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 22:15-22)
- 강목사님의 묵상 내용-
**#배경**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혼인잔치 거절과 버려짐, 예복을 입지 않음에 대한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가 메시아요,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가 되신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들의 논리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버린 사람들(바리새인)은
“돌아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 했다.
고작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려고…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지혜,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을
고작 예수님의 논리와 비유 따위에 제한해서 대응하려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의 대항을 예수님께 하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좋은 묘안을 짜냄**
그것을 로마(가이사)를 이용해 예수님을 진퇴양란에 빠트리고 죽이고자 하는 음모임.
자신들조차 해결하고 싶고, 벗어던지고 싶은 로마의 식민지배,
타 민족의 압제를 스스럼없이 이용하려는
모순적이고,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인간의 단면을 보여줌.
더 큰 올무가 될 것을 어쩌면 알면서도 그 순간 어리석음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
▶나를 억압하려고 하는 죄의 지배를 역이용하여 예수님을 쫓아내려는 일이 있다면?
**#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함께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함**
-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 사실 이 질문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물고 늘어지는 지긋지긋한 싸움이었다.
- 마치 솔로문의 판결 같은 걸 바라면서 예수님께 묻고 있다.
- 하지만 이렇게 대답하면 로마법에 걸리고, 저렇게 대답하면 유대율법에 걸리는 대답이 된다.
- 그러니 15절에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한 것이다.
**#마 17장 24~27절, 성전세와 비교**
성전세 / 불합리함, 아들은 아버지께 세금을 낼 필요가 없음,
그러나 그들을(대제사장과 성전관리들)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낚시해서 줄 것을 베드로에게 명하심
-이어지는 본문 - 천국에서 누가 큰가?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인라는 강조,
-이 작은 자 중 하나도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 성전세를 내시는 분, 천국은 그런 작은 자를 위한 곳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짐
즉 성전세 문제와 맥락과 목적과 내용이 전혀 다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 예수님의 답변**
-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세상에도 책임을 지고 하나님께도 충성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다.
-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묻고 계신다.
- 이 말씀의 처음을 보면 15절 혼인 잔치 비유를 들었던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까 하여...사실 여기서 헤롯당원들은 들러리에 불과하다.
- 다시 말해 헤롯당원들, 가이사의 편에 선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려는 내용이 애초에 아니었다.
- 예수님은 되려 묻고 계신다.
- 타협한 것은 결국 너희가 아니냐? 너희들은 가이사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서 정말로 하나님께는 충성했냐고 묻고 계신다.
-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황제와 헤롯을 만족시키는 게임을 하는 것을 너희가 아니냐는 것이다.
-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고,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율법이 주신 목적을 가장 잘아는 자들이 자신들만 배를 채우고, 로마 권력과도 교묘한 줄타기를 하며 세상에서도 잘나가는 권세가들로 살아가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 진실로 충성하지 않았다)
**#위의 모든 계략과 전개는 “죽거나 죽이는” 세상의 게임 방식이 전재되어 있다. 예수님이 이기거나, 유대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 권력자들에게 예수님의 비유와 경고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 비유와 경고는 지속적인 회유의 손짓이었고, 기회였고, 사랑의 매요 곪은 곳을 도려내는 외과적 수술이었다.
다시 말하면 두번째 기회였고, 죽이는 비유와 경고가 아니라 살리려는 절박함이었다.
**#이 묘안을 바래새인들이 낸 배경에서 본문의 맥락을 잡으면**
예수님이 어렸을 때 유명한 유대 지도자 중에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로마에 내는 세금 문제로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로마는 그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세금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경고의 표시로 혁명가들을 십자가에 달아 놓았다.
하나님나라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금을 반대하리라는 백성의 기대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의 비웃음과 분노를 샀다.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말은, 로마 황제가 더이상 왕이 아니라는 뜻 아닌가?
예수님이 세금 문제와 그것이 의미하는 현실의 상황을 전부 해결하실게 아니라면 왜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그분을 따라왔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몇일 전에 호산나라고 모두들 외쳤단 말인가?
호산나(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과 정치 권력자 사이에 언제나 적용할 수 있는 답변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호한 태도를 취하시거나, 궤변을 내놓으신게 아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위험이나 정치적인 위험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앞으로 나아가셨다.
예수님의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혁명이 아닌 사랑과 생명과 능력이었다.
예수님의 소명은 혁명가가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는 황제의 나라를 굴복시킬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더 큰 제국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이기는 승리를 통해서 하실 것이다.
그게 바로 다음 이야기의 주제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를 혁명적이다.
그러나 말이나, 무력이나, 권력의 전복을 통한 혁명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음의 세력에 의지해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죽음 없는 생명과 권능의 나라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죽느냐, 죽이느냐?
황제의 화폐와 세금
세상의 나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통치 아래 있기에 죄로 일그러진 인간의 탐욕의 역사도 아직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심판이 아니다. 새로운 빛이 들어와야 한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생명이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의 길을 가시고 계신다.
살리는 길로 가고 계신다.
세상 나라도 살리고(회복), 하나님 나라도 살리고 계신다.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를 생명과 사랑으로 전복시키고 있다.
생각보다 신경써야 할께 많다. 많은 변수들도 있다. 그러나 한길을 간다는 것, 생명의 길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우직하게 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가 임하도록 부름받은 성도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나라가 임하시오며”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살리는 삶은 생명을 주는 삶이다. how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압도하는 사랑과 생명으로 묵묵히 그 길을 가야 한다. how
예수님의 방식, 삶의 진액을 짜서, 피방울과 땀방울로 적셔내어, 순종의 길(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다시 사는 나라 born again, risen, resurr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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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었다. 책에서 인용.
