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6가지 일
1. 인생이 짧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죽음을 잊으면 생명의 가치도 함께 희미해진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생명에는 끝이 있다. 인생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끝난 후 재생도 안된다. 누구에게나 삶은 그 가치가 높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삶의 가치가 떨어진다.
2. 목적이 불분명한 삶을 산다.
죽음 때문에 생이 유한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진실이다. 그러나 이를 잊고 살면 존재의 목적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생의 의미를 질문해대지 않는다. 별 생각없이 산다. 주변인과 자기 시대의 문화를 따라 쉽게 휩쓸려다닌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묻지를 않는다. 그래서 답이 있어도 무관심하다. 78억분의 1의 개성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지금처럼 살아도 되는지, 안된다면 답은 어디에 있는지 등을 고찰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세파 따라 떠다니며 산다.
3. 문제가 나타나면 쉽게 흔들린다.
죽음을 잊은 생명은 흔들린다. 존재의 목적을 생각해본적 없는 인생은 모든 일에 허무하다. 살아 있으니 살아간다는 식의 생명은 온갖 문제를 일으킨다. 한 극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겁쟁이는 죽음에 앞서 몇 번이고 죽지만 용감한 사람은 한 번밖에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세익스피어. 죽음을 알고 존재의 의미를 숙고한 사람은 인생의 온갖 문제 앞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미리 생각해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망각한 인생에 죽음의 그림자가 덮치면 그때 마다 방향 없는 불안을 느끼며 실수를 해댄다.
4. 영원을 지향하지 않는다.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면 죽음 초월적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죽음을 고뇌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잘 알것이다. 그런 이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영원”이라는 것을 한번쯤 추측해봤을 것이다 행17:2.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진행 된다. 창조주께서 이미 올바른 지식의 씨앗을 사람 안에 넣어두셨기 때문이다 롬1:19.
성경에 존재의 답이 있다. 죽음을 잊고 살아 그렇지 본연의 생명은 무한하다. 이는 창조주의 속성, 영원과 맞닿아 있다. 그 생명에는 영원에 근거한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가치는 전 우주적이다 눅15:7. 시공을 초월하는 영속성의 파워도 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해본 사람들은 자기 경험도 맹신하지 않는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죽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지각은 영원을 향해 뻗어나간다. 경험계보다 더 큰 세계를 생각해본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 뒤에 도사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짐작해본다 고후4:18. 그러면서 생명보다 더 큰 존재, 하나님에게 마음을 쏟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성경말씀대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19.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음을 잊고사는 인생에게는 영원에 대한 지식도 자신을 감춘다. 그래서 영원한 존재의 궁극에 계신 하나님이 없는 것 처럼 산다. 가랑비를 부정해도 옷은 젖는다. 지각세계의 모든것을 뛰어넘는 존재를 무시하고 살아도 그 영향력아래 살고 죽는다. 죽음앞에 힘없는 일시적 존재들을 추구하면서,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생명의 가치와 목적에 전혀 걸맞지 않다.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못질을 해댄다거나, 세계에 단 1대 뿐인 초 슈퍼카로 공사장 폐자재를 나르는 격이다. 죽음을 잊은 인생은 “영원”에 걸맞지 않은 인생을 운영한다.
5. 현실에 대한 균형감각이 사라진다.
플레너리 오코너 Flannery O’Connor라는 작가가 있었다.
그녀는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이들 중 하나다. 그녀는 1949년부터 작가 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문학사에 획을 그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1952년 이후에 쏟아냈다. 그녀가 전신 홍반성 루프스 질병(S.L.E)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예견된 죽음이 그녀를 소명에 집중케 했다.
그녀에게는 매일 몰아치는 고통이 있었다. SLE와 그 합병증으로 그녀는 10년 넘게 매 순간 몸부림쳤다. 이보다 더 죽음이 가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했다. 여기서 생명력이 터졌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웠다. 그래서 글을 써댔다. 소명을 이루는 것 외의 다른 소란들은 모두 매일 조금씩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앞에 잠잠했다.
죽음을 부정하는 환경은 현실을 부정한다. 전세계적인 공통의 문제들도, 개인적인 인생 방향성을 매 순간 실천하는 것도 방해한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사람을 현재에 집중하게 만든다. 주변을 둘러보라. 아침부터 밤까지 온갖 일에 휩싸여 산다. 도시는 사람들로 붐비고 가는 곳마다 할 일이 넘친다. 누구든 그렇다. 직장인이든 사업가든, 여행객이든 휴식중이든, 한가한 사람이 없다.
세상은 사물 인터넷으로 날로 더 가까워지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등장은 먹고 사는 일에서까지 개인화를 가능케 하고 있다. 이 시대 어디를 둘러봐도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것만 같다.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조차 자신의 삶을 위한 가십 쯤으로 쉽게 다룬다. 세계를 휩쓸고 지나가는 신종바이러스로 몇명이 죽든, 그들의 생명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다. 단지 내가 이 위기에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상기시켜주는 가십일 뿐이다. 전세계적으로 10세 미만의 어린아이가 매 5초마다 1명꼴로 굶어 죽어가는 현실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식으로 낙태, 토양 오염, 물과 식량부족, 미성년자 성착취, 미혼모, 전쟁, 기아, 고아……등의 문제들 모두 살아가는 나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들로 전락한다.
각 개인에게는 그저 활발히 움직이는 세상이다. 남의 죽음만큼이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역시 거의 거짓에 가깝게 느껴지는 환경이다.
또 다른 편에서 세상의 삶은 너무 산만하다. 이때문에 개인의 현실에도 충분히 집중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소명에 깊이 몰입하기가 힘들다.
6. 공동체를 부정한다.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로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 이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어떤 믿음보다 우선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죽음이 없는 것 처럼 살면 삶을 맹신하게 된다. 계속 살아있을 것처럼 살다보면 삶 자체를 믿게 된다. 자기 자신의 호흡, 경험, 이력, 능력, 잠재력등이 세상을 다 초월할 것이라는 성공문학의 속삭임은 이를 겨냥한다. 모든 활동을 자신에게 맞춘다. 현재의 생명을 스스로 풍성히 성장시키기 위한 시간으로 하루를 가득 채운다. 그러다 보면 두가지 문제가 시작된다. 하나는 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이다.
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인다. 흔히 말하는 “중2병”에 걸린다. 다른 말로는 교만해진다. 이런 사람은 파멸의 길로 들어간다. 교만한 자는 실패하든 성공하든 끝난다. 잘되면 스스로를 신처럼 대하고, 잘못되면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자기 파괴적 감정과 행위를 나타내게 된다.
또한 외적으로는 사회적 고립의 길로 간다. 이미 교만하던 자도 죽음 앞에 서면 겸허해진다. 주변을 둘러보며 우선순위가 뒤집힌다. 특히 인간관계를 모두 되돌아본다. 하지만 죽음이 없는 것 처럼 살아 교만해지면, 성공하든 망하든, 주변에 사람이 없어진다. 스스로를 무한히 높여도 홀로 되고, 낮춰도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는 불가능해진다.
자괴감, 부러움, 자존심 상함 등은 모두 교만에 뿌리를 둔다. 교만이 실패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감정들이다. 반면에 성공한 자나 아닌자나 누구든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동질감이 있다. 개인에게 뿐 아니라 사회 관계의 연결망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죽음 만큼이나 모두가 공평하게 공유하는 운명이 또 있을까?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인식만 있어도 전 인류가 공동 운명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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