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패트릭 페어베른 (Patrick Fairbairn).
- 19세기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 성경 신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
- "The Typology of Scripture"라는 중요한 저서를 통해 구약 성경의 인물, 사건, 제도 등이 신약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구속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탐구.
2. 『The Typology of Scripture』
- 1847년 출간
-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유형들로 가득 차 있다는 신학적 입장을 설명하는 책.
- 구약의 여러 사건과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 역사와 어떻게 상징적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 논의하며, 이를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구속적 계획을 드러내고자 하는 책.
3. 책의 주요 내용: "Typology"
- 페어베른은 "type"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특정 인물, 사건, 제도, 의식들이 신약 성경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예표적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
- 예를 들어,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이스라엘의 탈출 사건(홍해를 건넌 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시하는 사건으로 해석.
4. 구약과 신약의 관계:
- 구약이 신약의 빛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
- 구약에서 나타나는 여러 typo들이 신약의 메시지를 완성하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열쇠가 됨.
5. 성경 전체의 통일성:
- 페어베른은 성경의 각 부분이 독립적이지 않고, 모두 하나의 구속적 계획을 이뤄가는 하나의 큰 이야기로 연결된다고 주장.
- 구약과 신약이 서로를 해석하며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성경의 통일성도 강조.
6. 신학적 접근:
- 페어베른은 신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성경의 유형을 연구했음.
- 그가 제시하는 typology는 단순한 상징주의를 넘어서, 신학적 깊이를 가진 해석을 제공.
- 성경을 읽는 방법의 중요한 신학적 틀.
-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을 어떻게 예표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도록 함.
7. 영향과 중요성:
- 패트릭 페어베른의 "The Typology of Scripture"는 19세기 성경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저서로, 후에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음.
- 특히, 그의 유형론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며, 성경을 보다 심오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줌.
8. 원서 이북 링크
https://archive.org/details/thetypologyofscr01fairuoft/page/n3/mode/2up
책의 내용 도식화
1장.
Historical and Critical Survey of the Past and Present State of Theological Opinion on The Subject.
THE Typology of Scripture has been one of the most neglected departments of theological science.
It has never altogether escaped from the region of doubt and uncertainty; and some still regard it as a field incapable, from its very nature, of being satisfactorily explored, or cultivated so as to yield any sure and appreciable results. Hence it is not unusual to find those who otherwise are agreed in their views of divine truth, and in the general 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 differing materially in the estimate they have formed of the Typology of Scripture. Where one hesitates, another is full of confidence; and the landmarks that are set up to-day are again shifted to-morrow.
With such various and contradictory sentiments prevailing on the subject, it is necessary, in the first instance, to take an historical and critical survey of the field, that from the careful revision of what has been done in the past, we may the more readily perceive what still remains to be accomplished, in order that we may arrive at a well-grounded and scriptural Typology.
- Typology of Scripture는 신학 분야에서 가장 소홀히 다뤄진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주제는 의심과 불확실성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 본질상 만족스러운 탐구나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확실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어려운 분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해나 성경 해석의 일반적인 원칙에서는 일치하는 사람들이라도 성경 예표론에 대해서는 크게 다른 의견을 갖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떤 사람은 망설이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확신에 차 있으며, 오늘 세워진 기준이 내일이면 또 바뀌곤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의견과 모순된 관점들이 존재하므로, 먼저 이 분야를 역사적이고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 이루어진 연구를 신중히 살펴보면, 앞으로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할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성경에 기초한 견고한 모형론(typology)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초대교회 교부들의 Typology
I. We naturally begin with the Christian Fathers.
Their typological views, however, are only to be gathered from the occasional examples to be met with in their writings; as they nowhere lay down any clear and systematic principles for the regulation of their judgments in the matter. Some exception might, perhaps, be made in respect to Origen. And yet with such vagueness and dubiety has he expressed himself regarding the proper interpretation of Old Testament Scripture, that by some he has been understood to hold, that there is a fourfold, by others a threefold, and by others again only a twofold, sense in the sacred text. The truth appears to be, that while he contended for a fourfold application of Scripture, he regarded it as susceptible only of a twofold sense.
And considered generally, the principles of interpretation on which he proceeded were not essentially different from those usually followed by the great majority of the Greek Fathers. But before stating how these bore on the subject now under consideration, it will be necessary to point out a distinction too often lost sight of, both in earlier and in later times, between allegorical and typical interpretations, properly so called. These have been very commonly confounded together, as if they were essentially one in principle, and differed only in the extent to which the principle may be carried.
There is, however, a specific difference between the two, which it is not very difficult to apprehend, and which it is of some importance to notice in connection especially with the interpretations of patristic writers.
An allegory is a narrative, either expressly feigned for the purpose, or —if describing facts which really took place—describing them only for the purpose of representing certain higher truths or principles than the narrative, in its literal aspect, whether real or fictitious, could possibly have taught. The ostensible representation, therefore, if not invented, is at least used, simply as a cover for the higher sense, which may refer to things ever so remote from those immediately described, if only the corresponding relations are preserved.
- 우리는 자연스럽게 초대교회 교부들부터 논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typological 관점은 그들의 글 속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예시들에서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명확하고 체계적인 원칙을 제시한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리겐(Origen)을 예외로 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구약 성경의 해석에 대해 너무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가 성경에 네 가지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고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은 세 가지 의미만 있다고 생각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 의미만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실 그는 성경의 적용 방식에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가 따랐던 해석 원칙은 대부분의 그리스 교부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원칙들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이 주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종종 간과된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유적(allegorical) 해석과 모형적(예표적)(typical) 해석의 구분입니다. 이 두 가지는 흔히 같은 원칙에 기반한 것처럼 혼동되어, 단지 원칙이 적용되는 범위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교부들의 해석과 관련해 중요합니다.
비유적 해석이란 특정 이야기가 어떤 높은 진리나 원칙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거나,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묘사하더라도 그 본래의 의미를 넘어 더 높은 진리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경우를 말합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는 만들어졌든 실제로 있었든 간에, 단지 더 높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이 더 높은 의미는 이야기 자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해당 관계가 유지되는 한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So that allegorical interpretations of Scripture properly comprehend the two following cases, and these only:
1. When the scriptural representation is actually held to have had no foundation in fact—to be a mere myth, or fabulous description, invented for the sole purpose of exhibiting the mysteries of divine truth; or,
2. When —without moving any question about the real or fictitious nature of the representation—it is considered incapable as it stands of yielding any adequate or satisfactory sense, and is consequently employed, precisely as if it had been fabulous, to convey some meaning of an entirely different and higher kind.
The difference between allegorical interpretations, in either of these senses, and those which are properly called typical, cannot be fully exhibited till we have ascertained the exact nature and design of a type. It will be enough meanwhile to say, that typical interpretations of Scripture differ from allegorical ones of the first or fabulous kind, in that they indispensably require the reality of the facts or circumstances stated in the original narrative. And they differ also from the other, in requiring, beside this, that the same truth or principle be embodied alike in the type and the antitype. The typical is not properly a different or higher sense, but a different or higher application of the same sense.
- 비유적 해석은 성경을 다음 두 가지 경우로 이해하는 방식을 포함합니다.
1. 성경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단지 신적 진리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나 꾸며낸 이야기로 여겨질 때.
2. 이야기가 실제 사건인지 허구인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는 충분한 의미나 만족스러운 해석을 제공할 수 없다고 간주되어, 마치 허구처럼 사용되어, 완전히 다른 높은 차원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해석될 때. - 비유적 해석과 예표적 해석의 차이는 '예표'의 정확한 본질과 목적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선 간단히 말하자면, 예표적 해석은 비유적 해석의 첫 번째 경우(허구적인 이야기)와는 달리, 본래 이야기의 사건이나 상황이 실제로 있었음을 필수적으로 요구합니다. 또한, 두 번째 경우와도 다른 점은 예표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대상)가 동일한 진리나 원칙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표적 해석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를 더 높은 수준에서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Returning, then, to the writings of the Fathers, and using the expressions typical and allegorical in the senses now respectively ascribed to them, there can be no doubt that the Fathers generally were much given both to typical and allegorical explanations,—the Greek Fathers more to allegorical than to typical,—and to allegorical more in the second than in the first sense, described above. They do not appear, for the most part, to have discredited the plain truth or reality of the statements made in Old Testament history.
They seem rather to have considered the sense of the latter true and good, so far as it went, but of itself so meagre and puerile, that it was chiefly to be regarded as the vehicle of a much more refined and ethereal instruction.
- 이제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로 돌아가, 앞서 정의한 비유적 해석과 예표적 해석의 개념을 적용하면, 교부들이 두 방식 모두를 자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 교부들은 예표적 해석보다 비유적 해석을 더 선호했으며, 비유적 해석 중에서도 첫 번째(허구적인) 방식보다는 두 번째 방식에 더 의존했습니다.
대체로 교부들은 구약의 역사적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약의 이야기가 진실하고 유익하다고 보면서도, 그 자체로는 너무 단순하고 유치하다고 여겨, 그것을 더 정교하고 영적인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했습니다.
Origen, however, certainly went farther than this, and expressly denied that many things in the Old Testament had any real existence. In his Principia (Lib. iv.) he affirms, that "when the Scripture history could not otherwise be accommodated to the explanation of spiritual things, matters have been asserted which did not take place, nay, which could not have taken place; and others again, which, though they might have occurred, yet never actually did so." Again, when speaking of some notices in the life of Rebecca, he says—"In these things, I have often told you, there is not a relation of histories, hut a concoction of mysteries"[1] (Opera, Vol. II., p. 88, Ed. Delarue).
And, in like manner, in his annotations on the first chapters of Genesis, he plainly scouts the idea of God's having literally clothed our first parents with the skins of slain beasts—calls it absurd, ridiculous, and unworthy of God, and declares that in such a case the naked letter is not to be adhered to as true, but exists only for the spiritual treasure which is concealed under it [2] (Ibid., p. 29).
Statements of this kind are of too frequent occurrence in the writings of Origen to have arisen from inadvertence, or to admit of being resolved into mere hyperboles of expression. They were, indeed, the natural result of that vicious system of interpretation which prevailed in his age, when it fell, as it did in his case, into the hands of an ardent and enthusiastic follower. At the same time it must be owned, in behalf of Origen, that however possessed of what has been called a "the allegorical fury," he does not appear generally to have discredited the facts of sacred history; and that he differed from the other Greek Fathers, chiefly in the extent to which he went in decrying the literal sense as carnal and puerile, and extolling the mystical as alone suited for those who had become acquainted with the true wisdom. It would be out of place here, however, to go into any particular illustration of this point, as it is not immediately connected with our present inquiry. But we shall refer to a single specimen of his allegorical mode of interpretation, for the purpose chiefly of showing distinctly how it differed from what is of a simply typological character.
- 오리겐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구약의 많은 내용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부정했습니다. 그의 저서 Principia 4권 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영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조화될 수 없을 때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아니, 일어날 수조차 없는 일들이 주장되기도 하며, 또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기록되기도 했다.”
또한, 리브가의 삶과 관련된 몇 가지 내용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번 말했듯이,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적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담아낸 기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Opera, 2권, p. 88, Delarue).
마찬가지로, 창세기 초반부에 대한 주석에서 그는 하나님이 실제로 짐승의 가죽으로 첫 사람들을 옷 입히셨다는 생각을 조롱합니다. 그것을 “말도 안 되고, 우스꽝스러우며,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부르며, 그러한 경우에는 문자적 의미를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가 단지 그 아래 숨겨진 영적 보물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선언합니다 (Ibid., 29).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오리겐의 글에서 너무 자주 등장하여 단순한 실수로 볼 수 없으며, 과장된 표현으로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그의 시대에 만연했던 잘못된 해석 체계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열정적이고 열광적인 학자인 그가 그것을 따랐을 때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을 변호하자면, 그가 종종 “비유적 해석의 열광”에 사로잡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역사에 나오는 사실 자체를 전반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 교부들과 주로 문자적 의미를 "육적이고 유치한 것"으로 폄하한 정도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오리겐은 영적이고 신비한 의미만이 진정한 지혜를 깨달은 이들에게 적합하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여기서 이 주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그의 비유적 해석 방식이 단순히 예표적 해석과 어떻게 다른지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할 것입니다.
We make our selection from Origen's homily on Abraham's marriage with Keturah (Horn. vi. In Genes.). He does not expressly disavow his belief in the fact of such a marriage having actually taken place between the parties in question, though his language seems to point in that direction; but he intimates that this, in common with the other marriages of the patriarchs, contained a sacramental mystery. And what might this be? Nothing less than the sublime truth, "that there is no end to wisdom, and that old age sets no bounds to improvement in knowledge death of Sarah (he says) is to be understood as the perfecting of virtue. But he who has attained to a consummate and perfect virtue, must always be employed in some kind of learning—which learning is called by the divine Word, his wife. Abraham, therefore, when an old man, and his body in a manner dead, took Keturah to wife. I think it was better, according to the exposition we follow, that the wife should have been received when his body was dead, and his members were mortified. For we have a greater capacity for wisdom when we bear about the dying of Christ in our mortal body. Then Keturah, whom he married in his old age, is, by interpretation, incense, or sweet odour. For he said, even as Paul said, (We are a sweet savour of Christ. Sin is a foul and putrid thing; but if any of you in whom this no longer dwells, have the fragrance of righteousness, the sweetness of mercy, and by prayer continually offer up incense to God, ye also have taken Keturah to wife." And forthwith he proceeds to show, how many such wives may be taken: hospitality is one, the care of the poor another, patience a third,—each Christian excellence, in short, a wife; and hence it was, that the patriarchs are reported to have had so many wives, and that Solomon is said to have possessed them even by hundreds, he having received plenitude of wisdom like the sand on the sea-shore, and consequently grace to exercise the largest number of virtues. We have here a genuine example of allegorical interpretation, if not actually holding the historical matter to be fabulous, at least treating it as if it were so. It is of no moment, for any purpose which such a mode of interpretation might serve, whether Abraham and Keturah had a local habitation among this world's families, and whether their marriage was a real fact in history, or an incident fitly thrown into a fictitious narrative, constructed for the purpose of symbolizing the doctrines of a divine philosophy. If it had been handled after the manner of a type, and not as an allegory, whatever specific meaning might have been ascribed to it as a representation of gospel mysteries, the story must have been assumed as real, and the act of Abraham made to correspond with something essentially the same in kind some sort of union, for example, between parties holding a similar relation to each other, that Abraham did to Keturah. In this, though there might have been an error in the particular application that was made of the story, there would at least have been some appearance of a probable ground for it to rest upon. But sublimated into the ethereal form it receives from the fertile genius of Origen, the whole, history and interpretation together, presently acquires an uncertain and shadowy aspect. For what connection, either in the nature of things, or in the actual experience of the Father of the Faithful, can be shown to exist between the death of a wife, and the consummation of virtue in the husband; or the wedding of a second wife, and his pursuit of knowledge? Why might not the loss sustained in the former case as well represent the decay of virtue, and the acquisition in the latter denote a relaxation in the search after the hidden treasures of wisdom and knowledge? There would evidently be as good reason for asserting the one as the other; and, indeed, with such an arbitrary and elastic style of interpretation, there is nothing, either false or true in doctrine, wise or unwise in practice, which might not claim support in Scripture. The Bible would be made to reflect every hue of fancy, and every shade of belief in those who assumed the office of interpretation; and instead of being rendered serviceable to a higher instruction, it would be turned into one vast sea of uncertainty and confusion.
- 오리겐의 설교 중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결혼에 관한 부분(창세기 주석, 설교 6편, 창 25:1-6)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이 결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명확히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언어는 그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대신, 그는 이 결혼이 다른 족장들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신비로운 상징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상징은 무엇일까요? 바로 "지혜에는 끝이 없으며, 나이가 들어도 지식의 향상을 멈출 수 없다"는 고상한 진리입니다.
오리겐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라의 죽음은 덕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완전하고 성숙한 덕을 이룬 사람은 항상 배움에 힘써야 하며, 이 배움은 신적 말씀에서 그의 아내로 불립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이가 들어 몸이 죽은 상태와도 같은 때에 그두라와 결혼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해석에 따르면, 그의 몸이 죽고 그의 지체가 죽은 상태에서 아내를 맞이한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간직할 때, 지혜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두라라는 이름은 ‘향’ 또는 ‘달콤한 냄새’로 해석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야 합니다. 죄는 더럽고 부패한 것이지만, 여러분 중에 이러한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의로움의 향기와 자비의 달콤함을 지니며, 기도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향을 드린다면, 여러분도 그두라를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오리겐은 이어서 많은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환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 인내 등을 각각의 아내로 비유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한 명의 아내라고 주장합니다. 족장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가졌다는 이야기는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며, 솔로몬이 수백 명의 아내를 가졌다는 것도 그가 해변의 모래알처럼 풍부한 지혜를 받았고, 덕을 실천할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리겐의 비유적 해석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허구로 여긴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다루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그두라가 실제로 결혼했는지, 그 결혼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상징적 가르침을 담은 허구적 이야기인지가 해석의 본질에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이 이야기를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예표적(모형적)으로 다뤘다면,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난 사실로 받아들였어야 하며, 아브라함의 행동이 그두라와 비슷한 관계를 가진 누군가와의 연합을 상징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비록 특정 적용이 잘못되었더라도, 해석에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리겐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야기와 해석이 매우 영적인 형태로 변형되면서, 이 모든 것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내의 죽음과 남편의 덕 완성, 또는 두 번째 아내와 지식 추구 사이에 본질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오히려 아내를 잃은 것이 덕의 쇠퇴를 나타내거나, 두 번째 결혼이 지혜와 지식 탐구의 나태함을 나타낸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임의적이고 확장 가능한 해석 방식은 어떤 교리나 관습이라도 성경에 근거를 둔다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 결과 성경은 더 높은 가르침을 전달하기는 커녕 혼란과 불확실성의 바다로 변하고 맙니다.
In proof of this we need only appeal to the use which Clement of Alexandria, Origen's master, has made of another portion of sacred history which relates to Abraham's wives (Strom. L. I. p. 333).
The instruction which he finds couched under the narrative of Abraham's marriage successively to Sarah and Hagar, is that a Christian ought to cultivate philosophy and the liberal arts before he devotes himself wholly to the study of divine wisdom. This he endeavours to make out in the following manner:—Abraham is the image of a perfect Christian, Sarah the image of Christian wisdom, and Hagar the image of philosophy or human wisdom (certainly a far from agreeable likeness!). Abraham lived for a long time in a state of connubial sterility; whence it is inferred that a Christian, so long as he confines himself to the study of divine wisdom and religion alone, will never bring forth any great or excellent fruits.
