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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처치 설교및 강의/웨이설교

(요 6:16-24) 설교 준비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 6:16-24

 

 

 

1. 맛보아 알고도 떠났던 백성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구약 백성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출애굽도, 광야 40년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한 다음,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났습니다. 
큰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영적 이탈을 가만 두지 않고 지적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내게서 등을 돌렸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렘 15:6)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하나님이 모압에게…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사 16:9)

모압이 하나님에게 등돌린 것에 대해,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22:12-14)
하나님은 슬픔에 사로잡혀 계십니다.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상태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사 59:13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찾고 찾으십니까?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 2:1-5

 

 

2. 하나님을 찾고 찾으라. 그렇지 않으면......

(1) 하나님을 찾고 찾으라.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신 4:29-31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개역한글)
렘 29: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렘 2:13)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19)

(2)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해주신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떠난 끔찍한 상황과 결과를 알려 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20)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애 2:11)

 

어린 아이들까지 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까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3. 예루살렘을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파토스)

눅 19:41에도 하나님의 눈물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 19:41-46)

하나님을 등지는 일을 하고 계십니까? 
영적 탈선, 영적 간음, 가짜 복음을 따르기,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언행, 각자의 옳은 소견대로 행하는 사람들, 예수님께 자기 자신의 소원을 투영해서 따르는 군중……이들은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직후, 예수님 앞의 군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을 등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파토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 오늘 본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떠나는 우리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너무너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거짓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6장 전체에서 예수님이 느끼셨을법한 하나님의 파토스를 상상해보면, 함께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부분 부터 한번 살펴봅시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67)

 

오병이어 사건 끝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의 12제자들에게도 떠나려고 하는지 확인하는 질문을 하실 정도로, 오병이후 직후, 사람들의 오해는 심각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정말 고통스럽고 괴로운 순간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 

완벽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자비와 은혜가 가득하시고, 친절한 예수님의 모습을 너무너무 잘 보여주는 요한복음 6장. 

요한복음 6장은 매일 종일토록 치유하시는 하루를 보내셨던 주님의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2만에서 2만 5천 명을 먹셨습니다.

그리고 7장 1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그 직전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는 것으로 장 자체가 끝납니다. 

이것은 가슴 아프고 참담한 장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현재… 예수님을 따르는 거짓 추종자들이 너무 너무 많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2) 예수님을 거짓으로 따르다니요…ㅜㅠ

예를 들어, 누군가 저를 “거짓으로 추종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건 예수님 앞에 어떤 의미가 될까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추종하면 제가 교주 되고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면, 누군가 이순신, 세종대왕, 민주당, 국민의힘….등을 “거짓으로 추종했다”면 그건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 역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요?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따랐나요?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가까이서 예수님을 알고 따르지 않았나요?

예수님의 이적과 치유와 가르치심을 충분히 보고 듣지 않았나요? 

그분의 인격과 권능을 접한 후에, 그분을 거짓으로 따르다니요. 

이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오늘날 우리 사이에서도 빈번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함이 있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였고, 결함이 있는 제자들은 우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71절이나 되는 길고 긴 6장의 내용중 이제 겨우 중간 부분입니다.

그 내용을 다 나누기에는 이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포인트, 핵심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 제자의 특징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거짓 제자의 특징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와 거짓 제자 사이의 차이”

 

(3) 예수님을 떠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나?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6절)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에 답하기 위해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예) 신랑을 떠난 신부가 여전히 그에게 신부가 될 수 있습니까? - 예. 

언제요?-신랑이 포기하지 않을 때요…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라는 단어를 예수님이 쓰실때, 그것은 우리가 쓸 때랑 많이 다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파토스"가 들어있는 단어입니다. 

등을 돌리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이 담겨있는 호칭입니다. 

 

많은 제자들이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과 함께 걷지 않습니다. 

그리스어로 “마테테스”= “학생, 학습자”를 의미합니다.

예) 당시 랍비들은 시골을 돌아다니며 걷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들에게 “마테테스”들로 구성된 작은 무리가 뒤따랐습니다. 1세기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랍비도, 2만 5천명의 대규모 군중이 따랐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 군중 속에는 여전히 제자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관심만 가지고 제자가 될 생각은 없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예수께 헌신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예수께 진실한 사람,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함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헌신적이고, 진실한 사람 그룹은 “마테테스”들로 불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대하며 따르며 그분에게 배우려는 무리 말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6장 끝에 그들 대다수가 예수님을 떠났고, 12제자들도 혼란을 느꼈던 것을 우리는 이어서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풍랑이 이는 바다 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자비와 능력으로 계속 제자화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4. 예수님의 핵심 제자 그룹에 들어있는 이들 조차,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려 했다. 

16절.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마 14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흩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14:22).

원문에 보면, "억지로 해산 시키셨다"고 나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왕 삼으려 했고, 제자들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너무나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파토스를 몰라주는 제자들. 

각자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모두 떠날 것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군중이 가진 오해로 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직후의 혼란과 환호로부터 제자들을 따로 떼어서 구별하셨습니다. 

