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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처치 설교및 강의

선교적 교회는 기도꾼이 세운다

산동네 교회의 추억

 

그곳은 산동네였다. 동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집에는 아버지가 안계셨고 어머니는 월세를 제때 못내셨다. 그래서 쫓겨나면 다른 판자집으로 이사를 다녔다. 어떤 해는 일년에 5 집을 옮겨야 했던 때도 있었다.

어디로 옮겨 가도 거기에 교회가 있었다.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가정집, 동네 구멍가게 윗층, 옥탑방 가건물, 혹은 군용 천막을 임시로 설치해둔 곳도 있었다. 모양은 달라도 공통점이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예배가 있었고 금요일 밤에는 밤새도록 기도회를 했다. 교인들은 문제가 많았고, 그럼에도 골목골목예수천당 불신지옥 외치고 다녔다. 중에서도 교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천막으로 설치한 교회 입구에는예배당이라고 한자로 적혀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방석과 허름한 나무 강대상, 그리고 눅눅한 나무 장작 냄새가 기억이 난다. 담임 목사님은 없었고, 담임 아저씨가 있었다. 예수님 믿은지 얼마 안된 동네 아저씨가 교회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교회를 세워야 한다며 신학 과정을 시작하셨던 분이었다. 이분은 밤새 기도하셨다. 자신은 아직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큰일이라며 매일 울부짖었다. 동네 사람들 이름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적어놓고 매일 기도하셨다.

 

교회에 대해서는 특히 내가 8살때의 일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여름 성경학교때문이다. 여름마다 나는 황홀했다. 산동네 교회 2군데에서 연합 성경학교를 열었다. 

여름성경학교 비용 마련을 위해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봄부터 함께 노가다 일도 다녀오셨다. 그해 여름에는 동네 어린이들 머리깎아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가 있는 어린이들이 많아서였다. 동네 어귀에 어린이들이 모여 앉았다. 이집 저집,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구경나오셨다. 주일예배만 마치면 자신들의 옥탑방, 판자집, 자취방에 데려가 라면 끓여주시던 선생님들이 이번에는 바리깡을 들고 나오셨다.  여름내 동네 어린이들은 너도 나도 삭발머리였다. 머리 깎으러 교회나온 친구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내게 최고의 순간은 간식 타임이었다. 사탕과 과자를 저마다 하나씩 들고 먹는 것은 어린 내게 경이로웠다. 시시때때로 연필과 공책도 나눠주었다. 일년에 두번 성경학교때마다 열리는 달란트 시장도 그랬다. 개인 용돈이 있을리 만무한 어린이들이 교회에서 오뎅, 순대, 떡볶이를 사먹었다. 성경학교는 교회 나가는 어린이들의 특권이었다.

교회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보다 따뜻하고 용감하고 지혜로웠다. 그분들은 나를 볼때마다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집으로도 자주 찾아와서 기도해주고 가셨다.

 

천막 교회에서는 너나 없이 전도자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자전거 할아버지였다. 그분은 새신자였다. 어느날 교회 수요예배에 다녀가신 뒤로 쌀자전거 끌고 매일 곳곳을 방문하셨다. 정기적으로 다니셨다. 짐받이에는 아주 마대 자루를 싣고 다니셨다. 거기에 강냉이 과자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분은 집집마다 순서에 따라 두드리고 일단 들어가 앉으셨다. 우리 집에도 일주일에 두번씩은 들어오셨다. 그때마다 달라셨다. 자신을 강냉이 팔러 다니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장사는 전혀 안하셨다. 오직 예수님 이야기만 하셨다. 오실때 마다 성경 이야기가 이어졌다. 에덴동산이야기,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바벨탑 사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이야기…… 매번 다음 시간이 기다려졌다. 말씀을 마치시면 끝엔 예수님 믿어야 한다며 강냉이를 그릇씩 퍼담아 주시고 가셨다. 매번 그러셨다.

 

회상해보면 사역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었다. 너나 할것 없이 모두가 선교사님들 같았다. 그분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종교생활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의 독특한 생활 방식이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기도했고, 방법은 다양했어도 종일 복음을 전했다. 어딜 가서도 기도꾼들이었고, 성경학교 선생님이거나, 전도자, 혹은 성경 이야기를  전하는 설교자들이었다. 그분들에게는 이렇다 교육 프로그램도 없었고, 특정 사역을 실행하는 특정 시간도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분들에게 삶의 현장은 몽땅 선교지였고 그분들 자신은 각자 선교사들이었다. 

