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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처치 설교및 강의/TYPOLOGY, Patrick Fairbairn(1847)

The Typology of Scripture_ 2장. 모형론의 본질과 범위(1)

모형론(Typology)적 성경해석의 원리에 대한 연구 

by Patrick Fairbairn, 1847.

 

원문 출처 링크

https://archive.org/details/thetypologyofscr01fairuoft/page/n3/mode/2up

 

https://archive.org/details/thetypologyofscr01fairuoft/page/n3/mode/2up

 

 

 

2장. 모형론의 본질과 범위

Chapter Second. The Proper Nature and Province of Typology.

 

(요약)

2장에서는, 성경 해석의 "모형론"의 본질과 영역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모형론이란 구약의 인물, 사건, 또는 의식이 신약에서 성취되는 진리를, 상징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저자는 "유형, 모형(type)"이라는 단어의 성경적 사용과 신학적 사용을 비교하면서, 진정한 모형론적 관계를 정의한다.

또한, 구약의 종교적 제도가 어떻게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연결되는지를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유형학적 관계가 단순한 상징 이상의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구약과 신약 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도구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는 '모형(type)'이라는 단어의 성경적 사용 사례와 신학적 용도를 비교하며, 신학적 유형 관계를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구약의 종교적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을 넘어 성경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학적 기초임을 논증한다. 

 

 

1. 성경에서 '모형'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신학적 정의의 비교: 구약의 종교 제도와의 관계에 비추어 본 독특한 모형적 관계의 특징

1. Scriptural Use of The Word Type Comparison of This with The Theological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a Typical Relationship, Viewed with Respect to The Religious Institutions of The Old Testament.

 

THE language of Scripture being essentially popular, its use of particular terms naturally partakes of the freedom and variety which are wont to appear in the current speech of a people; and it rarely if ever happens, that words are employed, in respect to topics requiring theological treatment, with such precision and uniformity as to enable us, from this source alone, to attain to proper accuracy and fulness. The word type (τύπος) forms no exception to this usage. Occurring once, at least, in the natural sense of mark or impress made by a hard substance on one of softer material (John 20:25), it commonly bears the general import of model, pattern, or exemplar, but with such a wide diversity of application as to comprehend a material object of worship, or idol (Acts 7:43), an external framework constructed for the service of God (Acts 7:44, Heb. 8:5), the form or copy of an epistle (Acts 23:25), a method of doctrinal instruction delivered by the first heralds and teachers of the Gospel (Rom. 6:17), a representative character, or, in certain respects, normal example (Rom. 5:14, 1 Cor. 10:11, Phil. 3:17, 1 Thess. 1:7, 1 Pet. 5:3). Such in New Testament Scripture is the diversified use of the word type (disguised, however, under other terms in the authorized version). It is only in the last of the applications noticed, that it has any distinct bearing on the subject of our present inquiry; and this also comprises under it so much of diversity, that if we were to draw our definition of a type simply from the Scriptural use of the term, we could give no more specific description of it than this—a certain pattern or exemplar exhibited in the position and character of some individuals, to which others may or should be conformed. Adam stood, we are told, in the relation of a type to the coming Messiah, backsliding Israelites in their guilt and punishment to similar characters in Christian times, faithful pastors to their flocks, first converts to those who should afterwards believe,—a manifestly varied relationship, closer in some than in others, yet in each implying a certain resemblance between the parties associated together; something in the one that admitted of being virtually reproduced in the other. 

 

  • 성경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대중적이며, 특정 용어의 사용은 한 민족의 일상 언어에서 나타나는 자유롭고 다양한 특성을 따릅니다. 따라서 신학적 주제를 다룰 때 사용되는 단어들이 항상 정확하고 일관되게 사용되지 않아, 단순히 성경적 용례만으로는 그 단어의 정확한 정의와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모형(type)'이라는 단어(헬라어로 τύπος)도 이러한 용례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한 번 이상 "딱딱한 물체가 부드러운 물체에 남긴 흔적"이라는 자연적 의미로 사용되며(요한복음 20:25), 일반적으로 '모델', '패턴', '본보기'라는 넓은 의미를 갖지만,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대상(사도행전 7:43),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외형적 구조물(사도행전 7:44, 히브리서 8:5), 서신의 형식(사도행전 23:25), 복음의 첫 전도자와 교사들에 의해 전달된 교리적 가르침(로마서 6:17), 그리고 특정 면에서 대표적이거나 규범적인 예(로마서 5:14, 고린도전서 10:11, 빌립보서 3:17, 데살로니가전서 1:7, 베드로전서 5:3) 등으로 나타납니다.

    신약 성경에서 '모형'이라는 단어는 이처럼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현재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와 명확히 관련이 있는 것은 마지막 용례입니다. 그러나 이 용례조차도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성경에서의 단어 사용만으로 모형을 정의하려 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반적 설명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모형이란, 특정 인물들의 위치와 성격에 나타난 본보기 또는 패턴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를 따르거나 이에 일치할 수 있는 대상이다."

    예를 들어, 아담은 오실 메시아의 모형으로 간주되었으며,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와 심판에서 기독교 시대의 유사한 인물들의 모형이 되었고, 신실한 목자들은 양떼들의 모형이 되었으며, 첫 번째 개종자들은 이후 믿게 될 사람들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이 관계는 명백히 다양하며, 어떤 경우에는 더 밀접하고, 다른 경우에는 더 느슨하지만, 각 사례에서는 두 대상 사이에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포함됩니다. 즉, 한 대상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다른 대상에서 사실상 재현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Thus defined and understood, it will be observed, also, that a type is no more peculiar to one dispensation than another. 

It is to be found now in the true pastor or the exemplary Christian as well as formerly in Adam or in Israel; and since believers generally are predestined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Christ, he might, of course, be designated for all times emphatically and preeminently the type of the Church. 

But presented in this loose and general form, there is nothing in the nature of a type that can be said to call for particular investigation, or that may occasion material difference of opinion. 

The subject involves only a few leading ideas, which are familiar to every intelligent reader of Scripture, and which can prove of small avail to the satisfactory explication of what is peculiar in the history of the Divine dispensations. When, however, with reference more to the subject itself than to the mere employment of a particular word in connection with it, we pursue our researches into the testimony of Scripture, we presently find relations indicated between one class of things and another, which, while the same in kind, perhaps, with those just noticed, have yet distinctive features of their own, which call for thoughtful inquiry and discriminating treatment. These have already to some extent come into consideration in the historical and critical review that has been presented of past opinion (see p. 41 sq.). It is enough to refer here to such passages as Heb. 9:24 where the holy places of the earthly tabernacle are called the antitypes (ἀντίτυπα) of the true or heavenly; the latter, of course, according to this somewhat peculiar phraseology, being viewed as the types of the other: Heb. 8:5—where the whole structure of the tabernacle, with its appointed ritual of service, is designated an example and shadow (ὑπόδειγμα σκία) of heavenly things: Ps. 110:4; Heb. 6:10-12, 7— where Melchizedek is exalted over the ministering priesthood of that tabernacle, as bearing in some important respects a still closer relationship to Christ than was given them to occupy: 1 Pet. 3:21— where Christian baptism is denominated the antitype to the deluge, and by implication the deluge is made the type of baptism: Matt. 2:15; Luke 22:16; 1 Cor. 5:7; John 2:19, 6:31-33; 1 Cor. 10:4—where Christ is in a manner identified with the corporate Israel, the passover, the temple, the manna, the water-giving rock. 

When reading these passages, and others of a like description, our minds instinctively inquire—what is the nature of the connection indicated by them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in God's economy? Is it such as subsists between things alike in principle, but diverse in form? Between things on the same spiritual level, or things rising from a lower to a higher level? Is the connection strictly the same in all, or does it vary with the objects and parties compared? What light is thrown by the different elements entering into it upon the revealed character of God, and the progressive condition of His Church? Can we discover in them the lines of a divine harmony in the one respect, and of a human harmony in the other? Such are the questions which here naturally press on us for solution; and they are questions altogether occasioned by peculiarities in preceding dispensations as compared with that of the Gospel. 

The relation of the present to the still coming future—which is that simply of the initial to the terminal processes of the salvation already accomplished—is of a much less complicated and embarrassing kind, and can scarcely be said to give rise to questions of the class now specified. 

 

  • 그러므로 이와 같이 정의되고 이해된 모형은 특정한 경륜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진정한 목자나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모형을 발견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아담이나 이스라엘에서 나타났습니다. 믿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를 아울러 교회의 모형으로 강조되고 높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슨하고 일반적인 형태로 제시된 모형 개념은 본질적으로 특별한 조사를 요구하거나, 큰 논란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주제는 몇 가지 주요 아이디어만을 포함하며, 이는 성경을 읽는 지성적인 독자들에게 친숙한 개념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특정 단어의 사용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 주제 자체에 대해 성경의 증언을 탐구해 보면,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에 동일한 종류지만 고유한 특징을 가진 관계가 나타납니다. 이는 이전에 다룬 신학적, 비평적 논의에서도 일부 고려된 바 있습니다(41쪽 참조). 

    예를 들어, 다음 구절들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 히브리서 9:24에서는 지상의 성소가 참되고 하늘에 있는 것들의 **대응물(안티투파, ἀντίτυπα)**로 불립니다. 이 구절의 독특한 표현에 따르면, 하늘의 성소가 지상의 성소의 모형으로 여겨집니다.  
    - 히브리서 8:5에서는 성막과 그 예배 의식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ὑπόδειγμα σκία)**로 묘사됩니다.  
    - 시편 110:4, 히브리서 6:10-12, 7장에서는 멜기세덱이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직보다도 더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높여집니다.  
    - 베드로전서 3:21에서는 기독교의 세례가 노아 홍수의 **대응물(안티타입)**로 언급되며, 암묵적으로 홍수가 세례의 모형임을 시사합니다.  
    - 마태복음 2:15, 누가복음 22:16, 고린도전서 5:7, 요한복음 2:19, 6:31-33, 고린도전서 10:4에서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공동체, 유월절, 성전, 만나, 물을 내는 바위와 어느 정도 동일시됩니다.

