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성경 통독을 왜 해야 할까?
1. 성경의 명령이니까.
우리는 왜 성경을 통독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올라야 할 대답은 간단하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그 자체가 통독적 접근을 요청한다. 이것은 선택해보라는 제안이나 권면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다루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누가복음 24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눈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는 말씀 속에는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확고한 선언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단지 몇 구절만 인용하지 않으셨다. 율법서, 선지서, 시가서를 포괄하는 히브리 성경 전체의 구조를 따라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성경을 다시 풀어주시면서, 그들의 눈을 열어 ‘전체 이야기’를 보게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통전적 시각”을 심어주셨다. 그것이 부활 이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성경을 읽는 방식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베드로의 설교 역시 이와 같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요엘서와 시편을 인용하며 성령 강림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한다. 베드로는 성경의 부분을 따로 떼어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 전체의 흐름 안에서 예수님의 구속 사건을 조명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의 설교는 구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진행되었다.
더 나아가, 평신도 스데반 역시 통전적인 설교를 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유대인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설교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요셉, 모세, 다윗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한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설교였다. 스데반은 ‘통전적 성경 읽기’를 통해 얻은 깊이 있는 시선으로 복음을 해석하고 선포했다.
성경 통독은 교회의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여기서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다. 교회는 ‘부분’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전체’를 전수하는 공동체다.
이처럼 성경통독은 여러 신앙 훈련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성경 통독은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며, 예수님과 사도들과 성도들이 실천했던 본래적인 신앙 방식이다. 성경은 본래 전체로 읽히기를 요청한다. 그것이 말씀의 흐름이며, 구속사의 구조이며, 교회의 근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전체’로 읽는 통독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단지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2. 교회는 성경의 터 위에 섰으니까.
교회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교회의 본질은 건물도 아니고, 프로그램도 아니며, 사람의 수나 조직력에 있지 않다. 교회는 오직 말씀 위에 세워진 공동체다. 이 진리를 곧장 받아들이면,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교회는 말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정답은 단 하나다. 전체로.
성경을 전체로 읽지 않는 교회는 마치 기초 없이 세운 건물과 같다. 어느 정도 올라갈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무너진다. 교회가 말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은, 단지 성경을 인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흐름과 맥락, 구조와 중심 메시지를 함께 품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에서 분명히 명령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을 따르는 교회라면, 성경 전체를 가르쳐야 한다. 성경의 일부, 혹은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만 반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전체 메시지’를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은 ‘전체 말씀’을 조명하시는 분이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성경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성령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통전적인 깊이와 폭을 경험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1장 5절 이하의 말씀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이 표현은 단순한 수사적 과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배우고 따르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성경의 진리를 풍성하게 소유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그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주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말씀의 충만함 위에 세워진다.
또한 에베소서 2장 20절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계시의 공동체’다. 교회의 뿌리는 성경 전체에 닿아 있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위기를 말한다. 교인의 수가 줄고, 세상의 신뢰를 잃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전체를 가르치지 않고, 전체를 읽지 않고, 전체를 설교하지 않을 때 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로 품을 때만, 다시 그 본래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다. 성경통독은 그 회복의 첫걸음이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경건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토대 작업이다.
3. 성경은 한 권의 책이니까.
성경은 66권이다. 그러나 그 66권은 서로 다른 책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열린 창문들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여러 시대, 수많은 인물과 장소를 지나가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그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요한계시록에 이른다.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추적, 예수님의 구속, 그리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이 전체 이야기를 모르면, 우리는 성경을 오해하게 된다. 종종 사람들은 성경을 사전처럼, 혹은 응급처치 키트처럼 사용한다. 위로가 필요할 때, 격려가 필요할 때, 삶의 문제 앞에서, 한 구절씩 뽑아 쓴다. 그렇게 읽은 성경은 편리하지만, 얕다. 그리고 어느새 왜곡된다.
