도가 더 성경적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있다. 기도가 왜 그토록 어려운지, 

 

이 책의 제목은 새벽 순종이다. 새벽에 기도는 어렵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니 순종하자는 뜻으로 지은 말이다. 

 

 

기도는 깨어있는 행위다. 

 

 

 

 

1. 예수님 따라하느라 

 

(1) 예수님 처럼 기도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35

 

(2) 예수님 처럼 사역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14:25)

 

(3)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싶어서 

- 목양: 양치려면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해야 함. 

- 준비 내용: 목양할 만한 사람이 되기(나를 단련)/ 기도로 영혼의 밭을 일구기/

 

 

2.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어서 

 

(1) 하루의 직전 밤에, 전략 점검/ 이미지 트레이닝은 새벽에  

(2) 출정 전에 칼을 벼려놔야 - 성령의 검

에베소서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3.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 

 

- 하루 중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 "목사님 내일 새벽 5시 15분에 커피숍에서 만나요" 이러는 사람 아무도 없음. 

 

- 예)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스스로가 먼저 준비되어야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 

 

- 혼자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기도, 독서, 연구, 자기관리/계발, 집필...... => 이들 모두 내 인생의 핵심 테스크들. 

 

 

 

 

 

 

 

4. 리더 다운 부지런함을 갖고 싶어서 

 

(1) 가족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나고 싶어서 - 내가 가장(리더)이니까. 

 

(2) 그럼 밤에 가장 늦게? - No. 

 

- 밤에 가장 늦게까지 깨어있을때 내가 주로 하는 일은 건설적인 일들이 아님.  - 가장으로써 모범이 안됨. 

 

- 일찍 잔다 - 가족에게 모범이 됨. 

 

(3) 하루라는 시간을 2배로 쓸 수 있음 - 9~12시 3시간. 오전 업무/ 새벽에 일어나면 7시도 안되서 오전 업무할 만큼의 시간을이미 사용.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5:16)

 

 

 

 

 

 

 

5. 잠10:4 말씀대로 살아보고 싶어서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10:4)

 

(1) 기도 

 

(2) 말씀

 

(3) 연구

 

(4) 운동 - 

 

(5) 책쓰기 - "지키는 기도" 매일 새벽에 2-4시간씩 썼음. 이런 식으로 2주 걸려 탈고. 

 

 

 

 

6. 하루 하루를 진지하게 살고 싶어서 

 

(1) 나만의 리추얼(진지한 예식)이 있다. 

 

Part1. 

 

-일어나자마자 "예수 그리스도!"

 

-노트를 열어 기도문을 읽고

 

-양치질후, 미리 준비해둔 운동복을 입고 "예수~!"를 외치며, 3Km를 뛴다.

 

-뜨거운 물로 10분간 샤워 후 물 500mL (여기까지 4:30이 됨)

 

......

 

 

 

(2) 리추얼로 시작한 하루는 진지한 하루가 됨 => 진지한 하루. 집중력 높은 하루. 성과/밀도 높음. 소명 이루기에 만족스러운 하루. 

 

 

 

(3) 들판은 희어져 추수를 기다리는데 추수할 일꾼이 너무 적어서. 하루를 효과적으로 살지 않으면 너무 아까움. 

 

 

 

 

 

 

 

 

 

 

 

 

 

 

3:47am. 이 시간에 일어난지 거의 4년째다. 

 

 

새벽뿐이다

달리시간없다

어렵다

순종해야할수있는일이다

근데 순종어렵다

이유는 말씀몰 라서그렇다

새벽기도는 문화적 선택사항이아니다

순종으로 진행해야하는 신앙의 필수 조건이다

기도해야만한다

언제할것인가?

새벽외에 당신이 언제 기도하고있나?

매일하고있나?

지속안되는이유는 새벽이아니기때문이다

예수모범이있다

예수는따른다면서 예수기도방법은안따르겠나?

3:47am. 

 

 

 

________

4장. 가장의 소명을 새벽에 완수하라. 

 

 

지키게 하시고

창 2:15. 

 

 

가장의 임무

가장의 임무는 아내를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정 창조 디자인에 들어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처음부터 큰 책임을 맡기셨다. 그것은 지키는 임무인데, 대상이 광범위하다. 무려 에덴동산 전부다. 

이것은 단순히 부동산 지키라는 임무가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상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는” 책임이다 창 2:15. 

지키는 것이 “가장家長”의 소명이었고, 이것은 하와가 아닌 아담에게 주어졌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를 보면 더 분명하다. 

그때 하나님은 “하와야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으셨다. 그 대신 “아담”을 찾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아담에게 먼저 물으셨다. 그 이유는 에덴 뿐 아니라, 하와도 아담 책임이기 때문이다 창 2:18.

하나님은 하와를 “돕는 배필”로 예정하시고, 지으시고, 이끌어오셨다 창 2:18, 22. 

그리고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이 되었다 창 2:18-25. 

아담과 하와는 둘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가정이다. 둘이 한몸을 이룬 부부가 성경 최초의 공동체가 되었다. 그 대표자는 아담이고, 그는 다름 아닌 “가장”이다. 

아담과 하와 가정 구성원은 둘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다. “둘이 한몸” 공동체다. 여기서 대표가 아담이다. 

하나님은 대표자에게 죄책을 물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대표가 책임자다. 

아담은 “둘이 한몸 공동체”를 지키는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보다 먼저 받았다 창 2:16, 17. 

가장의 임무가 하와를 만나기 전에 주어진 것이다. 

심지어 하와 뿐 아니라, 온 인류,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책임을 받았다. 

그러나 최초의 가장은 임무에 실패했고, 책임도 회피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실패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표답게 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꼴사납다. 자기가 지켜야 했을 대상에게 책임 전가하는 모습 어디에도 대표성은 없다. 가장이 대표성을 상실하는 순간이다. 

순순히 자기 책임을 인정하기는 커녕, 하와탓을 하는 그는 가장 답지 않다. 

여기서 두가지 질문을 해보자. 

(1) 아담은 왜 가장의 임무에 실패했나? 

(2) 실패 해놓고 왜 꼴사납게 남탓을 했나? 

 

 

 

왜 가장의 임무에 실패했나? 

선악과를 먹는 과정에서 남녀 차이가 말씀에 있었다 창 3:1-6. 

하와는 뱀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화했지만 창 3:1-5, 아담은 하와와 말씀 대화가 전혀 없었다. 그냥 덥석 먹었다.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이 부분이 범죄시 부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담이 오히려 하와와 말씀 대화를 더 해야 맞다. 왜냐면, 아담이 말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지키는 임무 수행 도구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창 2:16, 17.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행되도록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담 아니었나? 

하나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것들을 대적해야 하는 소명자가 아담 아니었나? 

그런데 아담은 스스로를 말씀으로 지키는데 실패했다. 

 

예를 들어, 선악과를 들고온 하와 앞에서 아담이 말씀을 선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하와자매! 어쩌려고 그래요?”

“왜요? 뱀과 대화 해 봤더니, 뱀 신학에 의하면, 이거 먹어도 안죽는대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내가 분명히 들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창세기 2장 17절에서 분명히 말씀 하셨다고요!”