 

요즘들어 어린시절 산동네 천막 교회의 모습이 자꾸 생각난다. 선교적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그분들 만큼 잘하지 못해서 그런것 같다. 교회를 하면 할수록 내게 신앙을 보여주셨던 선배님들이 그립다. 

그리워 하다 문뜩 궁금하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오늘날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과 많이 다른 그분들은 누가 교육시켜주었을까? 어떤 전도 프로그램을 이수했을까? 아니면 어디서 학위를 받았길래 그랬을까? 혹은 누가 리더였길래 그렇게 삶의 현장에서 하나같이 기도하고 말씀전하고 교회를 섬겼을까? 어떻게 그렇게 삶의 모든 현장에서 그저 선교사로 있었을까? 어떻게 공식적으로 사역자도 아니면서 빠짐없이 새벽기도, 밤기도, 철야기도를 하셨을까? 신학 수업 한과목 들은것도 없고 심지어 새신자반, 성장반, 제자반, 사역자반 이수도 없이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떻게 가르치며 다니셨을까?

 

 

 

능력과 말은 반비례한다

 

지난 9년동안 교회를 여러 지역에 개척해왔다. 사역 지경이 넓어짐에 따라 신학계에서는 우리(웨이처치)선교적 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호칭에 힘입어 같은 주제로 , “끝까지 가라”(규장) 냈다. 신학교, 교회 그리고 선교단체 등으로 강의도 다닌다. 세미나도 하고, 선교적 교회개척 훈련학교도 진행한다. 그러나 일이 커질수록 어린시절 경험했던 달동네 천막교회에 못미친다는 생각이 든다. 비단 교회뿐만이 아니다. 이사가 잦아 교회 이동도 많았던 나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70-80년대 한국교회는 대부분 이미선교적 교회였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그에 못미치고 있다. 

당시에는 선교적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 같은건 없었다. 선교적 교회가 없어서 논의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선교적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랬다. 진짜 능력이 나타나면 굳이 말로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교회 안밖에 논의가 넘친다. “무엇이 교회인가? 선교적 교회는 무엇인가? 전통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탈바꿈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선교적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논의들은 마치, “능력 보여주지 못해논쟁 하고 있던 마가복음 9장의 상황과 닮아있다. 

역사가 반복되듯 성경속 제자들의 모습도 오늘날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다. 능력이 없으면 말이 많아진다. 그러나 보여주면 논쟁은 사라진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9:14). 

구절대로라면, “능력 없던 제자들이 만들어냈던 것이변론이었다. 성경좀 읽어봤다면 스토리를 것이다. 귀신 들린 어린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왔던 사건이었다. 불과 챕터 앞을 보면, 이미 앞서 제자들은 능력을 보였다 (6:7). 그러나 문제는 지금이었다. 이제는 능력이 없다. 대신 말만 있다 (9:17, 18). 여기에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능력을 보이셨다 (9:19-27). 그때 말은 종료되었지만, 제자들은 마지막 질문이 생겼다. 분명히 능력을 행했는데 (6:13), 지금은 (9:18) 능력이 없는지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9:28)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없느니라” (9:29). 

듣고보니 답이 간단했다. 기도 때문이었다. 기도가 없어서 능력이 없었고, 능력이 없어서 변론만 있었다. 

 

스토리는 오늘날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다. 우리는 지금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20세기라는 썰물과 21세기라는 밀물이 충돌중인 시대적 이안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세대간 문화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고, 세계화된 사람들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누구와든 연결되어 정보와 의견이 넘친다. “다음 세대 불리는 젊은이들은 급속도로 교회를 빠져나가고 있으며, 이전과 같은 대형 집회나 대형교회 무브먼트 역시 시대 착오적인 형태로 보이며 거부 당하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거기에 교회가 욕먹을 일들도 자꾸 발표된다. 

우리에게 이전에 있던 능력이 없다. 변론이 늘고 질문은 거세진다. 무엇이 문제인가? 시대를 좌우하며 천막 하나만 치고도 마을을 바꿔대고 사회를 쥐락펴락 하던 부흥의 시대는 어디로 갔는가? 