성경은 단편적이거나 파편적으로 읽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며, 연결된 이야기다. 그 흐름을 모른 채 일부만 떼어 읽는 것은 마치 영화 중간 장면만 보고 결말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이순신 장군의 위인전을 중간까지 읽고는 왜 유관순 이야기는 없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엉뚱한 질문일 것이다. 또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읽으면서 각 장면마다 '가장 예쁜 사람'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보고 이야기가 모순된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전체 이야기를 아직 다 읽지 않은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 자주 암송하는 말씀들이라도, 전체 이야기 안에서 그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깊이를 놓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문장’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하나의 ‘이야기’로 왔다.
성경은 전체를 알고 나서야 부분이 이해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전달 방식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흐름 안에서 나의 자리를 찾는 일이다.
성경통독은 그 흐름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며, 어떤 결말을 향해 역사를 이끌어가시는지, 성경을 통독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서사’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
4. 성경 통독을 할 때, 부분도 보이니까.
우리는 흔히 “숲을 보라”는 말을 듣는다. 전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나무 하나하나의 위치와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경도 그렇다. 전체 이야기를 읽지 않으면, 그 안의 구절 하나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을 읽는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성경을 많이 읽었는데, 잘 모르겠다.” 그 말 속엔 보이지 않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바로 ‘통독’이다. 단편적인 묵상이나 부분 암송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마치 퍼즐 조각만 들여다보며 그림을 맞추려는 것과 같다.
성경은 퍼즐이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흩어놓으신 구속의 조각들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하나 맞추어간다. 그런데 퍼즐을 맞추기 전, 우리는 늘 먼저 전체 그림을 본다. 상자 위에 인쇄된 완성된 그림이 있어야, 각 조각이 어디에 들어가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성경통독은 바로 그 ‘그림’을 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보자.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는 ‘가정 회복’이나 ‘꿈의 성취’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보면,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언약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속 도구였다. 다시 말해,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부분을 넘어 전체를 읽는 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또한 욥기의 고난도 그렇다. 고난의 이유를 이해하려면, 욥기만 읽어서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인간의 죄, 의인의 고난, 구속의 은혜를 통전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욥기의 메시지가 깊어진다. 성경 한 권 안에 담긴 고난의 의미는, 성경 전체 안에서 읽힐 때 확장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통전적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뜻을 좁은 시야로 가늠할 수 없다. 전체 이야기를 모르면, 우리는 종종 본문을 오해하거나, 잘못 적용하기 쉽다. 때로는 반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부분만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독하면 할수록, 우리는 부분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전에는 그저 외워두었던 구절이, 이제는 맥락 속에서 말한다. 어제 묵상했던 본문이, 오늘 통독한 이야기 속에서 빛난다. 하나님이 숨겨두신 복선과 연결고리가 하나씩 드러난다. 성경은 연결되어 있고, 살아 있다.
성경을 통으로 읽을 때, 부분은 살아난다. 그리고 그 부분이 연결되며,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점점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통독의 열매이며, 말씀 묵상의 토양이다. 깊은 묵상은 깊은 통독 위에 세워진다.
통독은 결코 분석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먼저 종합, 그 다음 분석이다. 전체를 보아야 조각이 보이고, 전체를 읽어야 본문이 선명해진다. 성경통독은 단지 빠른 읽기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찾는 가장 정직한 여정이다.
5.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성경을 이렇게 가르치셨으니까
성경통독을 말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의 주제이실 뿐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신 분이셨다. 그분의 가르침 방식은 단편적이거나 순간적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성경을 전체 이야기로 풀어주셨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다가가셨다. 낙심과 혼란에 빠진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대신,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눅 24:27).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힌트를 얻게 된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성경 전체를 풀어가며 설명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씀의 구조와 흐름이 보이자, 그들의 심령이 반응한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열한 제자 앞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설명하셨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히브리 성경의 세 부분—율법서, 선지서, 성문서—전체가 자신을 예언하고 있음을 밝히셨다.
