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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독서

노자, 도덕경 1~3장.

제 1 장

道可道,非常道。도 가 도, 비 상 도. 名可名,非常名。명 가 명, 비 상 명.

  1. 직역: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2. 설명1: 노자가 말하는 "도(道)"란,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이자 본질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말이나 글로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신비롭고 무한한 본질을 가진다. 즉, 우리가 말로 설명하는 순간, 도의 진정한 본질은 왜곡되거나 제한된다.
  3. 설명2: 한편, 노자가 말하는 "명"(이름)이란 사물과 현상을 구분하고 정의하는 인간 인식의 수단이다. 하지만 "명"으로는 본질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명"으로는, 그러니까, 인간의 인식과 표현으로는, 단지 사물의 표면적인 것을 표현하는 데 그친다.
  4. 예시: "바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부는 공기"이다. 이것만으로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소리, 감촉, 에너지, 영향......등을 설명할 수 없다. "도"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각자의 경험 근거에 의한 인식 작용이 발동하지만, 그것이 "도"의 진짜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도"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보다 더 큰것이라서, 이름을 붙여도 그 대상을 나타내는 전부일 수 없다. 
  5. 생각: 내 존재에서 나온 인식으로는 피조세계의 본질이나 작동 원리를 꿰뚫을 수 없다. 이것은 인간 지성의 상호작용으로도 안되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러한 대상이시다. 그분에 대해 인간 스스로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분에 대한 어떤 지적 설명도 그분의 참 모습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다만 그분이 스스로를 계시 해 주실 때만 인간은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해 인식 할 수 있게 된다.
  6. 연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the eternal God. So tell them that the LORD, m) whose name is "I Am," has sent you. This is my name forever, and it is the name that people must use from now on (Ex. 3:14-15)

 

無名天地之 무 명 천 지 지 시; 有名萬物之母。유 명 만 물 지 모.

  1. 직역: 무명이(이름이 없는 것,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근원적 본질인 "도"가) 천지의 시작(근원)이다; 유명(이름이 있는 것,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만물의 현상, 도의 현상에 대해 인간이 이해를 하고 이름을 붙인 부분)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2. 예시: 나무가 되기 전의 씨앗은 나무라는 이름이 없지만, 나무의 본질이다; 나무에 사과 열매가 맺히게 되면, 그 나무를 향해 "사과나무"라고 이름을 붙여, 존재를 규정하게 된다. 이때 "사과나무"라는 "유명"은 애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인 씨앗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과나무씨앗"이 아니라, "사과나무"를 그 존재의 본질로 인식하게 된다.  
  3. 생각: 이름 붙여진 현상을 모체로 인식하는데서 그치지 말고,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라. 
  4. 연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8) 

 

故常無欲 고상무욕,以觀其妙 이기관묘, 常有欲 상유욕, 以觀其徼 이관기요.

  1. 직역: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으면 그 경계를 본다. 
  2. 설명: "무욕" 상태에서는 사물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그 깊이를 깨닫게 된다. 욕망이 없을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반면, "유욕" 상태에서는 사물의 표면적이고 제한적인 측면만을 인식하게 된다. 욕망이 우리의 시야를 좁히기 때문이다.
  3. 예시: 무욕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목양 소명을 위해서만 설교 사역을 준비하고 실행한다(무욕의 상태). 이때 성경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과 목양의 섬세한 묘미를 누리게 된다. 반면, 유욕의 상태에 있는 설교자는 예컨데 "명성"을 얻고자 설교사역을 진행한다. 이때에 그는 성경을 보고도 자신의 설교사역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하며 성경을 경계(표면적인 형태)로만 인식하게 된다. 
  4. 연결: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지기"이다 (마 16:24-25).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옛 자아가 매일 죽어야 한다 (고전 15:31).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에서 시작된다 (갈 2:20). 내게 죽는 것도 유익한 근거가 그리스도께 있다 (빌 1:20-21). 이들은 모두, 나의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는 삶을 통해 진행된다 (롬 8:6). 한편, "싸움의 정욕"도 떠오른다 (약 4:1). 그러고보니, 타락도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창 3:6). 타락이후 욕심에 근거한 인생은 지금까지 지속중이다. 이에 대해 성경이 내게 다음과 같이 할 바를 지시해준다: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차 량 자, 동 출 이 이 명, 동 위 지 현. 현 지 우 현, 중 묘 지 문.

