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요약:
모형론과 성육신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 진행됨.
성육신은 구속 계획의 중심적 요소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를 달리 해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성경적이라는 내용.
Chapter Fourth. The Proper Nature and Province of Typology (3)
part3. God's Work in Creation, how Related to The Incarnation and Kingdom Of Christ?
THE analogy presented near the close of the preceding chapter—in an extract from Hugh Miller[1]—between pre-Adamite formations in the animal kingdom, rising successively above each other, and those subsequent arrangements in the religious sphere which were intended to herald and prepare for the personal appearance of the Lord Jesus Christ, is stated with becoming caution and reserve.
It keeps strictly within the limits of revelation, and assumes the existence of nothing in the work of creation itself, with respect to typical forms or otherwise, such as could, even to the most profound intelligences of the universe, have suggested the idea of a further and more complete manifestation of God in connection with humanity.
The commencement of the new school of prophecy, allying itself to type and symbol of another kind than had yet appeared, is dated from the era of Adam's fall, as that which at once furnished the occasion and opened the way for their employment; while still, in the mind of Deity itself, or "in the eternal decrees," as it is expressed in the extract, it had been for ever determined that there should yet be a closer union between the Creator and creation than was accomplished in Adam. In other words, God had from eternity purposed the Incarnation; though the events in providence which were to exhibit its need, and give rise to the prophetic announcements and foreshadowing symbols which should in due time point the eye of hope toward it came in subsequently to creation, and by reason of sin; so that the Incarnation was predestined, because the fall was foreseen.
네 번째 장: 모형론의 고유한 본질과 영역
3. 창조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왕국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앞 장의 끝부분에서 휴 밀러(Hugh Miller)의 글에서 발췌한 유추는, 동물 왕국의 선(先)아담적 형성들이 점진적으로 상위 단계로 나아가는 것과 신앙적 영역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출현을 예고하고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후속 배열 사이의 관계를 신중하고 절제 있게 설명합니다.
이 유추는 계시의 한계를 엄격히 준수하며, 창조 작업 자체에서, 모형적 형태나 그 외의 어떤 것도, 가장 심오한 우주의 지성에게조차, 인간성과 연결된, 하나님의 더 크고 완전한 나타남의 개념을 암시할 수 있었다는 전제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만 이야기 해야 한다는 뜻인듯. 창조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 하지 않으신 내용을 인간이 특별한 의미를 두고 추측하지 않는다는 뜻 같음.)
예언의 새로운 방식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담의 타락 시점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곧 그 방식이 사용될 계기와 길을 열어 주는 사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속, 또는 "영원한 작정" 안에서는, 창조에서 아담을 통해 이루어진 것보다 더 긴밀한 창조자와 창조물 간의 연합이 있을 것임이 영원히 결정된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성육신을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성육신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이를 바라보는 희망의 눈을 예언적 발표와 상징적 모형으로 향하게 할 섭리의 사건들은 창조 이후, 죄로 인해 뒤따라 발생한 것입니다. 즉, 성육신은 예정된 것이었으며, 이는 타락이 예견되었기 때문입니다.
The same caution, however, has not been always observed not even in ancient, and still less in recent times.
The spirit of Christian speculation, in proportion as the circumstances of particular times have called it into play, has striven to connect in some more distinct and formal manner God's work in creation with a higher destiny for man in the future; but the modes of doing so have characteristically differed.
Among the patristic writers the tendency of this speculation was to find in the original constitution of things pre-intimations or pledges of a higher and more ethereal condition to be reached by Adam and his posterity, as the reward of obedience to the will of God, and perseverance in holiness.
The sense of various passages upon the subject gathered out of their writings has been thus expressed: "That Paradise was to Adam a type of heaven; and that the never-ending life of happiness promised to our first parents, if they had continued obedient, and grown up to perfection under that economy wherein they were placed, should not have continued in the earthly paradise, but only have commenced there, and been perpetuated in a higher state."[2]
It is impossible to say that such should not have been the case; for what in the event supposed might have been the ultimate intentions of God respecting the destinies of mankind, since revelation is entirely silent upon the subject, can be matter only of uncertain conjecture, or, at the very most, of probable inference. It is quite conceivable that some other region might have been prepared for their reception, where, free from any formal test of obedience, free even from the conditions of flesh and blood, and "made like unto the angels," they should have reaped the fruits of immortality.
그러나 이러한 신중함은 항상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고대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최근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기독교적 사변의 정신은 특정 시대적 상황이 이를 요구할 때, 창조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미래에 인간이 가질 더 높은 운명과 보다 명확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연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시도하는 방식은 시대와 사람들에 따라 특색 있게 달랐습니다.
교부들 사이에서 이러한 사변의 경향은, 창조의 원래 구성 안에서 아담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거룩함을 유지하며 완전에 이를 경우,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나아갈 가능성이나 약속을 찾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그들의 저술에서 여러 구절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담에게 하늘의 모형이었으며, 첫 부모가 순종을 계속 유지하고 자신들이 속한 경륜 아래에서 완전함에 이를 경우, 약속된 영원한 행복의 삶은 지상 낙원에서 지속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곳에서 시작되어 더 높은 상태에서 영속되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했는지 여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이 인간의 운명에 대해 품으셨을 궁극적 의도는 계시가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불확실한 추측의 영역에 머물거나, 최대한 관대한 해석으로도 추론의 문제일 뿐입니다.
다른 어떤 영역이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되었을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곳에서는 순종에 대한 공식적인 시험이나 심지어 육체와 혈육의 조건에서도 벗어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불멸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초기 교회의 신학자들은 아담이 순종했더라면 하나님이 더 높은 영적 삶(하늘에서의 삶)을 허락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세부 사항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므로, 이는 사람들의 상상과 논리에 의존한 생각일 뿐이라는 뜻)
But it is equally conceivable, that this earth itself, which "the Lord hath given to the children of men," might have become every way suited to the occasion; that as, on the hypothesis in question, it should have escaped the blighting influence of sin, so other and happier changes might have passed over it, and the condition of its inhabitants, not only than they have actually undergone, but than any we can distinctly apprehend; until by successive developments of latent energies, as well of a natural as of a moral kind, the highest attainable good for creation might have been reached. For anything we can tell, there may have been powers and susceptibilities inherent in the original constitution of things, which, under the benign and fostering care of its Creator, were capable of being conducted through such an indefinite course of progressive elevation. But everything of this sort belongs to speculation, not to theology; it lies outside the record which contains the revelation of God's mind and will to man; and to designate paradise simply, and in its relation to our first parents, a type of heaven, is even more than to speak without warrant of Scripture,—it is to regard paradise and man's relation to it in another light than Scripture has actually presented them. For there the original frame and constitution of things appears as in due accordance with the Divine ideal,—in itself good, therefore relatively perfect; and not a hint is dropped, or, so far as we know, an indication of any kind given, that could beget in man's bosom the expectation or desire of another state of being and enjoyment than that which he actually possessed—none, till the entrance of sin had created new wants in his condition, and opened a new channel for the display of God's perfections in regard to him. It was the influence of the ancient philosophy, which associated with matter in every form the elements of evil, or, at least, of imperfection, that so readily disposed th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to see in what was at first given to Adam only the image of some higher and better inheritance destined for him elsewhere.
그러나 이 땅 자체가, "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땅"으로서, 그 목적에 완전히 적합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위 가설에 따르면, 이 땅은 죄의 파괴적인 영향을 피했을 것이며, 그 위에 더 나은 행복한 변화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곳의 거주자들의 상태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나아갔을 것입니다.
자연적이든 도덕적이든, 잠재적 에너지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창조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선에 이를 때까지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창조의 원래 구성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돌보시는 가운데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생각은 신학이 아니라 사변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한 계시를 담고 있는 성경 기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낙원을 단순히, 그리고 인간의 첫 조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늘의 모형"이라고 지정하는 것은 성경의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는 성경이 실제로 제시한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낙원과 인간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창조의 원래 형태와 구조가 하나님의 이상과 정확히 일치하며, 본질적으로 선하고 상대적으로 완전하다고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의 마음속에 자신이 가진 상태 이상의 다른 존재나 즐거움을 기대하거나 갈망하도록 만드는 어떤 암시나 증거도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오직 죄가 들어와 인간의 조건에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 자신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통로를 여셨을 때 비로소 생겨났습니다.