그들을 바다로 내모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내려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기도하셨습니다.

주석에는 이렇게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따르는 때를 도리어 위기로 보시고 기도에 열중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물로 내려보내신 이유는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었고, 또한 홀로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밤샘 철야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 문화가 말하는 "솨하르 기도"인데, "솨하르"는 목마른 사슴이 간절히 밤새도록 새벽녘까지 물을 찾아 헤멜 때 쓰는 표현입니다.

구약에는 "간절히"라고 간단히 번역해놓았는데, 그 의미는 "처절한 기도"쯤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간절히"(아솨하레카)의 히브리어 단어는 "새벽"을 뜻하는 단어 "솨하르 שָׁחַר"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간절함과 새벽을 연결하여 같은 말로 보여줍니다.
대표적인 예로,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이 기도는 압살롬에게 쫓길때 쓴 기도 시편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솨하르 기도가 무엇인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다윗의 파토스가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면, 예수님의 솨하르기도의 심정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홀로 짊어져야 하는 외로운 짐, 어디가서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 다만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 외에는 대화 할 방법도 대상도 없는 기도 제목입니다. 

인기가 올라가더라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지식에 문제가 있어, 결국 예수님을 등지고야 말 제자들을 위해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새벽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나중 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며 제자들 찾아가시기를 딜레이 하셨던 것 역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사실에 집중시키시려는 시험이었습니다.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12제자들중, 7명은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와 함께 낙향하여 물고기 잡고 앉았습니다. 

그로 미루어 짐작컨데, 제자들은 어부 문화가 지배하는 그룹이었습니다. 

큰 바람, 파도, 그리고 두려움이 이어집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어부는 물 전문가인데, 전문가조차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문제 상황이 발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문제의 끝에 던져졌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보일까요?

예수님이 보여야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 잘 보이고, 상황이 불가항력적 어려움이라면 오직 "예수님 살려주세요"만 남지 않을까요?

사실, 이 부분이 바로 예수님이 의도하신 시험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밤새도록 솨하르 기도 제목이 그거 아닙니까.

제자들이 군중의 오해에 함께 휩싸여, 예수님을 등지지 않게 도우소서!!

"예수=그리스도"이 복음 진리에 제자들이 눈 뜨게 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 구원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희박합니다.

그저 두려워 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 했다는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마 14:25-26)

-배경 설명 후... 

 

예수 구원 소망과 믿음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 

예수님을 나중에 떠나게 되었던 많은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구원 소망과 믿음이 아예 없진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진짜로 누구신지를 말씀하실때, 그 부분만 듣지 않았습니다. 

기적의 이유는 복음 설교였습니다. 
기적을 베푸신 후,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했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들었다면, 군중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부분이 문제였습니다.

이 부분이 과거 구약 믿음의 조상들의 과오와 같은 맥락에 있었습니다. 

알긴 압니다.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하나님을 등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유령 생각에 두려워 할 뿐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며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는지 우리는 구약의 증거들이 있으므로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는 심정이셨을 겁니다.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전문가들이 자기 전문 영역에서 바람 통제가 안되고, 죽을 위협을 느끼며, 유령 생각하며 두려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 하지 말라"구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잠시라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거리감을 유지하며, 예수님에 대한 불신으로 두려워 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십니다. 

예수님을 듣지도 믿지도 않는 제자가 어떻게 예수 제자이겠습니까?

바람 가운데, 유령 생각이나 하는 제자가 어떻게 예수 제자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포기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들을 안심시키시기를 즉시 안심 시키십니다. 

마태복음에는 "즉시"가 추가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7)

 

두려울 때,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예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맞습니다. 

이것은 우리 이야기입니다.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예수님을 영접하면, "배는 곧" 순항합니다. 

이걸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더욱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예수님의 말을 경외태도로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무리들은 제자들만 거기 딱 한척 있던 배 타고 건너간 걸 봤습니다. 

바다 이편에 예수님은 혼자 걸어서 산에 기도하러 가시는 것도 봤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의외로 예수님이 육지에 없는 걸 발견했을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밤새 찾아 헤메고 있었습니다.

이제 죽다 살은 제자들은 군중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제와 다른 마음가짐으로 군중을 대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나중에 군중, 오병이어 사건 이후, 디베랴 사람들이 더 추가로 합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편이 더 몰려왔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이들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말입니다.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더 불어난 군중은 계속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동기가 비복음적임을 이어지는 장면에서 밝히실 것입니다.

 

 

 

 

4. 누가 진짜 제자입니까? 

우리는 가짜입니다. 

왜냐면, 군중에 쉽게 휩쓸리고, 예수님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한 소원들로 충만하며, 가장 두려운 상황에서 조차 예수님을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짜 제자들을 포기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십니다. 

제자답지 못한 제자들을 끊임없이 추적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눈물과 중보로 다루고 또 시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진짜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먼저 가진 소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진짜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군중에 휩쓸리지 않도록, 더이상 어떤 문제의 폭풍 속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도록, 우리를 제자화 시켜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