    이러한 구절들과 비슷한 구절들을 읽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 이 구절들이 하나님의 경륜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떤 본질적 관계를 나타내는가?  
    - 이것이 원칙적으로는 유사하지만 형식적으로는 다른 사물들 사이의 관계인가?  
    - 동일한 영적 수준에 있는 사물들 간의 관계인가, 아니면 낮은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관계인가?  
    - 비교되는 대상과 관계에 따라 이 관계는 동일한가, 아니면 다양성이 존재하는가?  
    - 이 관계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님의 계시된 성품과 교회의 진보적 상태에 어떤 빛을 비추는가?  
    -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조화로운 섭리와 인간의 조화로운 응답 사이에서 어떤 선을 발견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복음의 경륜과 비교했을 때 이전 경륜들의 독특한 특징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기됩니다. 한편, 현재와 아직 다가올 미래 사이의 관계는 이미 성취된 구원의 초기 과정과 최종 과정의 관계로, 훨씬 더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성격을 지닙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질문을 야기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In another respect, however, substantially the same questions arise namely, in connection with much that is indicated of the anticipated future of the Christian Church, pointing, as it does, even after Christian realities had come, to further developments of the forms and relations of earlier times. For in the prospective delineations which are given us in Scripture respecting the final issues of Christ's kingdom among men, while the foundation of all undoubtedly lies in the mediatorial work and offices of Christ Himself, it still is through the characters, ordinances, and events of the Old Covenant, not those of the New (with the exception just specified), that the things to come are shadowed forth to the eye of faith; the forms of things in the remote past have here also, it would seem, to find their proper complement and destined realization. Thus, Israel still appears, among the prophetic glimpses in question, with his twelve tribes, his marvellous redemption, wilderness-sojourn, and rescued inheritance (Matt. 19:28; Rev. 7:4-17, 12:14, 15:3); and the tabernacle or temple, with its courts and sanctuaries, its ark of testimony and cherubim of glory, its altars and offerings (2 Thess. 2:4; Rev. 4:7, 8, 8:3, 11:1, 2, 15:6-8, 21:3); and the ancient priesthood, with their linen robes and angel-like service (Rev. 4:4, 15:6); Zion and Jerusalem, Babylon and Euphrates, Sodom and Egypt (Heb. 12:22; Rev. 11:8, 14:1-8, 16:12, 21:2); and more remote still, especially when the mystery of God in Christ is seen approaching its consummation, paradise with its tree of life and rivers of gladness, its perennial delights, and over all its heaven-crowned Lord, with the spouse formed from Himself to share with Him in the glory, and yield Him faithful service in the kingdom (Rev. 2:7, 7:17, 19:7, 21:9). No more, amid the anticipations of Christian faith and hope, are we permitted to lose sight of the personages and materials of the earlier dispensations, than in those which took shape under pre-Christian times. Having respect, therefore, to the nature of the subject under consideration, and the more peculiar difficulties attending it, rather than to the infrequent and variable use of the word type in Scripture, theologians have been wont to distinguish between existing relationships (such as of a pastor to his people, or of Christ to the heirs of His glory) and those which connect together bygone with Christian times—the things pertaining to the Old with those pertaining to the New Covenant. The former alone they have usually designated by the name of types, the latter by that of antitypes. This mode of distinguishing by theologians has been represented as an unwise departure from Scriptural usage, and in itself necessarily fitted to mislead.[1] 

 

  •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즉, 기독교 교회의 미래에 대한 성경의 예언적 암시에 관한 것으로, 기독교적 실체들이 도래한 이후에도 과거 시대의 형태와 관계가 더 발전될 것을 시사합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그리스도 왕국의 최종 결과에 대한 예언적 묘사에서, 모든 기초가 확실히 그리스도 자신의 중보 사역과 직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사물들은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옛 언약의 인물, 규례, 사건들을 통해 믿음의 눈에 비쳐집니다. 과거의 형태들이 이곳에서도 그들의 적절한 완성과 예정된 실현을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예언적 암시들 속에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열두 지파, 놀라운 구속, 광야에서의 거주, 구원받은 유산과 함께 등장합니다(마태복음 19:28; 요한계시록 7:4-17, 12:14, 15:3). 성막이나 성전도 그 뜰과 성소들, 증거의 궤와 영광의 그룹, 제단과 제사들과 함께 나타납니다(데살로니가후서 2:4; 요한계시록 4:7-8, 8:3, 11:1-2, 15:6-8, 21:3). 고대의 제사장직 역시 흰 세마포와 천사와 같은 섬김으로 등장합니다(요한계시록 4:4, 15:6). 또 시온과 예루살렘, 바벨론과 유프라테스, 소돔과 애굽이 등장합니다(히브리서 12:22; 요한계시록 11:8, 14:1-8, 16:12, 21:2). 

    더 멀리,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완성에 다다를 때, 낙원과 그 생명나무, 기쁨의 강, 끊임없는 즐거움이 다시 나타나며, 그 위에는 천상의 관을 쓴 주님과 그분 자신으로부터 형성된 신부가 등장합니다. 이 신부는 주님과 함께 영광을 나누고 그 왕국에서 신실히 섬기게 됩니다(요한계시록 2:7, 7:17, 19:7, 21:9). 

    기독교 신앙과 소망의 예견 속에서, 우리는 옛 언약 시대의 인물들과 자료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시대에서도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논의 중인 주제의 본질과 관련된 특수한 어려움들을 고려해볼 때, 성경에서 '모형'이라는 단어의 드문 사용이나 변동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신학자들은 존재하는 관계와 과거 시대와 기독교 시대를 연결하는 관계를 구별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목자와 그의 백성, 혹은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의 상속자들 간의 관계 같은 '존재하는 관계'는 대개 '모형'이라 불리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사물들을 연결하는 관계는 '대응물(안티타입)'로 구별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이 사용한 이 구별 방식은 성경적 용례에서 벗어난 불필요한 변경으로 간주되었으며, 본질적으로 혼동을 초래할 소지가 있는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1】

 

 

It admits, however, of a reasonable justification; and to treat the subject with anything like scientific precision and fulness, without determining after such a method the respective provinces of type and antitype, would be found extremely inconvenient, if not impracticable. The testimony of Scripture itself, when fairly consulted, affords ground for the distinction indicated, in a great measure apart from and beyond the application of the specific terms. By adhering closely to its usage in respect to these, and disregarding other considerations, one might readily enough, indeed, present some popular illustrations, or throw off a few general outlines of the typical field; but to get at its mor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explicate with some degree of satisfaction the difficulties with which it invests, to our view, the evolution of God's plan and ways, is a different thing, and demands a greatly more exact and comprehensive line of investigation. The extravagance which has too often characterized the speculations of divines upon the subject has arisen, not from their devising a theological sense for the word type (which Scripture itself might be said to force on them), but from their failure to search out the fundamental principles involved in the whole representations of Scripture, and to make a judicious and discriminating application of the light thence arising to the different parts of the subject.[2] Understanding the word type, then, in the theological sense,—that is, conceiving its strictly proper and distinctive sphere to lie in the relations of the old to the new, or the earlier to the later, in God's dispensations,—there are two things which, by general consent, are held to enter into the constitution of a type. It is held, first, that in the character, action, or institution which is denominated the type, there must be a resemblance in form or spirit to what answers to it under the Gospel; and secondly, that it must not be any character, action, or institution occurring in Old Testament Scripture, but such only as had their ordination of God, and were designed by Him to foreshadow and prepare for the better things of the Gospel. For, as Bishop Marsh has justly remarked, "to constitute one thing the type of another, something more is wanted than mere resemblance. The former must not only resemble the latter, but must have been designed to resemble the latter. It must have been so designed in its original institution. It must have been designed as something preparatory to the latter. The type as well as the antitype must have been pre-ordained; and they must have been pre-ordained as constituent parts of the same general scheme of Divine Providence. It is this previous design and this pre-ordained connection [together, of course, with the resemblance], which constitute the relation of type and antitype."[3] 

 

 

  •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는 합리적인 정당화가 가능하며, 유형(모형type)과 대유형(antitype)의 각각의 영역을 이러한 방식으로 규정하지 않고는 주제를 과학적 정확성과 충실성에 근접하게 다루는 것이 극히 불편하거나,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경 자체의 증언은 공정하게 고려될 때, 특정 용어들의 적용과는 별개로, 그리고 그 너머에서 위에서 제시된 구분을 위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성경적 사용에 엄격히 따르고 다른 고려 사항을 무시하면, 대중적인 예시를 제시하거나 유형의 범위를 대략적으로 개괄하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방식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제공하는 그 특징적인 요소들을 파악하고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설명하려면, 훨씬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이 주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지나치게 자유로운 추측은, 단순히 "유형(모형)"이라는 단어에 대해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사실 성경 자체가 그러한 의미를 어느 정도 강요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표현에 내재된 근본적인 원칙들을 탐구하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빛을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주제의 다양한 부분에 적용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유형"이라는 단어를 신학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즉 유형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영역이 하나님의 경륜에서 옛것과 새것, 또는 초기와 후기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면, 일반적으로 동의되는 두 가지 요소가 유형의 구성에 포함된다고 여겨집니다. (1) "모형"이라 불리는 성격(character), 행위(action), 또는 제도(institution)는 복음에서 이에 대응하는 것과 형태나 영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2) 둘째, 그것은 단순히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성격, 행위, 또는 제도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고, 복음의 더 나은 것을 예시하고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이어야 합니다.

    Bishop Marsh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의 유형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유사성 이상이 필요합니다. 전자는 후자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후자와 유사하도록 설계되었어야 합니다. 이는 원래의 설립 당시부터 그렇게 설계되었어야 하며, 후자를 준비하는 것으로 설계되었어야 합니다. 유형과 대유형은 모두 미리 예정되어 있어야 하며,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 계획의 구성 요소로 미리 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선행 설계와 미리 예정된 연결(물론 유사성도 포함하여)이 유형과 대유형의 관계를 구성합니다."【3】

 

We insert, together with the resemblance; for, while stress is justly laid on the previous design and pre-ordained connection, the resemblance also forms an indispensable element in this very connection, and is, in fact, the point that involves the more peculiar difficulties belonging to the subject, and calls for the closest investigation. 