 

아니, 하와가 뱀과 대화하기 전부터 이렇게 대화 했다면 어땠을까? 

“하와자매! 이 오빠 말 잘 들어야해요. 저거 보여요?”

“네? 저거 생명나무요?”

“아니, 그 옆에 있는거요.”

“아하! 그때 오빠가 말씀했던 먹으면 죽는다던 그 나무요?”

“그래요 그거! 내가 다시 말씀을 전할테니 잘 듣고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해요: ‘창세기 2장 17절…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어머! 무서워요 오빠! 꼭 안아줘요… 어헝… 기억할께요!”

 

 

실패 해놓고 왜 꼴사납게 남탓을 했나?

지켜야 할 도구는 말씀이었다. 

아담의 실패 이유는 말씀 부재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말씀에 집중했다면 그는 자신 뿐 아니라 하와도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말씀 부재는 어디서 온 걸까? 아담은 왜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말씀, 그것도 66권도 아닌, 한 구절을 소홀히 하게 되었을까? 

먼저, 다음 구절을 보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 창 3:8.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눈가리고 아웅했다. 범죄후 아담의 첫 일은 다름 아닌, “숨기”였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의 눈을 피해서 숨을 곳은 없다. 그럼에도 숨었다. 미련하기 짝이없다.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고, 말을 거셨다 창 3:8. 

그 모습을 성경은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아담에게 지키라고 맡겨주신 동산에 하나님이 함께 거니신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범죄 직전까지 하나님과 아담의 교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둘은 함께 “거니는” 관계였다. 그야 말로, “산책”이다. 함께 걷는 관계!

아담은 말씀을 주신 분과 함께 거닐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존재였다.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한, 말씀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반면, 하나님과 함께 거니는 것에서 멀어지면, 동시에 말씀으로 부터도 멀어질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지 아닌지가, 말씀 집중도를 결정한다.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오던 그날, 첫 시간에 만약 아담이 하나님과 거닐었다면? 그랬다면 사건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래도 선악과를 덥석 먹었을까? 

실패의 원인은 감춰져 있다. 하지만, 정황을 보면서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다. 아담은 말씀으로 부터 멀어진 상태였고, 하나님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이셨다. 이 둘 사이에 숨은 이야기는 하나 뿐이다.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멀다. 최소한 그날 사건 전에 아담은 하나님과 산책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임무에 대해 책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말이 된다. 

하나님의 사람, 가정의 대표자가 말씀과 멀리 있었다. 하나님은 그곳에 거니시는 분이셨다. 가장은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있지 않았고, 실패했다. 실패는 하나님으로 부터 더 멀어지게 했고, 가장은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온 시간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온 시간은 언제였을까? 아침? 점심? 아니면 저녁때? 잘 모르겠다. 성경에 안나온다. 

하지만, 정황상 우리가 한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아담은 그날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거닐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다. 만약,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오기 전에,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하와가 뱀과 대화하기 전에, 아니 그날 부부가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랬다면? 

실패든 성공이든, 임무는 아담의 것이고, 책임도 그에게 있다. 

 

 

가장의 소명을 새벽에 완수하라. 

아담처럼 나도 가장이다. 이 임무를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도 하와와 같은 돕는 배필을 주셨다. 그녀는 내 책임이다. 내 임무는 가정을 말씀으로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뻔하다. 하루의 시작 전이다. 아직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다. 내가 잠들어있을 때 그녀를 지어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한다 창 2:21-23. 이제는 내가 깨어 가정을 지켜야 할 때다.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하나님과 거닐어야 한다. 가장의 임무를, 말씀 도구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과정을 통해 수행해야 한다. 

 

 

 

 

 

끈질기도록 기도가 잘 안될 때가 

있다. 

그것은 결코 

기도를 그만하라는 싸인이 아니다. 

오히려 

"아! 나는 기도가 잘 안되는구나!"를 알아차리게 된

훌륭한 깨달음의 시간이다.

이제 "기도 못함"을 발견했으니 

잘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지식이었다. 

기도와 먼 존재임을 깨달았다면,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다. 

 

 

 

 

 

 

 

 

o.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자.

r. 그러면 문제를 뛰어넘는 믿음의 찬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 속에 숨어지낼 때, 죽을 위기에서 새벽에 기도했다. 

O. 위기와 문제 앞에서 더욱 새벽에 다윗처럼 기도하자.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6-8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 

창 18:19

 

 

 

 

 

 

 

나는 “가장”이다. 아내와 두 딸을 돌봐야 하는 신적 임무가 내게 있다. 아내와 자녀는 가장의 책임이다 엡 5:25-29.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임무가 있다. 그것은 아내와 두 딸을 돌보는 일이다. 

나는 이 3인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선 “가장”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직분이 있다. 그것은 “가장”이다. 3인의 영혼들, 아내와 두 딸이 내 책임이다. 이 세명을 위해 영적 제사장이자, 예수님을 나타내는 모범으로 살아야 할 임무가 내게 있다. 

 

 

 

 

새벽기도와 부부관계

벧전 3:7 

남편들아….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나는 중년 남자다. 이 책을 쓰는 현재, 한국에서 인구 통계학적으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중년 남성이 그렇듯, 내게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 가장 가까이는 아내와 두 딸이 내 책임이다. 물심양면 나는 이들의 부양자며, 영적으로는 이들의 목양자다. 그리고 예배 인도자다.  

책임은 임무에서 오고, 임무는 소명에서,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온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남자”다. 이 소명은 창조로 부터 시작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남자)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5

 

아담의 임무가 예수 안에서 내게도 주어졌다 고전 15:22. 

 

 


지난 6년간 집중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일이다. 

이것은 내게 엄격한 순종을 요구한다. 왜냐면 새벽 기도에 실패하면, 기도 없는 하루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을 나는 그렇게 보내봤다. 그래서 기도 없는 하루의 무서움을 잘 안다. 

기도 없는 일과는 어떤 실패를 내게 가져올지 모른다. 그래서 무섭다. 

예를 들어, 한번은 리더십에게 크게 화를 냈다. 중요한 회의중이었는데, 내가 모두 망쳐버렸다. 나중에 각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긴 했지만, 한번 만들어진 마음의 상처들은 수년째 회복이 안된다. 

 

한번은 교회 개척 사역중이었는데, 너무 바빴고, 기도 없는 하루하루를 2달이나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후회될 일을 하나 저질렀다. 리더십에게 크게 화를 냈다. 전조는 그 일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지속되었다. 

 

어느날 부터인가 계속 화가 났다. 운전하다가도, 대화 하다가도, 심지어 예배 중에도 분노가 일었다. 모두 사소한 일들이었는데 감정 통제가 잘 되지 않았다. 거리의 차들이 나를 부당히 공격하는 것 같았고,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는 귀에 거슬리는 말들 투성이었다. 예배시간조차 청소상태, 음향 오류, 자막 오타까지 모든 사소한 것들이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 리더십에게 실수를 했다. 중요한 회의중 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호되게 지적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에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댔다. 말로 분노를 다 표출한 직후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씩씩대며 뒤로 문을 쾅 닫고 나왔다. 그런데 말씀이 바로 떠올랐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3)

 

말씀 기준에 나는 목회자로 적합하지 않았다. 분노는 자책이 되었다. 