Abraham, then, with the consent of Sarah, takes to him Hagar, which proves, according to Clement, that a Christian ought to embrace the wisdom of this world, or philosophy, and that Sarah, or divine wisdom, will not withhold her consent. Lastly, after Hagar had borne Ishmael to Abraham, he resumed his inter course with Sarah, and of her begat Isaac; the true import of which is, that a Christian, after having once thoroughly grounded himself in human learning and philosophy, will, if he then devotes himself to the culture of divine wisdom, be capable of propagating the race of true Christians, and of rendering essential service to the Church. Thus we have two entirely different senses extracted from similar transactions by the master and the disciple; and still, far from being exhausted, as many more might be obtained, as there are fertile imaginations disposed to turn the sacred narrative into the channel of their own peculiar conceits. It was not simply the historical portions of Old Testament Scripture which were thus allegorized by Origen, and the other Greek Fathers who belonged to the same school. A similar mode of interpretation was applied to the ceremonial institutions of the ancient economy; and a higher sense was often sought for in these, than we find any indication of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Clement even carried the matter so far as to apply the allegorical principle to the ten commandments, an extravagance in which Origen did not follow him; though we can scarcely tell why he should not have done so. For, even the moral precepts of the Decalogue touch at various points on the common interests and relations of life; and it was the grand aim of the philosophy, in which the allegorizing then prevalent had its origin, to carry the soul above these into the high abstractions of a contemplative theosophy.
The Fathers of the Latin church were much less inclined to such airy speculations, and their interpretations of Scripture, consequently, possessed more of a realistic and common sense character. Allegorical interpretations are, indeed, occasionally found in them, but they are more sparingly introduced, and less extravagantly carried out.[3] Typical meanings, however, are as frequent in the one class as in the other, and equally adopted without rule or limit.
- 오리겐의 스승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아브라함의 아내들에 관한 성경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신성한 지혜를 온전히 추구하기 전에 철학과 교양 학문을 먼저 익혀야 한다는 교훈을 끌어냅니다. 그의 해석 방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아브라함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 사라는 그리스도인의 지혜를 나타냅니다.
- 하갈은 철학이나 인간의 지혜를 상징합니다(이 해석은 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했습니다. 클레멘스는 이것을 그리스도인이 신성한 지혜와 종교만을 연구할 때는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합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사라의 동의로 하갈과 결혼했는데, 클레멘스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지혜, 즉 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라(신성한 지혜)도 이에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낳은 후, 아브라함은 다시 사라와 관계를 맺어 이삭을 낳습니다. 클레멘스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학문과 철학을 충분히 익힌 후 신성한 지혜를 추구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을 길러내고 교회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처럼, 스승인 클레멘스와 제자인 오리겐은 비슷한 성경 이야기를 두고 완전히 다른 해석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해석은 끝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이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성경 이야기를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에 맞춰 해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 오리겐이나 같은 학파에 속한 그리스 교부들은 단순히 구약의 역사적 이야기뿐만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의식 제도에도 이런 비유적 해석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종종 **히브리서**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클레멘스는 심지어 십계명에도 비유적 해석을 적용했는데, 이런 극단적인 해석은 오리겐조차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 오리겐이 클레멘스를 따라 십계명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삶의 일반적 관계와 공통된 이익에 관련된 부분이 많았고, 당시 유행하던 철학의 목표는 이러한 일상적 관계를 넘어 더 추상적이고 관조적인 신학적 사유로 영혼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 반면, 라틴 교부들은 이런 지나치게 공상적인 해석에 덜 기울었고, 성경 해석에서도 보다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비유적 해석이 그들 가운데서도 간혹 발견되지만, 훨씬 덜 사용되었고 극단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If in the Eastern church we find such objects as the tree of life in the garden of Eden, the rod of Moses, Moses himself with his arms extended during the conflict with Amalek, exhibited as types of the cross; in the Western church, as represented, for example, by Augustine, we meet with such specimens as the following:—"Wherefore did Christ enter into the sleep of death? Because Adam slept when Eve was formed from his side, Adam being the figure of Christ, Eve as the mother of the living, the figure of the church. And as she was formed from Adam while he was asleep, so was it when Christ slept on the cross, that the sacraments of the church flowed from His side."[4] So, again, Saul is represented as the type of death, because God unwillingly appointed him king over Israel, as He unwillingly subjected His people to the sway of death; and David's deliverance from the hand of Saul foreshadowed our deliverance through Christ from the power of death; while in David's escape from Saul's hand, coupled with the destruction that befell Ahimelech on his account, if not in his stead, there was a prefiguration of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5] In the treatment of New Testament Scripture also, the same style of interpretation is occasionally resorted to,—as when in the six waterpots of John's Gospel he finds imaged the six ages of prophecy; and in the two or three firkins which they severally held, the two are taken to indicate the Father and the Son, the three the Trinity; or, as he also puts it, the two represent the Jews and the Gentiles, and the third, Christ, making the two one (Tract ix. in Joan.). But we need not multiply examples, or prosecute the subject further into detail. Enough has been adduced to show, that the earlier divines of the Christian church had no just or well-defined principles to guide them in their interpretations of Old Testament Scripture, which could either enable them to determine between the fanciful and the true in typical applications, or guard them against the worst excesses of allegorical licence.[6]
- 동방 교회에서 우리는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 모세의 지팡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팔을 벌리고 있던 모세 자신과 같은 대상들이 십자가의 모형으로(예표로) 전시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음과 같이 해석한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잠에 들어가셨는가? 이는 아담이 잠든 동안 이브가 그의 옆구리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이브는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아담이 잠들었을 때 형성되었듯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잠들었을 때 교회의 성례전이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왔습니다." [4]
또한 사울은 죽음의 모형으로 해석되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를 마지못해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죽음의 지배 아래 두기를 마지못해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손에서 구출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는 것을 예표하며, 다윗이 사울의 손에서 벗어난 사건과, 다윗 대신에 아히멜렉에게 닥친 파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했습니다. [5]
신약 성경을 다룰 때도 때때로 동일한 해석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섯 개의 물 항아리에서 예언의 여섯 시대가 묘사되었고, 각 항아리가 두세 통씩 담고 있었던 것은 두 개는 성부와 성자를 나타내고, 세 개는 삼위일체를 나타낸다고 해석되었습니다. 또는, 두 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타내며 세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두 개를 하나로 만드셨음을 나타낸다고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주석 Tract ix.). 그러나 더 많은 예를 들거나 주제를 더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충분히 예를 들었으므로, 초기 기독교 교회의 신학자들이 구약 성경 해석에서 진정한 모형적 적용과 공상적 해석을 구별하거나 과도한 비유적 해석을 막기 위한 정당하고 명확한 원칙을 가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데 충분합니다. [6]
2. 종교개혁 시대의 Typology
II. Passing over the period of the middle ages, which produced nothing new in this line, we come to the divines of the Reformation.
At that memorable era a mighty advance was made, not only beyond the ages immediately preceding, but also beyond all that had passed from the commencement of Christianity, in the sou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The original text then at last began to be examined with something like critical exactness, and a stedfast adherence was generally professed, and in good part also maintained, to the natural and grammatical sense.
The leading spirits of the Reformation were here also the great authors of reform. Luther denounced mystical and allegorical interpretations as "trifling and foolish fables, with which the Scriptures were rent into so many and diverse senses, that silly poor consciences could receive no certain doctrine of anything." [7] Calvin, in like manner, declares that "the true meaning of Scripture is the natural and obvious meaning, by which we ought resolutely to abide;" and speaks of the "licentious system" of Origen and the allegorists, as "undoubtedly a contrivance of Satan to undermine the authority of Scripture, and to take away from the reading of it the true advantage."[8]
- II. 중세 시대를 지나,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것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시기를 넘어, 우리는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자들에게 이릅니다. 이 기념비적인 시대에, 단순히 직전의 시대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시작된 이후로 처음으로 성경을 건전하게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원문이 비로소 어느 정도의 비평적 정확성을 가지고 검토되기 시작했으며, 자연스럽고 문법적인 의미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일반적으로 표방되었고, 상당 부분에서 실제로 그렇게 유지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은 여기서도 개혁의 주요 원동력이었습니다. 루터는 신비적이고 비유적인 해석을 "성경을 너무나 다양한 의미로 분열시켜 가난하고 단순한 양심들이 어느 것 하나도 확실히 배울 수 없게 만드는 어리석고 사소한 우화들"로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7] 칼빈 역시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이며, 우리는 이에 단호히 머물러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오리겐과 비유적 해석자들의 "제멋대로의 체계"를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성경 읽기에서 진정한 유익을 제거하려는 사탄의 계략"으로 간주했습니다. [8]
In some of his interpretations, especially on the prophetical parts of Scripture, he even went to an extreme in advocating what he here calls the natural and obvious meaning, and thereby missed the more profound import, which, according to the elevated and often enigmatical style of prophecy, it was the design of the Spirit to convey. On the other hand, in spite of their avowed and generally followed principles of interpretation, the writers of the Reformation-period not unfrequently fell into the old method of allegorizing, and threw out typical explanations of a kind that cannot stand a careful scrutiny. It were quite easy to produce examples of this from the writings of those who lived at and immediately subsequent to the Reformation; but it would be of no service as regards our present object, since their attention was comparatively little drawn to the subject of types; and none of them attempted to construct any distinct typological system.
- "어떤 해석에서는, 특히 예언적인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루터는 여기서 말하는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를 옹호하는 데 극단적으로 치우쳐, 예언의 고양되고 종종 수수께끼 같은 스타일에 따라 성령이 전달하려 했던 더 심오한 의미를 놓치기도 했습니다.
- 반면, 종교개혁 시대의 저자들은 해석의 원칙을 공언하고 일반적으로 따르면서도 종종 옛 방식의 비유적 해석으로 빠져들었고, 면밀한 검토를 견딜 수 없는 유형의 모형적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와 그 직후에 살았던 이들의 글에서 이를 입증하는 예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만, 이 주제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비교적 적었고, 그들 중 누구도 명확한 모형론적 체계를 구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 목적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3. 17세기 중반 이후
III. We pass on, therefore, to a later period—about the middle of the seventeenth century—when the science of theology began to be studied more in detail, and the types consequently received a more formal consideration.
About that period arose what is called the Cocceian school, which, though it did not revive the double sense of the Alexandrian (for Cocceius expressly disclaimed any other sense of Scripture than the literal and historical one), yet was chargeable in another respect with a participation in the caprice and irregularity of the ancient allegorists. Cocceius himself, less distinguished as a systematic writer in theology than as a Hebrew scholar and learned expositor of Scripture, left no formal enunciation of principles connected with typical or allegorical interpretations; and it is chiefly from his annotations on particular passages, and the more systematic works of his followers, that these are to be gathered. How freely, however, he was disposed to draw upon Old Testament history for types of Gospel things, may be understood from a single example—his viewing what is said of Asshur going out and building Nineveh, as a type of the Turk or Mussulman power, which at once sprang from the kingdom, and shook the dominion of Antichrist (cur. Prior, in Gen. 10:11).
- III. 따라서 우리는 신학이 보다 세부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17세기 중반 이후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 시기에 모형들이 보다 공식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Cocceian 학파라 불리는 것이 등장했는데, 이 학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이중적 의미를 부활시키지 않았지만(사실 Cocceius는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외의 다른 성경적 의미를 명시적으로 부인했습니다), 고대 비유적 해석자들의 변덕과 불규칙성을 다른 측면에서 공유한 것으로 비난받았습니다. Cocceius 자신은 신학 체계적인 작가로서보다는 히브리 학자이자 성경의 학식 있는 해설자로 더 두드러졌으며, 모형적 또는 비유적 해석과 관련된 원칙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원칙들은 주로 특정 구절에 대한 그의 주석과 그의 추종자들의 더 체계적인 저작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적인 것들의 모형으로 구약의 역사를 얼마나 자유롭게 사용했는지는 단 하나의 예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앗수르(Asshur)가 나와서 니느웨(Nineveh)를 세웠다는 말씀이, 왕국에서 나온 동시에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뒤흔든 터키 또는 무슬림 권력의 모형이라고 보았습니다(창세기 10:11에 대한 주석).
He evidently conceived that every event in Old Testament history, which had a formal resemblance to something under the New, was to be regarded as typical. And that, even notwithstanding his avowed adherence to but one sense of Scripture, he could occasionally adopt a second, appears alone from his 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the eighth Psalm; according to which the sheep there spoken of, as being put under man, are Christ's flock the oxen, those who labour in Christ's service— the beasts of the field, such as are strangers to the city and kingdom of God, barbarians and savages—the fowl of the air and fish of the sea, persons at a still greater distance from godliness; so that, as he concludes, there is nothing so wild and intractable on earth but it shall be brought under the rule and dominion of Christ. It does not appear, however, that the views of Cocceius differed materially from those which were held by some who preceded him; and it would seem rather to have been owing to his eminence generally as a commentator than to any distinctive peculiarity in his typological principles, that he came to be so prominently identified with the school, which from him derived the name of Cocceian. If we turn to one of the earlier editions of Glass's Philologia Sacra, published before Cocceius commenced his critical labours (the first was published before he was born), we shall find the principles of allegorical and typical interpretations laid down with a latitude which Cocceius himself could scarcely have quarrelled with. Indeed, we shall find few examples in his writings that might not be justified on the principles stated by Glass; and though the latter, in his section on allegories, has to throw himself back chiefly on the Fathers, he yet produces some quotations in support of his views, both on these and on types, from some writers of his own age.
There seems to have been no essential difference between the typological principles of Glass, Cocceius, Witsius, and Vitringa; and though the first wrote some time before, and the last about half a century later than Cocceius, no injustice can be done to any of them by classing them together, and referring indifferently to their several productions. Like the Fathers, they did not sufficiently distinguish between allegorical and typical interpretations, but regarded the one as only a particular form of the other, and both as equally warranted by New Testament Scripture. Hence, the rules they adopted were to a great extent applicable to what is allegorical in the proper sense, as well as typical, though for the present we must confine ourselves to the typical department. They held, then, that there was a twofold sort of types, the one innate, consisting of those which Scripture itself has expressly asserted to possess a typical character; the other inferred, consisting of such as, though not specially noticed or explained in Scripture, were yet, on probable grounds, inferred by interpreters as conformable to the analogy of faith, and the practice of the inspired writers in regard to similar examples.[9] This latter class were considered not less proper and valid than the other; and pains were taken to distinguish them from those which were sometimes forged by Papists, and which were at variance with the analogies just mentioned. Of course, from their very nature they could only be employed for the support and confirmation of truths already received, and not to prove what was in itself doubtful. But not on that account were they to be less carefully searched for, or less confidently used, because thus only, it was maintained, could Christ be found in all Scripture, which throughout testifies of Him. It is evident alone, from this general statement, that there was something vague and loose in the Cocceian system, which left ample scope for the indulgence of a luxuriant fancy. Nor can we wonder that, in practice, a mere resemblance, however accidental or trifling, between an occurrence in Old, and another in New Testament times, was deemed sufficient to constitute the one a type of the other.
- 그는 분명히 구약 역사 속의 모든 사건이 신약의 어떤 것과 공식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다면 모형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경의 단일한 의미에 고수한다고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끔 두 번째 의미를 채택할 수 있었음을 그의 시편 8편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그곳에서 언급되는 양들은 사람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양 떼이며, 소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종사하는 자들이고, 들짐승들은 하나님의 도성과 왕국에 낯선 이방인과 야만인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은 경건과는 더욱 먼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지구상에서 아무리 광란하고 다루기 힘든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코케이우스의 견해가 그보다 앞선 이들이 가진 견해와 실질적으로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의 저명한 주석가로서의 지위 때문에 코케이안 학파와 두드러지게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우리가 코케이우스가 비판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출판된 글래스의 '신성한 언어학'의 초기 판 중 하나로 눈을 돌린다면(첫 번째 판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는 코케이우스가 불만을 품었을 법한 범위 내에서 알레고리적 및 모형적 해석의 원칙이 제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실, 그의 저작에서 글래스가 제시한 원칙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예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글래스가 자신의 시대의 작가들로부터 이러한 예와 전형에 대한 견해를 지지하는 인용을 내놓기 위해 주로 교부들에 의존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인용을 제시합니다. 글래스, 코케이우스, 비치우스, 비트링가의 모형적 원칙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시대에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함께 분류하고 그들의 여러 저작을 무작위로 참조하는 것에 대한 불공정은 없습니다. 그들은 교부들처럼 알레고리적 해석과 전형적 해석을 충분히 구별하지 않았으며, 하나를 다른 하나의 특정한 형태로 간주하고, 둘 다 신약 성경에 의해 동등하게 보장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채택한 규칙은 전형적(=모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적절한 의미의 알레고리적 해석에도 상당히 적용될 수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전형적 부분에 국한해야 합니다. 그들은 전형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본질적인 것으로, 성경이 전형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한 것들로 구성됩니다. 다른 하나는 추론된 것으로, 성경에서 특별히 언급되거나 설명되지 않았지만, 신뢰할 만한 근거에 따라 해석자들이 믿음의 유사성과 비슷한 예에 대한 영감 있는 작가들의 관행에 따라 추론한 것입니다. 후자의 범주도 전자의 범주 못지않게 적절하고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들은 이를 때때로 가톨릭 신자들이 조작한 전형과 구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그 본질상 이미 받아들여진 진리를 지원하고 확증하는 데만 사용될 수 있었고, 스스로 의심스러운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그들의 탐색이 덜 신중해지거나 덜 확신을 갖고 사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가 성경의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진술에서만 보더라도, 코케이안 시스템에는 모호하고 느슨한 부분이 있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대와 신약 시대의 사건들 사이에서 우연한 유사성이나 사소한 유사성만으로도 하나가 다른 하나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Hence in the writings of the eminent and learned men above referred to, we find the name of Abel (emptiness) viewed as prefiguring our Lords humiliation; the occupation of Abel, Christ's office as the Shepherd of Israel; the withdrawal of Isaac from his father's house to the land of Moriah, Christ's being led out of the temple to Calvary; Adam's awaking out of sleep, Christ's resurrection from the dead; Samson's meeting a young lion by the way, and the transactions that followed, Christ's meeting Saul on the road to Damascus, with the important train of events to which it led; David's gathering to himself a party of the distressed, the bankrupt, and discontented, Christ's receiving into His Church publicans and sinners; with many others of a like nature.
