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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공간/헤브론성경통독_책

4장.율법서~5장.역사서 (헤브론 성경통독 초안 작성중)

헤브론 성경통독 

프롤로그

헤브론에 처음 가게 된 이야기. 교장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 성경통독 제안과 진행에 대한 이야기. 성경통독의 추억과 미래. 이 책에 대한 기대감등. 

 

[목차]

Part1. 오리엔테이션
1장. 성경통독이란 무엇인가? 
2장. 성경 통독을 왜 해야 하는가?
3장. 성경 통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Part2. 구약성경
4장. 율법서: 예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5장. 역사서: 이스라엘에게 왕은 누구였을까? 
6장. 시가서: 우리가 힘들어할 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
7장. 선지서1: 예수님은 왜 심판하실까?
8장. 선지서2: 예수님은 왜 구원하실까?

Part3. 신구약 중간사
9장. 하나님은 왜 침묵 하셨을까? 
10장. 로마 제국은 어떻게 말씀 전파에 기여했을까?
11장.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Part4. 신약 성경
12장. 사복음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13장. 사도행전: 예수님은 교회를 왜 세우셨을까?
14장. 서신서1: 예수님은 교회를 어떻게 세우고 계실까?
15장. 서신서2: 예수님은 어떤 믿음을 원하실까?
16장. 요한계시록1: 예수님은 교회들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17장. 요한계시록2: 예수님은 어떻게 심판하실까?
18장. 요한계시록3: 예수님은 어떻게 구원하실까?
19장. 에덴에서 새예루살렘까지 성경 전체를 스토리 텔링하기 
20장. 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에 우리는 어떻게 순종할까?

 


 

[4장. 율법서: 예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율법서, 곧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성경 전체 이야기의 토대를 형성한다. 이 다섯 권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하나님의 언약, 구원의 서사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첫 무대다.

그 가운데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첫 구속 약속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피해 숨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언급하시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존재를 예고하신다(창 3:15).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원시복음’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날, 하나님은 구원의 첫 언약을 시작하셨다.

또한 창세기 3장 21절에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 이는 단순한 체면 가리개가 아니다. 죄를 덮기 위해 생명의 희생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속죄의 원칙이 이때 처음 등장한다. 가죽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희생과 대속을 상징하는 복음의 외투였다.

이후 등장하는 아벨의 제사 역시 피를 통한 믿음의 제사였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셨다고 증언한다. 이 흐름은 레위기의 제사 제도에서 구체화된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섯 가지 제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악을 직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제사의 정점에는 대속과 화목의 피가 흐르고 있다.

성경은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 묵묵히 좇아간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를 거치며, 하나님은 그 계보를 지키시고, 구원의 서사를 이어가신다. 마침내 예수께서 오셨을 때, 이 계보는 완성된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그때를 “때가 차매”라 부른다. 구약의 오랜 기다림이 한 인물 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율법서는 단지 명령과 법조항이 적힌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맨 처음 펼쳐진 서사이며, 구속의 피가 처음 흘러내린 자리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약속, 가죽옷이라는 상징, 피의 제사라는 예표는 모두 십자가로 연결된다. 율법서 안에 이미 복음의 첫 씨앗이 심겨 있었다.

예수님은 그 씨앗의 열매로 오셨고, 이제 우리는 그 열매를 따라 성경의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1. 모세오경은 어떤 책인가?

율법서, 곧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성경 전체 이야기의 토대를 형성한다. 이 다섯 권은 단순히 민족의 역사나 율법의 조항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구원의 방향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고, 인간이 어떻게 죄에 빠졌으며, 그 죄 가운데 놓인 사람을 어떻게 회복하시려는지를 처음으로 보여주신다. 다시 말해, 율법서는 복음의 언저리가 아닌, 복음의 발원지다.

