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칭찬할만한 성경인물들이 많다. 요셉, 다니엘, 느헤미야, 이사야......
그들은 모두 우리와 다르다. 특별하다.
그러나 여기, 우리와 너무 비슷한 성경인물이 있다. 요나 선지자다.
2. 본문
1절.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신입사원이 사장에게 매우 싫어하고 성낸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될까?
하물며 그보다 더 격차가 큰 하나님께 한 선지자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고 있다.
Fact1. 요나의 "매우"라는 원문 표현이 흥미롭다.
욘 1:2에 나오는 니느웨의 "악독"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매우”(라아흐) 싫어하고 성내며 = 그 “악독”(라아탐) 이… (PPT)
2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해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1) 복수 VS 정의
Fact2. 요나가 4장 2절에서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라고 하는 표현 역시 흥미롭다. 1장 2절에서 아무도 기도하지 않았음에도 니느웨의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라는 부분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F1&2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성경은 요나 선지자의 정의 호소와 니느웨의 악독을 성경이 계속 비교하고 있다.
요나의 정의와 니느웨의 악독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테이큰(2008)이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추적끝에 악당들 은신처를 찾아서 고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서 “악당이 불쌍하다, 주인공이 심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 아니면,
그대신 “통쾌하다! 악당을 죽여라! 매우 쳐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요나가 호소하고 있는 정의 - Q. 그것은 정의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법적 "정의 집행의 3가지 목표"를 가지고 살펴보자:
1. Retribution: 징벌
2. Deterrence: 효시
3. Rehabilitation: 교정
이것을 가지고 내가 질문을 한번 해보겠다:
금연장소에서 한 결찰이 흡연자를 발견했다치자. 경찰이 칼을 꺼내서 그 자리에서 손가락 두개를 잘라간다면? 이것은 징벌/효시/교정인가? => 맞다. 그러나 "정의"인가? => 아니다.
이번에는, 그 흡연자에게 경찰이 물었다. "어디 소속이요?" - "웨이쳐치요." - 그때 만약 경찰이 웨이처치 멤버 5명의 손가락을 잘라간다면? 그리고, 그날 저녁 뉴스에 생방으로 내보내며: “공공장소 흡연자의 친구들의 손가락입니다”라고 엄포를 놓는다면? 이것은 징벌/효시/교정인가? => 맞다. 그러나 "정의"인가? => 아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을 것이다.
정의는 단순히 징벌/효시/교정이라는 정의 집행 목표들을 완수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적합한 집행 수준"이 필요하며 그것은 양측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 수준을 법 집행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 이 예들을 가지고 이번에는 다시 요나의 주장으로 돌아와 보자.
요나가 화나는 이유가 2절에 나온다.
단순하다.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를 너무 많이 베푸신다! 심판을 하시라!!"는 내용이다.
이 정의 호소에는 집행 수준의 문제가 있다.
"요나의 심판 요구 수준이 요나에게도 옳은가?"라는 문제가 따라붙는다.
요나가 요구하는 심판의 수준 만큼
1) 그들의 악독의 수준이 적합한가? 그리고
2) 요나는 그런 요구를 할 만한 자격의 수준이 되는가?
같은 질문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주로 1) 실제 해당되는 법 집행보다 강하고 과한 수준의 벌을 상대에게 요구한다.
또한, 2) 법 집행을 전혀 할 수준이 아니면서 그것을 주장한다.
요나가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이다.
흔히, "죄 지은 자가 은혜 받는 것"을 싫어한다.
단지, "자신이 은혜 받는 것"은 좋아한다.
Fact3. 6,7,8절에 나오는 “예비하사”라는 말은 원어 의미상 “기름부으사”와 동의어다.
기름부음의 의미는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하나님께 속했으며, 때로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뜻을 가진 법적 행위이다.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신 것 만큼이나,
"박넝쿨, 벌레, 동풍" 그리고 무엇보다 "니느웨인들"도 사용하신다.
여기서 요나는 자신을 그들로부터 차별시키는 더 높은 도덕 수준을 적용한다.
도덕 수준을 스스로 정하는 것은 그렇다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주장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자신의 도덕 수준으로 낮추는 오류를 가진다.