-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저명하고 학식 있는 사람들의 글에서 우리는 아벨(Abel)의 이름(허무함, emptiness)이 우리 주님(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예표하는 것으로, 아벨의 직업이 이스라엘의 목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무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 또한, 이삭(Isaac)이 아버지의 집에서 모리아(Moriah) 땅으로 옮겨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갈보리로 인도된 것을 상징하며, 아담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을 나타냅니다.
- 삼손(Samson)이 길에서 젊은 사자를 만난 사건과 그 후의 일들은 다메섹 길에서 사울을 만난 그리스도와 그로 인해 생긴 중요한 사건들의 연속을 상징하며, 다윗이 고통받는 자들, 파산한 자들, 불만족스러운 자들을 자기에게 모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교회로 받아들이신 것을 나타냅니다. 이와 유사한 많은 예들이 있습니다.
Multitudes of examples perfectly similar—that is, equally destitute of any proper foundation in principle—are to be found in writers of our own country, such as Mather,[10] Keach,[11] Worden,[12] J. Taylor, [13] Guild,[14] who belonged to the same school of interpretation, and who nearly all lived toward the latter part of the seventeenth century.
Excepting the two first, they make no attempt to connect their explanations with any principles of interpretation, and these two very sparingly. Their works were all intended for popular use, and rather exhibited by particular examples, than systematically expounded the nature of their views.
- 비슷한 성격을 가진 예들이 영국의 작가들, 예를 들어 Mather, Keach, Worden, J. Taylor, Guild와 같은 사람들의 글에서도 발견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해석학파에 속했으며, 거의 모두 17세기 후반에 활동했습니다. 처음 두 사람을 제외하면, 그들은 해석의 원칙과 그들의 설명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앞의 두 사람조차도 그것을 아주 드물게 언급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대중적인 용도로 작성되었고, 특정 사례를 통해 그들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단순히 예시를 보여주는 데 그쳤습니다.
They, however, agreed in admitting inferred as well as innate types, but differed more perhaps from constitutional temperament than on theoretical grounds in the extent to which they respectively carried the liberty they claimed to go beyond the explicit warrant of New Testament Scripture. Mather in particular, and Worden, usually confine themselves to such types as have obtained special notice of some kind from the writers of the New Testament; though they held the principle, that "where the analogy was evident and manifest between things under the law and things under the Gospel, the one were to be concluded (on the ground simply of that analogy) to be types of the other."
- 그러나 그들은 선천적인 모형뿐만 아니라 유추된 모형도 인정했으며,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데 있어 이론적인 이유보다는 성향의 차이에 의해 더 많이 나뉘었습니다. 특히 Mather와 Worden은 신약 성경 저자들로부터 특별한 언급을 받은 유형에 주로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것들과 복음 아래 있는 것들 사이의 유추가 명확하고 분명한 경우, 전자는 단순히 유추를 근거로 후자의 모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했습니다.
How far this warrant from analogy was thought capable of leading, may be learned from Taylor and Guild, especially from the latter, who has no fewer than forty-nine typical resemblances between Joseph and Christ, and seven teen between Jacob and Christ, not scrupling to swell the number by occasionally taking in acts of sin, as well as circumstances of an altogether trivial nature.
Thus, Jacob's being a supplanter of his brother, is made to represent Christ's supplanting death, sin, and Satan; his being obedient to his parents in all things, Christ's subjection to His heavenly Father and His earthly parents; his purchasing his birthright by red pottage, and obtaining the blessing by presenting savoury vension to his father, clothed in Esau's garment, Christ's purchasing the heavenly inheritance to us by His red blood, and obtaining the blessing by offering up the savoury meat of His obedience, in the borrowed garment of our nature, etc.
- 이 유추의 권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Taylor와 Guild, 특히 Guild의 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Guild는 요셉(Joseph)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성을 49가지로, 야곱(Jacob)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성을 17가지로 나열했으며, 가끔은 죄의 행위와 사소한 사건들도 포함시켜 그 수를 부풀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이 형제를 속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 죄, 사탄을 속이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고, 부모에게 모든 면에서 순종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육신의 부모께 순종한 것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또한, 야곱이 붉은 죽을 사서 장자권을 얻고, 에서의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아버지께 드려 축복을 받았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붉은 피로 하늘 유산을 사시고, 우리 본성을 입고 순종이라는 맛있는 음식을 드려 축복을 받으신 것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Now, we may affirm of these, and many similar examples occurring in writers of the same class, that the analogy they found upon was a merely superficial resemblance appearing between things in the Old and other things in the New Testament Scriptures.
But resemblances of this sort are so extremely multifarious, and appear also so different according to the point of view from which they are contemplated, that it was obviously possible for anyone to take occasion through them to introduce the most frivolous conceits, and to caricature rather than vindicate the grand theme of the Gospel.
Then, if such weight was fitly attached to mere resemblances between the Old and the New, even when they were altogether of a slight and superficial kind, why should not profane as well as sacred history be ran sacked for them? What, for example, might prevent Romulus (seeing that God is in all history, if this actually were history) assembling a band of desperadoes, and founding a worldwide empire on the banks of the Tiber, from serving, as well as David in the circumstances specified above, to typify the procedure of Christ in calling to him publicans and sinners at the commencement of His kingdom?
As many points of resemblance might be found in the one case as in the other; and the two transactions in ancient history, as here contemplated, stood much on the same footing as regards the appointment of God; for both alike were the offspring of human policy, struggling against outward difficulties, and endeavouring with such materials as were available to supply the want of better resources.
And thus, by pushing the matter beyond its just limits, we reduce the sacred to a level with the profane, and, at the same time, throw an air of uncertainty over the whole aspect of its typical character.[15]
- 이와 같은 예들은 모두 구약 성경의 사건과 신약 성경의 사건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은 매우 다양하며,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중요한 주제를 풍자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을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과 신약 간의 단순한 유사성에 큰 무게를 둔다면, 왜 세속적인 역사도 유사성을 찾기 위해 조사하지 말아야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물루스(Romulus)가 범죄자들을 모아 티베르 강변에 세계적 제국을 세운 일이 다윗이 앞서 언급한 환경에서 행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절차를 예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요? 두 경우 모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에서의 위치는 유사하게 인간의 정책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남용은 성스러운 것을 세속적인 것과 동일시하며, 성경의 전형적 성격 전체에 불확실성을 불러올 위험이 있습니다.
That the Cocceian mode of handling the typical matter of ancient Scripture so readily admitted of the introduction of trifling, farfetched, and even altogether false analogies, was one of its capital defects. It had no essential principles or fixed rules by which to guide its interpretations set up no proper landmarks along the field of inquiry—left room on every hand for arbitrariness and caprice to enter.
It was this, perhaps, more than anything else, which tended to bring typical interpretations into disrepute, and disposed men, in proportion as the exact and critical study of Scripture came to be cultivated, to regard the subject of its typology as hopelessly involved in conjecture and uncertainty.
- Cocceian 학파가 고대 성경의 모형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사소하고 지나친 유추를 쉽게 도입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이들의 주요 결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의 해석에는 필수적인 원칙이나 고정된 규칙이 없었으며, 탐구의 범위에 적절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의성과 변덕이 해석에 침투할 여지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모형적 해석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성경의 정확하고 비판적인 연구가 발전함에 따라 모형론의 주제를 불확실성과 추측으로 가득 찬 것으로 간주하게 만들었습니다.
Yet this was not the only fault inherent in the typological system now under consideration. It failed, more fundamentally still, in the idea it had formed of the conn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in God's dispensations between the type and the thing typified which came to be thrown mainly upon the mere forms and accidents of things, to the comparative neglect of the great fundamental principles which are common alike to all dispensations, and in which the more vital part of the connection must be sought. It was this more radical error, which in fact gave rise to the greater portion of the extravagances that disfigured the typical illustrations of our elder divines; for it naturally led them to make account of coincidences that were often unimportant, and sometimes only apparent. And not only so; but it also led them to undervalue the immediate object and design of the types in their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mongst them. While these as types speak a language that can be distinctly and intelligently understood only by us, who are privileged to read their meaning in the light of Gospel realities, they yet had, as institutions in the existing worship, or events in the current providence of God, a present purpose to accomplish, apart from the prospective reference to future times, and we might almost say, as much as if no such reference had belonged to them.
- 그러나 이는 현재 논의 중인 모형론적 체계에 내재된 유일한 결함이 아니었습니다. 이 체계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구약과 신약, 그리고 모형과 그 예표된 대상 간의 연결을 형성하는 방식에서 더욱 근본적인 실패를 드러냈습니다. 이 연결은 주로 단순한 형식이나 우연적 요소에 기반하여 설명되었으며, 모든 섭리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중요한 근본 원칙들, 즉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연결 지점들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더 근본적인 오류가 초기 신학자들의 모형적 해석을 왜곡시키는 대부분의 과장을 낳았습니다. 이는 중요하지 않거나 때로는 단지 겉보기만의 우연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형들이 그 당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닌 직접적 목적과 설계를 과소평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모형들은 복음의 실체를 비추어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우리들에게만 명확하고 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언어를 말하지만, 여전히 당시의 예배 제도나 하나님의 섭리 속 사건들로서, 미래를 예고하는 것과 별개로, 당시에 달성해야 할 현재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미래적 참조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만큼이었습니다.
IV. These inherent errors and imperfections in the typo logical system of the Cocceian school, were not long in leading to its general abandonment.
But theology had little reason to boast of the change. For the system that supplanted it, without entering at all into a more profound investigation of the subject, or attempting to explain more satisfactorily the grounds of a typical conn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simply contented itself with admitting into the rank of types what had been expressly treated as such in the Scripture itself, to the exclusion of all besides. This seemed to be the only safeguard against error and extravagance.[16]
- IV. Cocceian 학파의 모형론 체계에 내재된 이러한 오류와 결함은 결국 이 체계가 일반적으로 폐기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자랑할 이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 체계를 대체한 새로운 시스템은 주제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거나 구약과 신약 사이의 모형적 연결의 근거를 더 만족스럽게 설명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은 채, 단순히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모형으로 언급된 것들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류와 과장을 방지하는 유일한 안전장치처럼 보였습니다. [16]
And yet, we fear, other reasons of a less justifiable nature contributed not a little to produce the result. An unhappy current had begun to set in upon the Protestant Church in some places while Cocceius still lived, and in others soon after his death, which disposed many of her more eminent teachers to slight the evangelical element in Christianity, and, if not utterly to lose sight of Christ Himself, at least to disrelish and repudiate a system which delighted to find traces of Him in every part of revelation. It was the redeeming point of the earlier typology, which should be allowed to go far in extenuating the occasional errors connected with it, that it kept the work and kingdom of Christ ever prominently in view, as the grand scope and end of all God's dispensations. It felt, if we may so speak, correctly, whatever it may have wanted in the requisite depth and precision of thought. But towards the end of the seventeenth and the beginning of the eighteenth century, a general coldness very commonly discovered itself, both in the writings and the lives of even the more orthodox sections of the Church. The living energy and zeal which had achieved such important results a century before, either inactively slumbered, or spent itself in doctrinal controversies; and the faith of the Church was first corrupted in its simplicity, and then weakened in its foundations by the pernicious influence of a widely cultivated, but essentially anti-Christian philosophy.
- 그리고 우리는 다른, 덜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들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고 우려합니다. Cocceius가 아직 생존해 있던 시기와 그의 사망 직후, 개신교 교회 내 일부 지역에서 불행한 흐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많은 저명한 신학자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복음적 요소를 경시하게 만들었으며, 그리스도 자체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계시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는 데 기쁨을 느끼는 체계를 불쾌히 여기고 배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초기 모형론의 구원적인 측면은, 그와 관련된 가끔의 오류들을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해야 하며,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섭리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왕국을 궁극적 목표이자 중심으로 항상 두드러지게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표현할 수 있다면, 필요했던 사상의 깊이와 정확성이 부족했을지라도 올바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갈수록, 심지어 교회의 정통파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글과 삶에서 일반적인 냉담함이 흔히 발견되었습니다. 한 세기 전에 그러한 중요한 결과를 이루어낸 활기찬 에너지와 열정은 비활성 상태로 잠들었거나 교리적 논쟁에 소모되었습니다. 교회의 신앙은 처음에는 단순성이 타락했고, 이후에는 널리 퍼진, 그러나 본질적으로 반기독교적인 철학의 해로운 영향으로 인해 기초가 약화되었습니다.
In such circumstances Christ was not allowed to maintain His proper place in the New Testament; and it is not to be wondered at if He should have been nearly banished from the Old. Vitringa, who lived when this degeneracy from better times had made considerable progress, attributed to it much of that distaste which was then beginning to prevail in regard to typical interpretations of Scripture.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work of Spencer on the Laws of the Hebrews,—a work not less remarkable for its low-toned, semi-heathenish spirit, than for its varied and welldigested learning,—he lamented the inclination that appeared to seek for the grounds and reasons of the Mosaic institutions in the mazes of Egyptian idolatry, instead of endeavouring to discover in them the mysteries of the Gospel. These, he believed, the Holy Spirit had plainly intimated to be couched there; and they shone, indeed, so manifestly through the institutions themselves, that it seemed impossible for anyone not to perceive the type, who recognised the antitype. Nor could he conceal his fear, that the talent, authority, and learning of such men as Spencer would gain extensive credit for their opinions, and soon bring the Typology of Scripture, as he understood it, into general contempt.[17]
-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약 성경에서 그분의 적절한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셨고, 구약 성경에서 거의 배제된 것에 대해 놀랄 일이 아닙니다. 더 나은 시절로부터의 타락이 상당히 진전된 시기에 살았던 Vitringa는 이러한 상황이 성경의 모형적 해석에 대해 당시 점차 확산되던 반감을 크게 야기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특히 Spencer의 히브리 율법에 관한 저작을 언급하며, 이 작품이 다양한 내용과 잘 정리된 학문적 깊이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급하고 반이교적인 정신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모세 율법의 기초와 이유를 이집트 우상숭배의 미로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애석하게 여겼으며, 대신 그 안에서 복음의 신비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그러한 신비가 그 안에 담겨 있다고 분명히 암시하셨다고 믿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신비는 율법 자체를 통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 모형과 그에 대응하는 실체를 인식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모형을 알아보지 못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또한 Spencer와 같은 인물들의 재능, 권위, 학문이 그들의 견해에 대한 폭넓은 신뢰를 얻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그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성경의 모형론을 일반적인 경멸 속에 빠뜨릴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17]
In this apprehension he was certainly not mistaken. Another generation had scarcely passed away when Dathe published his edition of the Sacred Philology of Glass, in which the section on types, to which we have already referred, was wholly omitted, as relating to a subject no longer thought worthy of a recognised place in the science of an enlightened theology. The rationalistic spirit, in the progress of its anti-Christian tendencies, had now discarded the innate, as well as the inferred types of the elder divines; and the convenient principle of accommodation, which was at the same time introduced, furnished an easy solution for those passages in New Testament Scripture which seemed to indicate a typ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past and the future. It was regarded as only an adaptation, originating in Jewish prejudice or conceit, of the facts and institutions of an earlier age to things essentially different under the Gospel; but now, since the state of feeling that gave rise to it no longer existed, deservedly suffered to fall into desuetude. And thus the bond was virtually broken by the hand of these rationalizing theologians between the Old and the New in Revelation; and the records of Christianity, when scientifically interpreted, were found to have marvellously little in common with those of Judaism. In Britain various causes contributed to hold in check this downward tendency, and to prevent it from reaching the same excess of dishonour to Christ, which it soon attained on the Continent. Even persons of a cold and philosophical temperament, such as Clarke and Jortin, not only wrote in defence of types, as having a certain legitimate use in Revelation, but also admitted more within the circle of types than Scripture itself has expressly applied to Gospel times. [18] They urged, indeed, the necessity of exercising the greatest caution in travelling beyond the explicit warrant of Scripture; and in their general cast of thought they undoubtedly had more affinity with the Spencerian than the Cocceian school. Yet a feeling of the close and pervading; conn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 dispensations restrained them from discarding the more important of the inferred types. Jortin especially falls so much into the vein of earlier writers, that he employs his ingenuity in reckoning up as many as forty particulars in which Moses typically prefigured Christ. A work composed about the same period as that to which the Remarks of Jortin belong, and one that has had more influence than any other in fashioning the typological views generally entertained in Scotland—the production of a young dissenting minister in Dundee (Mr M'Ewen)[19]—is still more free in the admission of types not expressly sanctioned in the Scriptures of the New Testament. The work itself being posthumous, and intended for popular use, contains no investigation of the grounds on which typical interpretations rest, and harmonizes much more with the school that had flourished in the previous century, than that to which Clarke and Jortin belonged. As indicative of a particular style of biblical interpretation, it may be classed with the productions of Mather and Taylor, and partakes alike of their excellences and defects. There was, therefore, a considerable unwillingness in this country to abandon the Cocceian ground on the subject of types. The declension came in gradually, and its progress was rather marked by a tacit rejection in practice of much that was previously held to be typical, than by the introduction of views specifically different. It became the practice of theologians to look more into the general nature of things for the reasons of Christianity, than into the pre-existing elements and characteristics of former dispensations; and to account for the peculiarities of Judaism by its partly antagonistic, partly homogeneous relation to Paganism, rather than by any covert reference it might have to the coming realities of the Gospel. As an inevitable consequence, the typological department of theology fell into general neglect, from which the Old Testament Scriptures themselves did not altogether escape. Those portions of them especially which narrate the history and prescribe the religious rites of the ancient Church, were but rarely treated in a manner that bespoke any confidence in their fitness to minister to the spiritual discernment and faith of Christians. It seems, partly at least, to have been owing to this growing distaste for Old Testament inquiries, and this general depreciation of its Scriptures, that what is called the Hutchinsonian school arose in England, which, by a sort of recoil from the prevailing spirit, ran into the opposite extreme of searching for the elements of all knowledge, human and divine, in the writings of the Old Testament. This school possesses too much the character of an episode in the histo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in this country, and was itself too strongly marked by a spirit of extravagance, to render any formal account of it necessary here. It was, besides, chiefly of a physico-theological character, combining the elements of a natural philosophy with the truths of revelation, both of which it sought to extract from the statements, and sometimes even from the words and letters of Scripture. The most profound meanings were consequently discovered in the sacred text, in respect alike to the doctrines of the Gospel and the truths of science. One of the maxims of its founder was, that "every passage of the Old Testament looks backward and forward, and every way, like light from the sun; not only to the state before and under the law, but under the Gospel, and nothing is hid from the light thereof."[20] When such a depth and complexity of meaning was supposed to be involved in every passage, we need not be surprised to learn, respecting the exactness of Abraham's knowledge of future events, that he knew from preceding types and promises, that "one of his own line was to be sacrificed, to be a blessing to all the race of Adam;" and not only so, but that when he received the command to offer Isaac, he proceeded to obey it, "not doubting that Isaac was to be that person who should redeem man." [21] The cabalistic and extravagant character of the Hutchinsonian system, if it had any definite influence on the study of types and other cognate subjects, could only tend to increase the suspicion with which they were already viewed, and foster a disposition to agree to whatever might keep investigation within the bounds of sobriety and discretion. Accordingly, while nothing more was done to unfold the essential and proper ground of a typical connection between Old and New Testament things, and to prevent abuse by tracing the matter up to its ultimate and fundamental principles, the more scientific students of the Bible came, by a sort of common consent, to acquiesce in the opinion, that those only were to be reckoned types to which Scripture itself, by express warrant, or at least by obvious implication, had assigned that character. Bishop Marsh may be named as perhaps the ablest and most systematic expounder of this view of the subject. He says, —"There is no other rule by which we can distinguish a real from a pretended type, than that of Scripture itself. There are no other possible means by which we can know that a previous design and a pre-ordained connection existed. Whatever persons or things, therefore, recorded in the Old Testament, were expressly declared by Christ or by His apostles to have been designed as prefigurations of persons or things relating to the New Testament, such persons or things so recorded in the former, are types of the persons or things with which they are compared in the latter. But if we assert that a person or thing was designed to prefigure another person or thing, where no such prefiguration has been declared by divine authority, we make an assertion for which we neither have, nor can have, the slightest foundation."[22]
