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웨이처치 설교및 강의/예수교회회복모임

2/20. 예교모 말씀. 꽉찬순종, 내게 준 기업(창3:19-20). 김용의 선교사

1. 도입. 

다비드 조각상 - 어떻게 저렇게 멋진 작품이 나왔을까? - 미켈란젤로 답: 돌 덩어리 안에서 작가의 눈에는 이미 들어와 있었던 완성품이었다. 없는 다윗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다윗 아닌것들을 벗겨냈더니, 다윗이 나왔다. 예수 교회 특징도 그런 것 같다. 교회의 다양한 형태가 역사상 존재했다. 그들 안에는, "예수교회"로 들어난 참된 교회의 공통 특징이 있다. 교회를 인위적으로 꾸며둔 부분들을 벗겨내면, 온전한 예수 교회가 드러난다. 본질이 아닌것들을 빼내자. 

잠언 25:4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종교 집단으로써의 교회를 벗겨내고, 예수 생명만 남은 교회를 기대하자. 생명의 교회가 드러나기를 기대하자. 껍데기와 거푸집을 걷어내자. 예수면 충분한 예수 교회여 일어날 찌어다! 선포하자. 누가 알아주든 말든, 주님께 집중하자. 아닌것들을 제거 하시도록 하자. 기도해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순전하게 해 오셨음을 찬양하자. 예수님만으로는 안될것 같던, 현상유지, 타협하지 못하도록 주님이 계속 주께로 이끌어오셨다. 2년간 여정중 작년 11/5에, 주님께서, 예수교회회복을 위한 원데이 컨퍼런스를 진행케 하셨다. 급기야. 예수교회 개척 원정대가 출범 하게 되었다. 

 

2. 예수교회의 진정한 특징은 무엇인가?

(1) 꽉 찬 순종

예) 비싼 코스요리 먹고 와서 컵라면 끓여먹는 듯한 공허한 요리 말고, 꽉찬 요리가 있다. 

꽉찬 순종이란, 여지가 남아있지 않은 순종이며, 여한이 남아있지 않은 순종이다. 지금 이 순간이 생의 마지막 순종이듯, 예수께 순종하는 순종이다. 

(2) 내게 준 기업

사람마다 똑같은 사람 하나 없다. 그렇듯, 인생마다, 사명이 다르다. 드러난사람보다 가리워진 사람들이 불평을 더 하거나, 덜 가진 사람이 더 불평한다. 그러나 예수 교회는 빈부귀천 각각의 상대적 아쉬움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 16:5-6)

예수 교회의 본질적 특징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제거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어떤 상황에서도 "꽉찬순종"을 드리는 예수 교회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고난과 역경도, 합력해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며 영광을 돌려드리는 예수교회로 우리 모두를 세워 주옵소서. 아닌것들을 인정사정 두지 말고 제거하소서. 나를 통해 예수 교회를 맘껏 드러내 주소서!

 

3. 요셉의 생애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교회의 특징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 37:19-20)

요셉. 인간적으로 보면, 슬픈 인생이었다. 너무 안타까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탄생부터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 야곱, 야곱은 자기 인생에 자기 원하는대로 일이 잘 풀린 적이 없었다. 남은 거저도 되는 일이 야곱에게는 어려운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꼬인 인생을 살았다. 사랑하는 라헬을 7년이나 기다렸던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7년을 기다렸음에도 결혼 첫날밤에 라헬을 빼앗겼다. 라헬이 죽을땐 어땠나? 막내 낳다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하고는 죽었다. 라헬 입장에서 야곱은 "내 남편"이 아니라, 공동 남편이었다. 애가 생기지 않아서 고통당했다. 요셉을 낳았으나, 그것은 짧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둘째, 베냐민을 여행중 난산했다. 그때 그녀는 슬픔중에 죽었다. 요셉.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 엄마 잃은 아빠를 보며 자랐다. 야곱은 병적일 만큼 요셉을 편애했다. 이로부터 가족의 불행이 깊어졌다. 불행한 가족에게 불행의 원인을 묻는다면, 그것은 요셉이었다. 

