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웨이처치 설교및 강의/성경신학관련 노트정리

"무조건적 은혜 아래 있는 조건적 은혜"에 대한 Matt Marino 목사의 설명을 들어보았다.

 

https://www.sermonaudio.com/sermons/119252237151898/a?autoplay=true&popout=true

 

The King of Glory

Dr. Larry Oldham | Grace Church (PCA)

www.sermonaudio.com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1-2, 9)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2~15장에는, 무엇을 "하라"는 명령이 없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반복만 있었다.

  •  (그러다가 17장에 이르러, 할례와 관련해서 지시 명령이 등장한다.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9))

 

창 15:12-20에도,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에게 깊은 잠이 임했을 때 홧불 언약 의식을 시작하셨다.

이들은 언약 관계를 특징짓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6)

 

17장에서 나타나는 "조건"들은 급격한 변화처럼 보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구원받는 데 있어 어떤 행위 "조건"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자주 접한다. 


범위 scope에 관한 두 가지 반대되는 오류

(1) 부분에서 전체로의 오류(part-to-whole fallacy)

- 어떤 것의 부분에 해당하는 진리가 그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추론하는 오류

 

(2) 전체에서 부분으로의 오류(whole-to-part fallacy)

- 어떤 것의 전체에 해당하는 진리가 그 모든 부분에도 적용된다고 추론하는 오류

 

이 두 가지 오류는

성경을 읽거나 구원 교리(soteriology)를 형성하려는 시도에서 자주 발생한다.

https://www.reformedclassicalist.com/home/conditional-realities-within-unconditional-grace

 

Conditional Realities within Unconditional Grace — The Reformed Classicalist

When God told Abraham, “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 that I may make my covenant between me and you” (Gen. 17:1-2), he was still unpacking what Reformed theologians call the covenant of grace. For some readers, this may seem to violate the princip

www.reformedclassicalist.com

 

 

 

 


1. 부분에서 전체로의 오류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표현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이는 사실일까요? 특정 문맥에서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반대되는 것으로 명확히 자리 잡은 경우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행위가 의와 관련되는 곳은 주로 칭의(justification)에 해당합니다.

칭의는 구원의 일부이지 전체가 아닙니다. 매우 중요한 일부로서,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sola fide)"고 주장한 것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복음주의는 이러한 교리적 구분을 경시하여, 개혁주의 교리에 대해 오해를 낳게 했습니다.

특히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sola fide)가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오해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을 하나의 공로(예: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의 공로)로 변질시키거나, 믿음을 가진 사람의 주관적 요소로 전환하여 구원의 확신을 세우는 근거로 삼게 만듭니다.

 

바르게 이해된 구원론

1)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 전체의 the efficient cause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의는 칭의(구원의 법적 측면)의 유일한  the sole material cause입니다.

3) 신자의 믿음은 여전히 칭의의 법적 측면에서 the sole instrumental cause입니다.

  • 구원론(soteriology)에서 다른 보조적 효율 원인, 형식적 원인, 최종 목적 등을 더 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 설명으로 충분합니다.

2. 전체에서 부분으로의 오류

이제 반대 오류를 살펴봅시다.

누군가 “그건 행위잖아!”라고 말하는 경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해야 할 것은, “행위란 무엇인가?”입니다.

 

단순히 무언가가 "행위"라는 이유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위란 단지 어떤 행동, 즉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에너지가 소모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정의를 통해 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행위"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라, “공로로서의 행위(meritorious work)”를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노력이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일으키는 근거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선택이나 중생의 원인도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로마서 11:6이 말하듯,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하나님의 은혜와 충돌하거나 은혜와 경쟁하는 곳에서만 행위는 배제됩니다.

  • 행위가 은혜와 충돌하는 경우 = "은혜와 갈등"하거나 "은혜와 경쟁"하는 경우 (그곳에서 "행위"는 배제됨).

 

행위와 은혜의 조화

성경은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0)고 말합니다.