‘내가 요즘 왜 이럴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책하며 방황했다. 두 시간은 걸었다. 자책이 사탄에게 틈을 내 주었다. 

‘각자 예수께 헌신해서 모인 사람들이야. 네가 뭔데 그렇게 화를 낼 수 있어? 네가 그러고도 교회 리더십이야?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것이 네 신상에 좋을 껄?’

사탄의 참소에 귀를 기울이며 후회 가득한 마음으로 그날이 지났다. 

그리고 새벽 3시 47분이 되었다. 악몽을 꾸다 깼고, 나는 침대 위에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베드로전서 말씀이 머릿속에 천둥처럼 울려댔다. 그대로 두시간을 끙끙대며 후회했다. 아니, 기도했다. 

침실 옆 창가로 아침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까지 했다. 후회 대신 기도가 자리하자, 자책도 회개로 바뀌었다. 이전에 암송하고 있던 요절들이 연달아 마음에 떠올랐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7)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사 54:4)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

 

 

요절들이 곧 기도 음성이 되었다. 내 입을 떠난 말씀들이 다시 내 귀로 들어와 마음에 자리잡았다. 하나님께서 기도중 일하셨다. 자책과 후회, 그리고 사탄의 참소가 소멸되었다. 오랜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마음이 위로 부터 임했다. 평강과 사랑과 새 힘이 내게 왔다. 단 몇시간 만에 내 마음이 새것이 된 것 같았다. 그로부터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약 한달간 리더십을 한사람씩 찾아가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교회 개척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맡기신 일이다. 그것은 기도로 진행할 때에야 옳고, 질서가 있다. 지난 12년간 계속 경험하고 있다. 내가 많이 실패해봤다. 지금도 계속 실패중이다. 그 중심에는 기도 여부가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명 순종은 어그러진다.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실패할지 모른다. 사명자가 아니라 사탄의 참소거리들을 만드는 앞잡이로 전락한다. 기도 없는 소명은 땀흘려봤자다. 그 열매들은 후회와 자책에 불과하다.

실패한 후에야 등떠밀려 기도하는 일을 반복해봤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깨워 주셔서 일어난 그날 이후 나는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 때가 새벽 3시 47분이었고, 그로부터 6년간 나는 순종 중이다. 

 

 

 

 

 

 

그간 부흥의 원동력이었던 새벽기도 - 예수 새벽 기도 모범 - 그런걸 벗어나서, 고요히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

새벽 이른 시간 12-1시. 

홀로 고요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시간. 

 

정말 물리적으로 5-6시 아닐수도? 2-3시일수도? 밤 4경. 핵심: 사람들이 다니지 않을 때… 

 

중년 남성 새벽기도. 

중년 남자들의 문제만 한참 파고 있다. 

김영하 작가의 관점 -  이 책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의 관점. 

쓰다보니, 중년남자 문제가 더 크게 보였다. 

왜 이런 마음일까?

 

중년 남성의 문제들 다양한 각도로 분석… 이렇게 문제가 많이 있는데… 기도 안하고 어떻게? 

우리 문제를 직면하지 못해서 기도 못했던거 아니냐?

바빠서 직면 못했던 것은 아니냐? 

그런데 제목은 기도 책. 

“그래서 기도할 수 밖에 없지않냐…”

 

프롤. 기도가 안될땐 새벽을 깨우라.

기도가 잘 안될 때가 있다. 

그것은 결코 

기도를 그만하라는 싸인이 아니다. 

오히려 "아! 나는 기도가 잘 안되는구나!"를 알아차리게 된훌륭한 깨달음의 시간이다.

이제 "기도 못함"을 발견했으니 잘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지식이었다. 

기도와 먼 존재임을 깨달았다면,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다. 

 

 

 

 

 

프롤. 가장의 소명을 새벽에 완수하라. 

 

지키게 하시고

창 2:15. 

 

가장의 임무

가장의 임무는 아내를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정 창조 디자인에 들어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처음부터 큰 책임을 맡기셨다. 그것은 지키는 임무인데, 대상이 광범위하다. 무려 에덴동산 전부다. 

이것은 단순히 부동산 지키라는 임무가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상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는” 책임이다 창 2:15. 

지키는 것이 “가장家長”의 소명이었고, 이것은 하와가 아닌 아담에게 주어졌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를 보면 더 분명하다. 

그때 하나님은 “하와야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으셨다. 그 대신 “아담”을 찾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아담에게 먼저 물으셨다. 그 이유는 에덴 뿐 아니라, 하와도 아담 책임이기 때문이다 창 2:18.

하나님은 하와를 “돕는 배필”로 예정하시고, 지으시고, 이끌어오셨다 창 2:18, 22. 

그리고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이 되었다 창 2:18-25. 

아담과 하와는 둘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가정이다. 둘이 한몸을 이룬 부부가 성경 최초의 공동체가 되었다. 그 대표자는 아담이고, 그는 다름 아닌 “가장”이다. 

아담과 하와 가정 구성원은 둘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다. “둘이 한몸” 공동체다. 여기서 대표가 아담이다. 

하나님은 대표자에게 죄책을 물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대표가 책임자다. 

아담은 “둘이 한몸 공동체”를 지키는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보다 먼저 받았다 창 2:16, 17. 

가장의 임무가 하와를 만나기 전에 주어진 것이다. 

심지어 하와 뿐 아니라, 온 인류,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책임을 받았다. 

그러나 최초의 가장은 임무에 실패했고, 책임도 회피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실패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표답게 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꼴사납다. 자기가 지켜야 했을 대상에게 책임 전가하는 모습 어디에도 대표성은 없다. 가장이 대표성을 상실하는 순간이다. 

순순히 자기 책임을 인정하기는 커녕, 하와탓을 하는 그는 가장 답지 않다. 

여기서 두가지 질문을 해보자. 

(1) 아담은 왜 가장의 임무에 실패했나? 

(2) 실패 해놓고 왜 꼴사납게 남탓을 했나? 

 

 

왜 가장의 임무에 실패했나? 

선악과를 먹는 과정에서 남녀 차이가 말씀에 있었다 창 3:1-6. 

하와는 뱀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화했지만 창 3:1-5, 아담은 하와와 말씀 대화가 전혀 없었다. 그냥 덥석 먹었다.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이 부분이 범죄시 부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담이 오히려 하와와 말씀 대화를 더 해야 맞다. 왜냐면, 아담이 말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지키는 임무 수행 도구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창 2:16, 17.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행되도록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담 아니었나? 

하나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것들을 대적해야 하는 소명자가 아담 아니었나? 

그런데 아담은 스스로를 말씀으로 지키는데 실패했다. 

 

예를 들어, 선악과를 들고온 하와 앞에서 아담이 말씀을 선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하와자매! 어쩌려고 그래요?”

“왜요? 뱀과 대화 해 봤더니, 뱀 신학에 의하면, 이거 먹어도 안죽는대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내가 분명히 들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창세기 2장 17절에서 분명히 말씀 하셨다고요!”

 

아니, 하와가 뱀과 대화하기 전부터 이렇게 대화 했다면 어땠을까? 