우리는 이것을 "자기 의"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의"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주장하는 자신의 정의 기준을 말한다.
요나의 주장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주장의 태도 자체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
(2) 우리의 “자기의”
우리도 “자기 의”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자기를 주장하는 요나의 오류를 자주 범한다.
"잘했든 잘못했든"이 중요하지 않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주장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의" VS "하나님의 의"의 대결 구도가 문제다.
만약 누군가가 불의 가운데 고통받고 있다면, 당연히 정의를 호소하며 심판을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죄책이 있고 그에 대한 심판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요나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했나 보라. => 심판자인가? 아니면 심판을 받는 자인가?
우리는 어떤가? 나는 나를 어디에 위치시키는가? => 심판자인가? 아니면 심판을 받는 자인가?
=> “심판”에 대한 내 위치가 내가 정의의 어느 편("자기 의" VS "하나님의 의")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만약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 그것은 자기기만이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요나가 화를 낸다. 자기 의에 의한 화를 낸다. 자신은 옳고 하나님은 틀렸다.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니느웨를 심판하는 정의는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주 화가 난다. 자신은 옳고 하나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늘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 중심에 "자기 의"가 있다.
(3) 사랑의 주님? VS 심판의 주님?
흔히, 구약은 심판/전쟁의 주님이시고, 신약으로 가면 용서/사랑/평화의 주님이시라고 생각한다.
...요나서는 그 반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상은 같은 주님이시다! 심판의 주님인 동시에 은혜의 주님이시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오해: 사랑 <=> 심판
(은혜는 항상 심판의 반대편에 있다는 생각은 진실이 아니다)
(잘못했을 때는 은혜를 바라고, 잘했을 때는 은혜를 싫어함/ 심판을 바람 => 이중적 태도는 옳지 않다)
Q. 사랑은 판단하는 것.
=> 서로 판단 없는 사랑이 있을수 있는가?
=> 당신의 배우자가 다른 남자/여자에게 가도 되? => 진정한 사랑인가? 아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
(아8:6)
Q. 만약 누군가가 나에 대해 모두 안다면 판단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Q. 사람들이 당신의 실체를 알게 되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겠는가?
겉모습 말고, 진짜 모습이 알려진다면?
최악의 모습을 다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
그런 사랑을 아는가?
(4) 진정한 사랑은 심판을 통과한다.
진실을 다 알고도 사랑할 때에야 진정한 사랑이다.
진실을 모른다면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
자신이 세워둔 허상을 투영해서 사랑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은 진실을 알고, 그에 대한 판단을 넘어설 때 존재할 수 있다.
=>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신다
(우리의 연약함, 실패, 어두움, 병든모습, 죄악이 가득한 것, 거짓된 것...)
그리고서 사랑하신다.
우리가 사랑스러워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요일4:9-10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
- 우리가 사랑스럽지 않다는 진실을 모르고 사랑하셨나?
- 아무 심판없이 사랑하셨나?
=> 아니요! 다 알면서도 사랑. 심판을 하시고서 사랑!
=> 어떻게 심판?? =>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혜는 심판없는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을 통과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책을 그에게 다 지우셨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각 페이지에서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며 “자기 의”를 주장하는 순간마다 질문하신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3. 결론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
하나님의 심판만 원하고 있음.
그러나 실상은 “심판”이 아니라 “복수”를 원하고 있음.
하나님이 요나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죽여달라고 외칠 정도로 자기의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음.
그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알고 회개하자.
자기 의를 벗어던지고, 심판주요 사랑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함께 그리스도께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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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온통 인생을 채울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내 문제"에 대한 호소를 멈추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호소로 삶을 다 불태울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내 교회"에 대한 고민을 멈추고
"예수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실행하는데 모든 재원을 단순/과격히 집중시킬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내 생명"에 대한 고집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명"을 뿌리고 가꾸는 일을 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죽을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내 교단, 내 신학교, 내 교회, 내 노회, 내 직장, 내 학벌, 내 명예, 나를 보는눈......이런것들을 모두 뛰어넘어서
오직 "예수님"
오직 "성경"
오직 "기도"
오직 "제자화"를
무한정 실행할 수 있다면?
......
만약, 우리가 "자기 의"를 버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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