창세기는 인간의 타락 이전, 에덴에서의 질서와 평화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러나 곧 선악과 사건을 통해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를 기록한다. 출애굽기는 억압당하던 백성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다루며, 레위기에서는 그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지를 ‘제사 제도’를 통해 구체화한다. 민수기는 광야의 여정을 따라가며 불순종과 인내, 연단의 시간을 기록하고, 신명기는 이 모든 이야기의 총정리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새기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다섯 권은 각각 독립된 책이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의 약속이 출애굽기의 행동으로, 출애굽기의 해방이 레위기의 예배로, 레위기의 예배가 민수기의 여정으로, 그리고 그 여정이 신명기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이 연결 고리 속에서 한 가지 일관된 메시지가 흐른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모세오경을 단지 과거의 역사나 윤리적 교훈으로 읽지 않으셨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과 시편에 자신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율법서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보셨고, 제자들도 그것을 보게 하셨다. 따라서 모세오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준비되고, 기다려졌으며, 약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사의 문서이다.

율법은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시 이어 붙이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내려주신 말씀이다. 그 안에는 명령이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랑이 있고, 인내가 있으며, 약속이 있다. 모세오경은 그 사랑의 서문이자, 복음의 첫 장이다.


2. 여자의 후손, 복음의 첫 약속

창세기 3장 15절은 타락 직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첫 구원의 언약이다. 하나님은 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씨(seed, 히브리어 'זֶרַע' [zeraʿ])와 여자의 씨도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씨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의 씨'라는 표현은 매우 이례적이다. 히브리어 'zeraʿ'는 후손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남성 중심의 계보를 따라 사용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특이하게 '여자'의 씨로 나타난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여성 단독에게서 오는 후손을 명시한 본문이다. 이처럼 비범한 표현은 이후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암시로 받아들여진다. 그 씨는 단수이며,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 씨가 곧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

이 언약은 단지 희망적인 말이 아니라, 성경의 나머지 모든 이야기를 견인하는 줄기다.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이삭과 야곱, 유다와 다윗—이 흐름은 '여자의 씨'라는 표현에서 시작되어 복음서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성경의 족보는 혈통을 말하는 동시에 약속의 계보를 말한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표현은 궁극적인 승리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갈등이나 작은 승부가 아니라, 악의 세력에 대한 철저한 종결을 예고한다. 뱀은 성경에서 죄와 타락, 유혹의 대명사다. 여자의 후손은 그 머리를 짓밟는 자로 등장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사명을 이루셨고,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꺾으셨다.

이 언약은 성경 전체를 꿰뚫는 흐름이다. 아담의 범죄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었고, 그 시작점에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 구속의 약속이 자리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 자리에서 도피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먼저 찾아와 약속하셨다. 이 구절이 복음의 가장 오래된 선언으로 불리는 이유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언약이다. 성경은 잊히지 않은 이 약속을 따라 한 사람을 향해 나아가고,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증언한다. 여자의 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약속의 실현이며, 구속사의 열매다.

 


3. 가죽옷, 피 흘림의 상징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졌고,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급히 자신을 가렸다(창 3:7). 하지만 그 가림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죄 가리개는 죄의 본질을 덮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 3:21). 이 장면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피 흘림과 희생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가죽옷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의 생명이 죽었다는 뜻이다. 피가 흘렀고, 그 대가로 죄인이 덮임을 입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죄를 가리는 방식을 ‘피’로 정하셨다. 무화과나무는 스스로의 수치심을 덮으려는 인간의 시도였고, 가죽옷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친히 감당하셨다는 상징이다.

이 가죽옷은 최초의 ‘속죄의 상징물’이다. 가죽옷은 하나님이 직접 마련하셨고, 인간은 그 옷을 입기만 했다. 이 은유는 복음의 구조를 그대로 닮아 있다. 우리가 만든 의로는 결코 우리의 수치를 가릴 수 없다. 죄 가리개는 오직 하나님이 마련하신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은 피 흘림, 곧 희생이다.

