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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공간/선교적교회개척

선교사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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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란누구인가?
1. 최초의 선교사: 아담
에덴동산에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1) 능력과 임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류를 지으셔서 자신의 피조세계를 다스리시기 시작하셨다 (창 1:27,28). 하나님이 보내신 지상의 대리 통치자, 아담은 5가지 복을 받았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능력들을 복으로 받았다 (창 1:28).
또한 아담은 2가지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것은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이었다 (창2:15).
한마디로, 아담은 능력을 받았고, 임무를 받았다.
세상을 정복할 능력과 그곳을 지킬 임무를 받았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을 세상에 충만하게 할 임무가 있었다. 이것은 하와에게서 시작해야 하는 임무였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될 때 아담의 임무는 수행되었다. 아담이 하와를 말씀의 사람으로 보존하는 일은 선교의 시작이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게 하는 일이 아담의 선교 업무였다. 그를 통해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덴동산을 채우고 세상을 채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게” 하는 순서였다.
그러나 아담은 이에 실패했다 (창3:6) 하와를 지키는 일에 실패했고, 스스로를 지키는 일에서 조차 실패했다.
선교는 끝났다.
(3) 1차 선교지: 자신의 마음
창세기 1~3장에서 볼 수 있는 선교는 일차적으로 아담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외부의 어떤 영향력도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깨뜨리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바로 선교의 출발점이었다. 아내 하와는 선교지였다. 그러나 그 선교지를 지키려면 아담은 스스로의 마음부터 지켜야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보존해내야 했다.
(4) 의미
선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성경을 펼쳤을 때 우리는 아담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다. 그 일은 자신의 마음을 선교지로 삼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선교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다. 거기서 선교가 시작된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거기서 선교가 실패로 끝나게 된다.
2. 궁극적인 선교사: 예수님
(1) 약속
그러나 하나님은 선교를 다시 시작하셨다.
아담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선교를 멈추지 않으셨다. 아담에게 하나님은 메시아에 대한 약속과 함께 그가 고난받는 종으로 오실 것을 약속해주신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선교하시는 시대로 전환되었고, 하나님은 실패한 선교를 메시아를 통해 회복하실 것이었다.
(2) 여자의 후손
실패한 선교사에게 하나님은 메시아를 약속하셨다.
그분은 승리하실 분이셨다. 뱀의 머리를 밟아이길 승리자셨다 (창 3:15). 정복자셨다. 그분의 이름은 “여자의 후손”이었다 (창 3:15). 쓰레기더미에 꽃을 피우시고, 깊은 밤을 새벽으로 물리시는 분이 실패의 터 “여자”에게 승리자 “후손”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이어지는 창세기 4장으로부터 모세5경 전체의 키워드였고, 출애굽 백성이 들어간 가나안땅에서의 주제였으며,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왕이었고, 모든 선지자들의 궁극적 도착지이자 역사의 종결자였다.
(3) 고난받는 선교사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실패한 선교사들에게 “가죽옷”을 지어입히셨다 (창 3:21). 이후 아담의 후예는 믿음으로 그 일을 반복했다. 에덴에서 승리자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가죽옷을 만들때 누군가는 죽임을 당했다.
아담의 후예는 이 사실을 듣고 믿었던 자와 믿지 않았던 자들로 나뉘기 시작했다 (히 11:4). 믿는 자들은 제사를 시작했다 (창 4:1-5). 믿는 자들은 그 가죽옷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희생시키신 제물처럼 고난받기 시작했고, 믿지 않는 자들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창 4:8).
핍박 받는 자들은 믿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그 핍박의 끝에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기 시작했다 (창 4:10).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보내주실 선교사 “여자의 후손” 메시아역시 그 “가죽옷”의 주인처럼, 핍박 당하고 죽으실 것이었고, 그분을 믿고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4) 의미
퓰러의 정용갑 박사는 하나님의 선교적 정복 방법을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라고 자신의 논문에서 역설했다 (약함으로부터의 선교 Mission From a Position of Weakness, 2009).
하나님의 정복 방법은 고난받는 메시아와 그 종들을 통한 것으로 전개되었다. 선교사는 약한 자들이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살아가는 자들이다 (고전 4:13).
가장 약한 자들을 찾아다니며 죽음으로 하늘에 구원을 호소하는 예수님의 삶을 모델로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따라 살다, 예수님 따라 죽는 자들이다.
3. 오늘날의 선교사: 제자들
아담과 예수님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함께 살아간다. 기독교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선교가 예수님과 사도들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안에서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의 방법으로 살고 죽는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의 방식도 따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살고 죽으셨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살고 죽으셨다.
더 나아가서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메세지 그 자체셨다. 자신의 메세지에 대한 증거가 그 삶과 죽음에 들어있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다 그 길에 살고 죽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을 심지어 직접 부탁하셨다 (마 28:19-20).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임무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 임무를 위한 모든 능력까지 주셨다 (행 1:8).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선교의 일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지키며 따르는 것이다. 마음을 넘어 자신의 예루살렘을 지키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정복하여 다스리게 하는 삶과 죽음이 우리의 임무이다.
예수님의 일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담아내지 않는 시간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다.
우리는 선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