 

  • 우리는 유사성과 함께 이 요소를 포함시킵니다. 이전 설계와 사전에 예정된 연결성에 정당하게 초점이 맞춰지긴 했지만, 이 유사성 또한 이 연결성의 필수적인 요소를 형성하며, 사실상 이 주제에서 가장 독특한 난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철저한 조사를 필요로 하는 지점입니다.

 

 

 


I. We begin, therefore, with the other point the previous design and pre-ordained connection necessarily entering into the relation between type and antitype. 

  • 따라서 우리는 모형(type)과 대응물(antitype) 사이의 관계에 필연적으로 포함된 이전 설계와 사전에 예정된 연결성이라는 다른 지점부터 논의를 시작합니다.

A relation so formed, and subsisting to any extent between Old and New Testament things, evidently presupposes and implies two important facts. 

It implies, first, that the realities of the Gospel, which constitute the antitypes, are the ultimate objects which were contemplated by the mind of God, when planning the economy of His successive dispensations. And it implies, secondly, that to prepare the way for the introduction of these ultimate objects, He placed the Church under a course of training, which included instruction by types, or designed and fitting resemblances of what was to come. Both of these facts are so distinctly stated in Scripture, and, indeed, so generally admitted, that it will be unnecessary to do more than present a brief outline of the proof on which they rest. 

  •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되고 구약과 신약의 요소들 사이에 어느 정도 존재하는 관계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제로 하고 암시합니다.

    첫째, 복음의 실체들(모형의 대상인 실체들)이 하나님의 연속적 섭리를 계획하실 때,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셨던 대상이라는 점을 함축합니다. 
    둘째, 이 궁극적 대상을 도입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일정한 훈련 과정 아래 두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훈련에는 다가올 것들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type), 즉 의도적이고 적합한 유사성을 통해 가르치는 방식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성경에서 매우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인정되므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간략하게 개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1. In regard to the first of the two facts, we find the designation of "the ends of the world" applied in Scripture to the Gospel-age[4];  and that not so much in respect to its posteriority in point of time, as to its comparative maturity in regard to the things of salvation the higher and better things having now come, which had hitherto appeared only in prospect or existed but in embryo. 

1. 두 가지 사실 중 첫 번째와 관련하여, 성경에서는 복음 시대를 "세상 끝"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4]. 이는 시간적 관점에서 뒤늦게 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구원의 사안에 있어 비교적 성숙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즉, 이제야 비로소 더 높고 더 나은 것들이 도래했으며, 이는 이전에는 단지 전망으로만 보이거나 배아 상태로만 존재했던 것들이었습니다.


On the same account the Gospel dispensation is called "the dispensation of the fulness of times;"[5] indicating, that with it alone the great objects of faith and hope, which the Church was from the first destined to possess, were properly brought within her reach. Only with the entrance also of this dispensation does the great mystery of God, in connection with man's salvation, come to be disclosed, and the light of a new and more glorious era at last breaks upon the Church. "The day-spring from the height," in the expressive language of Zacharias, then appeared, and made manifest what had previously been wrapt in comparative obscurity, what had not even been distinctly conceived, far less satisfactorily enjoyed.[6] 

  • 같은 이유로 복음 시대는 "때가 찬 경륜"으로 불립니다[5]. 이는 오직 이 시대에만 교회가 처음부터 소유하도록 예정되었던 신앙과 소망의 위대한 목표들이 올바르게 교회의 손이 닿는 범위 안에 들어왔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 경륜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가 드러나며, 새로운 더 영광스러운 시대의 빛이 마침내 교회 위에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사가랴의 표현을 빌리면,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새벽빛"이 그때 나타나 이전까지 비교적 흐릿하게 감추어져 있던 것들, 뚜렷하게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들, 그리고 완전히 만족스럽게 누려지지 못했던 것들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6].

 

 

Here, therefore, in the sublime discoveries and abounding consolations of the Gospel, is the reality, in its depth and fulness, while in the earlier endowments and institutions of the Church there was no more than a shadowy exhibition and a partial experience;[7] 

and as a necessary consequence, the most eminent in spiritual light and privilege before, were still decidedly inferior even to the less distinguished members of the Messiah's kingdom.[8] 

In a word, the blessed Redeemer, whom the Gospel reveals, is Himself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the scheme of God's dispensations; in Him is found alike the centre of Heaven's plan, and the one foundation of human confidence and hope. So that before His coming into the world, all things of necessity pointed toward Him; types and prophecies bore testimony to the things that concerned His work and kingdom; the children of blessing were blessed in anticipation of His promised redemption; and with His coming, the grand reality itself came, and the higher purposes of Heaven entered on their fulfilment.[9] 

 

  • 그러므로 복음의 숭고한 발견들과 풍성한 위로들 속에서 우리는 깊이와 충만함을 갖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의 초기 은사와 제도들은 단지 그림자와 같은 표현이었고, 부분적인 경험에 불과했습니다[7].따라서 필연적으로, 이전 시대에 가장 뛰어난 영적 빛과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도 여전히 메시아의 왕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두드러진 구성원들보다도 확연히 열등했습니다[8].
  • 한마디로, 복음이 계시하는 복된 구속자께서는 하나님의 경륜 계획의 시작이자 끝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늘 계획의 중심과 인간의 신뢰와 소망의 유일한 기초가 모두 발견됩니다. 따라서 그분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그분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모형들과 예언들은 그분의 사역과 왕국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증언하였으며, 축복의 자녀들은 그분의 약속된 구속을 기대하며 축복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심으로써 위대한 실체 자체가 도래하였고, 하늘의 더 높은 목적들이 성취되기 시작하였습니다[9].

 

 

 

 


2. The other fact presupposed and implied in the relation between type and antitype,—namely, that God subjected the Church to a course of preparatory training, including instruction by types, before He introduced the realities of His final dispensation, is written with equal distinctness in the page of inspiration. 

2. 모형과 실체 간의 관계에서 전제되고 암시된 또 다른 사실, 즉 하나님께서 최종 경륜의 실체를 도입하시기 전에 교회를 모형을 통한 가르침을 포함한 준비 과정으로 훈련시키셨다는 사실은 영감의 말씀에 똑같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It is scarcely possible, indeed, to dissociate even in idea the one fact from the other; for, without such a course of preparation being perpetually in progress, the long delay which took place in the introduction of the Messiah's kingdom would be quite inexplicable. Accordingly, the Church of the Old Testament is constantly represented as having been in a state of comparative childhood, supplied only with such means of instruction, and subjected to such methods of discipline as were suited to so imperfect and provisional a period of her being. Her law, in its higher aim and object, was a schoolmaster to bring men to Christ (Gal. 3:24); and everything in her condition—what it wanted, as well as what it possessed, what was done for her, and what remained yet to be done—concurred in pointing the way to Him who was to come with the better promises and the perfected salvation (Heb. 7, 8, 9). 

  • 사실상 이러한 준비 과정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면, 메시아 왕국의 도래가 오랜 기간 지연된 것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교회는 비교적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지속적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미완전하고 임시적인 시기에 적합한 방식으로만 교육받고 훈련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녀의 율법은 그 고차원적인 목적과 목표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교사**(갈라디아서 3:24)였습니다. 또한 그녀의 상태—그녀가 결여한 것뿐만 아니라 소유한 것, 그녀를 위해 이루어진 것과 여전히 남아 있는 것 모두—는 그리스도가 더 나은 약속들과 완전한 구원을 가지고 오실 것을 가리키는 데 일치했습니다(히브리서 7, 8, 9장).

 

Such is the plain import of a great many scriptures bearing on the subject. It is to be noted, however, in regard to this course of preparation, continued through so many ages, that everything in the mode of instruction and discipline employed ought not to be regarded as employed simply for the sake of those who lived during its continuance. It was, no doubt, primarily introduced on their account, and must have been wisely adapted to their circumstances, as under preparation for better things to come. But, at the same time, it must also, like the early training of a well-educated youth, have been fitted to tell with beneficial effect on the spiritual life of the Church in her more advanced state of existence, after she had actually attained to those better things themselves. The man of mature age, when pursuing his way amid the perplexing cares and busy avocations of life, finds himself continually indebted to the lessons he was taught and the skill he has acquired during the period of his early culture. And, in like manner, it was undoubtedly God's intention that. His method of procedure toward the Church in her state of minority, not only should minister what was needed for her immediate instruction and improvement, but should also furnish materials of edification and comfort for believers to the end of time. If the earlier could not be made perfect without the things belonging to the later Church (Heb. 11:40), so neither, on the other hand, can the later profitably or even safely dispense with the advantage she may derive from the more simple and rudimentary things that belonged to the earlier. The Church, considered as God's nursery for training souls to a meetness for immortal life and blessedness, is substantially the same through all periods of her existence; and the things which were appointed for the behoof of her members in one age, had in them also something of lasting benefit for those on whom the ends of the world are come (1 Cor. 10:6, 11). 

 

  • 이 주제와 관련된 많은 성경 구절의 명백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세대를 통해 이어진 이 준비 과정에 관해서는, 사용된 교육과 훈육의 방식이 단순히 그 기간 동안 살았던 사람들만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분명히 그들을 위해 주로 도입된 것이며, 다가올 더 나은 것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상황에 지혜롭게 적합하게 적용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잘 교육받은 청년의 초기 훈련처럼, 더 나아간 상태의 교회의 영적 삶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도록 설계되었어야 했습니다. 즉, 실제로 더 나은 것들에 도달한 후에도 유익함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 삶의 혼란스러운 걱정과 바쁜 일상 속에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배운 교훈과 습득한 기술에 계속해서 의지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미성숙한 상태로 대하시던 방식이, 단순히 그녀의 즉각적인 교육과 개선을 위해 제공된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교훈과 위로의 자료를 제공하도록 의도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이전의 교회가 나중의 교회와 관련된 것 없이는 완전해질 수 없었던 것처럼(히브리서 11:40), 반대로 나중의 교회도 이전 교회에 속했던 더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없이는 효과적으로 또는 안전하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영혼을 불멸의 생명과 축복에 합당하게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양육의 장으로 간주될 때, 모든 시대를 통해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리고 한 시대의 교회 구성원들을 위해 마련된 것들은 또한 "세상의 마지막 시대에 이른"(고린도전서 10:6, 11) 이들에게 지속적인 유익을 제공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It is farther to be noted, that in this work of preparation for the more perfect future, arrangements of a typical kind, being of a somewhat recondite nature, necessarily occupied a relative and subsidiary, rather than the primary and most essential place. The Church enjoyed from the first the benefit of direct and explicit instruction, imparted either immediately by the hand of God, or through the instrumentality of His accredited messengers. From this source she always derived her knowledge of the more fundamental truths of religion, and also her more definite expectations of the better things to come. The fact is of importance, both as determining the proper place of typical acts and institutions, and as indicating a kind of extraneous and qualifying element, that must not be overlooked in judging of the condition of believers under them. Yet they were not, on that account, rendered less valuable or necessary as constituent parts of a preparatory dispensation; for it was through them, as temporary expedients, and by virtue of the resemblances they possessed to the higher things in prospect, that the realities of Christ's kingdom obtained a kind of present realization to the eye of faith. What, then, was the nature of these resemblances. Wherein precisely did the similarity which formed more especially the preparatory elements in the Old, as compared with the New, really lie? This is the point that mainly calls for elucidation. 