“하와자매! 이 오빠 말 잘 들어야해요. 저거 보여요?”

“네? 저거 생명나무요?”

“아니, 그 옆에 있는거요.”

“아하! 그때 오빠가 말씀했던 먹으면 죽는다던 그 나무요?”

“그래요 그거! 내가 다시 말씀을 전할테니 잘 듣고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해요: ‘창세기 2장 17절…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어머! 무서워요 오빠! 꼭 안아줘요… 어헝… 기억할께요!”

 

 

실패 해놓고 왜 꼴사납게 남탓을 했나?

지켜야 할 도구는 말씀이었다. 

아담의 실패 이유는 말씀 부재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말씀에 집중했다면 그는 자신 뿐 아니라 하와도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말씀 부재는 어디서 온 걸까? 아담은 왜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말씀, 그것도 66권도 아닌, 한 구절을 소홀히 하게 되었을까? 

먼저, 다음 구절을 보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 창 3:8.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눈가리고 아웅했다. 범죄후 아담의 첫 일은 다름 아닌, “숨기”였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의 눈을 피해서 숨을 곳은 없다. 그럼에도 숨었다. 미련하기 짝이없다.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고, 말을 거셨다 창 3:8. 

그 모습을 성경은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아담에게 지키라고 맡겨주신 동산에 하나님이 함께 거니신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범죄 직전까지 하나님과 아담의 교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둘은 함께 “거니는” 관계였다. 그야 말로, “산책”이다. 함께 걷는 관계!

아담은 말씀을 주신 분과 함께 거닐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존재였다.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한, 말씀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반면, 하나님과 함께 거니는 것에서 멀어지면, 동시에 말씀으로 부터도 멀어질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지 아닌지가, 말씀 집중도를 결정한다.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오던 그날, 첫 시간에 만약 아담이 하나님과 거닐었다면? 그랬다면 사건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래도 선악과를 덥석 먹었을까? 

실패의 원인은 감춰져 있다. 하지만, 정황을 보면서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다. 아담은 말씀으로 부터 멀어진 상태였고, 하나님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이셨다. 이 둘 사이에 숨은 이야기는 하나 뿐이다.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멀다. 최소한 그날 사건 전에 아담은 하나님과 산책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임무에 대해 책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말이 된다. 

하나님의 사람, 가정의 대표자가 말씀과 멀리 있었다. 하나님은 그곳에 거니시는 분이셨다. 가장은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있지 않았고, 실패했다. 실패는 하나님으로 부터 더 멀어지게 했고, 가장은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온 시간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온 시간은 언제였을까? 아침? 점심? 아니면 저녁때? 잘 모르겠다. 성경에 안나온다. 

하지만, 정황상 우리가 한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아담은 그날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거닐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다. 만약,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오기 전에,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하와가 뱀과 대화하기 전에, 아니 그날 부부가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랬다면? 

실패든 성공이든, 임무는 아담의 것이고, 책임도 그에게 있다. 

 

 

가장의 소명을 새벽에 완수하라. 

아담처럼 나도 가장이다. 이 임무를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도 하와와 같은 돕는 배필을 주셨다. 그녀는 내 책임이다. 내 임무는 가정을 말씀으로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뻔하다. 하루의 시작 전이다. 아직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다. 내가 잠들어있을 때 그녀를 지어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한다 창 2:21-23. 이제는 내가 깨어 가정을 지켜야 할 때다.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하나님과 거닐어야 한다. 가장의 임무를, 말씀 도구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과정을 통해 수행해야 한다. 

 

 

 

 

 

 

 

 

 

 

 

 

o.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자.

r. 그러면 문제를 뛰어넘는 믿음의 찬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 속에 숨어지낼 때, 죽을 위기에서 새벽에 기도했다. 

O. 위기와 문제 앞에서 더욱 새벽에 다윗처럼 기도하자.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6-8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 

창 18:19

 

 

 

 

 

 

 

나는 “가장”이다. 아내와 두 딸을 돌봐야 하는 신적 임무가 내게 있다. 아내와 자녀는 가장의 책임이다 엡 5:25-29.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임무가 있다. 그것은 아내와 두 딸을 돌보는 일이다. 

나는 이 3인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선 “가장”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직분이 있다. 그것은 “가장”이다. 3인의 영혼들, 아내와 두 딸이 내 책임이다. 이 세명을 위해 영적 제사장이자, 예수님을 나타내는 모범으로 살아야 할 임무가 내게 있다. 

 

 

 

 

새벽기도와 부부관계

벧전 3:7 

남편들아….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나는 중년 남자다. 이 책을 쓰는 현재, 한국에서 인구 통계학적으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중년 남성이 그렇듯, 내게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 가장 가까이는 아내와 두 딸이 내 책임이다. 물심양면 나는 이들의 부양자며, 영적으로는 이들의 목양자다. 그리고 예배 인도자다.  

책임은 임무에서 오고, 임무는 소명에서,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온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남자”다. 이 소명은 창조로 부터 시작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남자)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5

 

아담의 임무가 예수 안에서 내게도 주어졌다 고전 15:22. 

 

 


지난 6년간 집중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일이다. 

이것은 내게 엄격한 순종을 요구한다. 왜냐면 새벽 기도에 실패하면, 기도 없는 하루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을 나는 그렇게 보내봤다. 그래서 기도 없는 하루의 무서움을 잘 안다. 

기도 없는 일과는 어떤 실패를 내게 가져올지 모른다. 그래서 무섭다. 

예를 들어, 한번은 리더십에게 크게 화를 냈다. 중요한 회의중이었는데, 내가 모두 망쳐버렸다. 나중에 각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긴 했지만, 한번 만들어진 마음의 상처들은 수년째 회복이 안된다. 

 

한번은 교회 개척 사역중이었는데, 너무 바빴고, 기도 없는 하루하루를 2달이나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후회될 일을 하나 저질렀다. 리더십에게 크게 화를 냈다. 전조는 그 일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지속되었다. 

 

어느날 부터인가 계속 화가 났다. 운전하다가도, 대화 하다가도, 심지어 예배 중에도 분노가 일었다. 모두 사소한 일들이었는데 감정 통제가 잘 되지 않았다. 거리의 차들이 나를 부당히 공격하는 것 같았고, 매일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는 귀에 거슬리는 말들 투성이었다. 예배시간조차 청소상태, 음향 오류, 자막 오타까지 모든 사소한 것들이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 리더십에게 실수를 했다. 중요한 회의중 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호되게 지적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에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댔다. 말로 분노를 다 표출한 직후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씩씩대며 뒤로 문을 쾅 닫고 나왔다. 그런데 말씀이 바로 떠올랐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3)

 

말씀 기준에 나는 목회자로 적합하지 않았다. 분노는 자책이 되었다. 

‘내가 요즘 왜 이럴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책하며 방황했다. 두 시간은 걸었다. 자책이 사탄에게 틈을 내 주었다. 

‘각자 예수께 헌신해서 모인 사람들이야. 네가 뭔데 그렇게 화를 낼 수 있어? 네가 그러고도 교회 리더십이야?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것이 네 신상에 좋을 껄?’

