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 5:1-9)
1.
표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의 문제 (요 4:48)
예수 이름에 힘입어 구원얻게 된다는 촛점.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요 4:54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표적 이야기로 옮겨가며, 표적의 진짜 의미 이야기가 이어짐...
어쩌면, 초대교회에 여전히 난무하고 있는 무속적 표적.
표적만 보면,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시고 기적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만 보고 끝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말씀으로 고치셨다.
말씀으로 고치셨다.
요1:1. 그분이 창조주시다. 생명의 근원이시다.
2.
어느 종교나 무속에도,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과 다른점은, 능력 출처다.
치유 방법이나 치유 결과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무속적 신앙이다.
예) 은과 금은 내게 없나니... =>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 용한 기도원, 귀신 잘 내쪼츤ㄴ 목사... 같은 맥락이다. 능력의 매개체나 결과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들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치유원리는 생명임을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생명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매개체나 현상이 아니라, 예수 생명 선물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감사의 조건은 예수 생명에 있다.
그것은 소원이나 육체의 변화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 된 권세 얻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3.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진정한 양의 문되신 분이 양의 문을 통과하신다 (요 10).
예수가 아닌, 다른 것(표적과 기사)에 근거해서 신앙하는 것은 다 "도적"과 "절도"다.
우리는 예수 이름 때문에 신앙한다.
양문 옆 베데스다(은혜의 집) 연못이 있다.
"행각 다섯" - 쉴 수 있는 장소, 그늘막 같은것이 있는 곳
거기 온갖 환자들이 다 모여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가끔(예수님의 영생수와 대조적) 물이 동할 때, 천사 강림&첫 사람 치유기적.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설이다.
하나님도 아니고, 천사가 나타나면이라는 전설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리스도도 아닌, 그 전설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여기 들어가면 낫는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다. 말씀에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설앞에 모여있는 환자들이 있었다.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4. 신앙 센터가 없던 수가성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 기대어 살아갔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그녀와 사마리아 인들이 소망하고 부러워하던 예루살렘, 바로 그 성전에, 사람들이 모였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그 길목에, 전설 따라 모여든 수많은 각색 병자가 있었다.
예배의 현장으로 나가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널부러져 있어야 하는 문제 덩어리들을 그냥 지나쳐 능력 없이 예배하러 다니는 모습이다. 참혹한 모습이다. 진정한 신앙은 없고, 전설이 난무하는 곳이 예루살렘, 성전 곁의 모습이었다.
사마리아만 소망 없는게 아니라, 예루살렘에도 소망 없다.
4.
근데, 더 참혹한 장면이 있다. 다음 구절에 나온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도와줄 이들이 있는 환자들은 좀 앞쪽에 있었다.
38년된 환자는 전설을 믿는 무속 신앙이나마 확률이 없다.
예) 아무것도 없는 복권집.
예) 이것이 요즘 된다더라... 이리 저리 몰려다니지만, 성공 확률이 없는 우리의 모습...
이미 결론 난 게임의 룰에도 못들어간 사람이 38년된 병자였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찾아오셨다. 예수 은혜 아니면 도무지 소망이 없는 사람이 바로 이 38년된 병자였다.
예)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5.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줌 인 하여 보고 계신다.
여러 사람 보고 있는 거 같지만, 베데스다 연못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 같지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편애다.
구원은 편애다.
인간의 편애와는 좀 달라도, 이것도바 더 좋은 표현이 아직 내겐 없다.
구원은 편애여야만 한다. 그래야 나같은 소망 없는 사람이 선택 받을 수 있다.
그 허황된 경쟁에서도 밀린 자를 편애 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저 사람은...내 남편은... 아내는..."그게 아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다.
6.
그렇게 묻는데도, "네"라고 대답 하지 못하고 38년 병자는 그저 신세한탄한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엉뚱한 대답이다.
올바른 대답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에게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신다.
예수님은 올바른 대답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의 당신을 만나주신다.
내가 정말로 바꾸고변화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대신 다른 것들이나 고치고자 한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진정한 문제를 고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린 말씀 본다.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장소를 못떠나고 있다.
38년이라는 수를 보라.
진짜 소망이 없다.
20살부터 다쳐서 아팠다면, 현재 노인아닌가.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 앉아 있다.
잘못된줄 알면서도... "이거마저 없으면..."이라는 미련 때문에 못떠난다.
예수께로 가는 선택 = "네 낫고자 합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는 여전히 베데스다를 붙들고 있다.
니고데모에겐 구약 종교
사마리아 여인에겐 야곱의 우물...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이 교회나 사역일수도...
그때였다.
예수님은 이 병자와 대화 안하신다.
캐묻지도 않으신다 (예) 니가 왜 그런 문제에 처했는지 알아??
(이런 궁금증은 우리에게만 있다)
주님은 그런 대화 대신 해결책을 주신다.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려고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주께로 가봐라.
"일어나라!"
그때 새 생명이 시작되었다.
7.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 그 자리가 곧 그 환자의 친구였다.
애착 대상이 있는가?
그 이불 아니면 못자고, 그 인형 아니면 못자고.... 그런 것이 있는가?
당신에게는 그런 것이 있는가?
예) 손 없는 날?
예) 필리핀 운전 기사들 = 표적과 기사, 무속......
십자가 걸수 있지만, 그 동기가 예수님인가? 그 동기가 예수 말씀인가? 그 동기가 예수 믿음인가?
상처와 단절하라. 희망 없는 너의 모든 경험과 단절하라.
내가 네게 소망을 준다... 이제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걸으라.
당신의 사고 방식, 아픔, 질병, 문제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당신의 숨은 문제에 이런 해결과 새 시작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8.
나의 믿음과 신앙의 근거가 기적과 표적이 아닌지 돌아보자.
어떤 무속적 의지처가 있다면, 거기서 떠나자.
기도와 예배의 현장에 예수 시선 따라 응답하자.
경건생활의 목적이 예수인지 다시 생각해보자.
복음의 새 생명이 시작되어야 하는, 베데스다못가 같은 곳이 내게도 있는지 생각해보자.
혹시 내게도 38년된 문제가 있다면, 눈을 뜨고 보게하시고, 직면케 하시고, 예수 말씀 순종케 해 달라고 기도하자.
내 질병에 관심 있으신 예수 만나자.
찬송가 - 나의 등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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