행위를 배제한다면, 신앙생활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는 은혜로 가능하며, 은혜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은혜가 구원의 모든 부분을 포괄한다고 해서, 은혜가 논리적 구분 없이 모든 행위를 배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은혜의 전반적인 특성이 부분에 적용될 때, 구별 없이 단순화하여 오해하는 것입니다.

행위와 은혜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행위가 구원의 조건으로서 은혜와 상충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러한 구분은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구절을 조화롭게 읽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조건, 필연성, 그리고 불안

우리의 영혼과 관련된 "조건들"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진리들과 씨름할 때, 기본적인 논리적 맹점이 작용하기도 합니다.

필연성과 조건성을 나타내는 모든 언어가 실제적인 인과 관계를 지칭하거나 완전히 가설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에서 조건성을 나타내는 단어로는 "if(만약)", "unless(하지 않으면)", "or else(그렇지 않으면)", "otherwise(그 외에는)"가 있고, 필연성을 나타내는 단어로는 "must(반드시)", "impossible(불가능한)", "necessarily(필연적으로)"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다른 책을 읽을 때와는 매우 다른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단어들과 개념들에 대해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감자만큼 단순합니다.

만약 이 내용이 다른 책의 주제라면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대할 때, 우리의 주의와 교정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두 가지 장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사랑하는 이들의 운명과 관련된 현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개인적인 경건 생활의 분할(compartmentalization)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매우 주관적이고 불안한 임무를 가진 독자가 됩니다.

대개는 시간 부족이나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이유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작위로 시작하거나 가장 익숙한 곳에 머물게 됩니다.

그 결과, 구원의 "조건과 약관"은 텍스트라는 잘 정돈된 놀이터에 지뢰처럼 터져 나옵니다.

우리는 점들을 원으로 연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대부분 처음으로 그 원을 그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책들에서처럼, 성경에서도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분명하고 명백한 진리입니다.

 


필연성의 의미

필연성이란,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현실"을 의미합니다.

"필연성"이라는 단어는 철학자들이 "분석적 진리"라고 부르는 것의 동의어로 기능합니다.

일상 언어에서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정의상으로 참"인 것을 말합니다.

진리에서의 필연성을 독자가 힘겹게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과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업에 늦은 사람은 종소리를 놓쳤다"라고 말하면, 이 진술이 매우 새로운 통찰을 준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늦은 사람들"과 "종소리를 놓친 사람들"은 같은 그룹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진술이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는 경우는, 당신이 학교에서 낙제 위기에 처해 있고, 상담교사가 "다음에 지각하면 퇴학"이라고 말했을 때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 당신은 종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며, 종이 있는지 없는지, 누군가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합리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그 불안이 진술의 본래 의미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성경 구절에서의 조건성과 필연성

요한복음 3:16을 예로 들어 봅시다. "누구든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는 구절은 예정론과 자유 의지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모든 칼빈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또는 그들이 본래의 본성으로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차이는 다른 구절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필연적 관계나 조건은 그것 자체로 인과적 행위의 순서를 나타내지 않으며, 완전히 가설적인 시나리오를 나타내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혼동은 독자가 조건과 은혜의 무조건적인 특성을 충돌시키는 원인입니다.


"걷다"와 "보다"의 혼동

성경에서 "걷다"는 표현은 대개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칭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걷다"고 하셨습니다. 왜 앞으로일까요? 걷는 방식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그렇게 흐릅니다. 이 방향은 독자가 이미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보일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 내 자녀는 어떻게 될까?"와 같은 질문의 답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 어떻게 왔지? 누가 그 공로를 얻지? 이 아이디어는 누구의 것이었지?"라는 질문들은 뒤에 있습니다—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영원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 질문은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혼동이 발생하면, 우리는 "문은 좁다"(마 7:14), "두려움과 떨림으로"(빌 2:13)와 같은 구절들을 하늘의 감독관이 던진 쇠사슬처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나에게 오라... 내가 너를 붙들겠다"는 초대의 말입니다. "좁은 문"은 모든 믿는 자가 가는 정상적인 길이며, 그것이 은혜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원리를 가지고 다양한 성경 구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건에 따른 성경 구절의 다섯 가지 범주

성경에 나타나는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을 포괄적으로 분류한 목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우리의 목적을 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조건적 현실과 은혜의 무조건적인 성격을 조화시키는 원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일반적으로 가장 어려움을 주는 다섯 가지 범주입니다.