사탄의 참소에 귀를 기울이며 후회 가득한 마음으로 그날이 지났다. 

그리고 새벽 3시 47분이 되었다. 악몽을 꾸다 깼고, 나는 침대 위에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베드로전서 말씀이 머릿속에 천둥처럼 울려댔다. 그대로 두시간을 끙끙대며 후회했다. 아니, 기도했다. 

침실 옆 창가로 아침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까지 했다. 후회 대신 기도가 자리하자, 자책도 회개로 바뀌었다. 이전에 암송하고 있던 요절들이 연달아 마음에 떠올랐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7)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사 54:4)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

 

 

요절들이 곧 기도 음성이 되었다. 내 입을 떠난 말씀들이 다시 내 귀로 들어와 마음에 자리잡았다. 하나님께서 기도중 일하셨다. 자책과 후회, 그리고 사탄의 참소가 소멸되었다. 오랜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마음이 위로 부터 임했다. 평강과 사랑과 새 힘이 내게 왔다. 단 몇시간 만에 내 마음이 새것이 된 것 같았다. 그로부터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약 한달간 리더십을 한사람씩 찾아가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교회 개척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맡기신 일이다. 그것은 기도로 진행할 때에야 옳고, 질서가 있다. 지난 12년간 계속 경험하고 있다. 내가 많이 실패해봤다. 지금도 계속 실패중이다. 그 중심에는 기도 여부가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명 순종은 어그러진다.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실패할지 모른다. 사명자가 아니라 사탄의 참소거리들을 만드는 앞잡이로 전락한다. 기도 없는 소명은 땀흘려봤자다. 그 열매들은 후회와 자책에 불과하다.

실패한 후에야 등떠밀려 기도하는 일을 반복해봤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깨워 주셔서 일어난 그날 이후 나는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 때가 새벽 3시 47분이었고, 그로부터 6년간 나는 순종 중이다. 

 

 

 

 

 

 

그간 부흥의 원동력이었던 새벽기도 - 예수 새벽 기도 모범 - 그런걸 벗어나서, 고요히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

새벽 이른 시간 12-1시. 

홀로 고요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시간. 

 

정말 물리적으로 5-6시 아닐수도? 2-3시일수도? 밤 4경. 핵심: 사람들이 다니지 않을 때… 

 

중년 남성 새벽기도. 

중년 남자들의 문제만 한참 파고 있다. 

김영하 작가의 관점 -  이 책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의 관점. 

쓰다보니, 중년남자 문제가 더 크게 보였다. 

왜 이런 마음일까?

 

중년 남성의 문제들 다양한 각도로 분석… 이렇게 문제가 많이 있는데… 기도 안하고 어떻게? 

우리 문제를 직면하지 못해서 기도 못했던거 아니냐?

바빠서 직면 못했던 것은 아니냐? 

그런데 제목은 기도 책. 

“그래서 기도할 수 밖에 없지않냐…”

 

 

 

 

 

 

 

 

 

O. 기도에 가장 좋은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바로 새벽이다. 
R. 새벽은 고요하다. 하나님께 집중하는데 방해가 거의 없다. 

새벽은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기에 가장 좋다. 
우선 몸이 다르다. 밤새 전날의 감정이 정리 되고, 뇌는 새로워진다. 
또한 영적 상태도 다르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목마름이 가장 큰 시간이다. 

다윗의 새벽찬양을 보라. 
도망자로 지내며 문제를 이기는 기도뿐 아니라, 상황을 초월한 찬양을 하나님께 새벽에 올렸다. 

새벽은 선과 악의 격전지며, 승리와 패배의 중간지대다. 성경에 나오는 영적 전쟁들이 주로 새벽에 진행된 것만 봐도 그렇다. 애굽의 정예군을 뒤로하고 갈라진 홍해 길은 새벽에 열렸다 출 14:20-22. 
또한 아직 하루의 일들이 시작되기 전이다. 출정 준비


E
O



기도에 가장 좋은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바로 새벽이다. 새벽은 고요하다. 


새벽은 고요하다. 하나님께 집중하는데 방해가 없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데는다. 책 속의 말씀 문자들 위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신다. 마치 태초같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키우던 개가 죽어 텃밭에 묻었다. 흙 덮은 자리가 허전해 보여, 꽃모종 한그루 얻어다 심었다. 

아침 저녁으로 지켜봤다.

출근길도 퇴근길도 나를 반기긴 마찬가지였는데, 빈 가지만 있어서 허전했다. 

그러다 일년이 지나자 꽃이 많았다. 

처음엔 가지만 앙상하던 녀석이 해가 지나고서야 화사했다. 

말씀이 떠올랐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개도 꽃도 함께 묻혔는데 지금은 꽃만 남아있는 자리. 그러고 보니 예수도 나도 함께 죽었는데, 지금은 예수만 남아 있을까 갈 2:20. 나 죽은 자리에 예수 꽃만 화사할까. 아니면, 죽어서도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며 썩은 내 진동할까. 

죽지 않겠다고 몸부림 치며 진창을 기는 벌레.

나의 죽음과 예수의 생명이 교차되어야 할텐데 

 

노란 국화였다. 내 눈엔 개꽃이었다. 

 

어제까지 해 온 일들의 합이 오늘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현재를 바꾸는 것은 미래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나의 경우, 홍대를 시작으로 전도와 제자화 사역이 12년째다. 그 사이 청년들은 장년이, 나는 중년이 되었다. 앞으로 10년은 이들과 함께 노인 사역을 준비해야 한다. 


노인들의 시대가 온다. 
곧 노인들의 시대가 된다. 이것은 팩트다. 현재의 인구 통계가 보여주는 내용이다. 2035년을 기점으로 65세 이상이 중년과 청년 인구 수의 합 보다 더 많아지게 된다. (출처: 통계청.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BPA002&vw_cd=MT_ZTITLE&list_id=&scrId=&seqNo=&lang_mode=ko&obj_var_id=&itm_id=&conn_path=E1&docId=02795&markType=S&itmNm=%EC%A0%84%EA%B5%AD)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마 16:26. 하물며, 최다 인구계층이 될 특정 연령층을 무시하고 어떻게 사역하겠는가? 
곧 노인들의 시대가 온다는 것은 선교적 교회개척자인 내게 도전장과 같다. 
노인을 타겟으로 하는 전도와 제자훈련을 준비해야 한다. 

아마도 10년 이내로 곳곳에서 노년타겟 사역들이 진행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뿐이다.

나는 노인을 모른다. 이것은 마치 일본 선교사가 일본어를 모르는 꼴이다. 
선교적 교회 개척자에게 언어는 복음 전달 수단이다. 내게는 노인 언어 준비가 필요하다. 노인 문화와 필요, 혹은 그 특징을 알고 익혀야 한다. 배워야 한다. 