이것은 통독적 관점이다. 예수님은 ‘본문 중심’이 아니라 ‘전체 중심’으로 가르치셨다. 한 구절, 한 사건만으로 진리를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진리를 보여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한다. 그분이 성경을 가르치신 방식은, 곧 제자 훈련의 모델이다.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보고, 그 안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따라가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다.
예수님은 성경을 분석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여 해석하셨다. 그분은 단지 신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가 아니셨다. 제자들의 삶과 현실을 성경의 이야기 속에 위치시키는 말씀의 인도자셨다.
성경통독은 예수님의 방식이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안에서 성경을 다시 읽는 길이다. 그러므로 통독은 단지 ‘읽기’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도의 방식이다.
말씀을 배우는 최고의 길은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성경을 보고, 예수님처럼 성경을 풀고, 예수님처럼 성경을 삶에 적용하는 것. 이것이 통독의 목적이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렇게 성경을 통째로 읽고, 믿고,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 방식이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는 제자 훈련의 본질이다.
3장. 성경통독을 어떻게 해야 할까?
1. 성경 통독은 예수님의 제자 훈련 방식임을 기억하라.
성경통독은 단지 말씀을 많이 읽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제자가 되는 길이며, 동시에 제자를 세우는 방식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함께 걷고 먹고 자는 일상 속에서 그들의 삶을 빚어가셨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권능을 주시고 사람들에게로 보내셨다. 단지 말씀을 많이 배운 제자들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자들을 예수님은 세우셨다.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을 전하고 살아내게 하셨다.
제자도는 지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여기서 ‘가르치라’는 말과 ‘지키게 하라’는 명령 사이에는, 삶의 동행이 들어 있다.
예수님의 방식은 분명했다.
첫째, 말씀을 들려주시고.
둘째, 말씀 안에서 같이 사시고.
셋째, 그 말씀대로 살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통독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지식의 축적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재구성을 위해 읽어야 한다. 제자 훈련이란, 단순히 책상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함께 나누며 걷는 길 위에서 일어난다.
제자를 세운다는 것은, 그에게 성경 한 구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따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성경 전체를 품어야 한다.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빚어야 하고, 성경의 흐름이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을 넘나들며 제자들에게 구속사의 흐름을 보여주셨고, 그 말씀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셨다. 성경을 읽고 가르치고 삶으로 동행하는 이 3중 구조가 곧 제자도의 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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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교회와 성도에게도 이 방식은 유효하다.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않으면, 제자도는 지식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성경을 통독하며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잠기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될 수 있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20).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명령을 보라. 이것은 제자도와 교회 사역의 방향을 뿌리째 결정짓는 핵심 구절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단순히 윤리적 명령이나 교훈적인 비유가 아니었다. 그분은 창세기에서 시작해 선지자들과 시편, 그리고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까지 아우르는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 전체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말한 ‘모든 것’은 바로 그 전체 이야기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 전체에 기록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을 풀어 설명하셨다. 제자들의 눈은 열렸고, 마음은 뜨거워졌다. 이처럼 ‘모든 것’은 한 구절, 한 교훈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성경 전체의 서사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가르치는 것과 지키게 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정보 전달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삶 속에 새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성경통독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보게 된다. 창세기의 첫 창조, 출애굽의 구원, 율법의 뜻, 선지자의 눈물, 시편의 고백, 복음서의 십자가,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완성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구원의 초청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전체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시는 그분의 음성이다. 이 초청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전편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을 배우고, 가르치고, 지키게 할 수 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엇을 하셨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그분은 제자들을 찾아가서 성경통독을 함께 하셨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은 두려움과 의심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먼저 그들의 평안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꾸짖거나 질책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을 열어 설명하신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눅 24:44)
여기서 말하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란 성경 전부를 이야기 한다. 이때 성경통독의 관점이 적용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에 관한 모든 예언이 성경 속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음을 먼저 상기시키신다. 제자들은 현실 속 사건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해석의 열쇠는 다름 아닌 성경 전체에 있었다. 예수님은 그 열쇠를 쥐고 성경의 문맥을 풀어주시며, 제자들의 이해를 성경 안에서 정돈하셨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도 여전히 의심하던 순간에, 예수님은 음식을 드시며 그들의 감각에 맞추셨다. 그러나 결정적인 전환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고, 구속사의 큰 흐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고난받고 죽으셨는지를 보여주셨다.