 


이보다 더 나아가, 더 완전한 미래를 준비하는 이 작업에서, 다소 은밀한 성격을 가진 모형적 성격의 배열이 필연적으로 상대적이고 보조적인 위치를 차지했지, 결코 가장 주요하고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길이나 그분의 공인된 사자들을 통해 제공된 명확하고 분명한 가르침의 혜택을 누려왔습니다. 이러한 출처로부터 교회는 항상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들과 더 나은 것들이 올 것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기대에 대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은 모형적 행동과, 제도의 적절한 위치를 결정하고, 그 아래에서 신자들의 상태를 판단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외부적이고 조정적인 요소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것들이 준비적 경륜의 구성 요소로서 덜 가치 있거나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일시적인 대안으로서, 그리고 전망 중인 더 높은 것들과의 유사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국의 실체들이 신앙의 눈에는 현재의 실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사성의 본질은 무엇이었습니까? 구약의 준비적 요소들이 신약과 비교하여 특히 유사성을 형성했던 것은 정확히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것이 주로 설명이 요구되는 핵심입니다.

 

 

 


II. It is the second point we were to investigate, as being that which would necessarily require the most lengthened and careful examination. 

And the general statement we submit respecting it is, that two things were here essentially necessary: there must have been in the Old the same great elements of truth as in the things they represented under the New; and then, in the Old, these must have been exhibited in a form more level to the comprehension, more easily and distinctly cognizable by the minds of men. 

 

II. 이는 우리가 조사해야 할 두 번째 요점이며, 필연적으로 가장 길고 신중한 검토가 필요할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제시할 일반적인 진술은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는 신약에서 대표되는 것과 동일한 위대한 진리의 요소가 존재해야 했으며, 구약에서는 이 진리들이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더 부합하고, 더 쉽게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1. There must have been, first, the same great elements of truth,—for the mind of God, and the circumstances of the fallen creature, 

are substantially the same at all times. 

What the spiritual necessities of men now are, they have been from the time that sin entered into the world. Hence the truth revealed by God to meet these necessities, however varying from time to time in the precise amount of its communications, and however differing also in the external form under which it might be presented, must have been, so far as disclosed, essentially one in every age. 

  • 1. 첫 번째로, 동일한 위대한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타락한 인간 존재의 상황은 모든 시대에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인간의 영적 필요가 어떠한지와 마찬가지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그 필요는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는, 그 전달의 정확한 양이 시대마다 다르거나, 외부적인 형태가 다를지라도, 계시된 진리는 모든 시대에 본질적으로 하나였어야 합니다.

 

 

For, otherwise, what anomalous results would follow! If the principles unfolded in God's communications to men, and on which he regulates His dealings toward them, were materially different at one period from what they are at another, then either the wants and necessities of men's natural condition must have undergone a change,—or these being the same, as they undoubtedly are—the character of God must have altered— He cannot be the immutable Jehovah. Besides, the very idea of a course of preparatory dispensations were, on the supposition in question, manifestly excluded; since that could have had no proper ground to rest on, unless there was a deep-rooted and fundamental agreement between what was merely provisional and what was final and ultimate in the matter. The primary and essential elements of truth, therefore, which are embodied in the facts of the Gospel, and on which its economy of grace is based, cannot, in the nature of things, be of recent origin—as if they were altogether peculiar to the New Testament dispensation, and had only begun with the entrance of it to obtain a place in the government of God. On the contrary, their existence must have formed the groundwork, and their varied manifestation the progress, of any preparatory dispensations that might be appointed. And whatever ulterior respect the typical characters, actions, or institutions of those earlier dispensations might carry to the coming realities of the Gospel, their more immediate intention and use must have consisted in the exhibition they gave of the vital and fundamental truths common alike to all dispensations. 

  •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과 그분의 행위 원칙이 시대마다 크게 달랐다면 어떤 기이한 결과가 초래되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적인 조건과 필요가 시대마다 변화했거나, 그렇지 않다면 변함없는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바뀌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적인 필요는 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변치 않는 여호와이십니다. 게다가, 만약 그러한 변화가 있었다면 준비적 경륜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준비적 경륜은 본질적으로 임시적이고 최종적인 것 사이에 깊이 뿌리박힌 근본적인 일치가 있어야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사실들에 내재한 진리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들, 그리고 그 은혜의 경륜이 기반을 두고 있는 원칙들은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들은 신약 시대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경륜과 구속 역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진리들은 준비적 경륜의 기초를 형성하였으며, 그 다양한 형태로의 발현은 준비적 경륜의 발전을 나타냈습니다. 그 당시의 모형적 성격, 행동, 제도들이 복음의 실체를 암시하는 의미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보다 즉각적인 목적과 사용은 모든 시대에 공통된 생명력 있고 근본적인 진리들을 보여주는 데 있었습니다.

 


2. If a clear and conclusive certainty attaches to this part of our statement, it does so in even an increased ratio to the other. Holding that the same great elements of truth must of necessity pervade both type and antitype, we must also assuredly believe, that in the former they were more simply and palpably exhibited--presented in some shape in which the human mind could more easily and distinctly apprehend them—than in the latter. 

  • 만약 우리의 주장 중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하고 확고한 확실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부분에 대해 더욱 강화된 형태로 적용됩니다. 동일한 진리의 위대한 요소들이 모형과 실체 모두를 반드시 관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또한 모형에서 이 진리들이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표현되었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이 더 쉽게 이해하고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어떤 형태로 제시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It would manifestly have been absurd to admit into a course of preparation for the realities of the Gospel, certain temporary exhibitions of the same great elements of truth that were to pervade these, unless the preparatory had been of more obvious meaning, and of more easy comprehension, than the ultimate and final. The transition from the one to the other must clearly have involved a rise in the mode of exhibiting the truth from a lower to a higher territory—from a form of development more easily grasped, to a form which should put the faculties of the mind to a greater stretch. 

  • 복음의 실체들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진리의 위대한 요소들을 포함한 임시적 표현들을 도입하면서도, 이러한 준비 단계가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것들보다 더 명확하고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면, 이는 분명히 불합리했을 것입니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전환은 분명히 진리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상승을 포함했어야 하며, 이는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형태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지적 능력을 더 크게 활용해야 하는 형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For thus only could it be wise or proper to set up preparatory dispensations at all. These, manifestly, had been better spared, if the realities themselves lay more, or even so much, within the reach and comprehension of the mind, as their temporary and imperfect representations. Standing, then, on the foundation of these two principles, as necessarily forming the essential elements of the resemblance that subsisted between the Old and the New in God's dispensations, we may now proceed to consider how far they can legitimately carry us in explaining the subject in hand; or, in other words, to answer the question, how on such a basis the typical things of the past could properly serve as preparatory arrangements for the higher and better things of the future? We shall endeavour to answer this question, in the first instance, by making application of our principles to the symbolical institutions of the Mosaic dispensation, which are usually denominated the ritual or legal types. 

  • 이렇게 해야만 준비적 경륜(preparatory dispensations)을 설정하는 것이 지혜롭고 적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복음의 실체들이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표현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인간의 이해력과 접근 범위 내에 있었다면, 이러한 준비적 경륜들은 차라리 생략하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존재했던 유사성을 형성하는 본질적 요소로서, 이 두 가지 원칙의 토대 위에 서서, 이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것들이 얼마나 합법적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모형들이 어떻게 이러한 기반 위에서 미래의 더 높고 더 나은 것들을 위한 준비적 배열로서 적합하게 기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우선 모세 율법 경륜의 상징적 제도들, 흔히 의식적 혹은 법적 모형으로 불리는 것들에 우리의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답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For, in respect to these we have the advantage of the most explicit assertion in Scripture of their typical character; and we are also furnished with certain general descriptions of their nature as typical, which may partly serve as lights to direct our inquiries, and partly provide a test by which to try the correctness of our results. 

  • 왜냐하면 이러한 점들에 관해서는 그 모형적 성격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성경적 진술이 제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모형적 본질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설명도 제공되어, 이는 우리의 탐구를 안내하는 빛으로 작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결과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기준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Now, viewing the institutions of the dispensation brought in by Moses as typical, we look at them in what may be called their secondary aspect; we consider them as prophetic symbols of the letter things to come in the Gospel. But this evidently implies, that in another and more immediate respect they were merely symbols, that is, outward and sensible representations of Divine truth, in connection with an existing dispensation and a religious worship. 

  • 이제 모세에 의해 도입된 경륜의 제도를 모형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그것들을 이른바 부차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즉, 우리는 그것들을 복음에서 다가올 더 나은 것들의 예언적 상징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또 다른, 보다 즉각적인 측면에서 그것들이 단순히 상징, 즉 기존의 경륜과 신앙적 예배와 관련된 신성한 진리의 외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에 불과했음을 함축합니다. 

 

 

It was only from their being this, in the one respect, that they could, in the other, be prophetic symbols, or types, of what was afterwards to appear under the Gospel; on the ground already stated, that the preparatory dispensation to which they belonged was necessarily inwrought with the same great elements of truth which were afterwards, in another form, to pervade the Christian. 