- 그의 이러한 우려는 분명히 틀리지 않았습니다.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Dathe는 Sacred Philology of Glass 의 판본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이미 언급한 모형에 관한 부분은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이는 계몽된 신학의 학문에서 더 이상 중요한 주제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리주의적 정신은 반기독교적인 경향이 발전함에 따라, 초기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선천적 모형뿐만 아니라 유추된 모형도 폐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도입된 "적응"이라는 편리한 원칙은 신약 성경에서 과거와 미래의 모형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에 대한 쉬운 해석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지 이전 시대의 사실과 제도가 복음 아래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에 맞춰졌다는, 유대인의 편견이나 자만심에서 비롯된 적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했던 정서적 상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 이러한 해석 방식은 당연히 폐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합리주의적 신학자들에 의해 구약과 신약 간의 계시적 연결이 사실상 단절되었고, 기독교의 기록은 과학적으로 해석되었을 때 유대교의 기록과 공통점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다양한 요인들이 이러한 하락세를 억제하는 데 기여했으며, 대륙에서 곧 그리스도에 대한 극단적인 모독으로 이어졌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Clarke와 Jortin과 같이 차가운 철학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모형이 계시에서 어느 정도 정당한 역할을 한다고 변호하며, 성경이 명시적으로 복음의 시대에 적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모형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18]
물론 이들은 성경의 명시적인 근거를 넘어설 때 최대한의 신중함을 기울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반적인 사상에서는 Spencer 학파보다는 Cocceian 학파와 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의 경륜 간의 긴밀하고 포괄적인 연결에 대한 감각이 그들로 하여금 더 중요한 유추된 모형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특히 Jortin은 초기 작가들의 기조를 강하게 이어받아 모세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40가지의 특징을 계산해내는 데 그의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Jortin의 견해와 같은 시기에 작성된 작품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모형론적 관점을 형성하는 데 다른 어떤 작품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는 던디(Dundee)의 젊은 비국교도 목사였던 M’Ewen이 작성한 것으로, 성경에서 신약에 의해 명시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모형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였습니다. 이 작품은 유고작이었고 대중적인 용도로 쓰였으며, 모형적 해석이 기반을 두고 있는 근거에 대한 조사를 포함하지 않았고, Clarke와 Jortin이 속했던 학파보다는 이전 세기에 번성했던 학파와 훨씬 더 많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특정 성경 해석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Mather와 Taylor의 저작과 동일한 범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들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공유했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모형에 대한 Cocceian의 관점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에 상당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이 퇴보는 점진적으로 일어났고, 그 진전은 새로운 관점이 도입되었다기보다는 이전에 모형적이라고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실천적으로 묵인되면서 두드러졌습니다.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이유를 찾기 위해 사물의 일반적인 본질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이전 시대의 요소와 특징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이교도주의와의 부분적 대립적 관계 및 부분적 동질적 관계로 인해 유대교의 특이성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필연적인 결과로, 신학에서 모형론의 영역은 일반적으로 방치되었으며, 구약 성경 자체도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특히 고대 교회의 역사와 종교적 의식을 서술한 구약 성경의 부분들은 기독교인의 영적 통찰력과 신앙을 함양하기에 적합하다는 신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 연구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의 증가와 그 기록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절하가 부분적으로 원인이 되어 영국에서 이른바 Hutchinsonian 학파가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학파는 당시의 일반적인 정신에서 벗어나 반동적으로 구약 성경의 글에서 인간적, 신적 지식의 모든 요소를 찾으려는 극단적인 경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학파는 영국에서 성경 해석의 역사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와 같은 성격을 지나치게 가지고 있었으며, 지나치게 과장된 정신에 의해 강하게 특징지어져 이 학파를 정식으로 다룰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이 학파는 본질적으로 자연 철학의 요소를 계시의 진리와 결합한 물리-신학적 성격을 주로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성경의 진술, 때로는 단어와 문자에서까지 추출하려 했습니다.
결국, 신학적 연구자들은 성경의 명시적인 근거로 모형성을 인정한 경우에만 모형으로 간주하는 관행에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Bishop Marsh는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모형과 거짓된 모형을 구별할 수 있는 다른 규칙은 성경 자체 외에는 없습니다. 이전의 설계와 예정된 연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성경에서 제공되는 권위입니다." [22]
This is certainly a very authoritative and peremptory decision of the matter. But the principle involved in this statement, though seldom so oracularly announced, has long been practically received. It was substantially adopted by Macknight, in his Dissertation on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at the end of his Commentary on the Epistles, before Bishop Marsh wrote; and it has been followed since by Vanmildert and Conybeare in their Bampton Lectures, by Nares in his Warburtonian Lectures, by Chevalier in his Hulsean Lectures, by Home in his Introduction, and a host of other writers. Judging from an article in the American Biblical Repository, which appeared in the number for January 1841, it would appear that the leading authorities on the other side of the Atlantic concurred in the same general view. The reviewer himself advocates the opinion, that "no person, event, or institution, should be regarded as typical, but what may be proved to be such from the Scriptures," meaning by that their explicit assertion in regard to the particular case. And in support of this opinion he quotes, besides English writers, the words of two of his own countrymen, Professor Stowe and Moses Stuart, the latter of whom says,—"That just so much of the Old Testament is to be accounted typical as the New Testament affirms to be so, and no more. The fact, that anything or event under the Old Testament dispensation was designed to prefigure something under the New, can be known to us only by revelation; and of course all that is not designated by divine authority as typical, can never be made so by any authority less than that which guided the writers of the New Testament."[23] Now, the view embraced by this school of interpretation lies open to one objection, in common with the school that preceded it. While the field, as to its extent, was greatly circumscribed, and in its boundaries ruled as with square and compass, nothing was done in the way of investigating it internally, or of unfolding the grounds of connection between type and antitype. Fewer points of resemblance are usually presented to us between the one and the other by the writers of this school than arc found in works of an older date; but the resemblances themselves are quite as much of a superficial and outward kind. The real harmony and conn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in the divine dispensations, stood precisely where it was. But other defects adhere to this more recent typological system. The leading excellence of the system that preceded it was the constant reference it conceived the Scriptures of the Old Testament to bear toward Christ and the Gospel dispensation; and the practical disavowal of this may be said to constitute the great defect of the more exact, but balder system, which supplanted it with the general suffrage of the learned. It drops a golden principle for the sake of avoiding a few lawless aberrations. With such narrow limits as it sets to our inquiries, we cannot indeed wander far into the regions of extravagance. But in the very prescription of these limits, it wrongfully withholds from us the key of knowledge, and shuts us up to evils scarcely less to be deprecated than those it seeks to correct. For it destroys to a large extent the bond of conn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 Scriptures, and thus deprives the Christian Church of much of the instruction in divine things which they were designed to impart. Were men accustomed, as they should be, to search for the germs of Christian truth in the earliest Scriptures, and to regard the inspired records of both covenants as having for their leading object "the testimony of Jesus," they would know how much they were losers by such an undue contraction of the typical element in Old Testament Scripture. And in proportion as a more profound and spiritual acquaintance with the divine word is cultivated, will the feeling of dissatisfaction grow in respect to a style of interpretation that so miserably dwarfs and cripples the relation which the preparatory bears to the ultimate in God's revelations. It is necessary, however, to take a closer view of the subject. The principle on which this typological system takes its stand, is, that nothing less than inspired authority is sufficient to deter mine the reality and import of anything that is typical. But what necessary reason or solid ground is there for such a principle? No one holds the necessity of inspiration to explain each particular prophecy, and decide even with certainty on its fulfilment; and why should it be reckoned indispensable in the closely related subject of types? This question was long ago asked by Witsius, and yet waits for a satisfactory answer. A part only, it is universally allowed, of the prophecies which refer to Christ and His kingdom have been specially noticed and interpreted by the pen of inspiration. So little necessary, indeed, was inspiration for such a purpose, that even before 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 at Pentecost, our Lord reproved His disciples as "fools and slow of heart to believe all that the prophets had spoken." And from the close analogy between the two subjects—for what is a type but a prophetical act or institution?— we might reasonably infer the same liberty to have been granted, and the same obligation to be imposed, in regard to the typical parts of ancient Scripture. But we have something more than a mere argument from analogy to guide us to this conclusion. For the very same complaint is brought by an inspired writer against private Christians concerning their slowness in understanding the typical, which our Lord brought against His disciples in respect to the prophetical portions of ancient Scripture.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sharp reproof is administered for the imperfect acquaintance believers among them had with the typical character of Melchizedek, and subjects of a like nature—thus placing it beyond a doubt that it is both the duty and the privilege of the Church, with that measure of the Spirit's grace which it is the part even of private Christians to possess, to search into the types of ancient Scripture, and come to a correct understanding of them. To deny this, is plainly to withhold an important privilege from the Church of Christ; to dissuade from it, is to encourage the neglect of an incumbent duty. But the unsoundness of the principle, which would thus limit the number of types to those which New Testament Scripture has expressly noticed and explained, becomes still more apparent when it is considered what these really are, and in what manner they are introduced. Leaving out of view the tabernacle, with its furniture and services, which, as a whole, is affirmed in the epistles to the Hebrews and the Colossians to have been of a typical nature, the following examples are what the writers now referred to usually regard as having something like an explicit sanction in Scripture: 1. Persons or characters: Adam (Rom. 5:11, 12; 1 Cor. 15:22; Melchizedek (Heb. 7); Sarah and Hagar, Ishmael and Isaac, and by implication Abraham (Gal. 4:22-35); Moses (Gal. 3:19; Acts 3:22-26); Jonah (Matt. 12:40); David (Ezek. 37:24; Luke 1:32, etc.); Solomon (2 Sam. 7); Zerubbabel and Joshua (Zech. 3, 4; Hag. 2:23). 2. Transactions or events: the preservation of Noah and his family in the ark (1 Pet. 3:20); the redemption from Egypt and its passover-memorial (Luke 22:15, 16; 1 Cor. 5:7; the exodus (Matt. 2:15); the passage through the Red Sea, the giving of manna, Moses veiling of his face while the law was read; the water flowing from the smitten rock; the serpent lifted up for healing in the wilderness, and some other things that befell the Israelites there (1 Cor. 10; John 3:14, 5:33; Rev. 2:17).[24] Now, let any person of candour and intelligence take his Bible, and examine the passages to which reference is here made, and then say, whether the manner in which these typical characters and transactions are there introduced, is such as to indicate, that these alone were held by the inspired writers to be prefigurative of similar characters and transactions under the Gospel? that in naming them they meant to exhaust the typical bearing of Old Testament history? On the contrary, we deem it impossible for anyone to avoid the conviction, that in whatever respect these particular examples may have been adduced, it is simply as examples adapted to the occasion, and taken from a vast storehouse, where many more were to be found. They have so much at least the appearance of having been selected merely on account of their suitableness to the immediate end in view, that they cannot fairly be regarded otherwise than as specimens of the class they belong to. And if so, they should rather have the effect of prompting further inquiry than of repressing it; since, instead of themselves comprehending and bounding the whole field of Scriptural Typology, they only exhibit practically the principles on which others of a like description are to be discovered and explained. Indeed, were it otherwise, nothing could be more arbitrary and inexplicable than this Scriptural typology. For, what is there to distinguish the characters and events, which Scripture has thus particularized, from a multitude of others, to which the typical element might equally have been supposed to belong? Is there anything on the face of the inspired record to make us look on them in a singular light, and attribute to them a significance altogether peculiar respecting the future affairs of God's kingdom? So far from it, that we instinctively feel, if these really possessed a typical character, so also must others, which hold an equally, or perhaps even more prominent place in the history of God's dispensations. Can it be seriously believed, for example, that Sarah and Hagar stood in a typical relation to Gospel times, while no such place was occupied by Rebekah, as the spouse of Isaac, and the mother of Jacob and Esau? What reason can we imagine for Melchizedek and Jonah having been constituted types—persons to whom our attention is comparatively little drawn in Old Testament history— while such leading characters as Joseph, Sampson, Joshua, are omitted? Or, for selecting the passage through the Red Sea, and the incidents in the wilderness, while no account should be made of the passage through Jordan, and the conquest of the land of Canaan? We can scarcely conceive of a mode of interpretation which should deal more capriciously with the word of God, and make so anomalous a use of its historical records. Instead of investing these with a homogeneous character, it arbitrarily selects a few out of the general mass, and sets them up in solitary grandeur, like mystic symbols in a temple, fictitiously elevated above the sacred materials around them. The exploded principle, which sought a type in every notice of Old Testament history, had at least the merit of uniformity to recommend it, and could not be said to deal partially, however often it might deal fancifully, with the facts of ancient Scripture. But according to the plan now under review, for which the authority of inspiration itself is claimed, we perceive nothing but arbitrary distinctions and groundless preferences. And though unquestionably it were wrong to expect in the word of God the methodical precision and order which might naturally have been looked for in a merely human composition, yet as the product, amid all its variety, of one and the same Spirit, we are warranted to expect that there shall be a consistent agreement among its several parts, and that distinctions shall not be created in the one Testament, which in the other seem destitute of any just foundation or apparent reason. But then, if a greater latitude is allowed, how shall we guard against error and extravagance? Without the express authority of Scripture, how shall we be able to distinguish between a happy illustration and a real type? In the words of Bishop Marsh: "By what means shall we determine, in any given instance, that what is alleged as a type, was really designed for a type? The only possible source of information on this subject is Scripture itself. The only possible means of knowing that two distant, though similar historical facts, were so connected in the general scheme of Divine Providence that the one was designed to prefigure the other, is the authority of that book in which the scheme of Divine Providence is unfolded."[25] This is an objection, indeed, which strikes at the root of the whole matter, and its validity can only be ascertained by a thorough investigation into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the subject. That Scripture is the sole rule, on the authority of which we are to distinguish what is properly typical from what is not, we readily grant—though not in the straitened sense contended for by Bishop Marsh and those who hold similar views, as if there were no way for Scripture to furnish a sufficient direction on the subject, except by specifying every particular case. It is possible, surely, that in this, as well as in other things, Scripture may indicate certain fundamental views or principles, of which it makes but a few individual applications, and for the rest leaves them in the hand of spiritually enlightened consciences. The rather may we thus conclude, as it is one of the leading peculiarities of New Testament Scripture to develop great truths, much more than to dwell on minute and isolated facts. It is a presumption against, not in favour of, the system we now oppose, that it would shut up the Typology of Scripture, in so far as connected with the characters and events of sacred history, within the narrow circle of a few scattered and apparently random examples. And the attempt to rescue it from this position, if in any measure successful, will also serve to exhibit the unity of design which pervades the inspired records of both covenants, the traces they contain of the same Divine hand, the subservience of the one to the other, and the mutual dependence alike of the Old upon the New, and of the New upon the Old.
- 이는 분명히 매우 권위적이고 단호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진술에 내포된 원칙은 이처럼 확고하게 선언된 경우는 드물었지만,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원칙은 Bishop Marsh 이전에 Macknight가 그의 Dissertation on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에서 받아들였으며, 이후 Vanmildert와 Conybeare가 Bampton Lectures에서, Nares가 Warburtonian Lectures에서, Chevalier가 Hulsean Lectures에서, Home이 그의 저서 *Introduction*에서, 그리고 많은 다른 작가들이 이를 따랐습니다.