요셉은 누구보다 이스라엘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평생 외국인으로 살았다. 이스라엘 12지파에 들어갈수도 없었다. 약속의 땅이 아니라, 평생 이방의 땅에 살다 그곳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인간적으로 볼 때, 요셉은 꼬인 인생, 어려운 인생이었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다. 우리는 화려한 헤피엔딩 같은 "국무총리"결말을 알아서 잘 생각 못한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 이름을 보라. 축복의 땅은 형들이 다 차지하고 있다. 요셉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일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기대와 반대로 가고 있었다. 딱 한가지 확신만 좋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 "므낫세=나로 내 아비의 집의 일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 요셉은 형들에 의해 존속살해 당한 인생이었다. 2중, 3중으로 살해 당했다. 그는 적이 아닌 형제들에 의해 배반 당했고, 죽임 당했고, 버림 받았고, 노예로 팔렸다. 애굽 최고의 실권자, 보디발 장군의 집에, 요셉 그는 몇푼 돈에 팔려 온 외국인 노예 청소년이었다. 중년 부인 강간 미수죄를 뒤집어 쓰고, 오명을 벗을 길도 없었다. 그의 인생은 억울하고 분하고 버림받고 보상도 없었던 인생이었다. 결혼도 원하는 결혼이 아니었다. 온제사장의 딸과 정략 결혼 당했다. 인간적으로 최소한의 행복꺼리도 전혀 누려본 적 없는 불쌍한 인생이었다. 

나는 최근, 주의 일을 이름없이 빛도 없이 하는 사람을 봤다. 동역자들을 떠나 보낸 사람. 외롭고, 병들고, 한계에 맞닿은 사람. 오직 하나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나섰던 사람. 그러나 가장 어려운 순간에 어떤 도움도 없이 혼자 남아야 했던 순종의 사람. 그를 보는데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순종은 꽉 찬 순조이어야 해". 그리고 요셉이 떠올랐다. "해도 너무 하신다. 숨통좀 틔여 주시면 안되나? 겹치는 일마다 되는 일마다 누가 작정이라도 한 듯, 가혹한 어려움에 겹겹이 부딪히고 있을까?" 미켈란 젤로의 입장을 다시 생각해보자. "꽉찬순종"이 되기까지, 순종처럼 보이는 섞인 마음을 주님이 그냥 두고 보시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예수 교회가 되기까지 인간의 의지, 방법, 계획을 다 떨어져 나가게 만드시는 주님의 손길이 보였다. 뭔가 바랄게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은 은혜를 주신 주님이 보였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이 말씀 하시느니라" 신바람 나서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주장하던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 하신다. 

이사야 44: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나는 언제 주님의 소유가 되었나?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롬 5:8). 가장 순전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욥의 인생처럼, "이런데도 주님을 예배할꺼야?! 차라리 저주하고 죽으라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떻게 헌신하고 사랑했는데 이럴수가 있어? 그런데도 너는 주님을 향한 순결을 지킬꺼야?"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대답은?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꽉 찬 순종을 하렵니다. 나의 모든 순종은 오직 예수님 떄문에 하는 순종입니다. 나를 나되게 하신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립니다. 내 몫의 순종의 십자가를 주님이 지워 주셨으니, 생명 다해 바치고 순종할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교회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다. 

 

4. 창세기 3 족장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교회의 특징

아브라함을 보라. 믿음의 순종을 했다. 아들을 바치기까지 순종했다. 복의 근원이 되고, 열방의 아비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따랐다. 구원의 일, 새 인류를 세우는 하나님의 일을 믿음으로 따라가며 순종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는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던 인물이었다.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었고 여기에 예수교회의 특징이 있다. 