고대 철학의 영향은 물질이 어떤 형태로든 악의 요소, 혹은 최소한 불완전함의 요소를 지닌 것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 초기 교부들은 아담에게 처음 주어진 것이 단지 다른 곳에서 그를 위해 예정된 더 높고 더 나은 유산의 모형에 불과하다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They did not consider what refinements matter itself might possibly undergo, in order to its adaptation to the most exalted state of being. But the same influence naturally kept them from connecting with this prospective elevation to a higher sphere the necessary or probable incarnation of the Word; since rather by detaching the human more from the environments of matter, than by bringing the divine into closer contact with it, did the prospect of a higher and more perfect condition for man seem possible to their apprehensions. Hence, also, in what may be fitly called the great symbol of the early Church's faith respecting the incarnation—the Nicene creed—goes no farther than this, that "for us men, and for the sake of our salvation, the Word was made flesh."[3] In recent times the speculative tendency, especially among the German divines, has shown a disposition to take the other direction —namely, to make the incarnation of itself, and apart altogether from the fall of man, the necessary and, from the first, the contemplated medium of man's elevation to the final state of perfection and blessedness destined for him. Some of the scholastic theologians had already signalized themselves by the advocacy of this opinion—in particular, Rupprecht of Deutz, Alexander of Hales, Aquinas, Duns Scotus; but it was so strongly discountenanced by Calvin and the leading divines of the Reformation, who denounced the idea (propounded afresh by Osiander) of an incarnation without a fall as rash and groundless,[4] that it sunk into general oblivion, till the turn given to speculative thought by the revival of the pantheistic theology served, among other results, to bring it again into favour. This philosophy, while resisted by all believing theologians in its strivings to represent the created universe as but the self-evolution and the varied form of Deity, has still left its impress on the views of many of them as to the nature of the connection between Creator and creature—as if an actual commingling between the two were, in a sense, mutually essential; since a personal indwelling of Godhead in the form of humanity is conceived necessary to complete the manifestation of Godhead begun in Adam, and only by such a personal indwelling could the work of creation attain its end, either in regard to the true ideal of humanity, on the one side, or to the revealed character of God and the religion identified with it, on the other. Adam, therefore, in his formation after the divine image, was the type of the God-man, or the God-man was the true archetype and only proper realization of the idea exhibited in Adam; the fall, with its attendant consequences, only determined the mode of Christ's appearance among men, but by no means originated the necessity of his appearing.
그들은 물질 자체가 가장 고귀한 상태에 적응하기 위해 어떤 정화 과정을 거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영향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더 높은 상태로의 상승을 성육신과 연결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이는 신성을 물질과 더 밀접하게 연결하기보다는, 인간을 물질로부터 더욱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인간이 더 완전한 상태에 이를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초기 교회의 신앙을 상징하는 니케아 신조에서도 성육신에 대해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말씀은 육신이 되셨다"는 표현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최근 독일 신학자들 사이에서 사변적 경향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인간의 타락과는 무관하게 성육신 자체가 인간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고 복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처음부터 계획된 매개체로 간주되었습니다. 일부 스콜라 신학자들, 예를 들어 데우츠의 루프레히트, 알렉산더,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는 이러한 견해를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칼뱅과 종교개혁의 주요 신학자들은 오시아더(Osiander)가 새롭게 제안한 "타락 없는 성육신" 개념을 성급하고 근거 없는 주장으로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견해는 한동안 잊혔으나, 범신론적 신학의 부활로 인해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이 철학은 우주를 신성의 자기 발전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으로 인해 모든 신앙적 신학자들로부터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 본질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 여전히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실제적 결합이, 어떤 면에서는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낳았습니다. 특히 인간의 형태 속에서 하나님의 개인적 내주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아담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완성하고, 인간성의 이상과 하나님과 관련된 신앙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인적 존재(God-man)의 모형이었으며, 신-인적 존재는 아담에서 나타난 개념의 참된 원형이자 유일하게 적절한 실현이었습니다. 타락과 그로 인한 결과는 단지 그리스도가 인간 사이에 나타나는 방식을 결정했을 뿐이며, 그분의 출현이 필요하다는 본질적 이유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The representatives of this transcendental school of Typology, as it may not inaptly be called— which undoubtedly includes some of the most learned theologians of the present day—differ to some extent in their mode of setting forth and vindicating the view they hold in common, according to the particular aspect of it which more especially strikes them as important. To give only a few specimens— Martensen presents the incarnation in its relation to the nature of God: the true idea of God is that of the absolute personality; and as the union of Christ with God is a personal union, the individual with whom God historically entered into an absolute union, must be free from everything individually subjective—he must reveal nothing save the absolute personality. Christ is not to be subsumed under the idea of humanity, but, inversely, humanity must be subsumed under Him, since it was He in whom and for whom all things were created (Col. 1:15). He is at once the centre of humanity and the revealed centre of Deity—the point at which God and God's kingdom are personally united, and who reveals in fulness what the kingdom of God reveals in distinct and manifold forms. The second Adam is both the redeeming and the world-completing principle; the incarnate Logos, and as such the head not merely of the human race, but of all creation, which was made by Him and for Him, and is again to be recapitulated in Him.[5] Lange makes his starting-point the final issues of the incarnation, and from these argues its primary and essential place in the scheme of the Divine manifestations. The post- temporal, eternal glory of the humanity of Christ points back to its eternal, ideal existence in God. The eternal Son of God cannot, in the course of His temporal existence, have saddled Himself (behaftet sich) for ever with something accidental; or have assumed a form which, as purely historical, does not correspond to His eternal essence. We must therefore distinguish between incarnation and assumption of the form of a servant (so as, he means, to place the latter alone in a relation of dependence to the fall of man); must also learn to understand the eternal beginnings of Christ's humanity, in order to perceive how intimate a connection it has with the past— with the work of creation, with primeval times, and the history of the Old Testament. The whole that appeared in these of good is to be regarded as so many vital evolutions of the Divine life that is in Christ; but in Him alone is the idea of it fully realized.[6]
초월적 모형론 학파의 대표자들은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관점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특히 중요하다고 여기는 특정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텐센(Martensen)**은 성육신을 하나님의 본성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개념은 절대적 인격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합은 개인적 연합이므로, 역사적으로 하나님과 절대적 연합을 이룬 개인은 모든 주관적 요소에서 벗어나야 하며, 오직 절대적 인격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개념 아래 포함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류가 그분 안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1:15). 그리스도는 동시에 인류의 중심이자 드러난 신성의 중심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왕국이 개인적으로 연합하는 지점이며, 하나님의 왕국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내는 것을 온전히 나타내는 분입니다. 둘째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자 세상을 완성하는 원리이며, 성육신한 로고스(Logos)로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를 통해 창조되었고, 그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다시 그 안에서 재통합될 것입니다【5】.
**랑게(Lange)**는 성육신의 최종 결과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나타나심 계획에서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초시간적이고 영원한 영광은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이상적 존재로 거슬러 올라감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은 시간적 존재 과정에서 우연적인 무엇에 얽매일 수 없으며, 단순히 역사적 형태를 취해 그의 영원한 본질에 맞지 않는 모습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육신과 종의 형상을 취함을 구별해야 하며(후자는 인간의 타락에 의존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원한 시작을 이해함으로써 창조의 역사, 태초의 시간, 구약의 역사와 그것의 연결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나타난 모든 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생명의 다양한 발전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그분 안에서만 이 모든 것이 완전하게 실현됩니다【6】.
Both of the writers just referred to, also Liebner, Kothe, and, greater than them all, Dorner, lay special stress on the argument derived from the headship of humanity indissolubly linked to Christ. Humanity, according to Dorner, as it appears before God—redeemed humanity —is not merely a mass or heap of unconnected individuals, but an organism, forming, with the world of higher spirits and nature, which is to be glorified for and through it, a complete and perfect organic unity. Even the natural world is an unity, solely because there is indissolubly united with it a principle which stands above it and comprises it within itself—namely, the Divine Logos, by whom the world was formed and is sustained, who is the vehicle and the representative of its eternal idea. But in a higher sense the world of humanity and spirits is an unity, because through the God-man who stands over it, and by His personal self-communication of Godhead- fulness pervades it, its creaturely susceptibility to God is filled; it now enters into the circle of the Divine life, and stands in living harmony with the centre of all good. But a matter so essential to the proper idea of humanity cannot belong to the sphere of contingency; it must be viewed as inseparably connected with the purpose of God in creation. And there is another thought, which Dorner conceives establishes beyond doubt the belief, that the incarnation had not its sole ground in sin, but had a deeper, an eternal, and abiding necessity in the wise and free love of God,—namely, that Christianity is the perfect religion, the religion absolutely, the eternal Gospel; and that for this religion Christ is the centre, without which it cannot be so much as conceived. Whoso, says he, maintains that Adam might have become perfect even without Christ, inasmuch as no one can deem it possible to conceive of perfection without the perfect religion, maintains, either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two absolute religions, one without, and one with Christ—which is a bare contradiction. No Christian, he thinks, will deny that it makes an essential difference, whether Christ, or only God in general, is the central point of a religion. At the same time, with Christian candour he admits, that the necessity of the truth he advocates will not so readily commend itself to theologians, who are wont to proceed in an experimental and anthropological manner (that is, who look at the matter as it has been evolved in the history and experience of mankind), as it must, and actually does, to those who recognise both the possibility and the necessity of a Christian speculation, that takes the conception of God for its starting-point.[7]
앞서 언급된 마르텐센과 랑게 외에도, 리브너(Liebner), 코테(Kothe),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뛰어난 **도르너(Dorner)**는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인간성의 머리됨(headship)에 관한 논증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도르너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는 인류—곧 구속된 인류—는 단순히 연결되지 않은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더 높은 영적 존재와 자연 세계와 함께 완전하고 완벽한 유기적 통일체를 형성하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자연 세계조차도 하나의 통일체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자신을 초월하여 그 속에 포함된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세상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신적 로고스(Divine Logos)**로, 세상의 영원한 이념의 매개체이자 대표자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더 높은 차원에서, 인간성과 영의 세계는 하나의 통일체로 보입니다. 이는 인간 위에 계시는 **신-인적 존재(God-man)**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신적 충만함이 인간에게 직접 전달됨으로써,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피조물로서의 감수성이 충만하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생명의 영역에 들어가며, 모든 선의 중심과 살아있는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도르너는 인간성에 본질적인 이러한 개념이 우연적일 수 없으며,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또한 성육신이 단순히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롭고 자유로운 사랑 속에 있는 더 깊고 영원하며 지속적인 필요성에 기초한다고 믿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완전한 신앙, 절대적 신앙이며, 영원한 복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도르너에 따르면, "아담이 그리스도 없이도 완전함에 이를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의 절대적 신앙과 그리스도가 있는 또 하나의 절대적 신앙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는 분명한 모순이라고 합니다. 그는 신앙의 중심이 단순히 일반적인 하나님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에 따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기독교인은 없다고 믿습니다.