1841년 1월호 American Biblical Repository에 실린 기사를 기준으로 볼 때,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주요 권위자들이 대체로 같은 견해를 공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사 작성자는 "어떤 사람, 사건, 또는 제도도 성경에서 그 특정 경우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면, 이를 모형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이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영국 작가들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 출신의 두 학자, Stowe 교수와 Moses Stuart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특히 Stuart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어느 것도 신약 성경이 모형으로 인정한 것 외에는 모형으로 간주될 수 없다. 구약의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신약의 어떤 것을 예표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은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적 권위에 의해 모형으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신약 성경 저자들을 이끈 권위보다 낮은 권위에 의해 모형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나 이 해석 학파가 채택한 관점은 앞선 학파와 공통된 하나의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모형적 영역의 범위가 매우 제한되고, 그 경계가 마치 자와 컴퍼스로 규정된 것처럼 엄격했으나, 내부적으로 이를 탐구하거나 모형과 예표 간의 연결의 근거를 밝혀내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학파의 작가들이 제시하는 유사점은 보통 이전 시대 작품들보다 적게 나타나지만, 그 유사점 자체는 상당히 표면적이고 외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신적 경륜에서 구약과 신약 간의 실제 조화와 연결성은 거의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최근의 모형론적 체계에는 다른 결점도 있습니다. 이전 체계의 주요 장점은 구약 성경이 그리스도와 복음의 경륜을 가리킨다고 보는 데 지속적으로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고 엄격한 새로운 체계가 도입되면서, 그 장점을 실질적으로 부인한 것은 그 큰 결점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몇 가지 법칙을 벗어난 오류를 피하기 위해 중요한 원칙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렇게 제한적인 경계를 설정하면, 과도한 영역으로 빠질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 속에서 중요한 지식의 열쇠를 부당하게 차단하며, 그 결과로 교회에 제공된 많은 신적 가르침을 박탈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초기 성경에서 기독교 진리의 씨앗을 찾고, 두 언약의 영감을 받은 기록이 "예수에 대한 증거"를 그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구약 성경의 모형적 요소를 부당하게 축소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신적 말씀에 대해 더 깊고 영적인 이해를 얻으려는 노력이 증대될수록, 하나님의 계시에서 준비 단계가 궁극적 단계와 가지는 관계를 왜곡하고 축소하는 이 해석 방식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 주제를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모형론적 체계가 근거로 삼는 원칙은, 어떤 것이 모형인지 현실적이고 의미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영감된 권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정당화할 필요 이유나 확고한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예언을 설명하거나 그 성취를 확신시킬 필요성이 영감된 권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형과 같은 밀접하게 연관된 주제에서 영감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오래전에 Witsius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들 중 일부만이 영감된 기록을 통해 특별히 주목되고 해석되었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런 목적을 위해 영감된 권위가 필요했던 것은 매우 적었으며, 성령이 강림하기 전에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지 못하여 마음이 둔하고 어리석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두 주제의 밀접한 유사성을 고려할 때, 모형적 부분에도 동일한 자유와 의무가 적용된다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V. We have still, however, another stage of our critical survey before us, and one calling in some respects for careful discrimination and inquiry.
The style of interpretation which we have connected with the name of Marsh could not, in the nature of things, afford satisfaction to men of thoughtful minds, who must have something like equitable principles as well as external authority to guide them in their interpretations. Such persons could not avoid feeling that, if there was so much in the Old Testament bearing a typical relation to the New, as was admitted on Scriptural authority by the school of Marsh, there must be considerably more; and also, that underneath that authority there must be a substratum of fundamental principles capable of bearing what Scripture itself has raised on it, and whatever besides may fitly be conjoined with it. But some, again, might possibly be of opinion that the authority of Scripture cannot warrantably carry us so far; and that both Scriptural authority, and the fundamental principles involved in the nature of the subject, apply only in part to what the disciples of Marsh regarded as typical. Accordingly, among more recent inquirers we have examples of each mode of divergence from the formal rules laid down by the preceding school of interpretation. The search for first principles has disposed some greatly to enlarge the typological field, and it has disposed others not less to curtail it.
V.우리는 비평적 검토의 또 다른 단계를 여전히 앞두고 있으며, 이는 몇 가지 면에서 신중한 구별과 탐구를 요구합니다.
Marsh의 이름과 연관된 해석 방식은, 자연적으로 공정한 원칙과 외부적 권위를 필요로 하는 사려 깊은 마음의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Marsh 학파가 성경적 권위에 따라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모형적 관계를 인정한 내용이 많다면, 더 많은 내용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권위 아래 성경 자체가 구축한 것과 적합하게 결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탱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칙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성경적 권위가 그렇게까지 확장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Marsh 학파가 모형적이라고 간주했던 것들 중 일부에 대해서는 성경적 권위와 주제의 본질에 내포된 근본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해석의 이전 학파가 제시한 공식적 규칙에서 벗어난 두 가지 방식의 사례가 있습니다. 근본 원칙을 찾으려는 노력은 일부 사람들이 모형적 영역을 크게 확장하도록 이끄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를 대폭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 To take the latter class first, as they stand most nearly related to the school last discoursed of, representatives of it are certainly not wanting on the Continent, among whom may be named the hermeneutical writer Klausen, to whom reference will presently be made in another connection.
But it is the less needful here to call in foreign authorities, as the view in question has had its advocates in our own theological literature. It was exhibited, for example, in Dr L. Alexander's Connection and Harmon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 (1841), in which, while coinciding substantially with Bahr in his mode of explaining and applying to Gospel times the symbolical institutions of the Old Covenant, he yet declared himself opposed to any further extension of the typical sphere. He would regard nothing as entitled to the name of typical, which did not possess the character of "a divine institution;" or, as he formally defines the entire class, "they are symbolical institutes expressly appointed by God to prefigure to those among whom they were set up certain great transactions in connection with that plan of redemption which, in the fulness of time, was to be unfolded to mankind." Hence the historical types of every description, even those which the school of Marsh recognised on account of the place given to them in New Testament Scripture, were altogether disallowed; the use made of them by the inspired writers was held to be "for illustration merely, and not for the purpose of building anything on them;" they are not thereby constituted or proved to be types. The same view, however, was taken up and received a much keener and fuller advocacy by the American writer Mr. Lord, in a periodical not unknown in this country—the Ecclesiastical and Literary Journal (No. XV).
1. 후자의 부류(모형적 영역을 축소하려는 관점)를 먼저 다뤄보겠습니다. 이들은 앞서 논의된 학파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유럽 대륙에도 이 관점을 지지하는 대표 인물들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이 중 해석학자인 클라우젠(Klausen)을 예로 들 수 있으며, 그는 다른 문맥에서 언급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점을 다루는 데 외국 학자들을 굳이 소환할 필요는 적습니다. 왜냐하면 이 관점은 우리 신학 문헌에서도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841년에 발간된 Dr. L. Alexander의 Connection and Harmon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에서 이러한 견해가 나타납니다. 그는 구약의 상징적 제도를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Bahr와 본질적으로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모형적 영역의 추가 확장에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신적 제도(divine institution)"의 성격을 가지지 않은 것은 모형(typical)으로 간주될 자격이 없다고 보았으며, 이 범주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모형적 제도란 하나님에 의해 명시적으로 임명되어, 그것들이 세워진 대상들에게 구속 계획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을 예표하도록 의도된 상징적 제도들이다. 이 구속 계획은 만물의 충만한 때에 인류에게 펼쳐질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모형, 심지어 Marsh 학파가 신약 성경에서 언급된 것을 근거로 인정했던 모형들까지도 모두 배제되었습니다. 그는 영감받은 성경 저자들이 이러한 역사적 모형을 사용한 목적은 단지 **"예증을 위해서일 뿐"**이라고 보았으며, 그것들을 모형으로 구성하거나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동일한 견해는 미국 작가인 Mr. Lord에 의해 더욱 강력하고 완전한 옹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영국에서도 알려진 정기 간행물 Ecclesiastical and Literary Journal (제15호)에서 이 입장을 전개했습니다.
This was done in connection with a fierce and elaborate review of the first edition of the Typology, in the course of which its system of exposition was denounced as "a monstrous scheme," not only "without the sanction of the word of God," but "one of the boldest and most effective contrivances for its subversion." It is not my intention now less, indeed, when issuing this new edition (the fourth) than formerly to attempt to rebut such offensive charges, or to expose the misrepresentations on which to a large extent they were grounded. I should even have preferred, had it been in my power to do so, repairing to some vindication of the same view, equally strenuous in its advocacy, but conducted in a calmer and fairer tone, in order that the discussion might bear less of a personal aspect. But as my present object is partly to unfold the gradual progress and development of opinion upon the subject of Scriptural Typology, justice could scarcely be done to it without hearing what Mr Lord has to say for the section of British and American theologians he represents, and meeting it with a brief rejoinder. The writer's mode was a comparatively easy one for proving a negative to the view he controverted. He began with setting forth a description of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a type, so tightened and compressed as to exclude all from the category but what pertained to "the tabernacle worship, or the propitiation and homage of God." And having thus with a kind of oracular precision drawn his enclosure, it was not difficult to dispose of whatever else might claim to be admitted; for it is put to flight the moment he presents his exact definitions, and can only be considered typical by persons of dreamy intellect, who are utter strangers to clearness of thought and precision of language.
- 이러한 작업은 *Typology*의 초판에 대한 격렬하고 정교한 비평과 관련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비평에서 이 책의 해설 체계는 "기괴한 계획(monstruous scheme)"으로,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인가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복시키기 위한 가장 대담하고 효과적인 계략 중 하나"로 비난받았습니다.
나는 이번에 새로운 판(네 번째)을 출간하면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공격적인 비난에 반박하거나, 그것들이 주로 기반을 둔 잘못된 표현들을 폭로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차라리 가능했다면, 나는 동일한 관점을 지지하지만 더욱 차분하고 공정한 태도로 진행된 변호를 참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논의가 덜 개인적인 색채를 띨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현재 목적은 성경 모형론(Scriptural Typology)에 대한 의견의 점진적 발전과 전개를 밝히는 데 일부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 신학자들의 일부를 대표하는 **Mr. Lord**가 제시한 주장을 들어보고 이에 간략히 답하는 것이 공정한 논의를 위해 필요합니다.
이 작가의 방식은 그가 반대하는 견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증명하기 비교적 쉬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먼저 모형의 본질과 특성을 설명하며, 이를 "성막 예배(tabernacle worship)나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와 경배"에 속하는 것만 포함하도록 지나치게 엄격하고 압축된 정의를 제시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러한 정의를 통해 자신의 경계를 단호하게 설정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포함되기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정확한 정의가 제시되자마자, 다른 주장들은 배제되었으며, 모형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단지 "몽상가적 지성을 가진 사람들," 즉 명료한 사고와 정확한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 한한다고 여겨졌습니다.
In this way it is possible, we admit, and also not very difficult, to make out a scheme and establish a nomenclature of one's own; but the question is, Does it accord with the representations of Scripture? and will it serve, in respect to these, as a guiding and harmonizing principle? We might, in a similar way, draw out a series of precise and definite characteristics of Messianic prophecy,—such as, that it must avowedly bear the impress of a prediction of the future—that it must in the most explicit terms point to the person or times of Messiah that it must be conveyed in language capable of no ambiguity or double reference; and then, with this sharp weapon in our hand, proceed summarily to lop off all supposed prophetical passages in which these characteristics are wanting—holding such, if applied to Messianic times, to be mere accommodations, originally intended for one thing, and afterwards loosely adapted to another. The rationalists of a former generation were great adepts in this mode of handling prophetical Scripture, and by the use of it dexterously got rid of a goodly number of the passages which in the New Testament are represented as finding their fulfilment in Christ. But we have yet to learn, that by so doing they succeeded in throwing any satisfactory light on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or in placing on a Scriptural basis the conn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in God's dispensations. How closely the principles of Mr Lord lead him to tread in the footsteps of these effete interpreters, will appear presently. But we must first lodge our protest against his account of the essential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a type, as entirely arbitrary and unsupported by Scripture. The things really possessing this character, he maintains, must have had the three following distinctive marks: They must have been specifically constituted types by God; must have been known to be so constituted, and contemplated as such by those who had to do with them; and must have been continued till the coming of Christ, when they were abrogated or superseded by something analogous in the Christian dispensation. These are his essential elements in the constitution of a type; and an assertion of the want of one or more of them forms the perpetual refrain, with which he disposes of those characters and transactions that in his esteem are falsely accounted typical. We object to every one of them in the sense understood by the writer, and deny that Scriptural proof can be produced for them, as applying to the strictly religious symbols of the Old Testament worship, and to them alone. These were not specifically constituted types, or formally set up in that character, no more than such transactions as the deliverance from Egypt, or the preservation of Noah in the deluge, which are denied to have been typical.
-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체계를 세우고 명명법을 정립하는 것은 가능하며, 또한 그리 어렵지도 않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성경의 묘사와 부합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성경 해석에서 안내하고 조화를 이루는 원칙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메시아적 예언의 특징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명백히 미래에 대한 예언의 인상을 가져야 하고, 가장 명확한 용어로 메시아의 인물이나 시대를 가리켜야 하며, 모호함이나 이중적 해석이 불가능한 언어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 다음, 이러한 날카로운 기준을 적용해, 이 특징들을 결여한 것으로 보이는 모든 예언 구절들을 간단히 잘라내며, 그것들이 메시아 시대에 적용된다면 단순히 한 가지 용도로 원래 의도되었다가 느슨하게 다른 용도로 적응된 것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 세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예언적 성경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데 능숙했으며, 이를 통해 신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묘사된 많은 구절들을 솜씨 좋게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들이 성경 해석에 만족스러운 빛을 비추었거나, 하나님의 경륜에서 구약과 신약 간의 연관성을 성경적 토대 위에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Mr. Lord**의 원칙들이 이처럼 비효율적인 해석자들의 발자취를 얼마나 가까이 따르고 있는지는 곧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그의 모형의 본질과 특징에 대한 설명에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의 설명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며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 특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은 다음 세 가지 뚜렷한 특징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구체적으로 모형으로 규정되었어야 합니다. 둘째, 그것들은 그러한 규정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들과 관련된 사람들이 그것을 그러한 것으로 간주했어야 합니다. 셋째,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계속되었으며, 기독교 제도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으로 대체되거나 폐지되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모형 구성의 필수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 중 하나 이상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가 모형으로 간주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인물들과 사건들을 반박하는 데 있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논거입니다.
우리는 작가가 이해한 의미에서 이 세 가지 요소 모두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것들이 구약의 종교적 상징들, 그리고 그것들에만 적용된다는 점에서 성경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부인합니다. 이들은 "특별히 모형으로 규정되었거나," 그러한 성격으로 공식적으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애굽에서의 구출이나 노아의 대홍수에서의 보존과 같은 사건들도 마찬가지로 모형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이들 사건이 단독으로 보았을 때, 메시아적인 미래를 참조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In the manner of their appointment, viewed by itself, there is no more to indicate a reference to the Messianic future in the one than in the other. Neither were they for certain known to be types, and used as such by the Old Testament worshippers. They unquestionably were not so used in the time of our Lord; and how far they may have been at any previous period, is a matter only of probable inference, but nowhere of express revelation. Nor, finally, was it by any means an invariable and indispensable characteristic, that they should have continued in use till they were superseded by something analogous in the Christian dispensation.
Some of the anointings were not so continued, nor the Shekinah, nor even the Ark of the Covenant; and some of them stood in occasional acts of service, such as the Nazarite vow, in its very nature special and temporary.
The redemption from Egypt was in itself a single event, yet it was closely allied to the symbolical services; for it was linked to an ever-recurring and permanent ordinance of worship. It was a creative act, bringing Israel as a people of God into formal existence, and as such capable only of being commemorated, but not of being repeated. It was commemorated, however, in the passover-feast. In that feast the Israelites continually freshened the remembrance of it anew on their hearts. They in spirit re-enacted it as a thing that required to be constantly renewing itself in their experience, as in the Lord's Supper is now done by Christians in regard to the one great redemption-act on the cross.
- 그들의 임명 방식 자체로 보았을 때, 한쪽이 메시아적 미래를 참조한다는 것을 다른 쪽보다 더 많이 나타낸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그것들이 구약 시대의 예배자들에게 모형으로 알려져 있었거나 그렇게 사용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주님 당시에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았으며, 그 이전 어느 시기에 그렇게 사용되었는지는 단지 추정에 불과할 뿐이며, 어디에서도 명시적인 계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것들이 기독교 제도에서 유사한 것으로 대체될 때까지 계속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불변의 필수적 특징도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기름부음 의식은 계속되지 않았고, **쉐키나**(Shekinah)나 심지어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것들은 본질적으로 특별하고 일시적인 성격을 가진 **나실인의 서약**(Nazarite vow)과 같은 특정한 봉사의 행위로 존재했습니다.
이집트로부터의 구속은 그 자체로 단일한 사건이었으나, 상징적인 예배 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항상 반복되고 영구적인 예배 규정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존재하게 한 창조적 행위였으며, 그러한 성격상 반복될 수는 없고 기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월절 축제에서 기념되었습니다. 이 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사건을 마음속에 새롭게 되살리며 이를 영적으로 재현했습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주님의 만찬(Lord's Supper)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한 번의 위대한 구속 행위를 기억하고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This, too, considered simply as an act in God's administration, is incapable of being repeated; it can only be commemorated, and in its effects spiritually applied to the conscience. Yet so far from being thereby bereft of an antitypical character, it is the central antitype of the Gospel. Why should it be otherwise in respect to the type?
The analogy of things favours it; and the testimony of Scripture not doubt fully requires it. To say nothing of other passages of Scripture which bear less explicitly, though to our mind very materially, upon the subject, our Lord Himself, at the celebration of the last passover, declared to His disciples, "With desire I have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for I say unto you, I will not any more eat thereof, until it be fulfilled in the kingdom of God."—(Luke 22:15, 16) That is, there is a prophecy as well as a memorial in this commemorative ordinance,—a prophecy, because it is the rehearsal of a typical transaction, which is now, and only now, going to meet with its full realization. Such appears to be the plain and unsophisticated import of our Lord's words. And the Apostle Paul is, if possible, still more explicit when he says, "For even Christ our passover is sacrificed for us (more exactly, For also our passover has been sacrificed, Christ): therefore let us keep the feast," etc.—(1 Cor. 5:7, 8)
-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행위로 단순히 고려할 때, 반복될 수 없는 행위이며, 단지 기념될 수 있을 뿐이고 그 효과는 영적으로 양심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유형적(antitypical) 성격을 상실한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복음의 중심적인 반유형입니다. 왜 모형(type)에 관해서는 이와 다르게 여겨야 합니까?