한편 이삭은 사랑의 순종을 했다. 늙은 아버지가 설명도 없이 번제(짐승을 목을 따고, 잡아 가죽을 벗기고 불로 태우는 번제)를 봐왔던 이삭이 아버지께 자신의 몸을 제물로 순종해 드렸다. 제사 전문가 아브라함이, 제사 드릴때마다, 흠없는 제물을 드렸다. 이를 이삭은 보고 자랐다. 가장 아끼는 양을 바치는 것을 늘 보아왔다. 설명이 없어도, 아버지가 자기 몸을 요구했을때, 그는 긴말 없이 순종했다. 그 순종의 이유는 무엇인가? 100살에 얻은 자식인데 오죽 사랑했을까? 나도 그랬다. 만약 자식에게 죽을 일 생기면, "내가 대신 받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본능적으로 나오더라. 더군다나,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100살에 얻은 자식인데 오죽 더 했을까? 이를 잘 알던 이삭이 제 발로 가서 아버지의 칼날 앞에 제 몸을 내놓았을까? 이것은 주님이 받으신 순종이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에 이를 막으시며 말씀하셨다. "네 사랑하는 독자 아들 이삭을 아끼지 않고 나를 경외하고 내게 드리는 너를 보고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내가 이제야 알았노라" 이삭이 자기 몸 내놓은 것은 아버지와 자식 서로간에 이뤄졌던, "사랑의 순종"이었다. 자식 바치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이삭 번제, 사랑의 순종을 해봤던 아브라함과 이삭은 충분히 공감하지 않았을까? 구원의 유일한 길. 아들 죽여서 우릴 살린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순종을 보라. 이삭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앞에 사랑의 순종을 드렸다. 죽는 날까지, 가나안과 섞이지 않는, 평범치 않은, 끝까지 외로운 삶을 살았을 법한 아브라함을 보라. 거룩한 삶을 살면 친구가 끊어진다. 기독교의 복음을 실제로 믿는 사람은 세속 어디가서 섞이기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야곱은 언약의 소망으로 순종했다. 그는 능력은 없고 성질은 까칠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자답지도 않고, 남편 답지도 않고, 아들 답지도 않고, 통빡 돌리다가 어려움만 가중되었던 요란한 인생이었다. 그런 인물에게도 장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열방의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순종이었다. 그는 언약을 소망으로 붙들며 살았다. 내 아들 하나는 고1때 자퇴하고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때 나는 그에게 "성경의 꼴통이 되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때 잠시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다. 세상을 가장 잘 아는 것은 하나님 뿐이시고,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한 것 뿐이다. 이 생각을 하니, "성경 꼴통"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성경 말씀을 소망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순종이 바로 야곱의 순종과 같은 것이다. 믿음의 순종, 사랑의 순종, 소망의 순종이 창세기 12장부터 끝까지 진행된다. 그러다가 창세기 27장 2절에 이렇게 나온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창 37:2)

야곱의 족보는 이렇다 해놓고는, 야곱 이야기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가 창세기 마치기 까지 나온다. 왜??

 

5. 3 족장들의 순종의 꽃이 요셉이었다. 

요셉은 3족장들의 순종의 꽃처럼 핀 인물이었다. 그는 아담 이래로 가장 아담같은 인물이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언약 확증해 주셨던 장소 벧엘을 기억해보라. 또 얍복강에서 절박하게 마지막으로 홀로 하나님과 씨름했던 야곱의 일을떠올려보라.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그저 죄인 떨거지에 불과한 야곱이었다.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을 붙들고,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했다. 야곱은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만큼은 죽어도 못놓는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이런 자세가 있다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자괴감의 공격 앞에서도, 대답이 없어도, 이해가 안가도, 생명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기쁨의 일이다. 나도 의지 박약자다. 세상말로 팔자도 사납고, 배경도 없고,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는 인생일찌언정, 예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이것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였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전 5:12-14)

얍복강가 씨름, 물고 늘어지는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고, 진정한 무쓸모 인생이 되었다. 그때, 이스라엘 정체성을 받았다. 나의 눈물겨운 최선이 박살이 나던 얍복강이 야곱의 삶에 있었다. 이것이 야곱에게 순도 100%의 순종, 꽉 찬 순종을 드리는 운명을 만들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빚어가고 계신다. 설명안되는 고난, 공격, 꼬인 미래...... 해석을 하지 말고, 해석보다 더 중요한, 주님이 계신다는 기억을 하자. 주님이 원하시는 꽉찬 순종이 될 때 까지, 찌꺼기를 제거해 나가시는 주님을 붙들자. 오직 주님이 남기고 싶으신 것들만 남겨 주옵소서. 예수면 다가 되게 하소서. 내게도 브니엘을 외치는 (하나님을 뵙고도 죽지 않았다!)순종을 주소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은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하자. 