도르너는 이 주장이 인간의 역사와 경험에 기초해 실험적이고 인류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신학자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아 기독교적 사변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리라고 주장합니다【7】.
While this mode of contemplating the incarnation of Christ, and of connecting it with the idea of creation, has in its recent development had its origin in the philosophy, and its formal exhibition in the theology, of Germany, it is no longer confined to that country; and both the view itself, and its application to the Typology of Scripture, have already found a place in our own. theological literature. Dean Trench, in his Sermons preached before the University of Cambridge, although he advances nothing strictly new upon the subject, yet he speaks not less decidedly respecting the necessity of the incarnation, apart altogether from the fall, to enable the race of Adam "to attain the end of its creation, the place among the families of God, for which from the first it was designed." Special stress is laid by him, as by Lange, on the issues of the incarnation, as reflecting light on its original intention: "The taking on Himself of our flesh by the Eternal Word was no makeshift to meet a mighty, yet still a particular, emergent need; a need which, conceding the liberty of man's will, and that it was possible for him to have continued in his first state of obedience, might never have occurred. It was not a mere result and reparation of the fall,—such an act as, except for that, would never have been; but lay bedded at a far deeper depth in the counsels of God for the glory of His Son, and the exaltation of that race formed in His image and His likeness. For, against those who regard the incarnation as an arbitrary, or as merely an historic event, and not an ideal one as well, we may well urge this weighty consideration, that the Son of God did not, in and after His ascension, strip off this human nature again; He did not regard His humanity as a robe, to be worn for a while and then laid aside; the convenient form of His manifestation, so long; as He was conversing with men on earth, but the fitness of which had with that manifestation passed away. So far from this, we know, on the contrary, that He assumed our nature for ever, married it to Himself, glorified it with His own glory, carried it as the form of His eternal subsistence into the world of angels, before the presence of His Father. Had there been anything accidental here, had the assumption of our nature been an afterthought (I speak as a man), this marriage of the Son of God with that nature could scarcely be conceived. He could hardly have so taken it, unless it had possessed an ideal as well as an historic fitness; unless pre- established harmonies had existed, such harmonies as only a divine intention could have brought about between the one and the other."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바라보고 그것을 창조의 개념과 연결시키는 접근은 최근 독일 철학과 신학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이제는 그 나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견해와 성경 모형론에의 적용은 이미 우리의 신학 문헌에서도 자리 잡았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설교를 했던 트렌치 학장은, 이 주제에 대해 엄밀히 새로운 것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고, 처음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가족들 사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성육신이 타락과는 별개로 필요하다는 점을 단호히 말합니다.
그는 랑게처럼 성육신의 결과에 특별히 주목하며, 이를 통해 그 본래 의도를 비춥니다. "영원한 말씀께서 우리의 육신을 취하신 것은 단지 특정한 긴급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었습니다. 이 필요는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가 처음의 순종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성육신은 단순히 타락의 결과이자 그 수리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진 그 인류의 고양을 위한 하나님의 깊은 계획 속에 본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육신을 자의적이거나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고, 동시에 이상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고려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승천 이후에 이 인간 본성을 다시 벗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인성을 단지 한동안 입었다가 벗는 옷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지상에서 인간과 교제하실 때에는 편리한 형태였으나, 그 나타남이 끝남과 함께 적합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본성을 영원히 취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과 결합하시고, 자신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하시며, 그 본성을 자신의 영원한 실존의 형태로 아버지의 면전과 천사들의 세계로 가져가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단순히 우연적이었다면, 우리 본성을 취하신 것이 후회의 산물이었다면 (내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과 이 본성의 결합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그렇게 취하신 것은, 그것이 단순히 역사적 적합성뿐 아니라 이상적 적합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적합성은 오직 하나님의 의도가 만들어낸 선제적 조화로만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The application of the view to Typology is apparent from the very statement of it; but it has also been formally made, and so as to combine the results obtained from the geological territory, with those of a more strictly theological nature. Thus, the late Mr Macdonald[8] speaks of "the scheme of nature, read from the memorials of creation inscribed on the earth's crust, or recorded in the opening pages of Genesis, as progressive, and from its very outset prophetic;" and a little farther on he says, "There is no reason whatever for confining the typical to the events and institutions subsequent to the fall. The cause of this arbitrary limitation lies in regarding as typical only what strictly prefigured redemption, instead of connecting it with God's manifestation of Himself and His purposes in all His acts and administrations, which, however varied, had from the very first one specific and expressed object in view—His own glory through man, at first created in the Divine image, and since the fall to be transformed into it; inasmuch as that moral disorder rendered such a change necessary. The whole of the Divine acts and arrangements from the beginning formed parts of one system; for, as antecedent creations reached their end in man, so man himself in his original constitution prefigured a new and higher relation of the race than the incipient place reached in creation" (p. 457). The fall is consequently to be understood, and is expressly represented, merely as a kind of interruption or break in the march of providence toward its aim, in nature akin to such events as the death of Abel and the flood in after times; while the Divine plan not the less proceeded on its course, only with special adaptations to the altered state of things.
이 관점을 모형론에 적용하는 것은 그 진술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 적용은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지질학적 영역에서 얻어진 결과와 더 엄격히 신학적인 성격의 결과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고(故) 맥도날드 씨는 "자연의 체계는 지구의 표면에 새겨진 창조의 기념물에서 읽어내든, 창세기의 처음 페이지에서 기록된 대로 읽어내든, 점진적이며 처음부터 예언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타락 이후의 사건과 제도에만 모형적 의미를 제한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의적 제한의 원인은, 구속을 엄격히 예표하는 것만을 모형적이라고 간주하는 데 있으며, 대신 하나님의 자신과 목적의 모든 행위와 경영에서의 나타남과 연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위와 경영은 매우 다양하지만, 처음부터 하나의 구체적이고 표현된 목적—즉,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을 통해 나타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타락 이후에는 그 형상으로 변모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는 도덕적 혼란이 그러한 변화를 필요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모든 행위와 배열은 하나의 체계의 일부를 형성했습니다. 선행된 창조가 인간 안에서 그 끝에 도달한 것처럼, 인간 자체도 그의 원래 구성에서 창조에서 도달했던 초기의 지위를 넘어선 새로운, 더 높은 인류의 관계를 예표했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457쪽). 따라서 타락은 섭리가 본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단순히 하나의 중단 또는 단절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는 후대의 아벨의 죽음이나 대홍수와 같은 사건들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없이 그 궤도를 계속 진행했으며, 단지 변화된 상황에 특별히 적응하여 진행되었을 뿐입니다.