이 장면은 부활 이후 40일 동안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상징적으로 요약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끌어안고, 말씀 안으로 이끄셨다. 감정적 회복이나 사역 지시보다 앞서, 성경의 구조와 목적, 중심 메시지를 다시 가르치셨다.
이는 오늘날의 성경통독이 어떤 방향을 가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경은 여러 책들중의 하나가 아니다. 텍스트로 기록되어있는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다른 책들과 다른 거대한 차별점이 있다. 성경은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증언하여, 구원에 이르는 충분한 지식이 있게 하는 책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함께 성경을 열어가셨다. 성경 통독을 진행하셨다. 이는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라고 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성경 통독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가게 하는 안내자와 같다.
예수님과 다시 성경통독을 한 제자들의 변화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했고,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명했으며, 성경을 새로운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 모든 변화는 성경 통독에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시던 그 순간, 말씀은 지식이 아닌 ‘사건’으로 다가왔고, 그 안에서 그들은 새로 태어났다.
4. 초대교회는 성경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오순절 이후 제자들의 설교는 이전과 달랐다. 그들의 말은 힘이 있었고, 방향이 분명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요엘서와 시편을 인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다. 이것은 그저 그런 교훈 이야기가 아니었다. 성경 통독적 해석이었다. 그는 구약을 ‘배경’으로 두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성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하는 중심 메시지의 ‘뼈대’로 보여주었다.
이 흐름은 사도행전 3장에서도 이어진다. 성전 미문 앞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 이후, 베드로는 모세, 사무엘, 아브라함의 언약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그 약속의 성취자임을 선포한다.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는 특정 본문에 갇히지 않고, 성경 전체를 가로지르는 해석의 여정이었다.
사도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는 말씀을 중심으로 모였다. 떡을 떼고 기도하며, 사도의 가르침에 전념했다(행 2:42). 그들은 조직보다 말씀에 반응했고, 규칙보다 복음의 능력에 붙들려 있었다. 성경을 통해 복음이 풀릴 때, 사람들은 변화되었다.
이방 교회로 확장되면서, 이 말씀 중심 구조는 더욱 분명해졌다. 에베소서 2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중심에는 복음이 있고, 그 복음은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교회는 예배의 장소이기 전에, 말씀 위에 세워진 공동체였다.
초대교회 리더십도 마찬가지였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기록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 위에 서라고 권면하며,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욱 성경을 가까이 하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성경을 통해 복음을 해석했고, 그 해석을 통해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에게 성경은 단지 참고자료가 아니었다. 방향이었다. 기초였다. 생명이었다. 말씀을 배우는 일은 삶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었고, 가르치는 일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5. 성경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성경 책은 장르도 다양하고, 저자도 많고, 시대적 배경도 겹겹이 쌓여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다양성 위로 흐르는 하나의 강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 66권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듯 보이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수렴된다.
구약은 약속의 이야기다. 창조에서 시작해 언약, 율법, 예언으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구조는 한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약은 그 약속의 성취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은 구약에서 말한 모든 예언의 실현이며, 이후의 서신서와 계시록은 그 복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지형도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은 단지 여러 책이 엮인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이야기다. 각 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각 사건과 인물이 전체 이야기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성경을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는 율법을 재해석하지 않으셨다. 완성하셨다. 또한 마태복음 5장 후반부에서는 율법의 문자보다 깊은 정신을 가르치셨다. 형식을 넘어 본질을 보게 하셨고, 외형을 넘어 중심을 짚으셨다.
