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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공간/헤브론성경통독_책

10장. 4복음서: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헤브론성경통독 책 초안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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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4복음서: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네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에를 서로 다른 관점, 다른 흐름, 그리고 다른 이야기로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속에서 흘러나오는 한 가지 고백이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4복음서는 예수 전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고, 어둠을 가르는 빛이며, 죄인을 구원하는 생명이다. 4복음서를 읽는다는 것은, 네 방향에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한 분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여정과도 같다.

이제 우리는 4복음서를 살펴보려고 한다. 말씀을 품은 왕, 고난을 짊어진 종, 기도하는 인자, 하나님이신 구원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묻는다.
"나는, 그분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1. 네 개의 복음서, 하나의 이야기 – 왜 네 권이 필요한가?

예수님의 생애는 너무 크고 깊었다. 하나님은 네 사람을 세우셔서, 예수님의 생애를 담아주셨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가 한 분, 예수님을 보여주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한다.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성령 하나님은 마태의 눈으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게 하셨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오래 기다려온 메시아가 오셨다."  

마가는 빠르게 달려갔다. 그는 고통받는 세상을 보았고, 거기에 달려오신 예수님을 증언했다. 마가복음은 행위로 가득 차 있다. 말보다는 행동, 설명보다는 치유를 보였다. “곧,” “즉시”라는 단어가 계속된다. 구원은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발걸음이었다.

누가는 의사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자, 소외된 자, 잃어버린 자들의 편에 서셨던 예수님을 기록한다. 누가는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누가복음은 기도로 시작해 성령으로 숨쉰다. 누가복음 전체는 기도하는 인물들,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성령의 임재와 활동이 아주 생생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요한은 가장 깊은 심장을 들여다보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는 말한다. 예수는 단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요한복음은 물과 피,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사이를 왕래하며, 모든 경계를 넘어 예수님을 증언한다.

복음서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네 방향에서 바라본 하나의 진실이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한 분이셨고, 그분의 공생애 사역은 4개의 관점으로 기록되게 하나님이 역사 하셨다. 

 

2.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들 – 제자화의 시작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 사역의 보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계속 살아가게 될, 교회의 씨앗들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곧 제자를 만드시는 일이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4-15)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은 ‘사람’에 집중하셨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를 돌보시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다. 그러나 그 모든 사역의 한가운데에는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면서도, 비유를 말씀하시면서도, 언제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눈으로 보게 하고, 귀로 듣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게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지 않으셨다. 거대한 건물을 짓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교회가 되었다.

오늘 우리도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은 여전히 사람을 통해 사람을 세우신다. 교회는 사역을 위한 모임이 아니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분과 함께 거하며, 그분께 보내심 받은 이들이 모인 곳, 그것이 교회다.

복음은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이어졌다.

열두 제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마 10:2-4).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그리고 가룟 유다.
그들은 어부였고, 세리였고, 열심당원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부르셨는가?
마가복음은 말한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어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시려 하심이라"(막 3:14-15).
예수님은 제자들을 단지 가르치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함께 걷게 하시고,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부르셨다.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8, 막 10:45).
예수님의 부르심은 특권이 아니라 섬김이었다.
제자는 배움을 넘어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셨다.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보내시고, 실패하게 하시고, 다시 세우셨다.
그 길은 쉽지 않았지만, 함께하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세상에 심으셨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라."

 

 

3. 마태와 마가 – 왕과 종으로 오신 예수님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보았다. 그는 유대인들의 오랜 기다림을 기억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다윗에게 주신 언약, 그리고 그 줄기를 따라 오신 한 분. 마태는 외친다.

“그분이 오셨다. 너희가 기다려온 메시아가, 바로 이 예수다” (성구 넣기)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한다. 여자의 후손, 다윗의 씨가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그 족보 위에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진다. 왕으로 오신 분. 그러나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길을 가시는 분. 십자가를 향한 왕, 겸손과 섬김으로 통치하시는 왕.

마가는 예수님을 종으로 보았다. 마가는 멈추지 않았다. "곧," "즉시," "또한"—마가복음은 쉼 없이 달린다. 구원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예수님은 머물지 않으셨다. 고통받는 자에게 달려가셨고, 병든 자를 찾아가셨다. 침묵하지 않고, 지체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으셨다.

마가가 본 예수님은 종이었다. 자기를 낮추어 섬기신 분.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분. 왕관 대신 가시관을 쓰고, 보좌 대신 십자가를 지셨다.

왕이신 예수님.
종이신 예수님.
두 복음서는 서로 다른 눈으로 같은 분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이 왕을 따를 수 있겠느냐?"
"너희는 이 종의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

 

3. 마태와 마가 – 왕과 종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다. 그러나 세상이 아는 왕들과는 달랐다. 그분은 영광을 두르고 오지 않으셨고, 군사와 권력을 이끌고 오시지도 않으셨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분이시다. 약속을 따라 오신 왕,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왕. 그러나 그분이 택하신 길은 죽기까지 섬기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그 왕은 성 안으로 당당히 입성하지 않았다. 나귀 새끼를 타고, 수많은 환호와 오해 속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칼을 들지 않으셨고, 심판을 외치지 않으셨다. 대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자기를 버리기 위해 성으로 향하셨다.

마가는 또 다른 눈으로 예수님을 본다. 구원은 설명이 아니었다.  구원은 병든 자의 손을 잡는 것이었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고, 주저 없이 고통 속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종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메우기 위해, 자기 몸을 허물어 바닥까지 내려가신 종.  

그는 섬김을 받으려 오지 않았다. 섬기러 오셨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걸어오셨다.  
마가는 그 걸음을 놓치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걷는 발자국, 눈물로 얼룩진 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꿇어 앉아 기도하던 새벽.

왕이신 예수님.  
종이신 예수님.  

마태와 마가는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 같은 분을 가리켰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까지 걸어가신 사랑.  
왕의 권세로 내려앉은 종의 무릎.  
십자가는 그 둘의 만남이었다.

그분은 세상의 방식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이 걸어간 길은, 가장 확실한 구원의 길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왕은 무너졌고, 종은 승리했다.  

 

 

4. 누가와 요한 –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인자(한자표기)셨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깊고 넓은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말씀한다. 그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과 세리들까지 품으셨던 그분의 손길은 희망을 전하는 손이었다.

누가복음은 기도로 시작해 성령으로 숨 쉰다. 기도하는 인물들,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그 구속의 길을 가기 위해 항상 기도하시며,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계셨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기록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신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빛을 비추셨고,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셨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신적 본질을 강하게 부각시키며,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다. 

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다.  그분은 단지 육신을 입은 인간이 아니라,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그분의 말씀과 삶 자체가 **하나님의 나타남**이었다.

누가와 요한.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예수님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본 예수님은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자로 오셨고, 하나님으로 오셨다.  그분의 고난과 영광, 죽음과 부활은 한 분 예수님에게서 모두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그분을 보내셨고,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5. 오늘, 나의 복음서는 써지고 있는가

복음서는 살아 있는 말씀이다. 4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생애는, 그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빛이다. 복음서는 우리가 복음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부름이 담겨 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가?
나는 예수님의 삶을 어떻게 따라가고 있는가?
복음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은 오늘 나의 이야기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순한 신앙 고백으로 끝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분을 따르는 길, 그분을 전하는 삶, 그분을 증언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복음서의 참된 의미이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내 삶이 복음의 계속된 증언이어야 한다.

오늘도 복음서는 나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그분이 나에게 주신 사명, 나에게 주신 복음,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복음은 결코 나 혼자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은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들에게도 복음의 말씀이 살아나고, 그들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복음서는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써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