 

  • 그것들이 한 측면에서는 이러한 상징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복음 아래 나타날 이후의 것들의 예언적 상징, 즉 모형으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들이 속했던 준비적 경륜이 이후 기독교적 경륜을 관통할 또 다른 형태의 동일한 위대한 진리 요소들로 필연적으로 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Had there not been the identity in the truths here supposed, assimilating amid all outward diversities the two dispensations in spirit to each other, the earlier would rather have blocked up, than prepared and opened, the way for the latter. A partial exhibition of a truth, or an embodiment of it in things comparatively little, easily grasped by the understanding, and but imperfectly satisfying the mind, may certainly make way for its exhibition in a manner more fully adapted to its proper nature:—The mind thus familiarized to it in the little, may both have the desire created, and the capacity formed for beholding its development in things of a far higher and nobler kind. 

  • 여기에서 가정된 진리들의 동일성이 없었다면, 즉 모든 외적인 다양성 속에서도 두 경륜을 성령안에서 서로 동화시키는 동일성이 없었다면, 초기 경륜은 후속 경륜을 준비하거나 여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진리의 일부를 보여주거나 그것을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구현하여 이해하기 쉽고 마음을 불완전하게 만족시키는 것이, 그 진리를 보다 본래의 본질에 적합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작고 단순한 것에서 진리에 익숙해진 마음은, 더 높은 차원의 더 고귀한 형태로 그 진리가 전개되는 것을 열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역량 또한 형성할 수 있습니다.

 

 

But a partial or defective representation of an object, apart from any principles common to both, must rather tend to pre-occupy the mind, and either entirely prevent it from anticipating, or fill it with mistaken and prejudiced notions of, the reality. If such a representation of the mere objects of the Gospel had been all that was aimed at in the symbolical institutions of the Old Testament—if their direct, immediate, and only use had been to serve, as pictures, to prefigure and presentiate to the soul the future realities of the divine kingdom—then who could wonder if these realities should have been wholly lost sight of before, or misbelieved and repudiated when they came? 

 

  • 그러나 어떤 원리의 공통점 없이, 한 대상의 부분적이거나 결함 있는 표현은 오히려 마음을 선점하여, 그 현실을 예상하지 못하게 하거나, 잘못되거나 편향된 관념으로 채우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구약의 상징적 제도가 단순히 복음의 대상들을 묘사하려는 데만 그 목적이 있었다면—즉, 그것들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유일한 용도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미래의 현실을 영혼에게 예표하고 표현하는 그림으로 기능하는 것이었다면—이 현실들이 이전에는 완전히 간과되었거나, 나타났을 때 잘못 믿어지거나 거부되는 일이 생겼다 해도 누가 놀랄 수 있겠습니까?

(▶ 이 부분은 이해가 안가서, 더 쪼개서 다시 표현해보자면... )

 

  • 구약의 상징적인 제도들이 단순히 복음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 같은 역할만 했다고 가정해보자.
  • 이런 경우, 복음의 진짜 현실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복음이 도래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믿거나 아예 거부했을 수도 있다.
  • 이는 구약의 제도들이 복음의 참된 의미를 준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 대신, 오히려 잘못된 기대감이나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었다.

 

 

 

 

For, in that case, the preparatory dispensation must have been far more difficult for the worshipper than the ultimate one. The child must have had a much harder lessen to read, and a much higher task to accomplish, than the man of full-grown and ripened intellect. And Divine wisdom must have employed its resources, not to smooth the Church's path to an enlightened view and a believing reception of the realities of the Gospel, rather but to shroud them in the most profound and perplexing obscurities. Every serious and intelligent believer will shrink from this conclusion. But if he does so, he will soon find that there is only one way of effectually escaping from it; and that is, by regarding the symbolical institutions of the Old Covenant as not simply or directly representations of the realities of the Gospel, but in the first instance as parts of an existing dispensation, and, as such, expressive of certain great and fundamental truths, which could even then be distinctly understood and embraced. This was what might be called their more immediate and ostensible design. Their further and prospective, reference to the higher objects of the Gospel, was of a more indirect and occult nature; and stood in the same essential truths being exhibited by means of present and visible, but inferior and comparatively inadequate objects. So that in tracing out the connection from the one to the other, we must always begin with inquiring, What, per se, was the native import of each symbol? What truths did it symbolize merely as part of an existing religion? and from this proceed to unfold how it was fitted to serve as a guide and a stepping-stone to the glorious events and issues of Messiah's kingdom. 

  • 만약 그렇지 않다면, 준비 과정이 궁극적인 복음의 현실보다 예배자에게 훨씬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는 아이가 성인이 된 후 지성과 경험으로 읽고 해결해야 할 과제보다 더 어려운 과제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신적 지혜는 교회가 복음의 현실을 밝히 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을 평탄하게 하는 대신, 가장 깊고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 감추는 데 그 자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 이러한 결론은 진지하고 지적인 신자라면 누구나 받아들이기를 꺼려할 것입니다.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이 결론을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언약의 the symbolical institutions가 단순히 복음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선 당시 존재하던 한 제도의 일부로서, 이미 그때에도 분명히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위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표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 이것이 바로 the symbolical institutions의 더 즉각적이고 명백한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더 높은 목적에 대한 미래적이고 간접적인 참조는 보다 간접적이고 숨겨진 성격을 띠었습니다. 이는 현재 눈에 보이는, 하지만 더 낮고 비교적 불완전한 대상을 통해 동일한 본질적 진리가 나타났다는 데 기초합니다.
  • 따라서 이 둘 사이의 연결을 추적하려면,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 각 상징이 본래적으로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존재했던 신앙 체계의 일부로서 어떤 진리를 상징했는가? 그리고 나서 그것이 어떻게 메시아 왕국의 영광스러운 사건들과 결과로 가는 길잡이와 디딤돌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 준비 과정이 궁극적인 복음보다 더 어려웠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 예를 들어, 아이가 성인이 된 후 해결해야 할 과제보다 더 어려운 과제를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 신적 지혜는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을 평탄하게 해야 한다.
  • 그러나 the symbolical institutions는 복음을 어둡고 혼란스럽게 감추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 상징적 제도는 당시 존재하던 제도의 일부로 근본 진리를 표현했다.
  • 이 진리는 그 시대에도 분명히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 복음과 연결된 의미는 간접적이고 숨겨진 성격을 가졌다.
  • 현재 눈에 보이는 대상을 통해 더 높은 진리를 암시했다.
  • 연결을 이해하려면 각 상징의 본래적 의미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 그리고 그것이 메시아 왕국으로 가는 길잡이로 어떻게 작용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This—which it was the practice of the elder typological writers in great measure to overlook—is really the foundation of the whole matter; and without it every typological system must either contract itself within very narrow bounds, or be in danger of running out into superficial or fanciful analogies. The Mosaic ritual had at once a shell and a kernel,—its shell, the outward rites and observances it enjoined; its kernel, the spiritual relations which these indicated, and the spiritual truths which they embodied and expressed. Substantially, these truths and relations were, and must have been, the same for the Old that they are for the New Testament worshippers; for the spiritual wants and necessities of both are the same, and so also is the character of God, with whom they have to do. There, therefore, in that fundamental agreement, that internal and pre-established harmony of principle, we are to find the bond of union between the symbolical institutions of Judaism and the permanent realities of Messiah's kingdom. One truth in both—but that truth existing first in a lower, then in a higher stage of development; in the one case appearing as a precious bud embosomed and but partially seen amid the imperfect relations of flesh and time; in the other expanding itself under the bright sunshine of heaven into all the beauty and fruitfulness of which it was susceptible. To make our meaning perfectly understood, however, we must descend from the general to the particular, and apply what has been stated to a special case. In doing so, we shall go at once to what may justly be termed the very core of the religion of the Old Covenant— the rite of expiatory sacrifice. 

 

이는 초기 모형적 작가들이 대체로 간과했던 부분이지만, 사실 이 부분이 모든 문제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가 없다면, 모형론 체계는 매우 좁은 범위로 제한되거나, 피상적이고 공상적인 유사성으로 빠질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모세의 의식 체계는 껍질과 핵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껍질: 규정된 외적 의식과 관행 / 핵심: 이 의식들이 가리키는 영적 관계와 이를 통해 표현되고 체화된 영적 진리). 

이 진리와 관계는 구약과 신약의 예배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동일했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했습니다.

이유는, 구약과 신약 모두 영적 필요와 결핍이 같고, 그들이 상대하는 하나님도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근본적인 일치와 원리에 내재된 조화에서 유대교의 상징적 제도와 메시아 왕국의 영구적인 현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지만, 그 진리는 처음에는 낮은 수준의 발전 단계에서, 이후에는 더 높은 발전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진리가 육체와 시간의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 소중한 꽃봉오리처럼 감춰져 있고 부분적으로만 보였으나, 신약에서는 하늘의 밝은 햇빛 아래 모든 아름다움과 열매를 드러내며 완전히 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일반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구약 신앙의 핵심이라 부를 만한 예식으로 바로 가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속죄 제사의 의식입니다.

  • 초기 모형론 작가들은 중요한 기초를 간과했다.
  • 이 기초 없이는 모형론 체계가 제한되거나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 모세 의식 체계는 껍질(외적 의식)과 핵심(영적 진리)을 동시에 가진다.

 

  • 구약과 신약의 영적 필요는 동일하다.
  •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

 

  • 따라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근본적인 일치와 조화가 존재한다.
  • 구약의 진리는 낮은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 신약의 진리는 더 높은 단계에서 완전하게 드러났다.
  • 이 점을 명확히 이해하려면 구체적인 사례로 넘어가야 한다.

 

  • 예를 들어, 속죄 제사를 생각해보자. 

 

 

 

That this was typically or prophetically symbolical of the death of Christ, is testified with much plainness and frequency in New Testament Scripture. Yet, independently of this connection with Christ's death, it had a meaning of its own, which it was possible for the ancient worshipper to understand, and, so understanding, to present through it an acceptable service to God, whether he might perceive or not the further respect it bore to a dying Saviour. 

It was in its own nature a symbolical transaction, embodying a threefold idea: 

first, that the worshipper, having been guilty of sin, had forfeited his life to God; 

then, that the life so forfeited must be surrendered to Divine justice; 

and finally, that being surrendered in the way appointed, it was given back to him again by God, or he became re-established, as a justified person, in the Divine favour and fellowship. 