이후 창세기 4장에서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의 제사는 받아들여졌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당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증언한다. 아벨은 가죽옷의 상징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피를 통과하는 것이며, 의로운 제사는 피 흘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죽옷은 구속사의 씨앗이다. 그 옷은 죄인을 덮었고, 동시에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 이후로 모든 제사, 번제, 속죄제, 화목제 등은 이 원리에 기초한다. 가죽옷은 인간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며, 그 정신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하나님은 단지 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덮으셨다. 죄 가리개의 길을 여셨다. 그 길은 희생이며, 피이며, 대신 죽는 제물이다. 가죽옷은 우리가 무엇으로 덮여야 하는지를 처음 가르쳐 준 하나님의 교훈이다.

 


4. 제사의 시작과 복음의 예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었다. 죄는 관계를 끊었고, 단절된 자리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단절을 방치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단지 보호를 위한 처사가 아니었다. 죄를 가리기 위한 ‘죽음의 대가’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그 원칙이, 성경의 최초의 희생인 가죽옷에서부터 분명히 선언되었다.

가죽옷의 의미를 이어받은 인물이 바로 아벨이었다. 그는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의 제사는 받아들여졌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되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차이를 ‘믿음’이라고 말한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이 ‘피’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그 피를 흘리며, 생명의 대가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이후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제사의 방식으로 상세히 규정하신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 다섯 제사는 그저 종교적인 의례가 아니었다. 죄와 죽음 앞에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진실을 보여주는 영적 연극이었으며, 각각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조각상이었다.

번제는 죄인을 대신하여 전부 불태워 드리는 제사였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태워졌다. 이는 예수님의 전적인 헌신과 순종을 보여준다.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였으며, 누룩 없는 정결함과 소금의 언약을 상징했다. 예수님은 썩지 않을 의로움과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을 드리셨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제사였으며, 이는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의 중보자가 되신 사건과 직결된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각각 죄를 속하고, 성물이나 타인에 대한 손해를 회복하기 위한 제사였다. 이 모든 제사의 본질은 하나였다. ‘대신 죽는 것’. 하나님은 사람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죄를 덮을 길도 친히 만드셨다. 그 길이 피였고, 제사였다.

하지만 이 제사에는 늘 중간에서 ‘섬기는 사람’이 필요했다. 바로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 죄인을 대신해 서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해 제물을 잡았고, 성소에서 피를 뿌렸으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 담대히 들어가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이들도 완전하지 않았다. 매번 먼저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고, 해마다 같은 제사를 반복해야 했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죄를 온전히 없애는 데는 부족했다. 그저 기다림이었다. 언젠가 단번에, 완전하게, 중보할 누군가를 위한 예표였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은 그 기다림의 종착점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한다. 예수님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셨고,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리고 그분은 단지 제물이 되신 것만이 아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직접 들어가셨고,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다.

이제 우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짐승의 피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속죄받은 자’로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피의 구원을 기억하며, 그분 앞에 매일의 삶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드릴 유일한 제사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길이다.

레위기의 제사도, 광야의 성막도, 출애굽기의 어린양도, 모두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다. 모든 제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죽지 않는다. 누군가가 너 대신 죽었다.” 그 누군가, 바로 예수. 모든 제사의 완성이며, 모든 제사장의 머리이신 분이다.

 

 