I. It is this more special bearing of the subject, its relation to a well- grounded and properly adjusted Scriptural Typology, with which we have here chiefly to do; and to this, accordingly, we shall primarily address ourselves. In doing so, we neither directly question nor defend the truth of the view under consideration; we leave its title to a place in the deductions of a scientific theology for the present in abeyance; and merely regard it in the light in which it is put by its most learned and thoughtful advocates, as a matter of inference from some of the later testimonies of Scripture concerning the purposes of God; and this, too, only as informed and guided by a spirit of Christian speculation, having for its starting-point the conception of God. Now the matter standing thus, it would, as appears to us, be extremely unwise to lay such a view at the foundation of a typological system, or even to give it in such a system a distinctly recognised place. For this were plainly to bring a certain measure of uncertainty into the very structure of the system—founding upon a few incidental hints and speculative considerations concerning the final purposes of God, in which it were vain to expect a general concurrence among theologians, rather than upon the broad stream and current of His revelations. It were also, as previously noticed (p. 58), to make our Typology, in a very important respect, return to the fundamental error of the Cocceian school; that is, would inevitably lead to the too predominant contemplation of everything in the earlier dispensations of God as from the Divine point of view, and with respect to the great archetypal idea in Christ, as from the beginning foreseen and set up in prospect. This tendency, indeed, has already in a remarkable manner discovered itself among the divines who bring into the fore ground of God's manifestations of Himself the idea of the God-man. Lange, for instance, has given representations of the "Divine-human life" in the patriarchs and worthies of ancient times, which seem to leave no very distinctive difference between the action of divinity in them and in the person of Jesus.
I. 여기서 우리가 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주제의 더 특별한 측면, 즉 견고하고 적절하게 조정된 성경적 모형론과의 관계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견해의 진위를 직접적으로 의문시하거나 옹호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를 과학적 신학의 추론 중 하나로 인정할 자격에 대한 논의를 현재로서는 유보하며, 단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후기 증언들로부터 도출된 추론으로서, 가장 학식 있고 사려 깊은 옹호자들이 제시한 방식으로만 고려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는 기독교적 사변의 정신에 의해 형성되고 안내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 하에서, 이러한 견해를 모형론적 체계의 기초로 삼거나, 그 체계 내에서 명확히 인정된 위치를 부여하는 것은 매우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입니다. 이는 그 체계의 구조 자체에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몇 가지 부수적인 암시와 사변적 고려에 기반을 두게 되며,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신학자들 간의 일반적인 합의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이러한 체계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흐르는 넓은 맥락과 흐름에 기초해야 합니다.
또한, 이는 앞서 언급한 바(58쪽)와 같이, 우리의 모형론을 매우 중요한 면에서 코케이우스 학파의 근본적인 오류로 되돌릴 위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하나님의 초기 경륜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을 신적 관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내다보고 계획된 원형적 관점에서 지나치게 바라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인간의 개념을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중심으로 삼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랑게는 고대의 족장들과 위대한 인물들 안에서 "신인적 생명"을 묘사하면서, 그들 안에서의 신성의 작용과 예수의 인격에서의 신성의 작용 간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는 표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Nägelsbach (in his work Der Gottmensch) even represents our first parent as Elohim-Adam (God-man), on the ground of his spiritual essence being of a divine nature; and both in Adam after the fall, and the better class who succeeded, there was what he calls an artificial realization of the idea of the God-manhood attempted, and in part accomplished. Hence, not without reason has Dorner delivered a caution to those who coincide with him in his view respecting the incarnation, to beware of darkening the preparation for Christ by throwing into their delineation of early times too much of Christ Himself, or of becoming so absorbed in the typical as to overlook the historical life and struggles of the people of the Old Covenant.[9] The caution, we are persuaded, will be of little avail, so long as the idea of the incarnation is placed in immediate relationship with God's work in creation; for in that case it must ever seem natural to make that idea shine forth in all the more peculiar instruments and operations of God, and generally to assimilate humanity in its better phases too closely to the altogether singular and mysterious person of Immanuel—to find in it, in short, a kind of God-manhood, whereby the God-man hood itself would inevitably come to be in danger of gliding into the shadowy form of a Sabellian manifestation.
나겔스바흐는 그의 저서 Der Gottmensch에서 우리의 첫 조상을 엘로힘-아담(God-man)으로 묘사하며, 그의 영적 본질이 신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둡니다. 그리고 타락 이후의 아담과 그 뒤를 이은 더 나은 부류의 사람들 안에서, 그가 말하는 "신인적 본질의 인위적 실현"이 시도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성취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해 도르너는 자신의 성육신 관점에 동의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던졌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초래한 준비 과정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초기 시대에 대한 묘사 속에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많이 투영하지 말 것을, 또는 구약 언약의 백성들의 역사적 삶과 투쟁을 간과할 정도로 모형적 측면에 몰두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9】.
우리는 이러한 경고가 성육신의 개념이 하나님의 창조 작업과 즉각적으로 연결된 한, 그리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그 개념이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와 작용에서 더욱 빛나게 보이도록 하려는 경향이 항상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더 나은 국면들을 임마누엘의 완전히 독특하고 신비로운 인격에 지나치게 밀접하게 동화시키려는 경향이 생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는 인간 안에서 일종의 신인적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신인적 본질 자체가 사벨리우스주의적 나타남의 그림자 형태로 전락할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Even if this serious error could be avoided, another and slighter form of the same erroneous tendency would be sure to prevail,—if the incarnation, as the archetypal idea of creation, were formally introduced, and made the guiding-star of our Typology. It would inevitably lead us, in our endeavours to read out the meaning of God's working in creation and providence, to put a certain strain upon the things which appear, in order to bring out what is conceived to have been the ultimate design in them; we should be inclined to view them rather as an artificial representation of what God predestined and foresaw, than a natural and needed exhibition of things to be believed or hoped for by partially enlightened but God-fearing men. The Divine here must not be viewed as moving in a kind of lofty isolation of its own; it should rather be contemplated as letting itself down into the human. We should feel that we have to do, not simply with Heaven's plan as it exists in the mind and is grasped by the all-comprehending eye of God, but with this plan as gradually evolving itself in the sphere of human responsibility, and developed step by step, in the manner most fitly adapted to carry forward the corporate growth of the Church toward its destined completeness, yet so as, at the same time, to mould the character and direct the hopes of successive generations in conformity with existing relations and duties. It is the proper aim and business of Typology to trace the progress of this development, and to show how, amid many outward diversities of form and ever-varying measures of light, there were great principles steadily at work, and in their operations forecasting, with growing clearness and certainty, the appearance and kingdom of the Lord Jesus Christ. To such a method also, Typology must owe much of the interest with which it may be able to invest its proper line of inquiry, and its success in throwing light on the history and mutual interconnection of the Divine dispensations. But it were to depart from this safe and profitable course, if we should attempt to bring all that, by dint of inference and speculation, expatiating in the strictly Divine sphere of things, we might find it possible to connect with the earlier acts and operations of God. These should rather be brought out in the aspect and relation they bore to those whom they immediately respected; in order that, from the effect they were designed and fitted to produce in the spiritual instruction and training of men who had in their respective generations to maintain the cause and manifest the life of God, the place and purpose may be learned that properly belonged to them in the general scheme of a progressive revelation.