나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사역의 지경이 넓어질수록 일은 늘어났다. 요즘 하루하루가 인생의 그 어느 때 보다 더 바쁜것 같다. 매일이 흡사 전쟁터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미 미룬 일들이 산더미인데, 새로운 미팅 약속들과 사역 요구들이 새롭게 몰려든다. 배움을 위해 따로 낼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 준비 없이 지낼 수도 없다. 
시간관리에 대해 대학생때 CCC(한국대학생선교회) 간사님들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순장(예비 선교사)은 시간을 양으로 쓰지 않고, 시간을 질로 바꿔 써야 한다!”
그때 배운 선교사 시간관리의 핵심은 3가지였다. (1) 우선순위를 정하고, (2) 선택과 집중의 전문가가 되며, (3) 일과 시간을 경영해야 한다는 내용의 가르침이었다. 

그에 따르자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뻔하다. 사역은 하나님께서 시킨 것이니 가장 먼저 나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 우선순위다. 
그 다음, 현재 진행 중인 일들을 모두 해서는 안된다. 노인 사역을 준비하는 것과 연결되는 일을 선택해서 집중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다음 그림과 같이, 현재와 미래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활동해야 한다.


현재 진행중인 제자 모임의 연령대는 중년층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분들은 5~10년 이내로 노년이 되신다. 만약 이분들이 그 사이 제자화 요원이 된다면? 그 누구보다 성육신적 사역자로 전도및 제자모임 인도를 잘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노년 방향성으로 중년 타겟을 유지하는 것이 맞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한 것이 옳다. 

중년 아저씨들의 고민
과거가 만든 오늘이다. 오늘들이 모여 또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다. 이것은 국가 인구 통계 뿐 아니라, 내 소명 현장에서도 진실이다. 
현재 인구 통계상으로 장/중년 인구 수가 가장 많다. 내가 참여중인 제자 모임들도 그렇다. 내가 아저씨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자모임마다 중년 아저씨들이 대세다. 
거기서 함께 대화하며 성경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다보면, 그들의 고민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공통점은 “은퇴 이후에 대한 염려”다. 
예를 들어 직장인 신우회 모임 중 아저씨 한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 노년 준비는 커녕, 자식 등록금도 없는데, 어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요양병원을 알아보고 있는데, 엄두가 안나요.  빚내야 할 처지예요.”

OO 전문가 OOO에 의하면, 현재 중년 아저씨들의 고민은 “6중고”로 요약된다 (출처). 
(1) 시대가 급변하고, 일에서 뒤처지니, 가족 봉양이 만만치 않다. 
(2)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데, 부모님도 모셔야 한다. 
(3) 더 큰 문제는 내 노년이다. 최다 사망 연령까지만 살아도, 나는 퇴직후 20~30년은 더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4) 이런 상황에서 고민중인 가장의 마음을 가족들이 몰라준다. 그래서 외롭다. 
(5) 교회에서는 청년과 주일학교 사역에 집중하느라 중년의 고민은 뒷전이다. 그래서 더 외롭다. 
(6) 문화가 너무 다르다. 바쁘게 일하느라 직장인들을 제외하고는 친구가 없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나는 꼰대일 뿐, 소통할 수 없다. 

사역 현장에서 내가 만난 중년 남성들은 모두 흔들리는 갈대들 같았다. 그들을 볼 때 마다 내 가슴에 복음의 불이 붙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내게 가장 가난하고, 연약하고, 갈급한 심령들이다. 그들이 나의 선교지다.
게다가 이들의 6중고는 몇년 안에 노년층의 고민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고
사역 현장의 고민을 품고 성경을 펼친다. 사도행전 6장이 눈에 띈다. 
첫 교회, 예루살렘 교회에 돈 문제가 생긴다. 이때 “구제 사역 경영”의 필요가 나타난다. 교회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집사들을 선출한다 행 6:1-6. 
궁금하다. 왜 사도들이 직접 이 일을 해결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은가. 처음 교회의 리더십은 사도들이었고, 돈 문제 역시 그들이 직접 해결하면 될 일 아닌가. 그럼에도 돈 문제 전담 리더십을 따로 뽑은 이유가 뭘까?  
왜 그래야 했는지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행 6:4.

그렇다. 돈 관리와 구제 사역 그 자체는 사도들의 업무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일은 “기도와 말씀”이었다. 사도들은 사명에 충실해야 했다. 
교회 리더십은 모든 일을 다 하지 않기로 한다. 그대신 기도와 말씀을 선택해 집중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교회 전체가 기도와 말씀 사역만 한 것도 아니었다. 교회는 구제를 잃지 않았다. 교회는 복음 전파와 함께 육적 필요를 채우는 일도 잃지 않았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니 예수님의 전통을 따른다. 예수님은 기도만 하시거나 말씀만 전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가난하고 배고프고 아픈 자들을 치료하고 먹이고 양육하셨다. 예수님의 삼중 사역인, “치유, 설교, 가르침”은 초대교회를 거쳐 교회와 선교의 전통이 되었다. 
(치유와 설교와 가르침의 삼중 사역은 20세기 선교의 방법론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를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사역”이라 불렀다. 혹은 “빵과 복음을 동시에 나누어 주는 선교”라고도 했다) (출처 - 국민일보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95191) 
선교적 교회 개척자라면, 복음 전파와 가르침뿐 아니라, 현재의 중년을 6중고로 부터 구제하는 문제를 함께 다뤄야 할 것이다. 

필요를 채우는 삼중사역의 출발점
미래가 보인다. 우리는 노인사역의 필요성을 곧 피부로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구 통계가 예측하는 노인층의 숫자는 곧 현실화 될 것이다. 그들은 현재 중년층을 이루고 있다. 반복된 과거가 오늘을 결정했듯, 오늘이 쌓여 미래가 된다. 현재 중년들의 6중고는 몇년 뒤 노인문제의 근원이 된다. 
만약 이 예측을 가지고 현재를 바꿔준다면, 그러니까 중년 6중고 구제 사역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나는 예측과 다른 미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6장에 근거해, 진정한 변화를 위해 오늘 내가 집중해야 할 일은 기도와 말씀이다. 나는 교회 공동체의 그 누구보다 앞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관련된 말씀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른 구제 사역자들을 따로 세워 주실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미래의 노년층이 될, 현재의 중년 6중고를 다룰 제자화 사역자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의 필요를 예측하되, 현재의 제자 모임 진행을 위해 나는 기도와 말씀에 전무한 리더십이 되어야한다. 문제가 피부로 와 닿기 까지, 현재 중년층을 기도와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문제 해결안은 기도와 말씀에 있다. 
삼중사역을 위해 처음 했던 생각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내게 시대상을 읽는 창업자의 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중년 아저씨들을 위한 창업 모임이라도 인도해줄 수 있을텐데. 아니면, 내게 많은 자본이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그들을 위한 펀드 기관이라도 세울 텐데……”
그러나 이를 위해 기도하던 중, 사도행전 6장을 통해 방법을 찾았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핵심 리더십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나 미래의 구제사역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붙들고, 중년의 6중고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하실 것이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아저씨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분들에게 강조해야 할 부분은 인구통계가 아니다. 기도와 말씀이다. 기도 훈련과 말씀 훈련으로 5~10년 준비된 영성이다. 그때에 노년 사역의 길도 열릴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들이 하나님의 방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소망이다. 현재의 중년 6중고에 이어 터져나오게 될, 미래 노년 문제들의 구제책은 가까이 있다. 오늘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된 사람들이 그들이 될 것이다. 