  1. 직역: "무와 유는 같은 근원에서 나오지만 이름이 다르다. 이를 신비라 부른다. 현묘하고 또 현묘하니, 모든 묘함의 문이다."
  2. 설명: 앞 구절의 "무욕"과 "유욕"이 서로 대립적으로 보이나, 실상 동일 근원을 갖는다. 이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통합적으로 이해하게되면, "현(玄=현묘함, 깊고 오묘함)"을 깨닫게 된다.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 조화가 있음을 말한다. 
  3. 예시: 한 설교자가 유명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설교사역을 시작했으나, 그 과정에서 말씀 연구의 본질에 다가가게 됨으로써, 욕망을 초월하여 순수한 설교자가 된다면, 그 설교자는 유욕과 무욕을 통합한 말씀의 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상반된 것들의 조화란 "현지우현" 즉 끝없이 깊고 신비로운 본질이다. 세상과 존재의 근원이 무한히 깊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신비로움이 모든 "묘"의 시작점("현문")이다. 상반된 것들의 조화를 깨달을 수록, 더 큰 신비와 연결된다. 피조세계의 아름다움은 여기서 흘러나온다.  
  4. 연결: 두가지 상반된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창조에서 부터 등장한다. 대립적 상태의 "혼돈"과 조화의 상태인 "질서"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나왔다 (창 1:1-3). 혼돈의 물이 궁창(하늘)을 사이에 되고 질서가 잡혔고 경계가 정해졌다(창 1:6-8). 빛과 어둠 사이에 질서와 조화가 잡혔다 (창 1:3-5). 창조의 하나님은 복음을 통한 인류 재창조의 사역에서도 같은 일을 진행하셨다. 완벽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셨다. 그분만큼 신비한 존재는 없다. 인간과 하나님의 조화만큼이나 전 우주적 스캔들은 없다. 그분 안에 가장 상반된 두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신비의 핵심이다. 공의적 심판과 사랑의 구원이라는 상반된 두가지의 사역이 그분 안에 완벽히 조화를 이루고 담겨있다. "차량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이라는 말을 통해 나는 복음의 신비를 더욱 생각하게 된다. 

 


  1.  

제2장

天下皆知美之為美,斯惡已;皆知善之為善,斯不善已。
천 하 개 지 미 지 위 미, 사 악 이; 개 지 선 지 위 선, 사 부 선 이.

  1. 직역: ""천하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 알면, 그로 인해 추함이 생기고, 사람들이 선함을 선함이라 알면, 그로 인해 선하지 않음이 생긴다."
  2. 설명: 한 문화권에서 특정 외모를 아름답다고 정의하는 순간, 상대적으로 "추하다"고 보는 대상이 생긴다. 또한 누군가에게 선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3. 예시: 사사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총회가 벤냐민 지파를 심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제는 양측 모두 "악"이라는 데 있다. 덜 악한 그룹이 더 악한 그룹을 심판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둘 다 악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차악이 최악보다 선이다. 인간이 판단하는 선악은 상대적이다. 그래서 허무하다. 오직, 하나님의 선악판단만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안전하고 평안하며 정의롭고 선하다. 
  4. 생각:
  • 사사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제는 "그나물에 그밥"이라는 데 있다.
    양측 모두 "악"이라는 데 있다.

    덜 악한 그룹이
    더 악한 그룹을 심판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둘 다 악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차악이 최악보다 선인 셈이다.

    인간이 판단하는 선악이란,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껏
    모두 상대적이다.

    그래서 허무하다.

    오직, 하나님의 선악판단만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안전하고 평안하며 정의롭고 선하다.

    인간판단의 상대성에 대한
    동양철학자 노자의 말도 떠오른다.

    #天下皆知美之為美 천하개지미지위미
    #斯惡已 사악이;
    #皆知善之為善 개지선지위선,
    #斯不善已 사부선이。

    직역하자면...
    "천하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 알면, 그로 인해 추함이 생기고, 사람들이 선함을 선함이라 알면, 그로 인해 선하지 않음이 생긴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특정 외모를
    "아름답다"고 정의하는 순간,

    상대적으로
    "추하다"고 보는 대상이 생기는 것 처럼,
    인간 판단의 선도 악도
    상대적이다.

    한마디로, 누군가에게 선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한 행동이 될 수 있고,
    내게 옳음이
    네게는 그름이 될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다.
    인간의 어떤 선도 차악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어떤 심판도
    상대적 심판일 뿐이다.