이 심각한 오류를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창조의 원형적 개념으로서 성육신을 공식적으로 도입하고 이를 모형론의 지침으로 삼게 된다면, 동일한 경미한 형태의 오류적 경향이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이는 창조와 섭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를 읽어내려는 과정에서, 그 안에 궁극적 설계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사물에 지나친 해석을 강요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미리 보신 인위적 재현으로 간주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반면, 이는 부분적으로 깨우침을 받은 경건한 인간이 믿거나 희망해야 할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표현으로 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신성을 단독적으로 높은 차원에서 고립된 상태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성이 인간 안으로 내려와 스며드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마음속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시는 천상의 계획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 계획이 인간의 책임 영역 안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고 발전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교회의 공동체적 성장을 그 완전함을 향해 발전시키는 데 적합한 방식으로 진행되며, 동시에 각 세대의 관계와 의무에 따라 사람들의 성품을 형성하고 희망을 이끄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모형론의 적절한 목표와 과제는 이러한 발전 과정을 추적하고, 다양한 외형적 형식과 변화하는 계시의 수준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위대한 원칙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원칙들은 점점 더 명확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의 왕국을 예고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모형론이 적절한 탐구의 방향에 흥미를 부여하고, 신적 경륜의 역사와 상호 연결성을 밝히는 데 성공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순수히 신적 영역에서의 추론과 사변을 통해 하나님의 초기 행위와 작용과 연결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면, 이는 이러한 안전하고 유익한 경로에서 벗어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와 작용은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에게 미쳤던 모습과 관계에서 다뤄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의 생명을 나타내는 사명을 각 세대에서 수행했던 사람들을 영적으로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해 의도되고 설계된 효과로부터, 그것들이 점진적 계시의 일반 체계에서 적절히 속했던 자리와 목적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The statement of Mr Macdonald may be referred to in proof of what is likely to happen from the neglect of such considerations, and from attempting to carry the matter higher. The scheme of God, he says, as well that which commenced with Adam as the preceding one which culminated in him, was "from the outset prophetic;" and again: "The whole of the Divine acts and arrangements from the beginning formed parts of one system; for, as antecedent creations reached their end in man, so man himself, in his original constitution, prefigured a new and higher relation of the race to the Creator, than the incipient place reached in creation." Now, taking the terms here used in their ordinary sense, we must understand by this statement that the work of creation in Adam carried in its very constitution the signs and indications of better things to come for man; for, to speak of it as being prophetic, or having a pre-figuration of a higher relation to the Creator than then actually existed, imports more than that such a destiny was in the purpose and decrees of the Almighty (which no one will dispute): it denotes, that the creation itself was of such a kind as to proclaim its own relative imperfection, and at the same time, by means of certain higher elements interwoven with it, to give promise of a state in which such imperfection should be done away. The question, then, is, How did it do so, or for whom? The Lord Himself, at the close of creation, pronounced it all very good; and the charge given to Adam and his partner spake only of a continuance of that good as the end they were to aim at, and of the loss of it as the evil they were to shun. What ground is there for supposing that more was either meant on God's part, or perceived on man's, than what thus appears on the broad and simple testimony of the divine record? Adam, indeed, was made, and doubtless knew that he was made, in the image of God; as such he was set over God's works, and appointed in God's name, to exercise the rights of a terrestrial lordship; but how should he have imagined from this, that it was in the purposes of Heaven to enter into some closer relationship with humanity, and that he, as the image of God, was but the figure of one who should be actually God and man united? Yet, supposing he could not. Might he not have been so in fact without himself knowing it, as in subsequent times we find prefigurations of Gospel realities, which were but imperfectly, sometimes perhaps not at all, understood in that character by those who had directly to do with them? But the cases are by no means parallel. For, in regard to those later prefigurations, the promise had already entered of a restored and perfected condition; and believing men were not only warranted, but in a sense bound, to search into them for signs and indications of the better future. If they failed to perceive them, it was because of their feebleness of faith and defect of spiritual discernment. In the primeval constitution of things it was quite otherwise: man was altogether upright, and creation apparently in all respects as it should be; the Creator Himself rested with satisfaction in the works of His hand, and by the special consecration of the seventh day invited His earthly representative to do the same. How, in such a case, should the thought of imperfection and deficiency have entered, or any prospect for the future seemed natural, save such as might associate itself with the progressive development and expansion of that which already existed? Beyond this, whatever there might be in the purpose and decrees of God, it is hard to conceive how room could yet have been found for any expression being given by Him, or hope cherished on the part of man.
맥도날드 씨의 진술은 이러한 고려를 무시하고 문제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 아담과 함께 시작된 계획뿐만 아니라, 아담에서 정점에 이른 그 이전의 계획도 **"처음부터 예언적이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모든 행위와 배열은 처음부터 하나의 체계를 형성했다. 선행된 창조가 인간 안에서 끝에 도달한 것처럼, 인간 자체도 그의 원래 구성에서 창조에서 도달한 초기 지위를 넘어 창조주와의 새로운, 더 높은 관계를 예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표현을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는 아담 안에서의 창조 작업이 인간에게 다가올 더 나은 것들에 대한 징후와 표시를 본질적으로 포함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창조를 예언적이거나,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것보다 창조주와 더 높은 관계를 미리 예표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그러한 운명이 하나님의 목적과 작정 속에 있었다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이는 창조 자체가 상대적 불완전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더 높은 요소들에 의해 그러한 불완전성이 제거될 상태를 약속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창조가 그렇게 했는가? 누구를 위해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릅니다. 창조의 끝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심히 좋다"고 선언하셨고, 아담과 그의 배우자에게 주어진 명령은 그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선의 지속성과 피해야 할 악의 상실에 대해서만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도가 더 많은 것을 의미했거나 인간이 그것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자신이 그렇게 창조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창조된 세계를 다스릴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하늘의 계획 속에 인간성과 하나님이 더 긴밀히 연합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혹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의 모형일 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된 존재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만약 그것을 알지 못했다 해도, 그는 그렇게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복음적 실체를 예표한 후대의 사례들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경우는 서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후대의 예표들에서는 회복되고 완전한 상태에 대한 약속이 이미 주어졌고, 믿는 자들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징후를 찾을 이유와 책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를 보지 못했다면, 이는 신앙이 약하거나 영적 분별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조의 초기 상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인간은 온전하게 창조되었고, 창조는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상태로 보였습니다. 창조주는 자신의 작품을 기뻐하시며, 일곱째 날을 성별하셔서 인간 대표가 동일한 만족을 누리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완전함이나 결핍의 생각이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제외한 미래에 대한 전망은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과 목적 속에 다른 계획이 있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입장에서 이를 표현하거나 기대할 자리가 있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Unquestionably there was much beyond in the Divine mind and purpose. "Known unto God are all His works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With infallible certainty He foresaw ere time began the issues of that constitution of things which was to be set up in Adam; foresaw also, and predetermined, the introduction of that covenant of grace by which other and hap Her issues for humanity were to be secured. On this account it is said of Christ, as the destined Mediator of that covenant, that He was "fore-ordained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and of those who were ultimately to share in the fruits of His mediation, that they also were chosen in Him before the world was made (1 Pet. 1:20; Eph. 1:4). But it is one thing to assign a place to such ulterior thoughts and purposes in the eternal counsels of the Godhead, and another thing to regard them as entering into the objective revelation He gave of His mind and will at the creation of the world, so as to bring them within the ken of His intelligent creatures. In doing the one, we have both the warrant of Scripture and the reason of things to guide us; while the other would involve the introduction, out of due time, of those secret things which as yet belonged only to the Lord.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에는 분명히 인간이 알 수 없는 더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말처럼,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담 안에서 세워질 체계가 가져올 결과를 완벽히 아셨습니다. 또한, 인류를 위한 더 나은 결과를 확보할 은혜 언약의 도입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해, 이 언약의 중보자로 예정되셨기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미리 정해졌다"**고 말하며(베드로전서 1:20), 그의 중보의 열매를 궁극적으로 나눌 자들에 대해서도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말합니다(에베소서 1:4).
그러나 이러한 궁극적인 생각과 목적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그것들이 창조 때 하나님이 자신의 뜻과 계획을 객관적으로 계시하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에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첫 번째 경우에는 성경의 증언과 논리적인 지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 아직까지 하나님께 속한 비밀을 시기상조로 도입하는 일이 될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만 속한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According to what may be called the palpable and prevailing testimony of Scripture on the subject, the work of God in creation is to be regarded as the adequate reflection of His own infinite wisdom and goodness, adapted in all respects to the special purposes for which it was designed; but the sin of man through the cunning of the tempter presently broke in to mar the good; and following thereupon the predestined plan of grace began to give intimation of its purpose, and to open for itself a path whereby the lost good should be won back, and the destroyer be himself destroyed. This plan starts on its course with the avowed aim of rectifying the evil which originated in man's defection; and it not less avowedly reaches its end when the restitution, or bringing back again, of all things is accomplished (Acts 3:21). It carries throughout the aspect of a remedial scheme, or restoration of that which had come forth in the freshness and beauty of life from the hand of God. A rise, no doubt, accompanies the process; and the work of God at its consummation shall assuredly be found on a much higher level than at the beginning, as it shall also present a much fuller and grander exhibition of the Divine character and perfections. But still, in the Scriptural form of representation, the original work continues to occupy the position of the proper ideal: all things return, in a manner, whence they came; and a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ith paradise restored and perennial springs of life and blessing, appear in prospect as the glorious completion to which the whole scheme is gradually tending. Since thus the things of creation are exhibited in a relation so markedly different to those of redemption, from that possessed by the preliminary, to the final processes of redemption itself, it were surely to intro duce an unjustifiable departure from the method of Scripture, and also to confound things that materially differ, were we, in a typological respect, to throw all into one and the same category. Creation cannot possibly be the norm or pattern of redemption, after the same manner that an imperfect or provisional execution of God's work in grace is to that work in its full development and ripened form. Yet, for the very reason that redemption assumes the aspect of a restoration, not the introduction of something absolutely new, creation assuredly is a norm or pattern, to which the Divine agency in redemption assimilates its operations and results: the one bases itself upon the other, and does not aim at supplanting, but only at rectifying, reconstructing, and perfecting it. Twin-ideals they may be called, and as such they cannot but present many points of agreement, bespeaking the unity of one contriving and all-directing mind, which it may well become us on proper occasions to mark. But the distinct ground this relationship occupies in Scripture should also find its correspondence in our mode of treating the things that belong to it; and for the province of Typology proper, we cannot but deem it on every account wise, expedient, and fitting that it should confine itself to what pertains to God's work in grace, and should move simply in the sphere of "the regeneration."
