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집필공간/헤브론성경통독_책

8장. 선지서2: 예수님은 왜 구원하실까? (해브론성경통독책 초안 작성중)

8장. 선지서2: 예수님은 왜 구원하실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만을 말씀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고통을 살아내신 분이었다. 그분이 기도하실 때는 땀방울이 피가 될 만큼 애타셨고, 예루살렘을 보며 통곡하셨다. 예수님의 구원은 차가운 판결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토스가 육신을 입고 걸어온 길이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그 사랑의 결을, 선지자들의 파토스를 통해 더듬어가 보려 한다.

 

1. 하나님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 파토스와 양가감정

선지서를 읽다 보면 혼란스러운 마음이 든다. 하나님은 한편으로 진노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눈물 흘리신다. 심판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위로와 회복의 약속이 시작된다. 백성을 부수시는 분이시고, 동시에 싸매시는 분이시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다.

이에 대해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J. 헤셀은 그의 저서 『선지자들(The Prophets)』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파토스를 증거한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이나 격정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깊은 감정, 곧 고통받고, 분노하며,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파토스는 하나님의 고통이다. 선지자들은 바로 그 고통을 하나님 대신 세상 앞에 쏟아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다. 그분은 죄인을 심판하신다. 동시에 그를 구원하기를 끝내 포기하지 못하신다. 죄를 정죄하면서도, 여전히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호세아 6장이 대표적이다. 하나님은 “내가 찢었으나 고치고, 때렸으나 싸매리라”고 하신다. 찢는 손과 싸매는 손이 동시에 하나님의 손이다.

또한, 예레미야 3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에브라임을 책망하였으나, 그가 돌이키므로 내 창자가 들끓고 그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없도다”(성경구절주소). 파토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느끼는 양가감정이 떠오르게도 한다. 이것은 분노와 긍휼이 함께 흐르는 감정의 깊이이다.

에스겔 18장도 마찬가지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랴? 그가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성구주소)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이지만, 그 심판 안에서도 구원의 길을 여시는 분이다. 이 긴장과 깊이가 선지자들을 무릎 꿇게 했고, 이 감정의 파토스가 예수님의 눈물과 십자가로 이어진다.


2. 왜 하나님은 돌이키라 하시는가 – 회개의 초대

선지서를 읽다 보면 가장 많이 반복되는 구절 중 하나가 있다. “돌아오라.” 하나님은 백성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래야 내가 너희를 고치리라.” 심판의 메시지 한가운데서도, 회개의 초대는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한 경고는 회복을 향한 초청이었다. 이사야서에서도 같은 흐름이 보인다. 1장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제사를 역겹다고 말씀하시지만,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사 1:18) 책망은 끝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연다.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울면서도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다시 이끌어 들이리라.”(렘 3:12)

에스겔 역시 외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가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18:23)

하나님의 회개 촉구는 깊은 기다림에서 비롯된 사랑의 언어다. 하나님은 마치 길 잃은 자식을 찾는 아버지처럼 백성을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 회개의 여정에서 끝내 예수님을 보내신다. 회개의 문은 열린 채로 있었고, 예수님은 그 문을 직접 열고 들어오신 분이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청을 하신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의 문을 통해 시작된다. 심판은 그 문 앞에 선 손짓이며, 구원은 그 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품이다.

 

 


 

3.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 구원을 가로막는 자들

하나님의 구원은 회개의 문을 통해 임한다. 그러나 그 문 앞에 서서 사람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들도 있다. 성경은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 부른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시지도 않았는데 나가서 말하고, 보지도 않았는데 보았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전한다.

예레미야 23장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명히 구별한다. 거짓 선지자는 평안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평안하리라”고 말한다. 회개가 필요한데도 회개를 말하지 않고, 상처 입은 백성에게 깊이 진단하지 않고 덧붙이는 말로만 위로한다. 그들의 말은 부드럽지만 그 끝은 멸망이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잘못된 예언만에만 있지 않다. 그들의 거짓은 장벽이 된다.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하게 막는 영적 장애물이 된다. 그들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되, 마음을 찔러 돌이키게 하지는 않는다. 참된 선지자는 듣기 힘든 진리를 말하되, 그 안에 생명의 길을 비춘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고, 그 말씀 때문에 고통받는다. 예레미야는 “주의 말씀이 내 뼛속에 사무쳐 불처럼 타올라 견딜 수 없다”(렘 20:9)고 했다. 에스겔은 말문이 막혔고,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통째로 예언의 도구로 살아야 했다. 그들은 편하지 않았고, 인기도 없었으며, 종종 외면당했다.

예수님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의 인기를 얻고자 율법을 이용했고, 회개 없는 평안을 말했으며,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죽음으로 가득한 자들이었다.

구원을 가로막는 것은 외부의 핍박이 아니라, 내부의 거짓에 있었다. 회개의 문을 향해 가는 길목에 놓인 그 왜곡된 말들을 분별해야 한다. 참 선지자의 말은 아프지만 생명을 살린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도 그랬다. “회개하라”는 말은 거절당할 수도 있는 말씀이지만, 진짜 구원이 시작되는 유일한 초대였다.


4. 예수님과 선지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은 '말씀 그 자체'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 14).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곧 하나님 자신이셨다.

신명기 18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너희 가운데 너희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니”라고 하셨다. 이 약속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적 선지자에 대한 예언이었다. 그리고 신약의 저자들은 이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확신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예수님은 선지자의 전통을 따르셨다. 회개를 외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말씀을 통해 병든 자를 고치셨다. 그러나 그분은 단지 ‘선지자처럼’ 행동하신 것이 아니라, 참 선지자의 정의를 완전히 구현하신 분이었다. 그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셨고(요 12:49),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셨다(요 5:19).

히브리서 1장 1-2절은 말한다.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 최종 계시로 오신 분이셨다. 그 안에는 이전 선지자들이 나눠서 말했던 모든 조각들이 하나로 모였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고난도 감당하셨다. 조롱당하셨고, 거절당하셨고, 끝내 죽임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선지자의 사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증거였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이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그는 단지 선지자의 말을 반복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신 분이다.

 


 

5. 결국 복음은 무엇인가 – 예수님의 몸을 쪼개어 보여준 하나님의 마음

복음은 예수님의 몸이 찢긴 자리에서 나온, 복된 소식이다. 죄를 심판해야 했던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위, 예수님의 몸을 통해 전해졌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파토스를 몸으로 살아내셨고, 죽으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홀로 받으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을 세상에 쏟아내셨다. “하늘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생명의 길을 여셨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셨다(마 20:28). 그 희생은 인간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동시에 죄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구원의 길이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하신 최종, 최선의 말씀이다. 심판을 선포하는 대신, 자신이 심판을 짊어지신 사건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파토스가 드러난 자리다. 공의와 사랑, 진노와 긍휼이 찢기고 쏟아진 자리다.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셨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마음을 찢어 보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랑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품 안에서, 함께 죽는 것이다. 또한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연합하여,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