사물의 유사성은 이를 지지하며, 성경의 증언도 분명히 이를 요구합니다. 비록 덜 명확하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성경 구절들은 논외로 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을 기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을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22:15-16) 이는 이 기념 의식 안에 예언과 기념이 모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예언이란, 이 의식이 이제야 비로소 그 완전한 실현에 도달하게 될 모형적 사건의 재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의 분명하고 솔직한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가능하다면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절기를 지키자." (고린도전서 5:7-8)
What, we again ask, are we to understand by these words, if not that there is in the design and appointment of God an ordained connection between the sacrifice of Christ and the sacrifice of the Passover, so that the one, as the means of redemption, takes the place of the other? In any other sense the language would be only fitted to mislead, by begetting apprehensions regarding a mutual correspondence and connection which had no existence. It is alleged on the other side, that "Christ is indeed said to be our passover, but it is by a metaphor, and indicates only that it is by His blood we are saved from everlasting death, as the first-born of the Hebrews were saved by the blood of the paschal lamb from death by the destroying angel." Were this all, the Apostle might surely have expressed himself less ambiguously. If there was no real connection between the earlier and the later event, and the one stood as much apart from the other as the lintels of Goshen in themselves did from the cross of Calvary, why employ language that forces upon the minds of simple believers the reality of a proper connection? Simply, we believe, because it actually existed; and our "exegetical conscience," to use a German phrase, refuses to be satisfied with Mr Lord's mere metaphor. But when he states further, that the passover, having been "appointed with a reference to the exemption of the first born of the Israelites from the death that was to be inflicted on the first-born of the Egyptians, it cannot be a type of Christ's death for the sins of the world, as that would imply that Christ's death also was commemorative of the preservation from an analogous death," who does not perceive that this is to confound between the passover as an original redemptive transaction, and as a commemorative ordinance, pointing back to the great fact, and perpetually rehearsing it? It is as a festal solemnity alone that there can be anything commemorative belonging either to the Paschal sacrifice or to Christ's. Viewed, however, as redemptive acts, there was a sufficient analogy between them: the one redeemed the first- born of Israel (the firstlings of its families), and the other redeems "the Church of the first-born, whose names are written in heaven." There is manifested a like tendency to evacuate the proper meaning of Scripture in most of the other instances brought into consideration. Christ, for example, calls Himself, with pointed reference to the manna, "the bread of life;" and in Rev. 2:17, an interest in His divine life is called "an eating of the hidden manna," but it is only "by a metaphor," precisely as Christ elsewhere calls Himself the vine, or is likened to a rock. As if there were no difference between an employment of these natural emblems and the identifying of Christ with the supernatural food given to support His people, after a provisional redemption, and on the way to a provisional inheritance! It is not the simple reference to a temporal good on which, in such a case, we rest the typical import, but this in connection with the whole of the relations and circumstances in which the temporal was given or employed. Jonah was not, it is alleged, a type of Christ; for he is not called such, but only a "sign;" neither was Melchizedek called by that name. Well, but Adam is called a type τύπος τοῦ μέλλαντος, Rom. 5:14), and baptism is called is the antitype to the deluge ὃ καὶ ὑμᾶς ἀντίτυπον νῦν σῴζει βάπτισμα, 1 Pet. 3:21).
-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이 말들로부터 무엇을 이해해야 합니까? 만약 그리스도의 희생과 유월절 희생 사이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정하신 연관성이 있어서 하나가 구원의 수단으로 다른 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 상호 대응과 연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단지 혼란만 야기할 것입니다. 반대 측에서는 "그리스도가 확실히 우리의 유월절이라 불리지만, 이는 단순히 비유에 불과하며, 이는 우리가 그분의 피로 인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음을 나타낼 뿐이다. 마치 히브리인의 장자들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멸망의 천사로부터 죽음을 면했던 것처럼"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사도는 확실히 덜 모호하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만약 이전 사건과 후속 사건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없었고, 고센의 문설주와 갈보리 십자가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왜 단순한 신자들에게 실질적인 연결의 현실성을 암시하는 언어를 사용했겠습니까? 단순히 실제로 그러한 연결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해석적 양심(exegetical conscience)"은 독일식 표현을 빌리자면, 단순한 비유에 그치려는 Mr. Lord의 해석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가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이집트의 장자들에게 내려진 죽음으로부터 면제받도록 설정된 것이므로, 이는 세계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사한 죽음으로부터의 보존을 기념하는 것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할 때, 누가 이것이 유월절을 하나의 원초적인 구속 행위로 보는 것과 하나의 기념 의식으로 보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겠습니까? 유월절 희생이나 그리스도의 희생에 있어서, 그것이 기념적 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축제적 의식으로서만입니다. 그러나 구속 행위로 본다면, 그들 사이에는 충분한 유사성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장자들(가족의 첫 번째 자녀들)을 구속했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장자들의 교회"를 구속합니다.
이와 유사한 경향은 고려된 다른 사례들에서도 성경의 본래 의미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자신을 만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생명의 빵"이라고 부르셨고,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서는 그분의 신적 생명에 대한 참여를 "감추어진 만나를 먹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비유적 표현일 뿐이며,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거나 반석에 비유한 것과 같다고 주장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리스도가 자연적 상징을 사용하는 것과, 임시 구속 이후 임시 유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그분의 백성을 지탱하기 위해 주어진 초자연적 음식과 동일시되는 것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가 모형적 의미를 찾는 것은 단순히 일시적인 선을 언급하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주어지거나 사용된 모든 관계와 상황과 연결해서입니다.
요나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아니라고 주장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표적"이라 불렸을 뿐이고, 멜기세덱 또한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로마서 5장 14절에서 "오실 분의 모형(τύπος τοῦ μέλλαντος)"이라 불립니다. 또한, 세례는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홍수의 반형(ἀντίτυπον)"이라 불립니다.
True, but then, we are told, the word in these passages only means a similitude; it does not mean type or antitype in the proper sense. What, then, could denote it? Is there any other term more properly fitted to express the idea? And if the precise term, when it is employed, still does not serve, why object in other cases to the want of it? Strange, surely, that its presence and its absence should be alike grounds of objection. But if the matter is to come to a mere stickling about words, shall we have any types at all? Are even the tabernacle and its institutions of worship called by that name? Not once; but inversely, the designation of antitypes is in one passage applied to them: "The holy places made with hands, the antitypes of the true" (ἀντίτυπα τῶν ἀληθινῶν, Heb. 9:24). So little does Scripture, in its teachings on this subject, encourage us to hang our theoretical explanations on a particular epithet! It varies the mode of expression with all the freedom of common discourse, and even, as in this particular instance, inverts the current phraseology; but still, amid all the variety, it indicates with sufficient plainness a real economical connection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in God's dispensations,—such as is commonly understood by the terms type and antitype; and this is the great point, however we may choose to express it. The passage in Galatians respecting Sarah and Isaac on the one side, and Hagar and Ishmael on the other, naturally formed one of some importance for the view sought to be established in the Typology, and as such called for Mr Lord's special consideration. Here, as in other cases, he begins with the statement that the characters and relations there mentioned have not the term type applied to them, and hence should not be reckoned typical. "It is only said," he continues, "that that which is related of Hagar and Sarah is exhibited allegorically; that is, that there are other things that, used as allegorical representatives of Hagar and Sarah, exhibit the same facts and truths. The object of the allegory is to exemplify them by analogous things; not by them to exemplify something else, to which they present a resemblance. It is they who are said to be allegorized, that is, represented by something else; not something else that is allegorized by them. They are accordingly said to be the two covenants, that is, like the two covenants; and Mount Sinai is used to represent the covenant that genders to bondage; and Jerusalem from above—that is, the Jerusalem of Christ's kingdom—the covenant of freedom or grace. And they accordingly are employed [by the Apostle] to set forth the character and condition of the bond and the free woman, and their offspring. He attempts to illustrate the lot of the two classes who are under law and under grace; first, by referring to the different relations to the covenant, and different lot of the children of the bond and the free woman; and then, by using Mount Sinai to exemplify the character and condition of those under the Mosaic law, and the heavenly Jerusalem, to exemplify those who are under the Gospel.
- 맞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단순히 유사성을 의미할 뿐, 올바른 의미에서의 모형(type)이나 반형(antitype)을 뜻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아이디어를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다른 용어가 있습니까? 만약 사용된 정확한 용어조차도 충분하지 않다면, 다른 경우에 그 용어의 부재를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왜입니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용어의 존재와 부재가 모두 반대의 근거가 될 수 있다니요.
하지만 만약 이 문제가 단순히 용어에 대한 고집으로 귀결된다면, 우리는 어떤 모형도 가질 수 있을까요? 심지어 성막과 그 예배 규정들도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나요? 단 한 번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히브리서 9장 24절에서 그들에게 반형이라는 용어가 적용됩니다: "손으로 만든 성소는 참된 것들의 반형(ἀντίτυπα τῶν ἀληθινῶν)"이라고 말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특정 수식어에 우리의 이론적 설명을 의존하도록 권장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표현 방식을 일상적인 대화의 자유로움으로 다양하게 사용하며, 심지어 이 특정한 경우처럼 일반적인 용어 사용을 거꾸로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실제적인 경제적 연결을 충분히 명확하게 나타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모형(type)과 반형(antitype)이라는 용어로 이해되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라와 이삭,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해 언급된 구절은, 모형론(Typology)에서 확립하려는 관점에 중요성을 지닌 구절로, 이에 대해 Mr. Lord의 특별한 검토가 요구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는 먼저 이들에 대해 "모형(type)"이라는 용어가 적용되지 않았음을 언급하며, 따라서 이를 모형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단지 하갈과 사라에 대해 언급된 것이 비유적(allegorical)으로 제시되었다고만 말합니다. 이는 하갈과 사라의 비유적 대표로 사용된 다른 것들이 동일한 사실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유사한 것들을 통해 그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다른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유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해지며, 이는 다른 것으로 대표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통해 다른 것이 비유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은 두 언약이라고 말해지며, 이는 두 언약과 유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내산은 종으로 만드는 언약을 대표하는 데 사용되고, 위로부터의 예루살렘—즉, 그리스도의 왕국의 예루살렘—은 자유 또는 은혜의 언약을 대표하는 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도에 의해] 종의 여인과 자유의 여인의 성격과 상태, 그리고 그들의 자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사도는 언약과의 관계의 차이와 종과 자유의 여인의 자손들의 서로 다른 운명을 언급함으로써,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 대한 그들의 운명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 시내산을 사용하여 모세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성격과 상태를 예증하고, 하늘의 예루살렘을 사용하여 복음 아래 있는 자들을 예증하려고 합니다."
The places from which the two covenants are proclaimed are thus used to represent those two classes; not Hagar and Sarah to represent those places, or the covenants that are proclaimed from them." Now, this show of exact criticism— professing to explain all, and yet leaving the main thing totally unexplained—is introduced, let it be observed, to expose an alleged "singular neglect of discrimination" in the use we had made of the passage. We had, it seems, been guilty of the extraordinary mistake of supposing Hagar and Sarah to be themselves the representatives in the Apostle's allegorization, and not, as we should have done, the objects represented. Does any of our readers, with all the advantage of the reviewer's explanation, recognise the importance of this distinction? Or can he tell how it serves to explicate the Apostle's argument? I cannot imagine how any one should do so? In itself it might have been of no moment, though it is of much for the Apostle's argument, whether Hagar and Sarah be said to represent the two covenants of law and grace, or the two covenants be said to represent them; as in Heb. 9:24, it is of no moment whether the earthly sanctuary be called the antitype of the heavenly, or the heavenly of the earthly. There is in both cases alike a mutual representation, or relative correspondence; and it is the nature of the correspondence, inferior and preparatory in the one case, spiritual and ultimate in the other, which is chiefly important. It is that (though entirely overlooked by the reviewer) which makes the Apostle's appeal here to the historical transactions in the family of Abraham suitable and appropriate to the object he has in view. For it is by the mothers and their natural offspring he intends to throw light on the covenants, and their respective tendencies and results. It was the earlier that exemplified and illustrated the later, not the later that exemplified and illustrated the earlier; otherwise the reference of the Apostle is misplaced, and the reasoning he founds on it manifestly inept. One specimen more of this school of interpretation, and we leave it. Among the passages of Scripture that were referred to, as indicating a typ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Old and the New in God's dispensations, is Matt. 2:15, where the evangelist speaks of Christ being in Egypt till the death of Herod, "that it might be fulfilled which was spoken of the Lord by the prophet, saying, Out of Egypt have I called My Son." The allusion to this passage in the first, as well as in the present, edition of this work, was never meant to convey the idea that it was the only Scriptural authority for concluding a typical relationship to have subsisted between Israel and Christ. It was, however, referred to as one of the passages most commonly employed by typological writers in proof of such a relationship, and in itself most obviously implying it. But what says our opponent? "The language of Matthew does not imply that it (the passage in Hosea) was a prophecy of Christ; he simply states, that Jesus continued in Egypt till Herod's death, so that that occurred in respect to Him which had been spoken by Jehovah by the prophet, Out of Egypt have I called My Son; or, in other words, so that that was accomplished in respect to Christ which had been related by the prophet of Israel." Was there not good reason for indicating a close affinity between the typological principles of this writer, and the loose interpretations of rationalism? One might suppose that it was a comment of Paulas or Kuinoel that we are here presented with, and we transfer their paraphrase and notes to the bottom of the page, to show how entirely they agree in spirit.[26]
- "두 언약이 선포된 장소는 두 계층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며, 하갈과 사라가 그 장소나 그곳에서 선포된 언약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제,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핵심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는 이 정밀 비평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것은 우리가 해당 구절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특별한 차별성의 부재"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도입되었다. 우리의 사용이 사도의 비유에서 하갈과 사라를 대표하는 존재로 잘못 간주했으며, 그들이 대표되는 대상이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우리 독자 중 리뷰어의 설명을 통해 이 구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이 있을까? 또는 그것이 어떻게 사도의 논증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하는지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하갈과 사라가 율법과 은혜의 두 언약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과 두 언약이 하갈과 사라를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 중 무엇이든 사도의 논증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는 히브리서 9장 24절에서 지상의 성소가 하늘의 성소의 반형이라고 불리거나, 반대로 하늘의 성소가 지상의 성소의 반형이라고 불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두 경우 모두 상호 표현 또는 상대적 상관성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각 경우의 상관성의 본질이다. 하나는 열등하고 준비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이고 궁극적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도가 아브라함 가족의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목적에 적합하고 적절하게 언급한 이유이며, 이는 리뷰어가 완전히 간과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사도는 어머니들과 그들의 자연적 자손을 통해 각 언약과 그 성향 및 결과에 대한 빛을 비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앞선 것이 나중의 것을 예증하고 설명한 것이지, 나중의 것이 앞선 것을 설명하거나 예증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의 참조는 부적절하며, 그 근거로 삼은 논증은 명백히 부적합하다.
이 해석 방식의 또 다른 사례를 한 가지 더 소개하고 이 논의를 마치겠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구약과 신약 간의 모형적 관계를 나타내는 구절로 언급된 것 중 하나는 마태복음 2장 15절이다. 여기서 복음서는 예수께서 헤롯이 죽기까지 이집트에 머무셨다고 말하며, "주께서 선지자를 통해 이르신 바,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심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초판과 현판에서 이 구절에 대한 언급은,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사이에 모형적 관계가 존재했다고 결론짓는 유일한 성경적 권위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모형론적 작가들에 의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구절 중 하나로, 그 자체로 그러한 관계를 가장 명백히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마태의 언어는 그것(호세아의 구절)이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예수께서 헤롯의 죽음까지 이집트에 머물렀음을 진술하며, 이는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바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말씀이 그에 대해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에 대해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대해 말한 것이 그에게도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해석적 입장은 모형적 원리와 이 작가의 느슨한 해석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울러스(Paulus)나 퀴노엘(Kuinoel)의 주석처럼 보일 만한 해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부가설명과 주석을 하단에 옮겨, 이들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26】
If the Evangelist simply meant what is ascribed to him, it was surely strange that he should have taken so peculiar a way to express it. But if the words he employs plainly intimate such a connection between Christ and Israel, as gave to the testimony in Hosea the force of a prophecy (which is the natural impression made by the reference), who has any right to tame down his meaning to a sense that would entirely eliminate this prophetical element,—the very element to which, apparently, he was anxious to give prominence? What we have here to deal with is inspired testimony respecting the connection between Israel and Christ; and it cannot have justice done to it, unless it is taken in its broad and palpable import. (See further, under Ch. IV., and Appendix A., c. 4.) 2. We turn now to the other class of writers, whose aim it has been in recent times to enlarge and widen the typological field. The chief, and for some time the only distinguished representatives of it were to be found in Germany; as it was there also that the new and more profound spirit of investigation began to develop itself. Near the commencement of the present century the religions of antiquity began to form the subject of more thoughtful and learned inquiry, and a depth of meaning was discovered (sometimes perhaps only thought to be discovered) in the myths and external symbols of these, which in the preceding century was not so much as dreamt of. Creuzer, in particular, by his great work (Symbolik) created quite a sensation in this department of learning, and opened up what seemed to be an entirely new field of research. He was followed by Baur (Symbolik und Mythologie), Görres (Mythengeschichte), Müller, and others of less note, each endeavouring to proceed farther than preceding inquirers into the explication of the religious views of the ancients, by weaving together and interpreting what is known of their historical legends and ritual services. These inquiries were at first conducted merely in the way of antiquarian research and philosophical speculation; and the religion of the Old Testament was deemed, in that point of view, too unimportant to be made the subject of special consideration. Creuzer only here and there throws out some passing allusions to it. Even Baur, though a theologian, enters into no regular investigation of the symbols of Judaism, while he expatiates at great length on all the varieties of Heathenism. By and by, however, a better spirit appeared. Mosaism, as the religion of the Old Testament is called, had a distinct place allotted it by Görres among the ancient religions of Asia. And at last it was itself treated at great length, and with distinguished learning and ability, in a separate work the Symbolik des Mosaischen Cultus of Bähr (published in 1837-9). This continues still (1863) to hold an important place in Germany on the subject of the Mosaic symbols, although it is pervaded by fundamental errors of the gravest kind (to which we shall afterwards have occasion to advert), and not unfrequently falls into fanciful views on particular parts. Some of these were met by Hengstenberg in the second volume of his Authentie des Pentateuchus, who has also furnished many good typical illustrations in his Christology and other exegetical works. Tholuck, in his Commentary on the Hebrews, has followed in the same tract, generally adopting the explanations of Hengstenberg, and still more recently (chiefly since the publication of our first edition), further contributions have been made particularly by Kurtz, Baumgarten, Delitzsch. Even De Wette, in his old age, caught something of this new spirit; and after many an effort to depreciate apostolic Christianity by detecting in it symptoms of Judaical weakness and bigotry, he made at least one commendable effort in the nobler direction of elevating Judaism, by pointing to the manifold germs it contained of a spiritual Christianity. In a passage quoted by Bähr (vol. i., p. 16, from an article by De Wette on the "Characteristik des Hebraismus"), he says—"Christianity sprang out of Judaism. Long before Christ appeared, the world was prepared for His appearance: the entire Old Testament is a great prophecy, a great type of Him who was to come, and has come. Who can deny that the holy seers of the Old Testament saw in spirit the advent of Christ long before He came, and in prophetic anticipations, sometimes more, sometimes less clear, descried the new doctrine? The typological comparison, also, of the Old Testament with the New, was by no means a mere play of fancy; nor can it be regarded as altogether the result of accident, that the evangelical history, in the most important particulars, runs parallel with the Mosaic. Christianity lay in Judaism as leaves and fruits do in the seed, though certainly it needed the divine sun to bring them forth." Such language, especially as coming from such a quarter, undoubtedly indicated a marked change. Yet it must not be supposed, on reading so strong a testimony, as if everything were already conceded; for what by such writers as De Wette is granted in the general, is often denied or explained away in the particular. Even the idea of a coming Messiah, as expressed in the page of prophecy, was held to be little more than a patriotic hope, the natural product of certain circumstances connected with the Israelitish nation (see Hengs. Christology, vol. iv., p. 391, Trans.). Nor did the new light thus introduced lead to any well-grounded and regularly developed system of typo logy, based on a clear and comprehensive view of the Divine dispensations. Bähr confined himself almost entirely to the mere interpretation of the symbols of the Mosaic dispensation, and hence, even when his views were correct, rather furnished the materials for constructing a proper typological system, than himself provided. And it has been noted by Tholuck and other learned men as a defect in their literature, that they are without any work on the subject suited to the existing position and demands of theological science.[27] It is to be observed, however, that this new current of opinion among the better part of theologians on the Continent, leads them to find the typical element widely diffused through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as well as the more strictly religious portions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ho is in any degree acquainted with the exegetical productions of Hengstenberg and Olshausen, now made accessible to English readers, can have failed to perceive this, from the tone of their occasional references and illustrations. Their unbiassed exegetical spirit rendered it impossible for them to do otherwise; for the same connection, they perceived, runs like a thread through all the parts, and binds them together into a consistent whole. Indeed, the only formal attempt made to work out a new system of typological interpretation, prior to the incomplete treatise mentioned in the last note,—the essay of Olshausen (published in 1824, and consisting only of 124 widely printed pages), entitled, Ein Wort uber tiefern Schriftsinn,—has respect almost exclusively to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ancient Scripture. When he comes distinctly to unfold what he calls the deeper exposition of Scripture, he contents himself with a brief elucidation of the following points:—That Israel's relation to God is represented in Scripture as forming an image of all and each of mankind, in so far as the divine life is possessed by them—that Israel's relation to the surrounding heathen in like manner imaged the conflict of all spiritual men with the evil in the world that a parallelism is drawn between Israel and Christ as the one who completely realized what Israel should have been—and that all real children of God again image what, in the whole, is found imperfectly in Israel and perfectly in Christ (pp. 87-110). These positions, it must be confessed, indicate a considerable degree of vagueness and generality; and the treatise, as a whole, is defective in first principles and logical precision, as well as fulness of investigation. Klausen, in the following extract from his Hermeneutik, pp. 334-345, has given a fair outline of Olshausen's views: "We must distinguish between a false and a genuine allegorical exposition, which latter has the support of the highest authority, though it alone has it, being frequently employed by the inspired writers of the New Testament.