 

 

 

선교적 교회는 기도꾼이 한다

 

교회는 교회의 길로 간다. 평안할때도 성경을 펴고, 혼란할때 역시 더욱 성경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성경위에 모임이다 (2:20). 

세상 모든것이 변해도 하나님은 불변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가복음 9 말씀 대로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능력이 있다 없다 한다. 갈림길에는기도 있다.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날 것이고 기도하지 않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선교를하는교회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불과 몇십년 전에 선교로존재하던 교회의 시대가 있었다. 교회 스케줄과 사역들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기도꾼들을 통해 도처에서 나타났던 때가 있었다. 나라에도, 굳이 선교 사역을 따로 진행할 필요가 없던 능력의 때가 있었다. 

그때 선배들은 교회에서 진행하는 특정 프로그램이나 재력이나 인력을 가지고 전도와 제자화를 하셨던 것이 아니었다. 교회 성장을 목적으로 세운 어떤 고급 방법론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것도 아니었다. 혹은 자신의 시대를 해석해서 적용해낸 훌륭한 사역 방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학자의 말대로다. 

선교적 교회는 (1) 전도 프로그램이 아니고, (2) 새로운 선교 방식도 아니고, (3) 교회 성장의 새로운 방법론도 아니며, (4) 교회를 운영하는차세대 방식이나포스트모던 방식 아니다. (5) 물론 (anti-) 전통적인 교회 형태도 아니다” (Alan J. Roxburgh). 

 

예수님교회시며, 예수님교회이다 (2:19-21, 16:18). 그래서 예수님께 붙어있는 사람만 교회를 있다 (18:20, 15:5). 예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모범을 보이셨다. 방법은 기도다 (4:2, 14:13, 14, 1:35-37, 5:15,16, 22:39, 40……). 

기도는 예수님 의존적인 행위의 핵심이라서, 기도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다. 알다시피,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없다 (15:1-5). 아이를 낳으려면 해산의 수고가 필요한 것처럼, 영적 자녀를 낳으려면 기도의 수고가 필요하다. 목양자도, 선교사도, 모든 성도들도 기도자여야 한다. 아니 기도 전문가, “이어야 한다.

기도에 예외 없다. 너나 할것 없고 사역자나 평신도 구분도 없다. 기도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매일 만나는 것이 교회의 일이다. 

기도 없는 능력은 가짜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근본적으로 존재할 없다. 말씀을 전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전도도 제자화도 선교도 기도해야 진행된다. 기도 없는 교회는 열매없는 과수원, 빛좋은 개살구다. 기도할 생명력이 있다. 기도해야 열매가 맺힌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진짜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거리가 멀다는 은혜 지식은 기도할때에야 얻을 있다. 회개하며 애통하는 것도 기도로만 가능하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말씀을 들을 귀가 있으며, 기도하는 사람만이 지금 하나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지 있다. 

기도가 없다면 교회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도 길이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께서 우실때 함께 울며, 외치실때 함께 외칠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저 자신의 교회를 것이다. 가짜 교회를 세울 것이다. 기도 없는 모든 땀은 땅에 버려져 허무할 것이다. 

 

20세기의 교회를 경험했던 크리스천들이라면 내가 경험했던 달동네 천막교회 이야기 비슷한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당시 교회의 기도들을 떠올려보라. 우리에게는 새벽마다 밤마다 교회 안나마리아실, 모세실, 바나바실, 회우실 등으로 이름붙은 지하에 모여 부르짖던 선배들이 있었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교회 뒷산 소나무 아래나, 동네 약수터 바위 위에서 두손 모세처럼 기도하던 성도들이 있었지 않은가? 그들은 지혜롭다기 보다 기도했으며, 높은 사람이라기보다 기도했으며, 리더십을 추구하기보다도 먼저 기도했지않은가? 그분들은 전문가도 아니었고, 특정 방법론도 없었으며, 혹은 이렇다 교단 소속도 없었지 않은가? 대신 그들은 기도꾼이었고, 삶의 현장에서는 영향력이 있었으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성경 66권을 스토리 텔링 하는 이야기꾼들이었지 않은가? (고전 1:26-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없느니라” (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