중년은 누구보다 바쁘다.
6중고를 겪는 중년들에겐 시간이 없다. 바쁘다. 그들은 일주일 내 짜투리 시간조차 없다.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대고 있다. 일터에서는 기술 변화를 따라잡느라 더 일하고 또 공부한다. 일이 끝나면 노년을 대비해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기술들을 익힌다. 집에 가면, 남녀 평등의 시대에 걸맞게 가사를 돕는다. 
부족한것은 시간뿐이 아니다. 사명감도 희미하다. 그들은 순간 순간 위기의 벼랑끝에서 일하는 감정으로 수십년씩 일해왔다. 그 과정이 중년의 뇌력을 떨어뜨렸다. 마치 환경이 이끄는대로 움직이는 곤충뇌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잔다. 가끔씩 염려가 밀려오지만, 생각은 커녕, 아플 여유도 없다. 대부분의 중년 남자들에게 유일한 낙이라고는 퇴근길 찬맥주 한잔 정도가 다다. 
시간도 사명감도 부족한 이들이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겠는가? 또 나는 이들을 어떻게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도록 돕겠는가? 

새벽 순종에 대하여
시간과 사명감 부족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새벽기도다. 
대부분의 중년들에게 추가로 낼 수 있는 시간은 새벽 뿐이다. 그리고 사명감을 회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출근 이후로 퇴근까지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퇴근 후에 잠시 주어지는 시간은 자기계발과 가족 돌봄이 기다리고 있다. 늦은 밤 시간은 더이상의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결국 새벽이다. 새벽 말고는 시간을 따로 낼 수 없다. 
또한 사명감은 기도로 회복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후, 누구나 사명자다. 예수의 영, 성령님의 임재가 있는 모두가 사명자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신앙이다 롬 6:1-11.  

성도의 영적 호흡은 기도에 있다. 
어떤 일이든 시간을 내야 할 수 있다. 
일단 물리적으로 

대부분의 중년들에게 유일한 시간은 해뜨기 전 새벽 뿐이다. 사명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기도 뿐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이 책을 쓰는 동안 내 노트북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들은 중년의 아저씨들이다. 그들은 직장인이고 가장인데, 아래로는 자식봉양, 위로는 부모 봉양의 짐을 진 사람들이다. 그 무게를 견디며 하루하루 일하면서도, 정작 마음은 자신의 은퇴 대비에 가 있는 이들이다. 
이 책은 그들을 위한 책이다. 
6중고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답이 기도와 말씀에 있다. 
함께 한장씩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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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란 깨어있는 행위다 눅 21:36. 

새벽 어스름에 눈 떠본 일이 있는가? 

예수님은 빛이시다. 
우리는 어둠이다.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 
어둠은 빛을 싫어했다. 
이유는 어둠이 파괴되니까. 

깨는 행위는 어둠을 파괴하는 행위다. 
기도는 빛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새벽은 순종의 시간이다. 
순종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듯 자기 뜻을 죽여야 시작된다 잠 25:4. 
죽고 남은 내 시체를 밑거름  눅 22:42. 


 죽이고 하나님의 원대로 
 죽여 없앤  나를 댗체하고 새로 태어나는 천국 생명이다. 
순종은 해산 만큼이나 홀로 드려야 하는 거룩한 일이다. 

순도 높은 


새벽이 오면 어둠이 떠난다. 
어둠은 빛을 모른다
어둠은 빛을 모르고, 죄인은 변화를 싫어한다 요 1:5. 

죄인은 죄의 상태에 머무는 것 외의 다른 상태를 알지 못한다. 

예외는 없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롬 3:10.
죄인은 하나님이 안내하시는 변화를 두려워 한다. 이는 빛 앞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연결되어있다. 
새벽도 그렇다. 
새벽은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시간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새벽은 선과 악이 역전되고, 성과 속이 뒤집히는 순간이다. 밤이 물러가며 낮이 드러나듯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날이 
몸과 뇌도, 혼과 영도 

죄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를 거부한다. 하던대로 하기가 말씀대로 하기보다 어렵다. 살던대로 살기가 예수따라 살기보다 어렵다. 말씀은 빛이다 요 1:1-4. 말씀이 들어오면 어둠은 변화를 요구받는다.
매일 똑같이 살면서 빛의 요구대로 살기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어떤 변화로 당신을 이끄시는지 보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그분을 진지하게 
만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무기를 점검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타이어에 바람을 넣지 않거나연료통에 기름을넣지 않고여행을떠나는것과같 다 (존 파이퍼, 말씀으로 승리하라, 58)






Q. 인간 창조 목적은 무엇인가요? 
A.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7).
A.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A.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롬 9:5).
A.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Q. 기도란 무엇인가요? 
A. 기도란 자신의 목적을 하나님을 통해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담아 낼 만한 순종의 사람으로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막 1:38-39











Chapter1. 가장의 소명을 새벽에 완수하라. 
지키게 하시고
창 2:15. 


가장의 임무
가장의 임무는 아내를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정 창조 디자인에 들어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처음부터 큰 책임을 맡기셨다. 그것은 지키는 임무인데, 대상이 광범위하다. 무려 에덴동산 전부다. 이것은 단순히 부동산 지키라는 임무가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상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는” 책임이다 창 2:15. 
지키는 것이 “가장家長”의 소명이었고, 이것은 하와가 아닌 아담에게 주어졌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를 보면 더 분명하다. 
그때 하나님은 “하와야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으셨다. 그 대신 “아담”을 찾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아담에게 먼저 물으셨다. 그 이유는 에덴 뿐 아니라, 하와도 아담 책임이기 때문이다 창 2:18.
하나님은 하와를 “돕는 배필”로 예정하시고, 지으시고, 이끌어오셨다 창 2:18, 22. 
그리고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이 되었다 창 2:18-25. 
아담과 하와는 둘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가정이다. 둘이 한몸을 이룬 부부가 성경 최초의 공동체가 되었다. 그 대표자는 아담이고, 그는 다름 아닌 “가장”이다. 
아담과 하와 가정 구성원은 둘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다. “둘이 한몸” 공동체다. 여기서 대표가 아담이다. 
하나님은 대표자에게 죄책을 물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대표가 책임자다. 
아담은 “둘이 한몸 공동체”를 지키는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보다 먼저 받았다 창 2:16, 17. 
가장의 임무가 하와를 만나기 전에 주어진 것이다. 
심지어 하와 뿐 아니라, 온 인류,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책임을 받았다. 
그러나 최초의 가장은 임무에 실패했고, 책임도 회피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실패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표답게 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꼴사납다. 자기가 지켜야 했을 대상에게 책임 전가하는 모습 어디에도 대표성은 없다. 가장이 대표성을 상실하는 순간이다. 
순순히 자기 책임을 인정하기는 커녕, 하와탓을 하는 그는 가장 답지 않다. 
여기서 두가지 질문을 해보자. 
(1) 아담은 왜 가장의 임무에 실패했나? 
(2) 실패 해놓고 왜 꼴사납게 남탓을 했나? 