누가복음 24장에서도 예수님은 율법, 선지자, 시편 곧 구약 전체를 들어 자신에 대한 말씀이라고 밝히셨다. 이것은 단순한 자의적 해석이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분을 향해 있었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가르치셨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먼저, 흐름을 따라야 한다. 연결된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각 권마다 핵심을 파악하되, 그 핵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 중심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의 외워야 할 지식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야 할 초청이다. 성경 속 인물들이 하나님과 부딪히며 살아갔듯, 오늘 우리도 그 말씀과 충돌하며 자신의 삶을 다시 세워가야 한다.
통독은 그 충돌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첫걸음이다. 맥락 안에서, 구조를 따라, 말씀 전체를 향해 걸어가는 시간. 그것이 진짜 성경읽기의 시작이다.
[헤브론 수업 노트 내용]
1. 성경통독을 해야 하는 4가지 성경적 이유.
(1) 예수님의 가르침 (눅 24:36~49).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뿐만 아니라 부활 후 40일 동안도
제자들에게 성경을 통전적(通全的)으로 가르치셨습니다.
(2) 사도들의 설교 (행 2:16~36)
사도들도 구약 전체를 통전적으로 설교했습니다.
(3) 성도들의 설교 (행 7장)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구약 전체를 통전적으로 설교했습니다.
(4) 교회의 터는 성경
① 교회의 역할 in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② 성령의 역할 in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③ 교회의 교회다움 in 고전 1:5-9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④ 교회의 터 in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교회 in 고린도전서1:1-3)도 성경을 한권의 책 즉, "전체"로 다루며 읽고 배우고 가르칩니다.
2. 성경통독의 2가지 상식적 이유.
(1) 성경은 한권의 책이다.
예) 이순신 장군 위인전 책을 중간만 읽고서, 왜 거기에 유관순이야기 없냐고 따지는 사람
예) 영화 한편, 중간에 15분 보고 나와서 전체를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
예) 백설공주 이야기: 각 챕터에서, 거울이 말하는 예쁜 사람이 다르다. 전체를 볼 때, 각 챕터가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
전체의 스토리 안에서 각각의 부분을 파악해야 한다.
예) 퍼즐 맞추기 할 때 전체 그림 먼저 본다.
(2) 숲을 보고 나서 나무를 본다.
전체의 스토리 안에서 각각의 부분을 파악해야 한다.
예) 퍼즐 맞추기 할 때 전체 그림 먼저 본다.
예) 편백나무가 필요한 가구 업자
예) 성경 종합 - 성경 분석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이를 살펴보면, 우리가 성경통독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1)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제자화 할 수 있을까? (마 10:1-11) (마 28:18-20)
(2)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 28:18-20)
(3)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엇을 하셨을까? (눅 24:36-48)
4. 교회는 성경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1) 성령 받은 제자들은 성경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행 1:8, 행 2:14-42, 3:11-26)
(2)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떻게 하나의 교회가 되었을까? (엡 2:18-22)
(3) 초대교회 리더십은 무엇을 했을까? (딤후 3:10-17)
5. 성경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1) 성경은 누구에 대한 이야기일까?
(2) 신약과 구약은 각각 어떤 이야기일까?
(3) 성경 66권은 각각 어떤 내용일까?
(4) 예수님은 구약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마 5:17-20, 5:21-48, 눅 24:44)
[끄적 끄적거렸던, 노트 내용]
꼭 듣고 싶은 하나님의 음성, 그런데 왜 성경은 안 펼칠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면 10시간도 걸어갈 텐데, 성경을 읽는 일은 왜 망설일까?”라는 수업 노트 속 질문에서 출발.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 손에 들려 있지만, 그 말씀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현실을 돌아본다.
성경통독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깨우친다.