성경에서 명백하고 일반적으로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을 적절히 반영하며, 설계된 특별한 목적에 완벽히 부합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유혹자의 간계로 인해 이 선함을 훼손하였고, 그 결과 예정된 은혜의 계획이 자신의 목적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잃어버린 선을 회복하고 파괴자를 멸망시키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계획은 인간의 배신에서 비롯된 악을 바로잡는 것을 분명한 목표로 삼아 시작되며, 모든 것이 회복될 때, 즉 **"모든 것이 회복되는 때"**에 (사도행전 3:21) 그 목표에 도달합니다. 이 계획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생명의 신선함과 아름다움 속에 나왔던 것들을 회복하려는 치료적 체계 또는 복구의 성격을 띱니다.
이 과정에는 상승이 동반되며, 하나님의 일이 완성될 때에는 초기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나타날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성을 훨씬 더 충만하고 장엄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의 표현 방식에서는 원래의 일이 적절한 이상으로 계속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어느 정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며,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회복된 낙원과 끊임없는 생명과 축복의 샘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이 점진적으로 향하는 영광스러운 완성으로 전망됩니다.
이처럼 창조의 사물이 구속의 사물과는 확연히 다른 관계 속에 전시되는 이상, 그리고 구속 자체의 초기와 최종 과정 간의 관계와도 구별되는 이상, 우리가 모형론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하나의 동일한 범주로 묶는 것은 성경의 방법을 부당하게 벗어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의 구속이 완전한 형태로 성숙했을 때 이루어진 일의 미완성된 또는 임시적인 실행이 구속의 기준이나 패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속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유 때문에, 창조는 분명히 구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그 작용과 결과를 동화시키는 기준이나 패턴이 됩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기초로 삼으며, 이를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고, 재구성하며, 완전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두 이상(창조와 구속)은 쌍둥이 이상으로 불릴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동일한 창조적이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마음의 통일성을 나타내는 많은 일치점을 제공합니다. 이는 적절한 상황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관계를 놓는 명확한 기반은 우리가 이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반영되어야 합니다. 모형론의 적절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의 사역과 관련된 것에 국한하여 **"재생"(the regeneration)**이라는 영역 안에서만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지혜롭고 적절하며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II. Passing now to the more general aspect of the view in question respecting the incarnation and kingdom of Christ, or its title to rank among the deductions of theological inquiry, it would be out of place here to go into a lengthened examination of it; and the indication of a few leading points is all that we shall actually attempt. The direction already taken on the typological bearing of the subject, is that also which I feel constrained to take regarding its general aspect. For, though it scarcely professes to be more than a speculation, and one purposely intended to exalt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yet the tendency of it, I am persuaded, cannot be unattended with danger, as it seems in various respects opposed to the form of sound doctrine delivered to us in Scripture.
II.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일반적 관점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왕국, 또는 신학적 탐구의 결론 중 하나로서의 자격에 대한 관점을 논의함에 있어, 여기서는 이를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몇 가지 핵심적인 요점을 간략히 제시하는 데 그치려고 합니다.
이미 모형론적 관점에서 채택한 방향은 이 주제의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 관점은 비록 단순히 사변으로 제안되었으며, 성육신 교리를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것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그 경향이 성경에서 전달된 건전한 교리의 형태와 여러 면에서 상충되는 듯 보이므로 위험을 동반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1. First of all, it implies, as already stated, a view of creation not only discountenanced by the general current of Scriptural representation, but not easily reconcileable with the perfect wisdom and goodness of the Creator. As a matter of fact, creation in Adam certainly fell short of its design; or, to express it otherwise, humanity, as constituted in our first parent, failed to realize its idea. But as so constituted, was it not endowed with all competent powers and resources for attaining the end in view? Was it absolutely and inherently incapable of doing so apart from the incarnation? In that case, one does not see how either the work of God could possess that character of relative perfection constantly ascribed to it in Scripture, or the defection of man should have drawn after it such fearful penalties. Both God's work and man's, on the hypothesis in question, seem to take a position different from what properly belongs to them; and the manifestation of God's moral character in this world enters on its course amid difficulties of a very peculiar and embarrassing kind. The perplexity thus arising is not relieved by the supposition, that mankind will be raised to a higher state of perfection and blessedness through the medium of the incarnation than had otherwise been possible, and that this was hence implied in creation as the means necessary to creation's end; for we have here to do with the character of God's work considered by itself, and what immediately sprang from it. Nor is it by any means certain, or we may even say probable, that if humanity had stood faithful to its engagements, the ultimate destiny of its members would have been in any respect lower than that which they may attain through sin and redemption. But on such a theme we have no sure light to guide us.
1. 우선, 이 관점은 창조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증언에 의해 지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완전한 지혜와 선하심과도 쉽게 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사실상, 아담 안에서의 창조는 분명 본래의 설계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최초의 부모로 구성된 인간은 그 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로 창조된 인간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모든 적합한 능력과 자원을 부여받지 않았나요? 성육신 없이는 본질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였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상대적 완전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타락이 그렇게 두려운 형벌을 초래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 가정에서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은 각각 본래 자리에서 벗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의 드러남은 이 세상에서 매우 독특하고 난해한 문제 속에서 시작됩니다.
또한, 성육신을 통해 인류가 이전보다 더 높은 완전성과 복된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가정은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는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육신이 필요했음을 암시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일을 그것 자체로 고려하며, 그것에서 즉각적으로 생겨난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약속을 성실히 지켰다면, 구성원들의 궁극적 운명이 죄와 구속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낮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거나 심지어 그렇게 추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에 관해서는 확실한 빛을 제공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2. The view presented by this theory of the mission of Christ, however, is a still more objectionable feature in it; for, exalting the incarnation as of itself necessary to the higher ends of creation, apart from the concerns of sin and redemption, it inevitably tends to depress the importance of these, and gives to something else, which was no way essentially connected with them, the place of greatest moment for the interests of humanity. The earlier Socinians, it is well known, on this very ground favoured the scholastic speculations on the subject; they espoused the view, not, indeed, of an incarnation without a fall (for in no proper sense did they hold what these terms import), but of the necessity of the mission of Christ, independently of the sin of Adam and the consequences thence arising; in this they appeared to find some countenance for the comparatively small account they made alike of the evil of sin, and of the wondrous grace and glory of redemption. And to a simple, unbiassed mind it must be all but incredible, that if the incarnation of our Lord were traceable to some higher and more fundamental reason than that occasioned by the fall, no explicit mention should have been made of it, even in a single passage of Scripture. All the more direct statements presented there respecting the design and purpose of our Lord's appearance among men stand inseparably connected with their deliverance from the ruin of sin, and restoration to peace and blessing. The distinctive name He bore (Jesus) proclaimed SALVATION to be the grand burden of His undertaking; or, as He Himself puts it, "He came to save the lost,"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Matt. 18:11, 20:28); or still again, "that men might have life, and might have it more abundantly" (John 10:10). He was made of a woman, made under the law, in order that He might redeem them who were held under the condemnation of law (Gal. 4:4). He took part of flesh and blood, in order that by His death He might destroy him that had the power of death was made like in all things to His brethren, as it behoved Him to be, that He might be for them a faithful high priest and make reconciliation for their sins (Heb. 2:14-17). It is but another form of the same mode of representation, when St John says of Christ, that He was manifested to destroy the works of the devil (1 John 3:8); and that as the gift of God's love to the world, it was to the end that men might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John 3:16). In the Supper also, the most distinctive ordinance of the Gospel, not the incarnation, but redemption is presented as the central fact of Christianity. Such is the common testimony of Scripture: redemption in some one or other of its aspects is perpetually associated with the purpose which Christ assumed our nature to accomplish; and the greatness of the remedy is made to throw light upon the greatness of the evil which required its intervention. But according to the view we now oppose, "both the consequences of sin and the value of redemption are lowered, since not the incarnation, but only its special form, is traceable to sin. That God became man is in itself the greatest humiliation; and yet this adorable mystery of divine love is not to stand in any [necessary] connection with sin! Only the comparatively smaller fact, that that man in whom God would at any rate have become incarnate had undergone sufferings and death, is due to sin! And what is even more dangerous, redemption ceases to be a free act of Divine pity, and is represented as a necessity implied in creation, which would have taken place whether man had remained obedient or not. Thus sin is not the sole cause of man's present state; and however the incarnation might remain an adorable mystery of love, redemption could no longer do so, since it had been involved in the decree of the incarnation, and could not be regarded as proceeding solely from divine mercy and compassion toward fallen man."[10]
2. 이 이론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관점은 더욱 큰 문제를 내포합니다. 성육신을 죄와 구속의 문제와는 무관하게 창조의 더 높은 목적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강조하면, 필연적으로 죄와 구속의 중요성을 약화시킵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무언가를 인간의 이익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습니다.