    성경진리로도
    지성진리로도
    이 생각은 참이다.

    그래서 안전한 심판이란
    성경에 기록된 최후의 심판때에서야 완성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절대적善이고
    인간의 심판은 상대적善이다.

    로마서 2장에 의하면,
    인간 판단(상대적 善)이란,
    절대선의 등장 앞에 놓인,
    악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서2장.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1-5)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1. 직역: "있음과 없음은 함께 살아가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세워가고, 길고 짧음은 서로 형성되고, 높고 낮음은 함께 기울어지며(사람(亻) + 경사(頃) → 사람이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친다는 뜻을 상징; 높음과 낮음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한쪽이 기울면 다른 쪽이 따라 기울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묘사), 본연의 소리(자연의 근원적이고 순수한 소리)는 인위적 음성과(환경과 감정이 더해진 소리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2. 예시들: "유무 상생" 빈 캔버스(없음)가 있어야 그림(있음)을 그릴 수 있음. 그림은 캔버스라는 공허함 속에서 의미를 찾게됨; "난이 상성" 등산은 오르막길(어려움)과 내리막길(쉬움)이 반복. 오르막이 없다면 내리막의 편안함도 느낄 수 없음; "장단 상형" 한 연극에서 주인공(긴 시간 동안 등장)과 조연(짧은 등장)이 서로 대비되며 극의 긴장감을 만들게 됨; "고하 상경" 높은 산은 주변의 낮은 평지 덕분에 "높다"고 느껴짐; "음성 상화" 비가 창밖을 두드리는 상황과 어울어지는 어떤 대화; "전후 상수" 달리기 경주에서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야 뒤따르는 사람이 존재하며, 서로의 위치가 관계를 형성하게 됨. 

생각들: 

(1) 대립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상태: 남녀, 노소, 빈부, 어려움과 쉬움, 성공과 실패...... 서로 상극에 있는 것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대립적 상태에 있는 것중의 최극단에 하나님과 죄인 사이가 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복음의 보배를, 이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죄인의 믿음의 마음에 담아 주셨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10) 

(2)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차이를 갈등으로 보지 말고, 서로를 보완하며 조화를 이루는 기회로 삼아봐야겠다. 그런데 이부분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는 영적 고뇌의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복음의 재창조의 사역을 진행해주신 주님께로 더욱 달려나가는 믿음의 일을 해야함을 알 수 있다. 

(3) 상호의존적인 존재: 나는 INTJ-T이지만, 상호의존성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겸손과 감사의 태도를 유지해야겠다. 한편, 이 부분 역시 주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보면 더욱 유익하다.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조금이라도 무관한 삶을 시도라도 해서는 안되겠다. 매 순간 복음 안에서 복음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야겠다. 

 

 

 


是以聖人處無為之事,行不言之教。
시 이 성 인 처 무 위 지 사, 행 부 언 지 교.

  •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물며, 말 없는 가르침을 실천한다."

萬物作焉而不辭,生而不有,為而不恃,功成而弗居。
만 물 작 언 이 부 사, 생 이 부 유, 위 이 부 시, 공 성 이 불 거.

  • "만물이 스스로 생겨나게 하고 소유하지 않으며, 일하고도 의지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자랑하지 않는다."

夫唯弗居,是以不去。
부 유 불 거, 시 이 불 거.

  • "다만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1.  

제3장 - 무위의 정치와 겸손한 삶

不尚賢,使民不爭;不貴難得之貨,使民不為盜;不見可欲,使民心不亂。
부 상 현, 사 민 부 쟁; 부 귀 난 득 지 화, 사 민 부 위 도; 부 견 가 욕, 사 민 심 부 란.

  • "현명한 사람을 높이지 않으면 백성이 다투지 않고, 귀한 재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둑질하지 않으며, 욕망을 자극하지 않으면 백성이 혼란스럽지 않다."

是以聖人之治,虛其心,實其腹,弱其志,強其骨。
시 이 성 인 지 치, 허 기 심, 실 기 복, 약 기 지, 강 기 골.

  • "성인은 백성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

常使民無知無欲,使夫智者不敢為也。
상 사 민 무 지 무 욕, 사 부 지 자 부 감 위 야.

  •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지식과 욕망이 없는 상태에 머물게 하고,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이 감히 간섭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為無為,則無不治。
위 무 위, 즉 무 부 치.

  • "무위로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