속죄 제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형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상징했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에서 매우 명확하고 빈번하게 증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이러한 연결과는 별개로, 속죄 제사는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고대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속죄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 제사가, 죽어가는 구세주를 상징한다는 더 깊은 의미를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말입니다.

속죄 제사는 본질적으로 상징적 행위였으며, 세 가지 개념을 담고 있었습니다:

  1. 예배자는 죄를 범했기에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칠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
  2. 그렇게 상실된 생명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반드시 바쳐져야 한다는 것.
  3. 그리고 지정된 방식으로 생명을 바친 후,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이 다시 돌려받아졌거나, 예배자가 하나님의 은총과 교제 안에서 의롭게 회복된다는 것.

 

 

How far a transaction of this kind, done symbolically and not really—by means of an irrational creature substituted in the sinner's room, and unconsciously devoted to lose its animal in lieu of his intelligent and rational life--might commend itself as altogether satisfactory to his view; 

or how far he might see reason to regard it as but a provisional arrangement, proceeding on the contemplation of something more perfect yet to come;

--these are points which might justly be raised, and will indeed call for future discussion, but they are somewhat extraneous to the subject itself now under consideration.

We are viewing the rite of expiatory sacrifice simply as a constituent part of ancient worship,--a religious service which formally, and without notification from itself of anything farther being required, presented the sinner with the divinely appointed means of reconciliation and restored fellowship with God.

 

  • 이와 같은 의식이, 상징적으로 행해지고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여 지각 없는 동물이 사용되고, 그 동물이 그의 지적이고 합리적인 생명 대신 희생되도록 의도되었다는 점에서) 죄인의 관점에서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 또는 그가 이를 단지 임시적인 제도로 여기고, 더 완전한 것이 나중에 올 것을 예상하며 받아들였는지에 관한 문제는, 충분히 논의될 수 있으며 실제로 이후에 다룰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와는 약간 동떨어져 있습니다.
  • 우리는 속죄 희생 의식을 단순히 고대 예배의 구성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더 이상의 추가 요구 사항을 알리지 않고, 죄인에게 하나님과의 화해와 회복된 교제를 위한 신이 지정한 수단을 형식적으로 제공하는 종교적 행위로 말입니다.

 

 

 

 

 

In this respect it symbolically represented, as we have said, a threefold idea, which if properly understood and realized by the worshipper, he performed, in offering it, an acceptable service. And when we rise from the symbolical to the typical view of the transaction—when we proceed to consider the rite of expiation as bearing a prospective reference to the redemption of Christ, we are not to be understood as ascribing to it some new sense or meaning; we merely express our belief that the complex capital idea which it so impressively symbolized, finds its only true, as from the first its destined realization, in the work of salvation by Jesus Christ. For in Him alone was there a real transference of man's guilt to one able and willing to bear it; in His death alone, the surrender of a life to God, such as could fitly stand in the room of that forfeited by the sinner; and in faith alone on that death, a full and conscious appropriation of the life of peace and blessing obtained by Him for the justified.

  • 이 점에서 속죄 의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 가지 주요 관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냈으며,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현한 예배자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 그리고 우리가 이 행위를 상징적 관점에서 모형적 관점으로 확장하여 (속죄 의식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예표로 고려할 때), 그 의식에 어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 우리는 단지, 그 의식이 강렬하게 상징했던 복합적이고 중요한 관념이, 처음부터 의도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에서만 그 참된 실현을 찾는다고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의 죄책이 이를 감당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분에게 실제로 전가되었으며, 오직 그분의 죽음에서만 죄인이 상실한 생명을 대신할 만한 자격이 있는 생명의 헌신이 이루어졌습니다.
  • 또한, 오직 그 죽음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그분이 의인들을 위해 얻으신 평화와 축복의 생명을 완전하고 의식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So that here only it is we perceive the idea of a true, sufficient, and perfect sacrifice converted into a living reality—such as the holy eye of God, and the troubled conscience of man, can alike repose in with unmingled satisfaction.

And while there appear precisely the same elements of truth in the ever-recurring sacrifices of the Old Testament, and in the one perfect sacrifice of the New, it is seen, at the same time, that what the one symbolically represented, the other actually possessed; what the one could only exhibit as a kind of acted lesson for the present relief of guilty consciences, the other makes known to us, as a work finally and for ever accomplished for all who believe in the propitiation of the cross.

The view now given of the symbolical institutions of the Old Testament, as prophetic symbols of the realities of the Gospel, is in perfect accordance with the general descriptions we have of their nature in Scripture itself.

These are of two classes. In the one they are declared to have been shadows of the better things of the Gospel; as in Heb. 10:1, where the law is said to have had "a shadow, and not the very image of good things to come;" in ch. [[8:5 >> Bible:He 8:5]] , where the priests are described as "serving unto the example (copy) and shadow of heavenly things;" and again in Col. 2:16, where the fleshly ordinances in one mass are denominated "shadows of good things to come," while it is added, "the body is of Christ." Now, that the tabernacle, with the ordinances of every kind belonging to it, were shadows of Christ and the blessings of His kingdom, can only mean that they were obscure and imperfect resemblances of these; or that they embodied the same elements of Divine truth, but wanted what was necessary to give them proper form and consistence as parts of a final and abiding dispensation of God.

 

  • 따라서 오직 여기에서만 참되고, 충분하며, 완전한 희생이라는 개념이 살아있는 실체로 변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눈과 인간의 불안한 양심 모두가 혼란 없이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구약의 반복되는 희생과 신약의 단번에 이루어진 완전한 희생에서 동일한 진리의 요소들이 정확히 나타나며, 동시에 전자는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것을 후자는 실제로 소유했음을 보여줍니다. 전자가 유죄 양심의 즉각적인 안식을 위해 연출된 교훈으로 제공했던 것을, 후자는 십자가의 화목 제사를 믿는 모든 이를 위해 영원히 성취된 완전한 사역으로 드러냅니다.
  • 구약의 상징적 제도가 복음의 실체들에 대한 예언적 상징으로 묘사된 지금의 관점은 성경 자체에서 제시하는 그들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 이 설명은 두 가지 범주로 나뉩니다. 첫 번째로, 구약의 제도가 복음의 더 나은 것들의 "그림자"였다고 선언됩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는 율법이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 그것들의 참된 형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히브리서 8장 5절에서는 제사장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과 그림자에 따라 섬긴다"고 묘사됩니다. 또한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는 육체적 규례들이 한 덩어리로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로 불리며, 이어서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고 덧붙입니다.
  • 성막과 그에 속한 모든 규례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축복에 대한 그림자였다는 것은, 그것들이 이들을 희미하고 불완전하게 닮은 것들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또는 그것들이 동일한 신적 진리의 요소를 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영속적인 경륜의 일부로 적절한 형상과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을 결여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And when we go to inquire wherein did the obscurity and imperfection consist, we are always referred to the carnal and earthly nature of the Old as compared with the New. The tabernacle itself was a material fabric, constructed of such things as this present world could supply, and hence called "a worldly sanctuary;" while its counterpart under the Gospel is the eternal region of God's presence and glory, neither discernible by fleshly eye, nor made by mortal hands. In like manner, the ordinances of worship connected with the tabernacle were all ostensibly directed to the preservation of men's present existence, or the advancement of their well-being as related to an outward sanctuary and a terrestrial commonwealth; while in the Gospel it is the soul's relation to the sanctuary above, and its possession of an immortal life of blessedness and glory, which all is directly intended to provide for. In these differences between the Old and the New, which bespeak so much of inferiority on the part of the former, we perceive the darkness and imperfection which hung around the things of the ancient dispensation, and rendered them shadows only of those which were to come. But still shadows are resemblances. Though unlike in one respect, they must be like in another. And as the unlikeness stood in the dissimilar nature of the things immediately handled and perceived—in the different materiel, so to speak, of the two dispensations, wherein should the resemblance be found but in the common truths and relations alike pervading both? By means of an earthly tabernacle, with its appropriate services, God manifested toward His people the same principles of government, and required from them substantially the same disposition and character, that He does now under the higher dispensation of the Gospel. For look beyond the mere outward diversities, and what do you see? You see in both alike a pure and holy God, enshrined in the recesses of a glorious sanctuary, unapproachable by sinful flesh but through a medium of powerful intercession and cleansing efficacy; yet when so approached, ever ready to receive and bless with the richest tokens of His favour and loving-kindness as many as come in the exercise of genuine contrition for sin, and longing for restored fellowship with Him whom they have offended. The same description applies equally to the service of both dispensations; for in both the same impressions are conveyed of God's character respecting sin and holiness, and the same gracious feelings necessarily awakened by them in the bosom of sincere worshippers.

 