그런 야곱의 족보를 창 37:2에서 요셉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요셉교회. 우리의 이름을 요셉의 족보에 넣어서 생각해보라. 야곱의 족보가 요셉으로 열매맺게 하셨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아닌가! 요셉의 생애는 예수님을 나타낸다. 므낫세="나로 내 아버지의 집의 일을 잃어버리게 하셨다" 이렇게 상상해봤다: "아빠가 나 없어진거 알면 아마 아빠 큰일날꺼야... 형들, 아빠 생각해서 나좀 돌려 보내줘..." 노예로 맞이해야 했던 그 끔찍한 세월 앞에선 어린 요셉의 심정을 상상해봤다. 17세 소년이 당했던 숨죽인 오열과 트라우마를 떠올려보라. 지울수 없는 고통의 기억들을 "므낫세", 즉 "다 잃어버리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요셉이었다. 우리가 우울증이니, 트라우마니 해도, 요셉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자식 이름을 므낫세에 이어서, 에브라임이라고 지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창41:51, 52) 

 

6. 교회와 "부르심"

아버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 이야기를 요셉은 어려서 들었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꿈을 꾸었으니, 어떻게 장자의 축복과 연결이 안되었을까? 하나님의 이어지는 약속을 요셉은 꿈으로 받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가치를 양보할수 없는 오직 예수 교회여야 한다. 복음은 영원히 세세토록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못보고 죽은 예수교회의 영광을 우리는 볼 것이다. 요셉은 주님이 주신 꿈, 부르심을 확고히 붙들었다. 형들이 총리 된 요셉 앞에 왔다. 요셉은 그때 보복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보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님의 꿈을 붙들었다. 당신들의 악 조차도 하나님이 선용하셨다. 보복당할까 두려워 말라며, 평생의 한을 부르심으로 해결했다. 예수 교회된 우리는 과거나 한에 묶여서 살아가는(상처니, 트라우마니...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새인류, 새백성되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았다. 우리는 부르심만 남은 사람들이다. 부르심만 남긴 사람들이다.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부르심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부르심에 온전히 붙들려있는 사람이 되자. 누구도 돌보지 않고,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때에, 그때도 부르심만 붙들자. 십자가 같은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약속의 땅에서 버림받고, 죽음보다 못한 노예로 팔려감으로써 꿈은 끝나는 것 처럼 보였다. 우리도 그렇다. 예수교회로 부르심은 반드시 도전을 받는다. 부르심을 지켜내려고 애쓸수록 항상 불안한 현실의 도전이 있다. 그놈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던 형들에게 애워 싸였던 요셉처럼 부르심의 사람들은 도전 받는다.

 

7. 교회와 "하나님의 주권"

창 38장. 요셉이 버려진 직후의 이야기가 나온다. 야곱 가족의 환경이 나온다. 유다의 이야기를 보라. 아브라함 약속의 핵심을 깨뜨리던 유다의 모습이 거기 나온다. 야곱의 정통 혈통이 가나안 여자와 결혼한다. 그 아버지 야곱은 신앙과 약속의 말씀을 따라, 70이 넘도록 결혼을 안했다. 그러나 그 아들 장자, 정통 혈통은 막나간다. 자신의 가족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도 돌이키지 않는다. 집구석이 다 하나님 여호와를 경홀히 여기며 산다. 유다를 대표로 기록함으로써, 나머지 아들들 이야기는 할 것도 없다. 믿음이 있는 놈은 핍박해서 노예로 팔아먹고, 기득권을 가진 정통 혈통은 믿음 없이 불경건의 대표 선수들로 살았다. 아내 죽은 뒤에도 정신 못차리고, 창녀를 찾아간 유다. 하나님을 떠났으나, 대가 끊기는 것은 싫었던 다말의 눈에 장자의 축복, 그 약속의 마씀은 어땠을까? 복음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신앙인들을 보는 이방인들의 눈에 뭐가 보일까? 그 집안의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찰ㅇ세기 38장에 나온다. 믿음있는 놈은 죽이고, 믿음 없는 놈은 약속의 땅 차지하고 앉아서, 우리가 정통이라 주장하며, 이방인 여자 데려다가 가족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살고 있다. 야곱때에, 야곱의 그릇, 야곱의 가족이 그랬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인간의 실력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만 유지된다. 하나님이 주관 하신다. 예수교회도 그렇다. 하나님이 구관하신다.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와 세라를 보라.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이 끊어버리려고 할 때 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셨듯, 오늘날 예수교회도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왕성하게 될 것이다. 