“하나님이 내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나는 그 음성을 듣기 위해 1시간이라도 걸어갈 수 있을까?”
“2시간? 10시간? 당연하지! 그게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길을 걷겠다.”
신학교 수업 시간에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저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내가 이어서 이렇게 물었을 때, 교실은 조용해졌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단지 성경책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면… 당신은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음… 그건… 조금…”
왜 그럴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음성이 담긴 성경책을 펴는 일에는 머뭇거리게 되는 걸까?
정답은 간단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론 잘 믿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것을 ‘옛날 이야기’, ‘종교적 문서’, 혹은 ‘신앙인의 필독서’ 정도로만 여긴다.
성경은 단지 과거의 증언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삶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7)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양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듣고 싶어해야 한다.
그 음성은 어디에서 들려오는가?
바로 성경에서.
이상하게도, 우리는 새벽기도는 가능하지만, 성경통독은 어렵다고 말한다.
집회를 몇 시간 듣는 건 괜찮지만, 성경 몇 장 읽는 건 버겁다고 느낀다.
그건 성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내게 직접 써 주신 편지다.
펼치지 않으면 안 들린다.
읽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묵상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경을 펴야 한다.
성경통독은 ‘신앙의 선택과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한다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삶의 자리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성경통독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여정이다.
성경 66권 전체는 예수님에 관한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성경 통독의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 있다.
성경통독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과정이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찾아야 하는 건 뭘까요?”
나는 성경통독 수업 시간마다 이 질문을 꼭 던진다.
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요.”
“신앙의 원리요.”
“삶의 지혜요.”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답은 따로 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요.”
성경은 단지 '무엇을 하라'는 지침서가 아니다.
성경은 '누가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인물 중심의 이야기다.
그 인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을 빼면, 성경은 전혀 다른 책이 된다.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구약도, 신약도, 창세기도, 계시록도 **‘한 권의 책’**이 된다.
예수님 자신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그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성경 전체를 다시 풀어주셨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눅 24:44)
성경 66권은 결국 하나의 주제를 향해 흐른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통독은 단순히 많은 양을 읽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반복적인 사랑의 순례다.
처음엔 잘 몰랐던 예수님의 성품이,
두 번째 읽을 땐 선명해지고,
세 번째 읽을 땐 눈물 나도록 깊어진다.
이런 말이 있다.
“성경을 다 읽었다고 말하지 말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말하라.”
맞는 말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건,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게 아니다.
말씀의 줄거리 안에서,
각 장면 속에서,
단어 하나하나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계신다.
성경통독은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그 만남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오늘도 또다시, 그 책을 펴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말씀에서 난다
로마서 10:17을 중심으로, 성경통독은 단지 성경 지식 축적이 아닌 믿음 성장의 도구임을 강조.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들을 때, 믿음이 깊어진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 ‘주입’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
성경통독은 믿음의 근육을 키우는 훈련이다.
"믿음이 흔들릴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나요?"
누군가는 말한다.
“찬양을 더 들어요.”
“기도 시간을 늘려요.”
“좋은 설교를 찾아 들어요.”
이 모든 것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성경은 보다 본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자란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계속해서 듣는 것’,
그것이 믿음을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듣고 있을까?
유튜브 알고리즘을 몇 시간이고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10분 듣는 것도 버겁게 느끼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믿음은 자동으로 자라지 않는다.
믿음은 말씀의 ‘영양분’을 먹을 때 자란다.
성경통독은 그 영양분을 꾸준히 공급받는 훈련이다.
처음에는 부담스럽다.
어렵고, 지루하고,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마음이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전엔 들리지 않던 말씀이 가슴을 때리고,
삶의 질문에 대한 답이,
말씀 한 구절 안에서 선명히 빛나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믿음이 자라는 순간이다.
말씀이 귀로만 들리던 것이, 이제는 마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때.
성경이 단순히 기록된 문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주시는 레마의 말씀이 될 때.