  • 그리고 구약의 모호함과 불완전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탐구할 때, 우리는 항상 신약과 비교하여 구약이 가진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에 주목하게 됩니다. 성막 자체는 이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재료로 지어진 물질적인 구조물로, "a worldly sanctuary"라고 불립니다. 반면에 복음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머무는 영원한 세계가 그 대응물로서 존재하며, 이는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 마찬가지로, 성막과 관련된 예배의 규례들은 모두 인간의 현재 삶을 보존하거나 이 땅의 공동체와 외적인 성소와 연관된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인간 영혼의 하늘 성소와의 관계, 그리고 불멸의 복된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 구약과 신약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들은 구약이 가진 열등함을 드러내며, 고대 경륜의 것들이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했음을 보여줍니다.
  • 그러나 그림자도 어느 정도는 실체를 닮아 있습니다. 한 면에서는 다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닮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차이가 다뤄지는 물질적 요소의 성격에 있다면, 닮음은 두 경륜 모두에 공통으로 스며 있는 진리와의 관계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습니다.
  • 하나님은 지상의 성막과 그에 적합한 의식을 통해 지금 복음의 더 높은 경륜 아래에서 하시는 것과 동일한 통치 원리를 백성에게 나타내셨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태도와 성품을 요구하셨습니다. 단순히 외적 차이를 넘어서 보면 무엇이 보입니까?
  • 두 경륜 모두에서 순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영광의 성소 깊은 곳에 거하시는 것을 봅니다. 죄 많은 인간은 강력한 중재와 정결의 효능을 통해서만 그 성소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렇게 접근할 때 진정한 회개와 하나님과의 회복된 교제를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가장 풍성한 표적들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 이러한 묘사는 두 경륜 모두의 예배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두 경륜 모두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와 거룩함에 대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셨으며, 이는 진실된 예배자들의 마음속에 동일한 은혜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But then, as to the means of accomplishing this, there was only, in the one case, a shadowy exhibition of spiritual things through earthly materials and temporary expedients; while in the other, the naked realities appear in the one perfect sacrifice of Christ, the rich endowments of the Spirit of grace, and the glories of an everlasting kingdom. The other general description given in New Testament Scripture of the prophetic symbols or types of the Old dispensation does not materially differ from the one now considered, and, when rightly understood, leads to the same result. According to it, the religious institutions of earlier times contained the rudiments or elementary principles of the world's religious truth and life. Thus in Col. 2:20, the now antiquated ordinances of Judaism are called "the rudiments of the world;" and in Gal. 4:3, the Church, while under these ordinances, is said to have been "in bondage under the elements (or rudiments) of the world." The expression, also, which is found in ch. [[3:24 >> Bible:Ga 3:24]] of this Epistle to the Galatians, "the law was our schoolmaster to bring us to Christ," conveys much the same idea; since it is the special business of a schoolmaster to communicate to those under his charge the rudiments of learning, by which their minds may in due time be prepared for the higher walks of science and literature. The law certainly did this, to a considerable extent, by direct instructions in the great principles of truth and duty. But it did so not less by means of its symbolical institutions and ordinances, which were in themselves inherently defective, and yet in their spirit and design entirely analogous to the higher things of the Gospel. The animal, the fleshly, the material, the temporal, was what alone appeared in them, when viewed in respect merely to their ostensible character and object; yet all was arranged in a manner fitted to exhibit ideas and relations that reached far beyond these, and could only, indeed, find their suitable development in things spiritual, heavenly, and eternal. The Church had then to be dealt with after the manner of a child. But the child must have instruction administered to him in a form adapted to his juvenile capacities. If he is to be prepared for apprehending the outlines and proportions of the globe, these must be presented to his view on diagrams of a few spans long. Or, if he is to be made acquainted with the laws and principles which bear sway throughout the material universe, he must again see them exemplified in miniature among the small and familiar objects of everyday life. In like manner, the Church of the Old Testament, while in bondage to fleshly institutions and services, yet received through these the rudiments of all Divine truth and wisdom. In a form which the eye of a spiritual babe could scan, and its hand, in a manner, grasp, she had constantly exhibited before her the essential truths and principles of God's everlasting kingdom.

 

  • 그러나 이를 달성하는 방법에 있어, 한쪽에서는 영적인 것들을 지상적인 재료와 일시적인 수단을 통해 그저 그림자로 보여주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 풍성한 은혜의 성령의 은사, 그리고 영원한 왕국의 영광 속에서 실체가 드러납니다.
  •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일반적인 묘사는 구약 시대의 예언적 상징이나 모형에 대해 앞서 언급된 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으며, 올바르게 이해할 경우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이 설명에 따르면, 초기 신앙 제도들은 세상의 종교적 진리와 삶의 기초나 기본 원리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2장 20절에서는 이제 폐지된 유대교 규례들을 "세상의 초보"라고 부르고, 갈라디아서 4장 3절에서는 교회가 이러한 규례 아래 있을 때 "세상의 초보 아래에 속박되어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나오는 표현인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었다"는 의미도 비슷한 생각을 전달합니다. 이는 초등교사의 주된 역할이 맡은 이들에게 배움의 기초를 가르쳐, 그들의 마음이 때가 되면 더 높은 학문과 문학의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율법은 분명히 진리와 의무의 큰 원칙들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 이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상징적 제도와 규례들을 통해서도 이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제도와 규례들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었지만, 그 정신과 목적은 복음의 더 높은 것들과 완전히 유사했습니다.
  • 구체적으로, 그것들은 동물적이고, 육체적이며,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요소들로만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은 영적이고 하늘에 속하며 영원한 것들에서만 적합하게 발전될 수 있는 개념과 관계를 드러내도록 배열되었습니다.
  • 당시 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의 미숙한 능력에 맞게 가르침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가 지구의 형태와 비율을 이해하도록 준비하려면, 몇 뼘 길이의 도식으로 이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 혹은, 물질적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과 원칙을 알려주려면, 그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작은 친숙한 물체들 속에서 이를 축소된 형태로 예시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교회는 육체적 제도와 의식에 얽매여 있는 동안에도, 이를 통해 모든 신적 진리와 지혜의 기초를 받았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눈으로도 살펴보고, 손으로도 어느 정도 붙잡을 수 있는 형식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의 본질적인 진리와 원칙을 끊임없이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And nothing more was needed than that the instruction thus imparted should have been impartially received and properly cultivated, in order to fit the disciple of Moses for passing with intelligence and delight from his rudimental tutelage, under the shadows of good things, into the free use and enjoyment of the things themselves.

The general descriptions, then, given of the symbolical institutions and services of the Old Testament, in their relation to the Gospel, perfectly accord with the principles we have advanced. And viewed in the light now presented, we at once see the essential unity that subsists between the Old and the New dispensations, and the nature of that progression in the Divine plan which rendered the one a fitting preparation and stepping-stone to the other. In its fundamental elements the religion of both covenants is thus found to be identical. Only it appears under the Old covenant as on a lower platform, disclosing its ideas, and imparting its blessings through the imperfect instrumentalities of fleshly relations and temporal concerns; while under the New everything rises heavenwards, and eternal realities come distinctly and prominently into view.

  • 그리고 모세의 제자들이 율법과 구약의 상징적인 제도들에서 배운 교훈을 공정하게 받아들이고 잘 계발하기만 하면, 그들은 "좋은 것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배운 초보적인 교육을 넘어, 복음에서 실체를 자유롭게 누리고 즐기는 단계로 지성과 기쁨을 가지고 옮겨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따라서, 구약의 상징적 제도와 예식들이 복음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설명한 성경의 일반적인 묘사들은 우리가 제시한 원칙들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지금 제시된 관점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의 두 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통일성을 즉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데 있어 적합한 준비와 디딤돌로 기능하게 한 하나님의 계획의 진보적 성격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 두 언약의 신앙은 근본적인 요소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보다 낮은 단계에서 나타나며, 육체적 관계와 일시적 관심사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을 드러냈습니다. 반면 신약에서는 모든 것이 하늘을 향해 상승하며, 영원한 실체들이 명확하고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But as ideas and relations are more palpable to the mind, and lie more within the grasp of its comprehension, when exhibited on a small scale, in corporeal forms, amid familiar and present objects, than on a scale of large dimensions, which stretches into the unseen, and embraces alike the Divine and human, time and eternity; so the economy of outward symbolical institutions was in itself simpler than the Gospel, and, as a lower exhibition of Divine truth, prepared the way for a higher. But they did this, let it be observed, in their character merely as symbolical institutions, or parts of a dispensation then existing, not as typically foreshadowing the things belonging to a higher and more spiritual dispensation yet to come. It was comparatively an easy thing for the Jewish worshipper to understand how, from time to time, he stood related to a visible sanctuary and an earthly inheritance, or to go through the process of an appointed purification by means of water and the blood of slain victims applied externally to his body: much more easy than for the Christian to apprehend distinctly his relation to a heavenly sanctuary, and realize the cleansing of his conscience from all guilt by the inward application of the sacrifice of Christ and the regenerating grace of the Holy Spirit.

 

  • 그러나 아이디어와 관계들은 친숙하고 현재의 물질적 형태로, 작은 규모에서 전시될 때 더 명확하게 이해되며,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큰 규모로 전개되어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확장되고, 신적(神的) 요소와 인간적 요소, 시간과 영원을 모두 포함할 때는 이해가 더 어렵습니다.
  • 따라서, 외적인 상징적 제도들은 그 자체로 복음보다 더 단순했고, 하나님의 진리의 낮은 수준의 전시로서 더 높은 수준의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상징적 제도들로서, 당시 존재하던 신앙 체계의 일부로서 그렇게 한 것이지, 더 높고 영적인 미래의 체계를 전형적으로 예고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 유대인 예배자가 눈에 보이는 성소와 지상 유산과의 관계를 이해하거나, 물과 희생된 동물의 피를 외적으로 그의 몸에 적용하여 정화 과정을 거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천상의 성소와의 관계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령의 재생의 은혜를 내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그의 양심이 모든 죄책에서 정화되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But for the Jewish worshipper to do—both his own and the Christian's part both to read the meaning of the symbol as expressive of what was already laid open to his view, and to descry its concealed reference to the yet undiscovered realities of a better dispensation, would have required a reach of discernment and a strength of faith far beyond what is now needed in the Christian.