5. 율법서에 담긴 복음의 씨앗

율법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하나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복음의 씨앗’이 심겨진 말씀이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율법서 전반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하나씩 씨앗처럼 박혀 있다. 그 씨앗은 창세기의 토양에 뿌려지고, 출애굽기의 역사 속에서 움트며, 레위기의 제사로 가지를 내고, 민수기의 여정을 따라 자라나고, 신명기의 언약 속에서 수확의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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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에 등장한 '여자의 후손'은 그 씨앗의 첫 표지였다. 죄가 막 시작된 순간, 하나님은 그 죄의 해결자도 함께 약속하셨다. 가죽옷은 그 약속이 결코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고,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레위기의 제사법까지, 피 흘림을 통한 죄 사함의 원리는 계속 이어졌다. 모든 희생 제사는 “이 죄를 위해 누군가가 대신 죽는다”는 진리를 각인시키며, 구속사의 무대가 곧 열릴 것을 예고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단호하셨지만, 동시에 그 죄를 덮는 길도 함께 열어주셨다. 아담과 하와를 책망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떠밀듯 쫓아내시지 않았다. 동산에서 가죽옷을 입히신 뒤에야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셨다. 죄인은 떠나지만, 죄인은 덮인 채로 나아간다. 이 장면은 율법서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적 구조를 상징한다. ‘죄에 대한 심판’과 ‘죄인을 위한 구속’이 함께 간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는다. 레위기에서는 반복되는 제사법 속에서, ‘완전하지 않은 제사’가 계속 반복된다. 매번 제물을 가져가야 했고, 매번 새로운 속죄가 필요했다. 왜 그토록 반복되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완전한 제사’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완전한 제사가 오기 전까지는, 제사의 반복은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이 모든 제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민수기와 신명기에 이르러, 백성은 여전히 흔들리고 반복적으로 불순종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다시 언약을 세우신다. 한 번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해서. 신명기 30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리니.” 이것은 단지 외적인 율법의 순종을 넘어, 내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말씀이다. 곧 새 언약, 마음에 새겨질 복음의 약속이다.

그 다섯 권 속에서 하나님은 복음을 묻으셨고, 성경은 그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준다(복음은 신약에서 갑자기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오경 속에 복음을 묻으셨고, 성경은 그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있다). 복음이 심겨졌고, 뿌리를 내렸으며, 싹을 틔웠다. 이 다섯 권의 책이 없이는 복음서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고, 히브리서의 ‘단번에 드린 제사’도 결코 깊이 읽을 수 없다. 율법서에 복음이 없다면, 신약의 복음도 뿌리를 잃게 된다. 복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소식이 아니라, 이미 태초부터 심겨진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성경을 통독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체 이야기 속에서 만나는 일이다. 창세기의 씨앗에서 복음서를 통해 열린 열매까지, 우리는 모든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율법서는 이 이야기의 첫 장이고, 우리는 거기서부터 다시 복음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5장. 역사서: 이스라엘에게 왕은 누구였을까?]

 

1. 이스라엘의 ‘다시 세움’

이스라엘의 국가는 인간의 기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서 비롯되었다. 세속의 국가들이 전쟁과 정복, 세습과 전략으로 태동되었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 그리고 언약 속에서 태어난 민족이었다. 그 시작은 국가라기보다 공동체였고, 제도라기보다 관계였다. 야곱에게 주어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출애굽 사건, 시내산 언약은 이들이 어떻게 한 ‘민족’으로,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곧 현실이라는 벽 앞에 부딪혔다. 가나안 정복 이후, 사사기를 거치며 민족의 연대는 느슨해졌고, 영적 리더십은 흔들렸다. 외적의 침입과 내부의 분열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하나님이 아닌 ‘사람 왕’을 요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신명기 17장에서 왕이 생길 것을 예고하셨다. 그러나 그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가까이 하며, 자기를 높이지 않는 이여야 했다. 다시 말해, 인간 왕의 조건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허용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배경은 사사기 마지막 구절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이 구절은 단순한 현실 진단이 아니라, 깊은 영적 해석이다. 왕이 없다는 말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 체계 안에서도, 사람들은 보이는 왕을 갈망했다. 이것은 곧 ‘다시 세움’의 신호탄이었다.

이 “다시 세움”은 구속사의 재정렬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전면 거절하지 않으셨다. 사무엘상 8장에서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성구 주소). 이 말은 하나님의 깊은 탄식이자, 동시에 새로운 계획의 서곡이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왕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 요청 안에서도 장차 오실 ‘참 왕’을 준비하고 계셨다.

이처럼, 국가의 시작은 단순한 제도적 탄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백성의 응답이었다. 이스라엘의 국가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민족을 통해, 사람의 통치를 넘어서는 ‘하늘의 왕국’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그리고 이 흐름은 다윗 언약과 그 후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다시 세움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믿음의 회복이었다. 인간 왕정을 향한 요청조차도,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계획 안으로 품으셨다. 이것이 바로 ‘역사서’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우리가 읽게 될 열왕기와 역대기, 사무엘서와 룻기 속에는, 이 ‘왕 되심’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과 인간의 응답, 그리고 결국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담겨 있다.