**초기 소시니안들(Socinians)**은 이러한 관점에 근거해 스콜라적 사변을 지지했습니다. 그들은 성육신이 타락 없이 가능했다는 관점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아담의 죄와 그 결과와는 독립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죄의 악함과 구속의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비교적 하찮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고 편견 없는 시각에서 볼 때, 주님의 성육신이 타락으로 인해 촉발된 것보다 더 높은 근본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라면, 성경에 단 한 구절에서도 이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습니다.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인간 사이에 오신 목적과 의도를 명확히 나타낸 구절들은 모두 죄로 인한 멸망에서 인간을 구원하고, 평화와 축복으로 회복시키는 것과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분의 이름인 **"예수"**조차도 구원을 위한 그분의 사명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오셨다",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셨다"(마태복음 18:11, 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요한복음 10:10)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분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여인의 몸에서 나시고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갈라디아서 4:4).
히브리서에서는 그분이 죽음을 이기고 악마를 멸하기 위해 살과 피를 취하시고, 형제들과 모든 점에서 같아지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죄를 위해 화목제사장이 되기 위함입니다(히브리서 2:14-17).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은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다"(요한일서 3:8)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고 선언합니다.
심지어 복음의 가장 독특한 의식인 성찬에서도 성육신이 아니라 구속이 기독교의 중심적 사실로 제시됩니다.
이처럼 성경의 공통된 증언은 구속이 그리스도께서 인간 본성을 취하신 목적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구속의 위대함은 그것이 필요했던 악의 심각성을 비춥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하는 이 관점에서는 **"죄의 결과와 구속의 가치는 낮아지고, 성육신 자체가 아니라 성육신의 특별한 형태만이 죄와 관련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가장 큰 굴욕이지만, 이 사랑의 신비가 죄와 본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구속은 신성한 자비의 자유로운 행위로 여겨지지 않고, 인간이 순종했더라도 발생했을 필연성으로 묘사됩니다. 이 관점에서는 죄가 인간의 현재 상태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게 되며, 성육신이 사랑의 신비로 남을 수 있을지라도, 구속은 더 이상 그러하지 못합니다. 이는 성육신의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신적 자비와 동정에서만 비롯된 것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There are passages of Scripture sometimes appealed to on the other side, but they have no real bearing on the point which they are adduced to establish. One of these is Eph. 1:10, in which the purpose of God is represented as having this for its object, that "in the dispensation of the fulness of times He might gather in one all things in Christ, both which are in heaven and which are on earth." The passage simply indicates, among the final issues of Christ's work, the recapitulating or summing up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of all things in Him, heavenly as well as earthly; but it is the historical Christ that is spoken of—the Christ in whom (as is stated immediately before) believers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and are predestinated to life eternal; and there is not a hint conveyed of the purpose or predestination of God, except in connection with the salvation of fallen man, and the work of reconciliation necessary to secure it. What might have been the Divine purpose apart from this, we may indeed conjecture, but it must be without any warrant whatever from the passage before us; and, as Calvin has justly said, not without the audacity of seeking to go beyond the immutable ordination of God, and attempting to know more of Christ than was predestinated concerning Him even in the Divine decree (Inst., B. ii., c. 12, § 5). The somewhat corresponding but more comprehensive passage in Col. 1:15-17, has been also referred to in this connection, but with no better result. For though expressions are there applied to Christ, which, if isolated from the context, might with some plausibility be explained to countenance the idea of an incarnation irrespective of a fall, yet when taken in their proper connection they contain nothing to justify such an application. The starting-point here also is redemption ([[ver. 14 >> Bible:Col 1:14]] ,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and the statements in what immediately follows (vers. [[15-17 >> Bible:Col 1:15-17]] ), have evidently for their main object the setting forth of the divine greatness of Him by whom it is effected—as the One by whom and for whom all things were created Himself,—consequently, prior to them all, and infinitely exalted above them. But this plainly refers to Christ as the Logos, or Word, through whom as such the agency is carried on, and the works are performed, by which the Godhead is revealed and brought out to the view of finite intelligence. In that respect He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ver. 15 >> Bible:Col 1:15]] ); because in Him exists with perfect fulness, and from Him goes forth into actual embodiment, that which forms a just representation of the mind and character of the Eternal. On the same account also, and with reference simply to His creative agency, He is "the first-born of every creature;" being the causal beginning, whence the whole sprang into existence, and the natural head, under whom all its orders of being must ever stand ranged before God. His divine Sonship is consequently the living root, in which the filial relationship of men and angels had its immediate ground; and His image of Godhead that which reflected itself in their original righteousness and purity. Hence, as all things came from Him at first in the character of the revealing Word, so they shall be again recapitulated in Him as the Word made flesh— though in degrees of affinity to Him, and with diverse results corresponding to the relations they respectively occupied to His redemptive agency.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인용하지만, 실제로 그 구절들이 주장하는 점에 실질적으로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에베소서 1장 10절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목적이 **"때가 찬 경륜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지 그리스도의 사역의 최종 결과 중 하나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요약하거나 통합하는 것(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언급된 것은 역사적 그리스도로, 그분 안에서 믿는 자들이 그분의 피로 구속을 받고,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에는 타락한 인간의 구원과 이를 확보하기 위한 화해의 사역과 관련되지 않은 하나님의 목적이나 예정에 대한 암시는 전혀 없습니다.
칼뱅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를 통해 다른 목적을 추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작정을 넘어서고, 신성한 작정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예정된 것 이상을 알기를 시도하는 과감한 행위입니다(기독교 강요, II권 12장 5절).
비슷하지만 더 포괄적인 내용이 담긴 골로새서 1장 15-17절도 이와 관련하여 언급되었지만, 더 나은 결과를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문맥에서 분리된 경우, 성육신이 타락과 무관하다는 관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표현들이 있지만, 올바른 문맥에서 해석하면 그러한 적용을 정당화할 근거는 없습니다.
골로새서에서도 시작점은 구속입니다(1:14,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후의 진술(1:15-17)은 구속을 이루신 분의 신적 위대함을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분은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며, 모든 것을 초월하는 분입니다. 이는 분명히 로고스(말씀)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고, 유한한 지성에게 나타나는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1:15)으로 나타납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완벽하게 충만히 존재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정확히 나타내는 형상을 실제로 구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창조적 활동과 관련하여 그분은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난 자"**로 묘사됩니다. 이는 모든 존재가 그분을 통해 생겨난 근원임을 의미하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자연적 머리가 됨을 나타냅니다.
창조주로서 그분의 신적 아들됨은 인간과 천사의 자녀 관계를 형성하는 근원이었으며, 그들의 원래 의와 순결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 계시의 말씀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던 것처럼, 그것들은 이제 "육신이 되신 말씀" 안에서 다시 요약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분과의 관계, 그리고 구속 사역에 대해 각각의 존재가 차지한 위치에 따라 다양한 결과와 관계를 가질 것입니다.
Hence, also, the Divine image, which by Him as the Creator was imparted to Adam, is again restored upon all who become related to Him as the Redeemer: they are renewed after the image of Him that created them (Col. 3:10, Eph. 4:24); implying that His work in redemption, as to its practical effect on the soul, is a substantial reproduction of that which proceeded from Him at creation. We have looked at the only passages worth naming which have been pressed in support of the theory under consideration; and can see nothing in them, when fairly interpreted, that seems at variance with the general tenor of the testimony of Scripture on the subject. But this so distinctly and constantly associates the incarnation of Christ with the scheme of redemption, that to treat it otherwise must be held to be essentially anti-scriptural.
따라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구속주로서 그분과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회복됩니다. 이들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됩니다(골로새서 3:10, 에베소서 4:24). 이는 구속의 사역이 영혼에 미치는 실질적 효과가 창조에서 시작된 작업의 본질적 재현임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이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제기된 주요 구절들을 검토했으며, 그것들을 공정하게 해석할 경우, 성경의 일반적인 증언과 상충된다고 보이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구속의 계획과 분명하고 지속적으로 연관시키므로, 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성경적이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3. The matter is virtually disposed of, in a theological point of view, when we have brought to bear upon it with apparent collusiveness the testimony of Scripture; nor is there anything in the collateral arguments employed by the advocates of the theory, as indicated in the outline formerly given of their views, which ought to shake our confidence in the result. That, for example, derived from the wonderful relationship, the personal and everlasting union, into which humanity has been brought with Godhead, as if the purpose concerning it should be turned into a kind of after-thought, and it should sink, in a manner derogatory to its high and unspeakably important nature, into something arbitrary and contingent, if placed in connection merely with the fall:—Such an argument derives all its plausibility from the limitations and defects inseparable from a human mode of contemplation. To the eye of Him who sees the end from the beginning, whose purpose, embracing the whole compass of the providential plan, was formed before even the beginning was effected, there could be nothing really contingent or uncertain in any part of the process. Nor, on the other hand, was the creation of man necessary (in the absolute sense of the term), any more than the fall of man: it depended on the movements of a will sovereignly free; and, hypothetically, must be placed among the things which, prior to their existence, might or might not, to human view, have taken place. Besides, since anyhow the mode of the incarnation was determined by the circumstances of the fall, and the mode, as well as the thing itself, decreed from the very first, how can we with propriety distinguish between the two? The one, as well as the other, has a most intimate connection with the perfections of Deity; and, for anything we know, the reality in any other form might not have approved itself to the infinitely wise and absolutely perfect mind of God. Otherwise than it is, we can have no right to say it would have been at all.