바리새인들
당시 유대는 종교 국가였다. 국민이 내는 세금은 순수하지 않았다. 세금 시스템 자체가 이미 이중적이었다. 하나는 로마의 수하들이 걷어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대교를 위해 조상 대대로 내왔던 각종 헌금의 의무적인 이행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둘 다에 관여했다. 금액 자체에 대해서만 아니라 영향력에 있어서도, 그들은 정치와 경제를 통합 운영하는 큰손 집단이었다. 말하자면 돈에 대해서 누구보다 일가견이 있었다. 그들은 종교인이자 정치가, 그리고 돈 전문가였다.
전문가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굳이 이력을 보자면, 듣보잡 자영업자였다가 지금은 떠돌이 프리랜서 목수 총각이었다. 그런 이가 계속 돈(富)에 대한 이야기를 해댔고,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열광했다. 바리새인들과 돈 문제로 직접 부딪히기 전까지 예수님이 하셨던 돈과 관련된 이야기만도 한가득이다. 큰 흉년과 과부 이야기(눅 4:25, 26), 물고기 이야기(눅 5:1-11), 모세가 명한 예물 이야기(눅 5:14), 혼인집 손님 대접 이야기(눅 5:34), 새 옷에 헌옷 조각을 붙이는 이야기(눅 5:36),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이야기(눅 5:37),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 이야기(눅 6:4), 축복과 저주 이야기(눅 6:20-26), 원수 구제 이야기(눅 6:27-38),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눅 7:41), 향유 옥합의 가치(눅 7:44) 등등.
그러다 누가복음 16장에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청지기 이야기를 꺼내셨다(눅 16:1-13). 여기 등장하는 청지기는 이중장부를 썼다. 주인을 속이고 자기 실속을 챙겼다. 그들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이 세대의 아들들’이었다(눅 16:8).
바리새인들의 임무를 보라. 그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청지기였다. 문제는 그들이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이었다(눅 16:13). 그들은 겉으로도 이중적이었고 속으로도 이중적이었다. 그들은 유대 나라의 하나님과 로마의 정치 제도를 동시에 섬겼다. 하나님의 법을 운운하며 헌금을 세금처럼 걷어갔고, 동시에 로마가 털어가는 세금에는 침묵으로 지지했다. 그들 속에 숨겨진 이중성은 이보다 더 어두웠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도, 로마도 없었다. 다만 돈이 있을 뿐이었다. 사랑했기에 철저했다. 그들의 이중장부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제자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중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1
질문은 제자들을 향해 던져졌으나, 정작 뜨끔했을 이들은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님은 이중적인 바리새인들 앞에서 이중적인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자. 주님은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돈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전해주셨다. 영원하지 않은 ‘없어질 재물’에 있어서 그들보다 더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었다(눅 16:8,9).
이 비유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불의한 일을 칭찬하는 듯 보여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제자들이었다. (마태를 제외한다면) 돈에 문외한인 비전문가 제자들에게,(문장이 길어서 쉼표 넣어봤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제대로 관리하는 태도를 요구하고 계셨다.
유대인들
군중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말씀을 함께 듣고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세금 시스템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이중장부에 대해 분노했다. 화가 난 사람들 중에는 정치적인 전복을 꾀하는 집단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불의한 자들이나 이들에 대해 화내는 자들이나 도긴개긴이었다. 악인의 형통에 대한 분노와 그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한통속이었다(잠 24:19). 마치, 미움이나 살인이나 모두 죄인 것처럼 (요일 3:15). 간음하는 눈길이나 실제 간음이나 둘 다 간음인 것 처럼(마 5:28).
마찬가지다. 바리새인들이 돈을 사랑하는 태도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결국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고,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오늘을 사는 우리
역사는 반복되고, 성경은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자주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문제를 가난한 자와 부자의 대결 구도쯤으로 전락시켜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가 아니다.
돈은 무조건 문제가 되니 아예 가난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있는 대로 다 소비해버리는 경제시스템을 가동시킨다. 매월 얼마의 수익이 있든, 그들을 매번 제로로 만들면서 말씀대로 산다고 착각한다.
같은 논리를 다른 내용에 대입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부모가 이혼하는 걸 보고는 자기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청년,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를 보고는 예수님을 떠나겠다는 성도를 생각해보라.
돈의 액수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마음이다. 오염된 경험이 마음에 상처로 작용하며 말씀의 진리를 가로막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듣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 자체는 전혀 어렵지 않다. 말씀 그대로다. 하나님과 재물은 함께 섬길 수 없다. 단순하다. 오해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이를 곡해한다. 대부분은 들은 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좌로나 우로 치우친다(잠 4:27). 우로 치우친 사람들은 ‘겸하여’ 섬길 수 없으니 아예 재물은 생기는 족족 다 없애자고 주장한다. 반면 좌로 치우친 이들은 재물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적당히 이용하며 둥글게 둥글게 살자 한다.
우리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볼 만큼 순수하지 않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라고 말하는 많은 이들도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재물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이중적 태도로 아닌 척하거나, 아예 대놓고 하나님보다 가난이나 부에 더 신경을 쓰기도 한다. 돈 때문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일희일비하는 모습 역시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다(딤후 2:3). 명령을 들었다면, 들은 대로만 따르면 된다. 군인의 미덕은 명령 해석이 아닌 복종 액션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명령형이다. 그 말씀대로 따르면 성공이다. 성경에는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소진하라거나 하나님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라는 말씀은 없다. 가난해야 천국 간다는 말씀도 없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며, 돈을 잘 이용하면 된다. 불의한 청지기를 뛰어넘는 지혜로 주어진 재물을 잘 관리해드리면 된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따르면, 돈에 대한 책임은 제자들에게 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당신도 이에 순종할 의무가 있다. 당신은 ‘불의의 재물’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재배치해야 하는 소명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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