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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처치 설교및 강의/웨이빌리지 신학 디펜스

자본가와 노동자를 생각해봄

자본가와 노동자가 돈을 버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자본가는 사업에 자본을 투자해서, 그 사업의 이윤을 통해 돈을 번다.

노동가 역시 사업에 투자를 하지만, 그는 자본이 아닌 노동시간을 투자함으로써 급여를 받아 돈을 번다.

자본이나 노동이나 둘 다 사업에 투자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큰 차별이 있다. 

크게 두가지만 다뤄보자면, 하나는 이득에 대한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전체 시스템이 자본친화적이라는 것이다. 

 

1. 이득에 대한 관점의 문제

노동을 자본의 한 종류로 보기는 하지만, 그 이득의 상대적 차이는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노동 투자의 시간당 급여가 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이윤보다 항상 작아야 유지되는 시스템이다. 

경제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 없다. 어떤 사람이도, 사업 이득보다 큰 노동 급여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 투자는 기대감의 출발부터가 다르다. 투자금보다 적은 이득을 기대하는 자본가는 아무도 없다. 

한편에서는 인풋보다 적은 아웃풋을 기대하고 

다른편에서는 인풋보다 큰 아웃풋을 기대하고 시작한다. 

두 맹인을 고치시던 예수님 생각이 난다. 주님은 그들을 고치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 (마9:29). 이 말씀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믿음에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우상을 믿는 사람은 우상처럼 안들리고 안보이게 되어버린다 (시115:1-8). 한마디로, 사람은 자신이 믿는대로 된다.

 

2.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

물고기는 자신이 물속에 사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한국어 구사를 일일이 신경쓰지 않는다. 인간은 공기를 인식하며 살지 않는다...... 예는 수없이 들 수 있다. 사회 시스템도 그렇다. 우리는 자본주의사회를 모른다.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 인생 매트릭스가 자본 중심의 시스템안에 메여 굴러간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시작을 9세기 이슬람이라고 본다. 그러나 전체의 맥락과 흐름을 읽자면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이미 고대 근동지역과 나일강변의 문명들은 잉여생산을 통해 자본에 눈 떴다. 그들에게 자본력은 정치권력과도 연결되어있었다.  

예수님 역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눅16:1-14). 크리스천이 악한 자본을 어떻게 대할찌에 대한 말씀이셨다. 

뿌리깊은 시스템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구조다. 만약 누군가(기대하는 바로는 우리가) 제4의 경제체제를 만들어내서 획기적으로 전세계를 뒤집지 않는한 자본과 금융 시스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과 사회는 없다. 

그렇다면, 뻔하다. 잘 쓰면 될 일이다.

우리는 노예다. 그러나 돈과 부의 노예는 아니다. 주인은 하나다.  그리스도 뿐이다. 나머지는 주인을 위해 잘 이용하면 된다. 자본도 그렇다. 

노동투입 대비 임금 아웃풋은 인플레이션과 비슷하게 상승한다. 은퇴때 까지 실험해볼 일도 아니다. 불을 보듯 뻔하다. 노동투입만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를 이용할 수 없다. 그러나 사업을 통해 얻는 수익은 다르다. 단기적으로는 비슷해 보일 찌 몰라도, 결국 Exponential Growth공식(Y=2ˣ)에서 보듯 장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훨씬 초과한다. 

잠언 말씀이 떠오른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잠언13:22).

그저 내일 일을 전전긍긍 염려하며 쌓아두기만 할 때가 아니다. 자본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는 길로 발걸음을 돌릴때다. "자자 손손"에게 이어지는 "산업"을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