2.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 하나님이 이끄신 민족

이스라엘은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묶인 ‘민족 공동체’였다. 이들의 정체성은 땅이나 군대나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졌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민족을 향한 계획을 말씀하셨고, 그 계획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졌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식 선언’되었다.

이 선언은 종교적 규범을 넘어서 정치와 문화, 일상과 공동체 질서 전체를 아우르는 통치 구조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고, 그분의 율법이 곧 헌법이었다. 신명기 6장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기초였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말씀을 일상에 새기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통치 방식이었다.

이런 신정 체계 속에서 하나님은 멀리 계신 창조주가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시며 현장에 계신 왕으로 존재하셨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백성을 참으시고, 배신하는 백성에게 기회를 주셨으며, 믿음 없는 세대 속에서도 언약을 깨지 않으셨다. 그분의 인도는 무력의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인내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늘 눈에 보이는 통치를 갈망한다. 사사기의 혼란 속에서 백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왕을 원했다. 사무엘상 8장에서 하나님은 그 요청을 허용하시지만, 그에 앞서 분명히 경고하신다. “너희가 왕을 요구하는 것은 나를 버린 행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간 통치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요구조차 구속사의 도구로 삼으신다. 사울의 실패, 다윗의 선택, 솔로몬의 부흥과 분열—이 모든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과의 언약(삼하 7장)을 통해 ‘영원한 왕위’를 약속하셨고, 이는 메시아 왕국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끄신 민족이었다. 그 이끄심은 실패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고, 죄악 속에서도 포기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늘 나라의 모델’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는, 이 땅의 왕국을 넘어서는 하늘의 질서였고, 그분이 이끄신 민족은 역사 속에서 구속사를 살아낸 백성이었다.


3. 이스라엘의 첫 왕은 누구였을까?

우리가 흔히 아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이다. 그는 외모와 출신, 그리고 초반의 겸손함으로 대중의 눈길을 끌었으며, 이스라엘 역사상 첫 번째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상징적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첫 왕’을 단지 정치적 직책으로만 보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왕의 기원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위임을 주셨다. ‘왕적 통치’를 암시하는 명령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였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첫 번째 왕은 아담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 통치의 권한을 유지하지 못했다. 죄로 인해 그는 에덴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어야 했다. 왕은 존재하되, 권위를 잃은 채 추방당한 인류의 첫 실패였다. 이로부터 성경은 ‘잃어버린 왕권’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서사를 시작한다. 그 다음 계보로 이어지는 야곱, 요셉, 모세는 모두 부분적으로 그 왕적 그림자를 품고 있으나, 여전히 온전한 왕은 아니었다.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로 세워진 왕이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고 요청한다. 이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인간적 체계를 따르려는 시도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울을 기름부으시고, 그를 통해 왕정 시대를 시작하신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복적으로 불순종했고, 결국 그 왕권은 거두어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단지 ‘사울의 실패’를 넘어서 ‘참된 왕의 조건’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신명기 17장에는 왕이 반드시 율법책을 옆에 두고 날마다 읽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스스로를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기준이 명시되어 있다. 이 기준은 사울의 실패를 대비시키며, 다가올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를 만든다.

다윗은 바로 그 기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윗조차도 완전한 왕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 속에는 믿음과 신실함이 있었지만, 동시에 큰 죄와 연약함도 있었다. 결국 성경은 이 모든 왕적 시도들을 통해 단 한 사람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분은 인간의 요구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오신 진정한 왕,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첫 왕은 누구였을까?”라는 질문은 단지 사울로 끝나지 않는다. 그 질문은 결국 이렇게 귀결된다. “진짜 왕은 누구인가?” 사울은 제도적 시작이었고, 다윗은 예표였으며, 예수는 성취다. 왕의 자리는 하나님만이 온전히 채우실 수 있음을,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서를 통해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다.