 

  • 그러나 유대 예배자가 자신의 역할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역할까지 수행하며, 상징이 드러낸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이 이미 그에게 드러난 것을 표현하는 의미로 읽으며, 동시에 더 나은 신앙 체계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실체에 대한 숨겨진 참조를 발견하는 것은, 현재 기독교인이 요구받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분별력과 강한 신앙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For this had been, not like him to discern the heavenly, when the heavenly had come, but to do it amid the obscurities and imperfections of the earthly; not simply to look with open eye into the deeper mysteries of God's kingdom, when these mysteries are fully disclosed, but to do so while they were still buried amid the thick folds of a cumbrous and overshadowing drapery. Yet let us not be mistaken. We speak merely of what was strictly required, and what might ordinarily be expected of the ancient worshipper, in connection with the institutions and services of his symbolical religion, taken simply by themselves. We do not say that there never was, much less that there could not be, any proper insight obtained by the children of the Old Covenant into the future mysteries of the Gospel. There were special gifts of grace then, as well as now, occasionally imparted to the more spiritual members of the covenant, which enabled them to rise to unusual degrees of knowledge; and it is a distinctive property of the spiritual mind generally to be dissatisfied with the imperfect, to seek and long for the perfect. Even now, when the comparatively perfect has come, what spiritual mind is not often conscious to itself of a feeling akin to melancholy, when it thinks of the yet abiding darkness and disorders of the present, or does not fondly cling to every hopeful indication of a brighter future? But even the best things of the Old Covenant bore on them the stamp of imperfection. The temple itself, which was the peculiar glory and ornament of Israel, still in a very partial and defective manner realized its own grand idea of a people dwelling with God, and God dwelling with them; and hence, because of that inherent imperfection (it was plainly declared), a higher and better mode of accomplishing the object should one day take its place.— (Jer. 3:16, 17)

  • 왜냐하면 이것은 하늘의 것(천상의 것)이 도래했을 때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불분명함과 불완전함 가운데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깊은 신비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 그것을 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두터운 어두움과 복잡한 덮개 아래 감춰져 있을 때 이를 보려는 시도와 같았습니다.
  •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단지 상징적 신앙 체계와 관련된 제도와 예배 행위 자체에 국한된 것에 대해 엄격히 요구되었거나 일반적으로 기대되었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언약의 자녀들이 복음의 미래 신비에 대한 적절한 통찰력을 결코 얻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통찰력을 결코 가질 수 없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 그 시대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특별한 선물이 가끔씩 언약의 영적으로 더 깊은 구성원들에게 주어졌고, 그들이 특별한 지식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영적인 마음의 특징은 불완전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갈망한다는 점입니다.
  • 심지어 비교적 완전한 것이 현재 도래했을 때에도, 영적인 마음은 여전히 현재의 어둠과 혼란을 생각할 때 종종 비슷한 멜랑콜리한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더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모든 희망적인 표시들에 매달리는 성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구약 언약의 가장 훌륭한 것들조차도 불완전함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영광과 장식이었던 성전 자체조차도,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는 백성이라는 위대한 아이디어를 아주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만 실현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내재적 불완전함 때문에 (이것은 명백히 선언되었습니다), 더 높은 수준의 더 나은 방식으로 그 목적을 이루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3:16-17 참고)

 

So, too, the palpable disproportion already noticed in the rite of expiatory sacrifice between the rational life forfeited through sin, and the merely animal life substituted in its room, seemed to proclaim the necessity of a more adequate atonement for human guilt, and could not but dispose intelligent worshippers to give more earnest heed to the announcements of prophecy regarding the coming purposes of Heaven. But yet, when we have admitted all this, it by no means follows that the people of God generally, under the Old Covenant, could attain to very definite views of the realities of the Gospel; nor does it furnish us with any reason for asserting that such views must ever of necessity have mingled with the service of an acceptable worshipper. For his was the worship of a preparatory dispensation. It must, therefore, have been simpler and easier than what was ultimately to supplant it. And this, we again repeat, it could only be by being viewed in its more obvious and formal aspect, as the worship of an existing religion, which provided for the time then present a fitting medium of access to God, and hallowed intercourse with heaven. The man who humbly availed himself of what was thus provided to meet his soul's necessities, stood in faith, and served God with acceptance,—though still with such imperfections in the present, and such promises for the future, that the more always he reflected, he would become the more a child of desire and hope.[10] We have spoken as yet only of the symbolical institutions and services of the Old Testament; and of these quite generally, as one great whole. For it is carefully to be noted, that the Scriptural designations of rudiments and shadows, which we have shown to be the same as typical, when properly understood, are applied to the entire mass of the ancient ordinances in their prospective reference to Gospel realities. And yet, while New Testament Scripture speaks thus of the whole, it deals very sparingly in particular examples; and if it furnishes, in its language and allusions, many valuable hints to direct inquiry, it still contains remarkably few detailed illustrations. It nowhere tells us, for example, what was either immediately symbolized, or prophetically shadowed forth, by the Holy Place in the tabernacle, or the shew-bread, or the golden candlestick, or the ark of the covenant, or, indeed, by anything connected with the tabernacle, excepting its more prominent offices and administrations. Even the Epistle to the Hebrews, which enters with such comparative fulness into the conn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and which is most express in ascribing a typical value to all that belonged to the tabernacle, can yet scarcely be said to give any detailed explanation of its furniture and services beyond the rite of expiatory sacrifice, and the action of the high priest in presenting it, more particularly on the great day of atonement. So that those who insist on an explicit warrant and direction from Scripture in regard to each particular type, will find their principle conducts them but a short way even through that department, which, they are obliged to admit, possesses throughout a typical character. A general admission of this sort can be of little use, if one is restrained on principle from touching most of the particulars; one might as well maintain that these stood entirely disconnected from any typical property. So, indeed, Bishop Marsh has substantially done; for, "that such explanations," he says, referring to particular types, "are in various instances given in the New Testament, no one can deny. And if it was deemed necessary to explain one type, where could be the expediency or moral fitness of withholding the explanation of others? Must not, therefore, the silence of the New Testament in the case of any supposed type, be an argument against the existence of that type?"[11] 

  • 죄로 인해 잃어버린 이성적인 생명(인간의 생명)과 그것을 대신하여 바쳐진 단순한 동물의 생명 사이에 명백히 존재하는 불균형은, 인간의 죄를 위한 보다 적절한 속죄의 필요성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지적인 예배자들로 하여금 하늘의 다가올 계획에 대해 예언이 발표한 내용을 더 진지하게 주목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점들을 모두 인정한다고 해도, 구약의 언약 아래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복음의 실제들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관점이 반드시 받아들여진 예배자들의 섬김에 혼합되었어야 한다는 이유를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 구약의 예배는 준비 단계의 언약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할 복음의 예배보다 더 단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접근 용이성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보이는 방식과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가능했습니다. 즉, 당시 존재하던 신앙 체계의 예배로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을 제공하고, 하늘과의 거룩한 교제를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제공된 것을 겸손히 활용한 사람은 믿음 안에 서 있었고, 하나님을 기쁘게 섬겼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에는 불완전함이, 미래에는 약속이 주어졌기에, 그가 더 많이 숙고할수록 그는 더 강렬한 열망과 희망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의 상징적 제도와 예배 의식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를 하나의 거대한 전체로서 다루었는데, 이는 구약의 모든 제도가 복음적 실제에 대한 미래적 참조로 기능했음을 성경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신약 성경은 이러한 전체를 언급하면서도, 특정 예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룹니다. 비록 신약의 언급과 암시가 탐구를 이끄는 많은 귀중한 힌트를 제공하더라도, 여전히 세부적인 설명은 놀랄 만큼 적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성막의 성소, 진설병, 금등잔대, 언약궤 또는 성막과 관련된 어떤 것들이 즉각적으로 상징한 바가 무엇인지, 또는 예언적으로 무엇을 암시했는지에 대해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 특히 히브리서조차도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논의하고, 성막에 속한 모든 것이 모형적 가치를 가진다고 분명히 언급하지만, 속죄의 제사 의식과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이를 집행하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성막의 기구와 예배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거의 제공하지 않습니다.
  • 따라서 각 모형에 대해 성경의 명시적인 권한과 지침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원칙이 심지어 모형적 성격을 인정해야 하는 구약의 영역조차도 그리 멀리 이끌지 못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정은 대부분의 세부사항을 원칙적으로 다루지 못하게 제한된다면 별로 유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러한 세부사항들이 모형적 특성과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 실제로 마시 주교(Bishop Marsh)는 이렇게 실질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는 특정 모형에 대한 설명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에서 일부 모형의 설명이 제공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모형의 설명이 필요하다면, 다른 모형들의 설명을 생략하는 것이 어디에서 도덕적 적합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따라서 신약이 어떤 모형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그 모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않겠습니까?”【11】

 

 

 

 

 

 


[1] "We do not know what right divines have to construct a system of theological types, instead of a system of Scripture types. We are sure that had they kept to the Scripture use of the term, instead of devising a theological sense, they would have been saved from much extravagance, and evolved much truth."—M'Cosh, in "Typical Forms," p. 523. 

 

[2] The question, whether the things of creation should be formally treated as typical, will be considered in Ch. IV. 

 

[3] Marsh's Lectures, p. 371.

 

[4] 1 Cor. 10:11; Heb. 11:40.

 

[5] Eph. 1:10.

 

[6] Luke 1:78; 1 John 2:8; Rom. 16:25, 26; Col. 1:27; 1 Cor. 2:7, 10.

 

[7] Col. 2:17; Heb. 8:5.

 

[8] Matt. 11:11, where it is said respecting John the Baptist, "notwithstanding he that is least (ὁ μικρότερος)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The older English versions retained the comparative, and rendered "he that is less in the kingdom of heaven"—(Wickliffe, Tyndale, Cranmer, the Geneva); and so also Meyer in his Comm., "he who occupies a proportionately lower place in the kingdom of heaven." Lightfoot, Hengstenberg, and many others, approve of this milder sense, as it may be called; but Alford in his recent commentary adheres still to the stronger, "the least;" and so does Stier in his Reden Jesu, who, in illustrating the thought, goes so far as to say, "A mere child that knows the catechism, and can say the Lord's prayer, both knows and possesses more than the Old Testament can give, and so far stands higher and nearer to God than John the Baptist." One cannot but feel that this is putting something like a strain on our Lord's declaration.

 

[9] Rev. 1:8; Luke 2:25; Acts 10:43, 4:12; Rom. 3:25; 1 Pet. 1:10-12, 20.

 

[10] If any one will take the trouble to look into the elder writers, who formally examined the typical character of the ancient symbolical institutions, he will find them entirely silent in regard to the points chiefly dwelt upon in the above discussion. Lowman, for example, on the Rational of the Hebrew Worship, and Outram de Sac., Lib. i., c. 18, where he comes to consider the nature and force of a type, gave no proper or satisfactory explanation of the questions, wherein precisely did the resemblance stand between the type and the antitype, or how should the one have prepared the way for the other. We are told frequently enough that the "Hebrew ritual contained a plan, or sketch, or pattern, or shadow of Gospel things:" that "the type adumbrated the antitype by something of the same sort with that which is found in the antitype," or "by a symbol of it," or "by a slender and shadowy image of it," or "by something that may somehow be compared with it," etc. But we look in vain for anything more specific. Townley, in his Reasons of the Laws of Moses, still advances no farther in the Dissertation he devotes to the Typical Character of the Mosaic Institutions. Even Olshausen, in the treatise formerly noticed (Ein Wort über tiefern Schriftsinn), when he comes to unfold what he calls his deeper exposition, confines himself to a brief illustration of the few general statements formerly mentioned. See p. 46.

 

[11] Lectures, p.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