왜 가장의 임무에 실패했나? 
선악과를 먹는 과정에서 남녀 차이가 말씀에 있었다 창 3:1-6. 
하와는 뱀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화했지만 창 3:1-5, 아담은 하와와 말씀 대화가 전혀 없었다. 그냥 덥석 먹었다.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이 부분이 범죄시 부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담이 오히려 하와와 말씀 대화를 더 해야 맞다. 왜냐면, 아담이 말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지키는 임무 수행 도구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창 2:16, 17.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행되도록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담 아니었나? 
하나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것들을 대적해야 하는 소명자가 아담 아니었나? 
그런데 아담은 스스로를 말씀으로 지키는데 실패했다. 

예를 들어, 선악과를 들고온 하와 앞에서 아담이 말씀을 선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하와자매! 어쩌려고 그래요?”
“왜요? 뱀과 대화 해 봤더니, 뱀 신학에 의하면, 이거 먹어도 안죽는대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내가 분명히 들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창세기 2장 17절에서 분명히 말씀 하셨다고요!”

아니, 하와가 뱀과 대화하기 전부터 이렇게 대화 했다면 어땠을까? 
“하와자매! 이 오빠 말 잘 들어야해요. 저거 보여요?”
“네? 저거 생명나무요?”
“아니, 그 옆에 있는거요.”
“아하! 그때 오빠가 말씀했던 먹으면 죽는다던 그 나무요?”
“그래요 그거! 내가 다시 말씀을 전할테니 잘 듣고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해요: ‘창세기 2장 17절…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어머! 무서워요 오빠! 꼭 안아줘요… 어헝… 기억할께요!”


실패 해놓고 왜 꼴사납게 남탓을 했나?
지켜야 할 도구는 말씀이었다. 
아담의 실패 이유는 말씀 부재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말씀에 집중했다면 그는 자신 뿐 아니라 하와도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말씀 부재는 어디서 온 걸까? 아담은 왜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말씀, 그것도 66권도 아닌, 한 구절을 소홀히 하게 되었을까? 
먼저, 다음 구절을 보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 창 3:8.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눈가리고 아웅했다. 범죄후 아담의 첫 일은 다름 아닌, “숨기”였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의 눈을 피해서 숨을 곳은 없다. 그럼에도 숨었다. 미련하기 짝이없다.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고, 말을 거셨다 창 3:8. 
그 모습을 성경은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아담에게 지키라고 맡겨주신 동산에 하나님이 함께 거니신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범죄 직전까지 하나님과 아담의 교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둘은 함께 “거니는” 관계였다. 그야 말로, “산책”이다. 함께 걷는 관계!
아담은 말씀을 주신 분과 함께 거닐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존재였다.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한, 말씀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반면, 하나님과 함께 거니는 것에서 멀어지면, 동시에 말씀으로 부터도 멀어질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지 아닌지가, 말씀 집중도를 결정한다.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오던 그날, 첫 시간에 만약 아담이 하나님과 거닐었다면? 그랬다면 사건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래도 선악과를 덥석 먹었을까? 
실패의 원인은 감춰져 있다. 하지만, 정황을 보면서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다. 아담은 말씀으로 부터 멀어진 상태였고, 하나님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이셨다. 이 둘 사이에 숨은 이야기는 하나 뿐이다.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멀다. 최소한 그날 사건 전에 아담은 하나님과 산책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임무에 대해 책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 말이 된다. 
하나님의 사람, 가정의 대표자가 말씀과 멀리 있었다. 하나님은 그곳에 거니시는 분이셨다. 가장은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있지 않았고, 실패했다. 실패는 하나님으로 부터 더 멀어지게 했고, 가장은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온 시간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온 시간은 언제였을까? 아침? 점심? 아니면 저녁때? 잘 모르겠다. 성경에 안나온다. 
하지만, 정황상 우리가 한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아담은 그날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거닐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다. 만약, 하와가 선악과를 들고 오기 전에,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하와가 뱀과 대화하기 전에, 아니 그날 부부가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랬다면? 
실패든 성공이든, 임무는 아담의 것이고, 책임도 그에게 있다. 


가장의 소명을 새벽에 완수하라. 
아담처럼 나도 가장이다. 이 임무를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도 하와와 같은 돕는 배필을 주셨다. 그녀는 내 책임이다. 내 임무는 가정을 말씀으로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뻔하다. 하루의 시작 전이다. 아직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다. 내가 잠들어있을 때 그녀를 지어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한다 창 2:21-23. 이제는 내가 깨어 가정을 지켜야 할 때다.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하나님과 거닐어야 한다. 가장의 임무를, 말씀 도구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과정을 통해 수행해야 한다. 






























o.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자.
r. 그러면 문제를 뛰어넘는 믿음의 찬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 속에 숨어지낼 때, 죽을 위기에서 새벽에 기도했다. 
O. 위기와 문제 앞에서 더욱 새벽에 다윗처럼 기도하자.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6-8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 
창 18:19







나는 “가장”이다. 아내와 두 딸을 돌봐야 하는 신적 임무가 내게 있다. 아내와 자녀는 가장의 책임이다 엡 5:25-29.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임무가 있다. 그것은 아내와 두 딸을 돌보는 일이다. 
나는 이 3인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선 “가장”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직분이 있다. 그것은 “가장”이다. 3인의 영혼들, 아내와 두 딸이 내 책임이다. 이 세명을 위해 영적 제사장이자, 예수님을 나타내는 모범으로 살아야 할 임무가 내게 있다. 



새벽 기도의 성경적 근거

6장. 성경 속의 새벽 기도
(1) 예수님의 새벽 기도
(2) 다윗의 새벽 기도
(3) 다른 성경 인물들의 새벽 기도

-예수님의 새벽 기도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다윗의 새벽 기도
-시편 5편 3절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57편 8절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아브라함의 새벽 기도
창세기 19장 27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야곱의 새벽 기도
창세기 28장 18절."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모세의 새벽 기도
출애굽기 34장 4절

"모세가 돌 두 판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 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한나의 기도 (새벽 기도로 해석될 수 있는 장면)
사무엘상 1장 19절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사도 바울의 기도 (새벽과 관련된 기도)
사도행전 16장 25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1. 성경적 근거
- **예수님의 본보기**: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됩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그분의 기도 습관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영적 준비와 각성**: 시편 5편 3절에서 다윗은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께 의지하고 인도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새벽 기도는 하루를 영적으로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 신학적 의미
- **우선순위의 표현**: 새벽에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첫 번째 우선순위로 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일상 활동이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 **영적 싸움에서의 준비**: 에베소서 6장 12절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과 함께 하며, 영적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실질적인 유익
- **조용한 시간과 집중력**: 새벽 시간은 조용하고 방해 요소가 적기 때문에 집중해서 기도하기에 이상적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 쉬우며,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 **삶의 질 향상**: 연구에 따르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새벽 기도를 통해 하루를 긍정적으로 시작하면, 그날 하루가 더 활기차고 의미 있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4. 영적 성장과 변화
- **영적 훈련**: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 훈련과 영적 성장을 도모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 **하나님과의 친밀감**: 새벽 시간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는 그분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5. 결론
새벽 기도는 우리에게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많은 유익을 줍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하루를 의탁하며 시작하는 이 시간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풍성하게 하고, 영적 성장과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새벽 기도가 중요하며, 우리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