- "복음서 기자가 단순히 자신에게 귀속된 것을 의미하려 했다면, 그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독특한 방식을 택한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호세아의 증언에 예언적 힘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이스라엘 사이의 연결성을 분명히 암시한다면(이는 그 참조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인상이다), 그의 의미를 약화시켜 이 예언적 요소—그가 분명히 강조하고자 했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으로 해석할 권리가 누군가에게 있을까?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간의 관계에 대한 영감받은 증언이며, 이 증언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광범위하고 명백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만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 (추가 내용은 제4장과 부록 A, 4장에서 참조하라.)
2. 이제 최근에 들어 모형론적 범위를 확장하고 넓히는 것을 목표로 삼은 또 다른 작가 그룹으로 눈을 돌리자. 이 그룹의 주요 인물들은 독일에서 발견되었으며, 또한 새로운 심층적 탐구 정신이 처음 발전하기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19세기 초에 이르러 고대 종교가 보다 심도 있는 학문적 탐구의 주제가 되었으며, 신화와 외적 상징 속에서 이전 세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의미의 깊이가 발견되었다(혹은 발견되었다고 여겨졌다). 특히 크로이처(Creuzer)는 그의 중요한 저서 *Symbolik*으로 이 학문 분야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완전히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바우르(Baur, *Symbolik und Mythologie*), 괴레스(Görres, *Mythengeschichte*), 뮐러(Müller), 그리고 덜 알려진 다른 이들에 의해 이어졌으며, 각자는 고대인의 역사적 전설과 의식의식을 엮고 해석하여 이들의 종교적 관점을 더 깊이 탐구하려고 노력했다.
초기에는 이러한 연구가 고고학적 연구와 철학적 사변의 방식으로만 진행되었으며, 구약의 종교는 이 관점에서 너무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특별히 고려되지 않았다. 크로이처는 구약에 간헐적으로 몇 가지 언급만 했다. 심지어 신학자인 바우르도 다양한 이교도에 대해 길게 논의하면서도 유대교의 상징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더 나은 탐구 정신이 나타났다. 괴레스는 구약의 종교, 즉 모세교(Mosaism)를 아시아의 고대 종교들 중 하나로 구별하여 자리를 부여했다. 마침내 모세교의 상징을 다룬 별도의 저서 *Symbolik des Mosaischen Cultus*가 1837-1839년에 출간되었으며, 이는 배어(Bähr)의 작품으로 학문적 탁월함과 능력을 겸비했다. 이 책은 여전히(1863년 기준) 독일에서 모세 상징에 관한 중요한 저서로 자리 잡고 있지만, 중대한 근본적인 오류들로 가득 차 있으며(이는 이후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특정 부분에서는 종종 공상적인 견해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 중 일부는 헹스텐베르크(Hengstenberg)가 그의 저서 *Authentie des Pentateuchus* 두 번째 권에서 반박했으며, 그는 또한 그의 *Christology* 및 다른 주석서에서 훌륭한 모형적 해석들을 많이 제공했다.
톨룩(Tholuck)은 그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같은 경로를 따랐으며, 일반적으로 헹스텐베르크의 해석을 채택했다. 최근(특히 이 책 초판이 출간된 이후로)에는 쿠르츠(Kurtz), 바움가르텐(Baumgarten), 델리츠슈(Delitzsch) 등에 의해 추가적인 기여가 이루어졌다. 심지어 드 베테(De Wette)조차 그의 만년에 이 새로운 탐구 정신에 영향을 받았다. 드 베테는 유대적 약점과 편협성을 발견하여 사도적 기독교를 폄하하려는 많은 시도를 한 후, 유대교의 다양한 영적 기독교적 씨앗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유대교를 격상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배어의 저서(1권 16페이지)에서 인용된 드 베테의 한 구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발생했다.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오래 전에 세상은 그의 출현을 준비했다. 구약 전체는 오실 분, 즉 이미 오신 분에 대한 위대한 예언이자 위대한 모형이다. 구약의 거룩한 예언자들이 오래전에 오실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았고, 때로는 더 명확하고 때로는 덜 명확하게 새로운 교리를 예고한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구약과 신약의 모형론적 비교 또한 단순한 공상의 놀이가 아니며, 복음적 역사와 모세의 역사 간의 중요한 평행이 우연의 결과라고 간주할 수도 없다. 기독교는 씨앗 속의 잎과 열매처럼 유대교 안에 내재되어 있었으며, 분명히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신의 태양이 필요했다."
The fundamental error in the common allegorizing, from which all its arbitrariness has sprung, bidding defiance to every sound principle of exposition, must be sought in this, that a double sense has been attributed to Scripture, and one of them consequently a sense entirely different from that which is indicated by the words. Accordingly, the characteristic of the genuine allegorical exposition must be, that it recognises no sense besides the literal one none differing from this in nature, as from the historical reality of what is recorded; but only a deeper-lying sense ὑπόνοια, bound up with the literal meaning by an internal and essential connection a sense given along with this and in it; so that it must present itself whenever the subject is considered from the higher point of view, and is capable of being ascertained by fixed rules. Hence, if the question be regarding the fundamental principles, according to which the connection must be made out between the deeper apprehension and the immediate sense conveyed by the words, these have their foundation in the law of general harmony, by which all individuals, in the natural as well as in the spiritual world, form one great organic system the law by which all phenomena, whether belonging to a higher or a lower sphere, appear as copies of what essentially belongs to their respective ideas; so that the whole is represented in the individual, and the individual again in the whole. This mysterious relation comes most prominently out in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and their worship. But something analogous everywhere discovers itself; and in the manner in which the Old Testament is expounded in the New, we are furnished with the rules for all exposition of the Word, of nature, and of history." The vague and unsatisfactory character of this mode of representation, is evident almost at first sight; the elements of truth contained in it are neither solidly grounded nor sufficiently guarded against abuse; so that, with some justice, Klausen remarks, in opposition to it,—"The allegorizing may perhaps be applied with greater moderation and better taste than formerly; but against the old principle, though revived as often as put down,—viz., that every sense which can be found in the words has a right to be regarded as the sense of the words,—the same exceptions will always be taken." If the Typology of Scripture cannot be rescued from the domain of allegorizings, it will be impossible to secure for it a solid and permanent footing. It cannot attain to this while coupled with allegorical licence, or with a nearer and deeper sense. It is proper to add, that Klausen himself has no place in his Hermeneutik for typical, as distinguished from allegorical interpretations. In common with Hermeneutical writers generally, he regards these as substantially the same in kind; and the one only as the excess of the other. Some application he would allow of Old Testament Scripture to the realities of the Gospel, in consideration of what is said by inspired writers of the relation subsisting between the two; but he conceives that relation to be of a kind which scarcely admits of being brought to the test of historical truth, and that the examples furnished of it in the New Testament arose from necessity rather than from choice. Later writers generally, however, on the Continent, who have meditated with a profound and thoughtful spirit on the history of the Divine dispensations, have shown a disposition to tread in the footsteps of Olshausen rather than of Klausen. And it cannot but be regarded as a striking exemplification of the revolving cycles through which theological opinion is sometimes found to pass, that after two centuries of speculation and inquiry, a substantial return has been made by some of the ablest of these divines—though by diverse routes—to the more fundamental principles of the Cocceian school. It was characteristic of that school to contemplate the dispensations chiefly from the divine point of view; according to which, the end being eyed from the beginning, the things pertaining to the end were often, by a not unnatural consequence, made to throw back their light too distinctly on those of the beginning, and the progressive nature of the Divine economy was not sufficiently regarded. It was further characteristic of the same school, that, viewing everything in the scheme of God as planned with reference to redemption, they were little disposed to discriminate in this respect between one portion of the earlier things belonging to it and another; wherever they could trace a resemblance, there also they descried a type; and everything in the history as well as in the institutions of the Old Covenant, was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realities of the Gospel. Now, these two fundamental characteristics of Cocceianism, somewhat differently grounded, and still more differently applied, are precisely those to which peculiar prominence is given in the writings of such men as Hofmann, Kurtz, Lange, and others of the present day. The first of these, in a work (Weissagung und Erfüllung, 1841-44) which, from its spirit of independent inquiry, and the fresh veins of thought it not unfrequently opened up, exerted an influence upon many who had no sympathy with the doctrinal conclusions of the author, made even more of the typical element in Old Testament history than was done by the Cocceians.
- "일반적인 비유적 해석의 근본적인 오류는, 모든 자의성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모든 건전한 해석 원칙에 도전하는데, 이는 성경에 이중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중 하나가 단어로 나타나는 의미와 전적으로 다른 의미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비유적 해석의 특징은 문자적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기록된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문자적 의미와 내적이고 본질적인 연결로 묶인 더 깊은 의미(ὑπόνοια)로, 문자적 의미와 함께 주어지며 그 안에 내재합니다. 따라서 더 높은 관점에서 주제를 고려할 때 반드시 드러나야 하며, 고정된 규칙에 따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더 깊은 이해와 단어가 전달하는 직접적인 의미 사이의 연결을 규명하는 기본 원칙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면, 이 원칙들은 자연계와 영적 세계의 모든 개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체계를 형성하는 일반적인 조화의 법칙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더 높은 영역이든 더 낮은 영역이든 모든 현상이 각각의 본질적 아이디어를 모방한 형태로 나타나는 법칙이며, 따라서 전체가 개체 속에 표현되고 개체가 다시 전체 속에서 표현됩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관계는 유대인의 역사와 그들의 예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것은 어디에서나 발견되며, 신약에서 구약이 해석되는 방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자연, 그리고 역사의 모든 해석을 위한 규칙을 제공받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표현이 모호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점은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여기에 포함된 진리의 요소들은 견고하지도 않고 남용에 충분히 방어되지도 못하였으며, 클라우젠(Klausen)이 이에 반대하며 이렇게 언급한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합니다. "비유적 해석은 아마도 이전보다 더 절제되고 더 나은 취향으로 적용될 수 있겠지만, 오래된 원칙—즉 단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의미는 단어의 의미로 간주될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대해 여전히 같은 반대가 제기될 것입니다."
성경의 모형론을 비유적 해석의 영역에서 구해내지 못한다면, 모형론은 견고하고 영구적인 기반을 확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유적 자의성이나 '더 깊고 더 가까운 의미'와 결합된 상태로는 이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추가로, 클라우젠은 그의 저서 *Hermeneutik*에서 모형적 해석과 비유적 해석을 구분할 자리를 두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해석학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두 해석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종류로 간주하며, 하나는 단지 다른 것의 과잉 형태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클라우젠은 신약 성경 저자들이 구약과 신약 간의 관계를 언급한 내용을 고려하여 구약 성경의 일부를 복음의 실체에 적용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 관계가 역사적 진실의 시험에 부합할 만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그 관계의 예들이 신약 성경에 제시된 이유가 선택이 아닌 필요에서 비롯되었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최근 대륙에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대해 심도 있는 숙고와 사색적 정신을 가진 작가들 대부분은 클라우젠보다 올스하우젠(Olshausen)의 발자취를 따르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신학적 의견이 순환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200년간의 추론과 탐구 끝에, 가장 유능한 신학자들 중 일부는—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코케이우스 학파(Cocceian school)의 더 근본적인 원칙들로 실질적으로 회귀했습니다.
코케이우스 학파의 특징은 하나님의 섭리를 주로 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었으며, 시작부터 끝을 바라보며, 종종 끝에 속한 것들이 시작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빛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고, 하나님의 경제적 점진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 속 모든 것이 구속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초기의 사물들 간의 차이를 구별하는 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든 유사성을 추적할 수 있으면, 그곳에 모형이 있다고 여겼으며, 구약 언약의 역사와 제도 모두를 복음의 실체와 연결했습니다.
이제 현대의 호프만(Hofmann), 쿠르츠(Kurtz), 랑게(Lange)와 같은 작가들의 저술에서, 이 두 가지 코케이우스주의의 기본 특성이 다르게 기반을 두고, 또 다르게 적용되었지만, 독특하게 부각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It is in the typical character of history, rather than in the prophetic announcements which accompanied it, that he would find the germ and presage of the future realities of the Gospel: the history foreshadowed these; the prophets, acting as the men of superior discernment, simply perceived and interpreted what was in the history. Therefore, to elevate the historical and depress the prophetical in Old Testament Scripture, might be regarded as the general aim of Hofmann's undertaking; yet only formally and relatively to do so: for, as expressive of the religious state and development of the covenant people, both were in reality depressed, and the sacred put much on a level with the profane. This will sufficiently appear from the following illustration:—"Every triumphal procession which passed through the streets of Rome was a prophecy of Augustus Cassar; for what he displayed through the whole of his career, was here displayed by the triumphant general on his day of honour,—namely, the God in the man, Jupiter in the Roman citizen. In the fact that Rome paid such honours to its victorious commanders, it pointed to the future, when it should rule the world through the great emperor, to whom divine honours would be paid." This he brings into comparison with the allusion made in John 19:36 to the ordinance respecting the passover lamb, that a bone of it should not be broken; and then adds, "The meaning of the triumph was not fully realized in the constantly recurring triumphal processions; and so also the meaning of the passover was not fully realized in the yearly passover meals; but the essential meaning of both was to be fully developed at some future period, when the prophecy contained in them should also be fully confirmed" (I., p. 15). But what, one naturally asks, did the prophecy in such cases amount to? It will scarcely be alleged, that even the most gifted Roman citizen, who lived during the period of triumphal processions, could with any certainty have descried in these the future possessor of the imperial throne. It could at the most have been but a vague anticipation or probable conjecture,—if so much as that; for, however the elevation of Augustus to that dignity might, after the event actually occurred, have come to be regarded "as the top-stone and culminating point in the history," assuredly the better spirits of the commonwealth were little disposed to long for such a culmination, or to think of it beforehand as among the destinies of the future. It is only as contemplated from the divine point of view, that the triumphal procession could with any propriety be said to foreshadow the imperial dignity,—a point of view which the event alone rendered it possible for men to apprehend; and the so-called prophecy, therefore, when closely considered and designated by its proper name, was merely the divine purpose secretly moulding the events which were in progress, and, through these, marching on to its accomplishment. This, and nothing more (since Zion is put on a footing with Rome) is the kind of prophecy which Hofmann would find, and find exclusively, in the facts and circumstances of Israelitish history. Because they in reality culminated in the wonders of redemption, they might be said to mark the progression of the Divine procedure toward that as its final aim. But who could meanwhile conjecture that there was any such goal in prospect? The prophets, it is affirmed, could not rise above the movements of the current history; not even the seers, by way of eminence, could penetrate further into the future than existing relations and occurrences might carry them. What signified it, then, that a latent prophecy lay enwrapped in the history? There was no hand to remove the veil and disclose the secret.
- "그는 예언적 선언보다는 역사 자체의 모형적 성격에서 복음의 미래 실체에 대한 싹과 징조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역사는 이것들을 예표했고, 예언자들은 우월한 식견을 가진 사람들로서 단지 역사 속에서 그것을 인지하고 해석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역사적 요소를 부각시키고 예언적 요소를 낮추는 것이 호프만(Hofmann)의 시도에서 일반적인 목표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는 형식적이고 상대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했으며, 언약 백성의 종교적 상태와 발전을 표현하는 요소로서, 실제로는 두 요소 모두 약화되었고, 신성한 것이 세속적인 것과 거의 동일시되었습니다.