1. 구원을 점검하거나 확인하라는 요청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라는 구절은 주관적인 필요에 대한 실천적 필요성을 가르칩니다. 신자는 본성적으로 이를 느끼며, 이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확신을 얻는 주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베드로후서 1:10, 빌립보서 2:12-13은 이러한 구절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명령형 구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발하거나 불분명한 기준으로 점검을 수행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인과적 설명이나 명확한 기준을 제공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기대하거나 실패했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2. 끝까지 인내하라는 요청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마태복음 10:22)는 구절은 조건필연성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견디면 또한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디모데후서 2:12)와 같은 분석적 진리입니다.

이러한 요청은 행해야 할 조건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늘 도성에 들어가는 모든 자가 그 입성을 ‘행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러한 요청은 인간 행동 요소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의 발이 흔들리지 않도록 보장하셨습니다. “그가 네 생명을 지키시리로다”(시편 121:7),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는 약속이 이를 확증합니다.

 

3. 배교에 대한 경고

배교에 대한 경고 구절은 "경고" 및 "배교" 구절로 불립니다. 마태복음 7:23과 요한일서 2:19는 영원히 배교하는 자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셨으며, “한때 알았지만 이제는 모른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참된 신자는 아니었으며, 눈에 보이는 교회와 형식적인 신앙 고백에서 떨어져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6:4-6은 "배교"를 언급하지만, 문맥상 이는 믿음이 없는 자들(reprobate)을 지칭합니다. 이러한 구절은 진정한 신자가 일시적으로 떠나는 경우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4.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마태복음 6:14-15의 말씀은 용서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충족시키는 무조건적인 기준을 요구하지 않으며, 용서하지 않는 자들에게 회개와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5. 선행, 사랑, 또는 거룩함의 필요성

“모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느니라”(마태복음 7:17),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등의 말씀은 행위를 요구합니다. 이는 은혜 아래 있으므로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로마서 6:14의 의미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요구는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며, 그리스도가 율법의 짐을 지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9:30; 골로새서 2:14).

 

결론
“주 예수께서 붙드신다”(빌립보서 3:12-16)는 말씀처럼, 성경의 조건적 구절은 믿음의 여정을 위한 방향성을 제공하며, 은혜와 상충되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의 삶에서 영적 성장의 표시로, 은혜의 증거입니다.

 

 

 

 

 


요약 하자면... 

Matt Marino의  "조건적 현실과 무조건적 은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성경적 언약에서 제시되는 조건적 요소들 간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고 있음.

특히 아브라함과의 하나님의 언약에 초점을 맞춰, 이러한 개념을 오해하게 만드는 일반적인 논리적 오류들을 설명하며 두 개념을 조화시키기 위한 통찰을 제공함.

 

하나님의 은혜가 무조건적이지만,

성경에 언급된 조건들은 은혜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며 특정 목적을 위해 존재함.

올바른 맥락을 이해하고 논리적 오류를 피함으로써 신자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 안에서 조건적 현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음.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은 순서 전개로 설명함:

  1. 아브라함과의 언약:
    하나님의 언약은 무조건적인 약속과 특정 조건을 모두 포함하며, 은혜와 순종의 조화를 보여줌. 
  2. 논리적 오류 지적
  3. 조건의 목적:
    성경에서의 조건들은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함.
  4. 필연적 진리
  5. ‘행위’에 대한 오해:
    성경에서 '행위'가 항상 공로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문맥의 이해가 중요함.
  6. 은혜와 선행:
    신자들의 선행은 은혜로 가능하며, 이때는 은혜와 상충되지 않음.
  7. 이해의 성숙
  8. 개념의 조화

 

 

-느낀점:

왜 장로교 신학을 한 사람들은 말을 현학적으로 하는걸까...??

그럼.... 혹시... 설마...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