나머지가 다 실페해도, 주님은 요셉 한 사람 속에 이스라엘 전부를 담아 두셨다. 오늘날 예수교회도 세상에 섞이지 아니한, 이스라엘이 그 몸에 담겨있는 "나"를 통해 역사 하실 것이다. 예수교회는 준비된 "나", 오직 예수로만 설명이 가능하고, 예수로 충만하고, 예수만 쫓는 나를 통해 이뤄질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순종, 야곱의 소망이 모두 요셉 안에 보인다. 예수면 충분한 사람의 모델이 요셉이다. 섞인 신앙, 섞인 동기, 섞인 사명을 다 덜어내시고, 순전한 순종만 남은 예수의 사람, 요셉과 같은 한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단련 시키고 계신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3)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인생이 예수교회의 특징이다. 세상적으로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선을 이뤄 가시는 것이 형통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것을 보디발이 알 정도로 요셉은 형통했다. 내 원하는대로 안되었지만, 그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까지 도망안가고, 예수님 따라붙어서, 천연덕스럽게 예수 잘 믿는 것 처럼 처음부터, 그랬던 것 처럼 여기 앉아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에게 형통의 최고 증거는 믿음 안떠나고 예수 붙드는 것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최고의 형통이다. 

모래 위의 발자국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었네.
하늘에는 내 인생의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네.
나는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을 바라보았네.
때로는 두 개의 발자국이 있었고,
때로는 하나의 발자국만 있었네.

그것이 나를 괴롭게 했네.
왜냐하면 내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절망에 빠져 있었을 때,
항상 하나의 발자국만 있었기 때문이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물었네.
"주님, 주님께서 저와 함께 걷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하지만 제가 가장 힘들고 절망했던 순간에는
오직 하나의 발자국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 순간에 주님은 저를 떠나신 건가요?"

주님께서 대답하셨네.
"내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하며
한순간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
네가 가장 큰 시련을 겪고 있었을 때,
네가 보았던 그 하나의 발자국은,
내가 너를 업고 가던 발자국이란다."

원본: Footprints in the Sand (모래 위의 발자국)-메리 스티븐슨(Mary Stevenson)-1936

One night I dreamed I was walking along the beach with the Lord.
Many scenes from my life flashed across the sky.
In each scene, I noticed footprints in the sand.
Sometimes there were two sets of footprints,
other times there was only one set of footprints.

This bothered me because I noticed that during the low periods of my life,
when I was suffering from anguish, sorrow, or defeat,
I could see only one set of footprints.

So I said to the Lord,
"You promised me, Lord,
that if I followed you,
you would walk with me always.
But I have noticed that during the most trying periods of my life,
there have only been one set of footprints in the sand.
Why, when I needed you most, have you not been there for me?"

The Lord replied,
"My precious child, I love you and will never leave you.
During your times of trial and suffering,
when you see only one set of footprints,
it was then that I carried you."

요셉의 형통 = 내가 너와 함께 했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주님이 내게 줄로 재어준 그 구역은 아름답도다! 요셉의 마지막 찬양도 이런 내용 아니었을까? 누군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버텨서 섬겨주어야 한다. 숨은 그림자처럼 평생을 이해 안가는 상황을 통과했던 요셉의 형통. 그의 모습이 예수교회의 모습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새끼 발가락조차, 없으면 불구다. 연약해도 나는 꼭 필요하다. 주님은 모두의 자리를 그만의 자리로 주셨다. 그만의 사명을 주셨다. 그게 너무 아름답다. 비교 대상이 아니다. 요셉은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그 길을 갔을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형통이니까. 그것이 주님과 동행이며, 주님이 줄로 재어주신 구역이니까. 가장 아름다운 나만의 자리를 정해주신 주님 앞에 순종을 드리자. 꽉찬 순종을 드리자. 자기 몫의 순종을 드리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은.... ▶ 예수교회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준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