그래서 성경통독은 ‘믿음을 위한 루틴’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생명줄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내가 말하는 것이고,
성경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통로다.
성경을 읽을 때,
믿음이 자라고,
소망이 살아나고,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회복된다.
믿음을 잃지 않고 싶다면,
성경을 놓지 말아야 한다.
믿음을 자라게 하고 싶다면,
오늘도 한 장, 한 줄이라도 말씀을 귀로 들으며 읽어야 한다.
성경은 내 삶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다
시119:105 말씀을 중심으로, 성경은 삶을 이끄는 길잡이요 인생 내비게이션임을 강조.
인생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통독은 삶의 방향을 회복하는 강력한 도구다.
성경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이끄는 책이며, 하나님의 사명 매뉴얼이다.
한밤중, 전기가 나갔던 적이 있다.
익숙한 집 안인데도, 불이 꺼지자 한 걸음도 떼기 어려웠다.
잠시 후, 손전등을 켜자 비로소 앞이 보였고,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길을 안다고 해도, 빛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시편 기자도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말씀은 우리의 삶을 비추는 빛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은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성경은 단지 하늘나라 이야기만 담은 책이 아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현실적인 지침서다.
그것은 ‘교훈의 책’이 아니라 ‘실천의 책’이다.
말씀은 우리의 행동을 이끌고, 습관을 새롭게 하며,
결국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성경통독은 그 방향을 끊임없이 점검하게 해준다.
처음엔 몰랐던 내 내면의 어둠이 보이고,
놓치고 있던 하나님의 뜻이 다시 선명해진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정돈되고,
길을 잃은 나침반이 다시 ‘북쪽’을 가리킨다.
우리는 삶의 수많은 결정 앞에서 흔들린다.
관계, 진로, 재정, 감정, 사명…
모든 것이 복잡하고, 갈래길은 너무 많다.
이럴 때, 성경은 내 안에 조용히 불을 켠다.
말씀은 삶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등’이며,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빛’이다.
그래서 성경통독은 단지 ‘경건의 훈련’이 아니라,
**매일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실존의 지도’**다.
오늘 하루가 너무 어두운가?
그렇다면 성경을 펴야 한다.
말씀의 빛 없이 하루를 산다는 건,
불 꺼진 방 안을 눈 감고 걷는 것과 같다.
말씀은 당신의 발 앞을 비춰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장 안전한 길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경을 펴라
야고보서 4:8을 바탕으로, 성경통독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여는 통로이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말씀 없는 기도는 독백이지만, 말씀 있는 기도는 대화이다.
통독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능케 한다.
“요즘 하나님과 멀어진 느낌이에요.”
“기도가 잘 안돼요.”
“예배는 드리는데, 하나님이 잘 안 느껴져요.”
나는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조심스럽게 묻는다.
_“그런데, 성경은 읽고 있나요?”_
많은 사람들이 잠시 멈칫한다.
_“음… 솔직히 요즘 잘 못 읽고 있어요.”_
그렇다.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느낌은, 대부분 ‘말씀과 멀어진 자리’에서 생긴다.
기도는 계속하지만, 말씀이 없다면 그건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혼잣말’일 수 있다.
예배를 드려도, 말씀 없이 드려진 예배는 감정의 위로는 될 수 있어도
삶을 뚫고 들어오는 능력이 없다.
야고보서 4장 8절은 이렇게 말한다.
_“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_
그렇다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성경을 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 안에 담겨 있다.
하나님의 마음도, 성품도, 계획도, 약속도
모두 성경 안에 담겨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건
라디오를 켜지 않고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와 대화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그분께로 이끈다.
상한 마음을 싸매주시고,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해주시며,
삶의 방향을 재설정해주신다.
성경을 펴면,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분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분의 사랑이 다시 가슴에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조용한 자리에 앉아
성경을 펴라.
그 순간부터
당신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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