3.
성경의 증언을 근거로 삼아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검토할 때, 이 이론의 결론에 대한 확신을 흔들 만한 부차적 논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성이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영원한 연합 안에 놓였다는 놀라운 관계에서 유래된 주장은, 이 목적이 단순한 후속적 생각으로 변질되어, 타락과의 연관 속에서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가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인간적 관점에서 오는 제한과 결함에서 비롯된 그럴듯함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섭리적 계획 전체를 포괄하는 목적이 창조 이전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과정의 어떤 부분도 실제로 불확실하거나 우연적일 수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창조는 절대적인 필요성(absolute necessity)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으며, 인간의 타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창조와 타락 모두 발생할 수도,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성육신의 방식이 타락의 상황에 의해 결정되었고, 방식과 성육신 자체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라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 듭니다. 성육신과 타락은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본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다른 형태의 현실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완전한 뜻을 넘어서는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The argument founded on the supposed necessity of the incarnation to the proper unity of the human race, is entitled to no greater weight than the one just noticed. It assumes a necessity which has not and cannot be proved to have existed. Situated as the human family now is, it may no doubt be fitly designated, with Dorner, "a mere mass," an aggregate of individuals, without any pervading principle to constitute them into an organism. But this is itself one of the results of the fall; and no one is entitled to argue from what actually is, to what would have been, if the race had stood in its normal condition. In the transmission of Adam's guilt to his posterity, with its fearful heritage of suffering, corruption, and death, we have continually before us the remains of a living organism,—the reverse side, as it were, of the original likeness of humanity. Why might there not have been, had its divinely constituted head proved stedfast to his engagements, the transmission through that head of a yet more powerful as well as happy influence to all the members of the family? We have no reason to affirm such a thing to have been impossible, especially as the human head was but the representative and medium of communication appointed by and for Him who was the causal or creative head of the family. Dorner himself admits, that even the natural world is an unity, because in the Divine Logos, as the world-former and preserver, who in Himself bears and represents its eternal idea, it has a principle which is above it, yet pervades it, and comprises it within itself.[11] If so much can be said even now, how much more might it have been said of the world viewed as it came from the hand of its Maker,—with no moral barrier to intercept the flow of life and blessing from its Divine fountainhead, and paralyze the constitution of nature in its more vital functions! In that case the unity in diversity, which is now the organic principle of the Christian Church, might, and doubtless would, have been that also of the Adamic family: only, in the one case, having its recognised seat and effective power in Christ as the incarnate Redeemer; in the other, in Him as the eternal and creative Word. Indeed, from the general relation of the two economies to each other, we are warranted in assuming, that as, in regard to individuals, Christ, the Redeemer, restores the Divine image, which, as to all essential properties, was originally given by Christ, the Word, so in regard to the race (considered as the subject of blessing), He restores in the one capacity what, as to germ and principle, He had implanted in the other. There are, of course, gradations and differences, but with these also fundamental agreements. As to the argument that Christianity is the absolute religion, and that without an incarnation there could be no Christianity in the proper sense, little more need be said, than that it starts a problem which, in our present imperfect condition, we want the materials for solving,— if, indeed, we shall ever possess them. To speak of the absolute in connection with what, from its very nature, and with a view to its distinctive aims, must be inter woven with much that pertains to the individual and the relative, is to employ terms to which we find it impossible to attach a very definite meaning. But if a religion is entitled to be called absolute, it surely ought to be because it is alike adapted to all, who through it are to contemplate and adore God—the whole universe of intelligent and moral creatures. How this, however, could have been found in a revelation which had the incarnation for its central fact,—found precisely on this account, and no otherwise,—is hard to be understood, since, to say nothing of the incarnation as now indissolubly linked to the facts of redemption, even an incarnation dissociated from everything relating to a fall, must still be viewed as presenting aspects, and bearing a relation, to the human family, which it could not have done to angelic natures.
But, apart from this apparent incongruity, if there be such a thing possible as a religion that can justly be entitled to the name of absolute, we know as yet too little of the created universe, and the relations in which other portions of its inhabitants stand to the Creator, to pronounce with confidence on the conditions which would be required to meet in it. We stand awed, too, by the solemn utterance, "No man knoweth the Father but the Son, and he to whomsoever the Son may reveal Him;" and assured that the Son has nowhere revealed what, according to the mind of the Father, would be needed to constitute for all times and regions the absolute religion, we feel that on such a theme silence is our true wisdom.
성육신이 인간 종족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앞서 언급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약합니다. 이는 존재하지 않거나 증명할 수 없는 필요성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간 가족은 도르너가 말한 대로 "단순한 집합체"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들의 집합일 뿐, 이를 유기체로 만드는 일관된 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의 결과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를 근거로 인간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었다면 어떠했을지를 논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죄와 그로 인해 후손들에게 전해진 고통, 부패, 죽음의 유산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잔재를 목격합니다. 이는 마치 인간의 원래 모습을 반전시킨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아담이 자신의 약속을 성실히 지켰다면, 아담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에게 더 강력하고 복된 영향이 전달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도르너 자신도 자연 세계가 하나의 통일체라고 인정합니다. 이는 세상을 형성하고 보존하는 신적 로고스(Divine Logos) 안에 존재하는 원리 덕분입니다. 이 원리는 자연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이를 관통하며, 그 안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축복이 흐르는 도덕적 장애물이 없었던 창조 초기 상태라면, 생명과 축복의 흐름을 방해할 요소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경우 현재 기독교 교회의 유기적 원리가 아담의 가족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 현 교회: 유기적 원리가 성육신한 구속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자리하고 작용합니다.
- 아담의 가족: 창조적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리했을 것입니다.
이 두 체계의 일반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주로서 인간에게 신적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처럼, 창조 당시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셨던 원리와 형상을 구속을 통해 다시 완성하셨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절대적 신앙이라는 주장과 성육신 없이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현재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이를 해결할 충분한 자료가 없습니다.
"절대적"이라는 용어를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개념에 적용하는 것은 의미를 명확히 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절대적이라면, 이는 그 신앙이 모든 지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들이 하나님을 묵상하고 경배하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성육신을 중심 사실로 삼는 계시에서 어떻게 그러한 절대성이 실현될 수 있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성육신이 구속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육신이 타락과 무관하다 하더라도, 인간과 천사들 같은 다른 존재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버지를 아는 자는 아들 외에는 없고, 아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자 외에는 없다"는 엄숙한 선언 앞에서 겸손히 침묵해야 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영역에 걸쳐 절대적 신앙을 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는지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 See page 107.
[2] This proposition, with the authorities that support it, may be found in the discourses of Bishop Bull, Works, Vol. II., p. 67. His proofs from the earlier Fathers—Justin Martyr, Tatian, Irenaeus—are somewhat inadequate. The first explicit testimony is from Theophilus of Antioch, who speaks of Adam being "at length canonized or consecrated and ascending to heaven," if he had gone on to perfection. The testimony becomes more full, as the speculative tendency of the Greek philosophy gains strength in the Church. And Clement of Alexandria expressly says in his Liturgy, that "if Adam had kept the commandments, he would have received immortality as the reward of his obedience," meaning thereby, eternal life in a higher sphere.
[3] The divines of the Reformation very commonly concurred, to a certain extent, in the view of the Fathers, and hence the position is defended by Turretine, that Adam had the promise of being carried to heaven and enjoying eternal life there as the reward of his obedience (Loc. Oct., Qwest. VI.). But he admits that Scripture makes no distinct mention of this, and that it is only matter of inference. The grounds of inference are in this case, however, rather far to seek.
[4] See, for example, Calvin's Inst. L. ii. 12, 5. Maestricht, Theol. Lib. v., c. 4, § 17.
[5] Dogmatik, § 130, 131.
[6] See the outline of his views in Dorner on the Person of Christ, note 23, Vol. II., P. II. Of the original, note 34 of the Eng. Trans.
[7] Person of Christ, Vol. II., Pt. II., p. 1241. Eng. Trans., Div. II., Vol. III., p. 232, sq.
[8] Introd. To the Pent., Vol. II., p. 451.
[9] Vol. II., Ft. II., No. 23, or Eng. Trans., No. 34.
[10] [[|Text: Kurtz, Bible and Astronomy, Chap. II., § 12. Trans.
[11] Vol. II, Pt. II., p. 1242; Eng. Trans., Div. II., Vol. III., p.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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