4. 왕의 실패와 다윗 언약.

이스라엘의 왕정은 기대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그 기대는 이내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사울은 외형적으로는 이상적인 지도자처럼 보였으나, 그의 통치는 불순종과 자의적 판단으로 무너졌다. 사무엘상 13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못하고 번제를 드렸고, 15장에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이 반복된 불순종은 그의 왕권이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졌음을 증명했다.

사울의 실패는 사명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사람의 왕’을 구한 대가였다. 하나님은 왕권을 주셨지만, 동시에 경고하셨다. 사울은 하나님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삶과 통치는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야 했는지를 되묻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신다. 다윗은 어린 목동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렸다(삼상 13:14). 그는 사울과 달리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회개할 줄 아는 왕이었다.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 언약은 구약의 핵심 약속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사무엘하 7장은 그 언약의 정점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이 언약은 단지 솔로몬의 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윗 언약은 메시아적 언약이었다. 영원한 왕, 다시 오실 왕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는 후대의 선지자들에 의해 반복되고 확장된다. 이사야는 장차 올 한 아이가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사 9:6), 예레미야는 다윗의 가지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할 왕’이 일어날 것이라 말한다(렘 23:5).

다윗도 완전하지 않았다. 밧세바 사건과 인구조사, 자식들 간의 분열과 반역은 그가 가진 인간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언약을 담는 그릇이었고, 그를 통해 메시아의 계보가 이어진다.

왕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계획을 꺾지 못한다. 오히려 그 실패들 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도드라진다. 인간은 넘어져도, 하나님의 언약은 서 있다. 다윗 언약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불완전함을 꿰뚫고 흘러가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동맥이다. 결국 이 언약은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지며, 역사서의 언약이 복음서의 성취로 연결되는 교차점이 된다.

이처럼 역사서의 중심에는 실패한 왕들과 언약하시는 하나님이 나란히 놓인다. 그리고 그 긴장을 뚫고, 모든 언약을 성취하신 한 분이 나타난다. 그 이름이 바로 예수다. 다윗 언약은 단지 옛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그분을 통해 계속되고 있는 왕의 계보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시작된 선포다.


5. 진짜 왕의 이름은 ‘예수’


이스라엘 역사서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주제는 ‘왕의 실패’다. 사울의 자의성과 다윗의 불완전함, 솔로몬 이후의 분열과 쇠락은 모두 인간 왕정의 한계를 증언한다. 백성들은 참된 통치를 원했지만, 그 왕권은 늘 인간의 죄와 욕망 앞에 무너졌다. 그렇기에 이 모든 이야기의 저편에는 하나의 깊은 갈망이 흐른다. 진짜 왕, 완전한 통치자, 참된 왕국을 갈망하는 마음.

그 갈망은 예수 안에서 응답된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그분이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선포한다. 이는 단순한 계보 정리가 아니다.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선언이며, 그분이 구약에서 예언된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은 참된 왕이라는 증거다. 이사야는 그분을 이렇게 예언했다. "그 정권과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할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7).

예수님의 왕권은 십자가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썼으니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 하였더라"(요 19:19-20). 세상은 그를 조롱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참된 왕의 이름을 새기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는 희생자처럼 보였지만, 그 죽음은 오히려 왕으로서 백성을 품는 가장 깊은 헌신이었다. 성을 지키기 위해 백성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 밖에서 자신의 피를 흘려 백성을 지키신 왕이었다.

그분의 왕국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눈에 보이는 궁전이나 군대는 없지만,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 나라는 눈에 보이는 실제로 도래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증언한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

예수는 단지 한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왕이다. 사무엘상에서 시작된 왕정의 서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진짜 왕의 이름은 예수다. 그는 오늘도 우리의 왕이시며,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다스리는 왕국은, 공의와 진리가 샘솟는 나라다. 그 나라에 속한 자는 지금도 믿음으로 살아가며, 언젠가 그 왕의 얼굴을 대면할 날을 기다린다.

 보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라. 그러하리라. 아멘(요한계시록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