이 점은 다음의 예시에서 충분히 드러납니다: "로마 거리에서 행해졌던 모든 개선 행렬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예언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전 경력에서 보여주었던 것이, 개선 장군이 그의 명예로운 날에 보여주었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즉, 인간 안의 신, 로마 시민 안의 주피터가 그것이었다. 로마가 승리한 지휘관들에게 그러한 영예를 부여했던 사실은, 로마가 위대한 황제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게 될 미래를 가리켰으며, 그 황제는 신성한 영예를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이를 요한복음 19장 36절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뼈가 꺾이지 않아야 한다는 규례를 언급한 것과 비교하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개선 행렬의 의미는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개선 행렬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유월절의 의미도 매년 행해지는 유월절 식사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의 본질적인 의미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완전히 발전되었을 것이며, 그 안에 담긴 예언도 완전히 확인되었을 것입니다" (1권, 15쪽).
그러나 자연스럽게 의문이 듭니다. 그러한 경우의 예언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심지어 가장 뛰어난 로마 시민조차도 개선 행렬에서 제국의 왕좌에 오를 미래의 소유자를 확신을 가지고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막연한 기대나 가능성 있는 추측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있었는지 의문이지만요.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그 직위에 오르게 된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 후에야 '역사의 정점이자 절정'으로 간주되었을 수 있지만, 공화국의 보다 나은 정신들은 그러한 정점을 열망하거나 그것을 미래의 운명으로 미리 생각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신적인 관점에서만 개선 행렬이 제국의 존엄성을 예표했다고 적절히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야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세히 검토하고 적절한 이름으로 지정해보면, 이른바 예언은 진행 중인 사건들을 은밀히 형성하고 이를 통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신성한 목적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시온이 로마와 동일시된다는 가정 하에서) 호프만이 이스라엘 역사적 사실과 상황에서 찾고자 했던 예언은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었으며, 오직 이것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구속의 경이로움에서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역사는 그 절정을 목표로 하는 신성한 절차의 진보를 나타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그러한 목표를 향해 진행되고 있음을 누가 짐작할 수 있었을까요? 예언자들조차 현재 역사적 움직임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고 주장됩니다. 심지어 가장 뛰어난 선견자들도 현재의 관계와 사건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서 미래를 관통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 잠재된 예언이 무엇을 의미했겠습니까? 그 비밀을 드러내고 베일을 벗겨낼 손이 없었습니다."
The prophecy as such was known only in the heavenly sphere; and the whole that could be found in the human was some general conviction or vague hope that principles were at work, or a plan was in progress, which seemed to be tending to loftier issues than had yet been reached. This scheme of Hofmann is too manifestly an exaggeration of a particular aspect of the truth to be generally accepted as a just explanation of the whole; by soaring too high in one direction, fixing the eye too exclusively on the Divine side of things, it leaves the human bereft of its proper significance and value—reduces it, in fact, to a rationalistic basis. Hengstenberg has justly said of it, in the last edition of his Christology (vol. iv., p. 389), that "by overthrowing prophecy, in the strict sense, it necessarily involves acted prophecy (or type) in the same fate; and that it is nothing but an illusion to attempt to elevate types at the expense of prophecy." Without, however, attempting after this fashion to sacrifice the one of these for the sake of the other, various theologians have sought to combine them, so as to make the one the proper complement of the other two divinely-appointed factors in the production of a common result, such as the necessities of the Church required. Thus Kurtz (Hist, of Old Cov., Introd., § 7, 8), while he contends for the proper function of prophecy, as having to do with the future not less than the present, maintains that the history also of the Old Covenant was prophetic, "both because it fore shadows, and because it stands in living and continuous relation to, the plan of salvation which was going to be manifested." He thinks it belongs to prophecy alone to disclose, with requisite freedom and distinctness, the connection between what at any particular time was possessed and what was still wanted, or between the fulfilments of promise already made and the expectations which remained to be satisfied; but, in doing this, prophecy serves itself of the history as not only providing the occasion, but also containing the germ of what was to come. He therefore holds that the sacred history possesses a typical character, which appears prominently, continuously, markedly in decided outlines, and in a manner patent not only to posterity, but, by the assistance of prophecy, to contemporaries also, according to the measure that their spiritual capacity might enable them to receive it. This character belongs alike to events, institutions, and dispensations; but in what manner or to what extent it is to be carried out in particular cases, nothing beyond a few general lines have been indicated. These views of the typical element contained in the history and institutions of the Old Covenant, while they present certain fundamental agreements with the principles of the Cocceian school, have this also in common with it, that they take the need for redemption—the fall of man—as the proper starting-point alike for type and prophecy. But another and influential class of theologians, having its representatives in this country as well as on the Continent, has of late advanced a step further, and holds that creation itself, and the state and circumstances of man before as well as after the fall, equally possessed a typical character, being from the outset inwrought with prophetic indications of the person and kingdom of Christ. To this class belong all who have espoused the position (not properly a new one, for it is well known to have been maintained by some of the scholastic divines), that the incarnation of Godhead in the person of Christ was destined to take place irrespective of the fall, and that the circumstances connected with this only determined the specific form in which He was to appear, and the nature of the work He had to do, but not the purpose itself of a personal indwelling of Godhead in the flesh of man, which is held to have been indispensable for the full manifestation of the Divine character, and the perfecting of the idea of humanity. The advocates of this view include Lange, Dorner, Liebner, Ebrard, Martensen, with several others of reputation in Ger many, and in this country, Dean Trench (in his Sermons preached before the University of Cambridge). Along with these there are others—in particular, Dr M'Cosh, the late Hugh Miller, also the late Mr M Donald of Edinkillie—who, without properly committing themselves to this view of the incarnation, yet, on the ground of the analogy pervading the fields alike of nature and redemption in respect to the prevalence of typical forms, on this ground at least, more especially and peculiarly, hold not less decidedly than the theologians above named, the existence of a typical element in the original frame and constitution of things. Such being the turn that later speculations upon this subject have taken, it manifestly becomes necessary to examine all the more carefully into the nature and properties of a type. We must endeavour to arrive (if possible) at some definite ideas and fundamental principles on the general subject, before entering on the consideration of the particular modes of revelation by type, which undoubtedly constitute the great mass of what in Scripture is invested with such a character, and to which, with a view to the right understanding and proper application of these, our inquiry must be mainly directed.
- "예언은 본질적으로 천상의 영역에서만 알려져 있었으며, 인간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원칙이 작동하고 있거나, 혹은 지금까지 도달한 것보다 더 숭고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계획이 있다는 일반적인 확신이나 막연한 희망뿐이었습니다. 호프만(Hofmann)의 이 구상은 진리의 특정 측면을 과장한 것으로, 전체를 정당하게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점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높이 날아오르고, 신적 측면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적 요소를 적절한 의미와 가치를 잃게 만들고, 사실상 그것을 합리주의적 기반으로 축소시켰습니다.
헹스텐베르크(Hengstenberg)는 그의 『그리스도론(Christology)』 마지막 판(4권, 389쪽)에서 이를 정당하게 비판하며, "예언을 엄격한 의미에서 무너뜨리면, 필연적으로 예언적 행위(또는 모형) 또한 같은 운명을 겪게 되며, 예언을 희생시키면서 모형을 높이려는 시도는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요소 중 하나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여러 신학자들은 이를 결합하여 교회의 필요에 따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완하는 두 가지 신적으로 임명된 요소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쿠르츠(Kurtz)는 그의 『구약 언약사(Hist. of Old Cov.)』 서론 7~8장에서, 현재뿐 아니라 미래와도 관련이 있는 예언의 고유한 기능을 주장하는 한편, 구약의 역사도 "미래를 예표하고 구속 계획과 살아 있는 지속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예언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언만이 적절한 자유와 명확성을 가지고 특정 시점에 존재하는 것과 여전히 필요한 것, 또는 이미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와 여전히 충족되지 않은 기대 사이의 연결을 밝힐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언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삼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미래에 나타날 것의 싹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를 활용합니다.
따라서 그는 성경적 역사가 모형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성격이 뚜렷하고 연속적이며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이 모형적 성격은 단지 후세에게만 명백한 것이 아니라, 예언의 도움으로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영적 능력에 따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했습니다. 이러한 성격은 사건, 제도, 제도적 배열 모두에 동일하게 속하며, 특정 사례에서 어떤 방식으로 또는 어느 정도까지 실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반적인 방향만이 제시되었습니다.
구약 언약의 역사와 제도에 내재된 모형적 요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코케우스 학파(Cocceian school)의 원칙과 몇 가지 근본적인 일치를 나타내며, 타락한 인간의 구속 필요성, 즉 인간의 타락을 모형과 예언의 적절한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신학자 집단이, 이 나라와 유럽 대륙 모두에서 그 대표자를 가지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창조 자체와 타락 이전뿐 아니라 이후의 인간 상태와 환경도 동일하게 모형적 성격을 가지며,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인격과 왕국을 예표하는 예언적 표시로 짜여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랑게(Lange), 도르너(Dorner), 리브너(Liebner), 에브라르트(Ebrard), 마르텐센(Martensen)과 같은 독일의 명망 있는 신학자들과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설교한 트렌치(Dean Trench)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이 관점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구속의 영역에서 모형적 형식의 존재를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코시(Dr. M'Cosh), 고(故) 휴 밀러(Hugh Miller), 에딘킬리(Edinkillie)의 고(故) 맥도널드(Mr. McDonald)가 있습니다. 이들은 최소한의 수준에서, 위에 언급된 신학자들만큼이나 초기 창조 질서와 구조에서 모형적 요소의 존재를 단호히 주장합니다.
이 주제에 대한 최근의 이러한 사색이 취한 방향을 고려할 때, 모형의 본질과 특성을 더욱 신중히 조사할 필요성이 명백히 대두됩니다. 성경에서 그러한 성격을 부여받은 대부분의 모형적 계시 방식에 대한 고찰에 들어가기 전에,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 몇 가지 명확한 아이디어와 기본 원칙을 도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올바른 이해와 적절한 적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1] Opera, Vol. II., p. 88, Ed. Delarue.
[2] Ibid., p. 29.
[3] See, however, a thorough specimen of allegorizing after the manner of Origen, on the "Sacramentum," involved in the name and office of Abishag, in Jerome's letter to Nepotianus (Ep. 52 Ed. Yallars.), indicating, as he thinks, the larger development of wisdom in men of advanced age.
[4] On Psalm 41.
[5] On Psalm 42.
[6] The major part of our readers, perhaps, may be of opinion that they have already been detained too long with the subject, believing that such interpretations are for ever numbered among the things that were. So we were ourselves disposed to think. And yet we have lived to see a substantial revival of the allegorical style of interpretation, in a work of comparatively recent date, and a work that bears the marks of an accomplished and superior mind. We refer to that portion of Mr Worsley's Produce of the Intellect in Religion, which treats of the Patriarchs in their Christian Import, and the Apostles as the Completion of the Patriarchs. His notion respecting the Patriarchs briefly is, that Abraham, Isaac, and Jacob respectively, "present to us the eternal triune object" of worship,— Father, Son, and Holy Ghost; that the marriages of the Patriarchs symbolize God's union with His church, and with each member of it; and especially is this done through the wives and children of Jacob, at least in regard to its practical tendency and sanctifying results. In making out the scheme, the names of the persons mentioned in the history are peculiarly dwelt upon, as furnishing a sort of key to the allegorical interpretation. Thus Leah, whose name means wearisome and fatiguing labour, was the symbol of "services and works which are of little worth in themselves—labours rather of a painful and reluctant duty, than of a free and joyful love." "She sets forth to us that fundamental repulsiveness or stubbornness of our nature, whose proper and ordained discipline is the daily taskwork of duty, as done not to man, nor to self, but to God." Afterwards, Leah is identified with the ox, as the symbol of stubbornness and wearisome labour; and so "with Leah the ox symbolizes our taskwork of duty, and our capacity for it," while the sheep (Rachel signifying sheep) symbolizes "our labours of love, i.e., our real rest and capacity for it." (P. 71, 113, 128.) It may be conjectured from this specimen what ingenuities require to be plied before the author can get through all the twelve sons of Jacob, so as to make them symbols of the different graces and operations of a Christian life. We object to the entire scheme.—1. Because it is perfectly arbitrary. Though Scripture sometimes warrants us in laying stress on names, as expressive of spiritual ideas or truths connected with the persons they belong to, yet it is only when the history itself draws attention to them, and even then they never stand alone, as the names often do with Mr Worsley, the only keys to the import of the transactions: as if, where acts entirely fail, or where they appear to be at variance with the symbolical ideal, the key were still to be found in the name. Scripture nowhere, for example, lays any stress upon the names of Leah and Rachel; while it very pointedly refers to the bad eyes of the one, and the attractive comeliness of the other. And if we were inclined to allegorize at all, we should deem it more natural, with Justin Martyr (Trypho, c. 42) and Jerome (on Hos. 12:3), to regard Leah as the symbol of the blear-eyed Jewish church, and Rachel of the beloved church of the Gospel. Even this, however, is quite arbitrary, for there is nothing properly in comm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ymbolized—no real bond of connection uniting them together. And if by tracing out such lines of resemblance, we might indulge in a pleasing exercise of fancy, we can never deduce from them a revelation of God's mind and will. 2. But further, such explanations offend against great fundamental principles—the principle, for example, that the Father cannot be represented as entering into union with the Church, viewed as distinct from the Son and the Spirit; and the principle that a sinful act or an improper relation cannot be the symbol of what is divine and holy. In such a case there never can be any real agreement. "Who, indeed, can calmly contemplate the idea of Abraham's connection with Hagar, or Jacob's connection with the two sisters and their handmaids—in themselves both manifestly wrong, and receiving on them manifest tokens of God's displeasure in providence—should be the chosen symbol of God's own relation to the Church? How very different an allegorizing of this sort is from the typical use made of them in Scripture will be shown in the sequel.
[7] On Gal. 4:26.
[8] On Gal. 4:22.
[9] Philologia Sac. Lib. II. P. I. Tract. II. Sect. 4. Vitringa Obs. Sac. Vol. II. Lib. VI. c. 20. Witsius De (Econom. Lib. IV. c. 6.
[10] The Figures and Types of the Old Testament.
[11] Key to open the Scripture Metaphors and Types.
[12] The Types Unveiled; or, The Gospel Picked out of the Legal Ceremonies.
[13] Moses and Aaron. [14] Moses Unveiled.
[15] In the reference made above to the beginnings of David's kingdom, it will be understood that the characters he associated with himself are simply viewed in the light contemplated by the writers more immediately in view. My own conviction is, that 1 Sam. 22:2, if rightly interpreted, would present those who gathered themselves to David as spiritually the better sort in Israel those who were partly made bankrupt by oppression, and partly were grieved and vexed in their minds at the existing state of things.
[16] The following critique of Buddeus, which belongs to the earlier part of last century, already points in this direction: "It cannot certainly be denied that the Cocceians, at least some of them, have carried this matter too far. For, besides that they everywhere seem to find images and types of future things, where other people can discern none, when they come to make the application to the antitype, they not unfrequently descend to minute and even trifling things, nay, advance what is utterly insignificant and ludicrous, exposing holy writ to the mockery of the profane. And here it may be proper to notice the fates of exegetical theology; since that in temperate rage for allegories which appeared in Origen and the Fathers, and which had been condemned by the schoolmen, was again, after an interval, though under a different form, produced anew upon the stage. For this typical interpretation differs from the allegorical only in the circumstance, that respect is had in it to the future things which are adumbrated by the types; and so, the typical may be regarded as a sort of allegorical interpretation. But in either way the amplest scope is afforded for the play of a luxuriant fancy and a fertile invention."—I. F. Buddei Isagoge II. hist. Theolog. 1830.
[17] Obs. Sac. Vol. II., p. 460, 461.
[18] Clarke's Evidences, p. 420, sq. Jortin's Remarks on Ecclesiastical History, Vol. I., p. 138-152.
[19] Grace and Truth, or the Glory and Fulness of the Redeemer displayed, in an attempt to explain the Types, Figures, and Allegories of the Old Testament, by the Rev. AY. M'Ewen.
[20] Hutchinson's Works, Vol. I., p. 202.
[21] Ibid., Vol. VII., p. 325.
[22] Lectures, p. 373.
[23] Stuart's Ernesti, p. 13. [24] We don't vouch, of course, for the absolute completeness of the above list. Indeed, it is scarcely possible to know what would be regarded as a complete list—some feeling satisfied with an amount of recognition in Scripture which seems quite insufficient in the eyes of others. There have been those who, on the strength of Gen. 49:24, would insert Joseph among the specially mentioned types, and claim also Sampson, on account of what is written in Judges 13:5. But scriptural warrants of such a kind are out of date now—they can no longer be regarded as current coin. On the other hand, there are not a few who deem the scriptural warrant insufficient for some of those we have specified, and think the passages where they are noticed refer to them merely in the way of illustration. The list, however, comprises what are usually regarded as historical types, possessing distinct scriptural authority, by writers belonging to the school of Marsh. The arguments of those who would discard them altogether will be considered under next division. [25] Lectures, p. 372. [26] Kuinoel: Ut adco hie recte possit laudari, quod dominus olim interprete propheta dixit, nempe: ex AEgypto vocavi filium meum. Paulus: "πληροῦσθαι is here fulfilling, as denoting a completion after the resemblance;" and he adopts as his own Ernesti's paraphrase, "Here one might say with greater justice (in a fuller sense) what Hosea said of Israel." [27] This defect cannot yet be said to have been supplied; not by the Symbolique du Culte de L' Ancienne Alliance (1860) of Neumann, published since the above was written the work of a German, though written—in French. For not only is the work incomplete (the first part only having appeared), but it possesses more the nature of a condensed sketch or outline of the subject, than a full investigation. So far as it goes, it is written with clearness and vigour, contains some fine thoughts, and is pervaded by an earnest and elevated spirit. Justice requires me to add, that it appears to be marred by two misleading tendencies: one of excess attempting to carry religion too much into the domain of science (for example, in the use made of Goethe's Theory of Colours to explain some of the Old Testament symbols); the other of defect—viewing religion almost, if not altogether exclusively, on the subjective side, which necessarily leads to certain meagre and arbitrary explanations. Reference may possibly be made to some of them in the sequel.
'웨이처치 설교및 강의 > TYPOLOGY, Patrick Fairbairn(1847)'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Typology of Scripture_4장. 모형론의 본질과 범위 (3) (0) | 2025.01.24 |
---|---|
The Typology of Scripture_3장. 모형론의 본질과 범위 (2) (0) | 2025.01.22 |
The Typology of Scripture_ 2장. 모형론의 본질과 범위(1) (0) | 2025.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