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토리 요약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내려온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의 법을 전달한다.
또한 그에 파생되어 나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법"을
종의 법, 살인에 관한 법, 패륜아에 대한 법, 그리고 사람을 후린 자(납치범?)에 대한 법을 통해 알려준다.
2. 하나님이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
(1) 나는 말씀으로 네게 임한다.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이 모세와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임하셨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요 1:1-3).
그분은 내게도 오셨다 (고후13:5).
나는 그분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도록 나를 내어 드려야한다.
내 생각은 그분의 생각으로 온통 뒤덮혀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내 몸을 그분의 말씀이 지배하도록 내맡겨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마음이 되도록, 나는 나를 거부하고, 그대신 말씀을 반복해서 마음에 부어넣어야 한다.
(2) 너는 온전히 나의 것이다.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과 나의 친밀한 관계를 요구한다.
십계명은 시작부터, "나는," "너를," "네게,"라는 친밀한 관계의 언어를 사용한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나는 네(너의),......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나는 너의,......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나는 너의......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그 내용은 1:1의 대화이다.
하나님과 나는 개인적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이다.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대해야 한다.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혀야 한다.
(3) 너는 우상숭배를 멈추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나는 오늘도 축복과 저주 사이에 서 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우상이 있으면 나는 저주를 받고, 그렇지 않으면 축복을 받는다.
축복의 길은 단순하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축복의 길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매우 가깝고 개인적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하나님이 질투하실 정도로 개인적인 관계다.
하나님은 내게
나를 위한 어떤 우상제작도 금지시키셨다.
나는 내가 섬길 것을 만들면 안되는 운명이다.
나는 내가 의지할 것을 만들면 안되는 운명이다.
내 마음이 하나님 섬김으로 가득할 때 나는 축복된 존재가 된다.
김용의 선교사님의 무소유, 종신, 공동체의 3원칙이 떠오른다.
그분은 예수님만 따르기 위해 이 3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하셨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원칙이 다 이해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나"사이의 온전함을 지키는 것의 엄준함을 볼 때, 조금 더 이해가 간다.
김선교사님은 무소유와 종신과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과 자기 자신 사이의 모든 우상을 불살라 잿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렸다.
그의 처절한 우상 거부 인생을 볼 때 나는 숙연해진다.
나는 그정도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만든 어떤 우상(내가 의지할 대상)을 세우지 않는 삶을 살기위해 몸부림 쳐 봤던 적이 있었던가.
이런 생각은 내게 두근거리는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두근거리는 공포도 준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섬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니...
그정도로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무한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섬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려면, 나는 더이상 내가 아닌 존재가 될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나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일상으로 살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김용의 선교사님이 또 떠오른다.
그분은 "무소유, 종신, 공동체"의 3대 원칙을 세우기까지
어떤 자기 부인의 세월을 보내셨을까?
나는 아직 그정도의 자기 성찰 수준이 없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먹고 사는 일"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난 2년 반의 빵집 장사를 통해 나는 먹고 사는 일, 그러니까 "소유 숭배"는 통과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명예"는 아직 없애지 못한 것 같다.
왜냐면, 어제 기도할 때
기도에 방해된 포인트가 바로 "명예"였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내는 것"이 내게는 우상인것 같다는 생각을 어제 기도때 했다.
(어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이스라엘 광야로 100명을 보내서 일주일간 광야 복음학교를 진행해보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릴 때였다.
나는 그 일을 주도 하고 싶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도 중
그 일을 당사자 100명 & 그 리더십과 나누며 함께 기도할 것에 대한 감동이 일었고, 나는 그 감동을 계속 거부했다.
왜냐면, 만약
그 당사자들이 기도 중 감동을 받아 스스로 그 일을 진행하게 되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주도했을 때 일어날 칭찬과 사랑을 빼앗기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을 용납하기 싫었다.
이 감정은 나를 놀라게 했다.
일주일간의 이스라엘 광야 복음학교가 진행되는 것 자체를 원하여서 기도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를 통해서" 그 일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50%쯤은 섞여 있는 듯 했다.
왜 그랬을까?
성령 하나님이 어떤 내적 감동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일을 원하신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소원이 이뤄지는 것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일은 멋져 보였고,
그래서 내가 주도해 보고 싶었기에,
뒤에서 기도하기는 싫었던 것 같다.
나는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하나님의 소원이
그저 누군가를 통해서든 이뤄지는 것 보다는,
나를 통해서만 이뤄지기를
나는 대체 왜 원하는 것일까?
거기에 거룩한 것이 있나?
물론,
섞여 있기는 하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 + 하나님의 일을 내가 주도함으로써 뭔가 개인의 정욕을 채우려는 욕망"
그런데,
만약 섞여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주셨던 말씀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나는 너의......"라는 반복에 등장하는 그 온전한 관계를 반영하는 상태는 무조껀 아니다.
....................................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만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나의 우상인것 같다.
하나님이 같은 역사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하시는 것을 나는 섞인 마음을 가지고 질투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실 때 함께 높여 주시길 나는 많이 원하는 것 같다.
아론보다 모세가 되길,
이드로보다 모세가 되길,
십보라보다 모세가 되길 원하는 것 같다.
나는 왜 하나님이 나만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나만 통해 일하셔야,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나도 찬양하는 것을 원해서라면, 나는 정말 큰일이다.
그런 생각은 우상숭배적이다.
내가 하나님이 높임 받는 자리에 하나님과 함께 올라서기를 사사로이 욕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 마음을 소멸해야 한다. 불살라 잿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없애야 한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님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일이 나를 통해 실행 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도 더불어 사랑받게 되는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사랑 받는 것이
나의 우상이 된다.
평소 "내 귀가 얇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비춰 나의 우상을 가정해보니,
내 귀가 얇은 이유는 내가 만든 우상을 섬기는 한 태도가 될 수 있다.
(귀가 얇은 것 = 나는 남의 말에 가능한 최선으로 동의하기 위해 이해하려 애쓴다)
귀가 얇은 것, 타인의 문화코드를 빨리 읽고 그에 걸맞은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그에게 "사랑 받는 것"을 쉽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ㅜㅠㅜㅠㅜㅠㅜㅠㅜㅠㅜㅠㅜ
나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섬기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사랑받는 일"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나는 홀로 잠잠히 하나님과 둘이서만 거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에 만족하며,
아니 하나님의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나는 너의...."라는 말씀 관계만 가지고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과 나,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친밀한 것으로
100% 만족할 수 있을까...
이 둘 사이에 1%라도,
나의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섞여 있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전혀 없고
하나님만 완전히 계신 마음의 상태를
얻고 싶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득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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