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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공간/헤브론성경통독_책

12장. 서신서1: 예수님은 교회를 어떻게 세우시고 계실까? (헤브론성경통독 초안 작성중)

바울은 원래 복음의 적이었다. 예수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분노가 일었고, 교회를 짓밟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죽이지 않으시고 부르셨다. 다메섹 길 위에서 눈을 감기시고, 마음을 열게 하셨다. 바울은 심판 대신 은혜를 만났고, 핍박자에서 사도로 다시 태어났다. 그가 만난 복음은 그를 완전히 다른 길로 이끌었다......

 

1. 박해자에서 사도로 – 바울이 복음을 만났을 때

바울은 처음부터 사도가 아니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예수의 이름을 부정했고,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스데반의 죽음 현장에 있었던 사람, 교회를 향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 그러나 그가 그토록 대적하던 예수님께서 바로 그를 부르셨다. 바울의 사도됨은 그의 이력이 아니라, 은혜의 기적으로 설명된다.

그는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 위에서 눈이 멀었다. 한순간, 그의 시야는 어두워졌고, 그의 마음은 밝아졌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 부르심은 심판이 아니라 초대였다. 주님은 그의 길을 꺾으셨고, 그의 이름을 바꾸셨고, 그의 삶을 완전히 뒤집으셨다.

그의 회심은 곧 새로운 사명의 시작이었다. 바울은 그 사건을 두고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단지 그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셨다. 복음을 핍박하던 자가,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는 사도가 된 것이다.

그가 만난 복음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예수님이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순간, 그는 복음 그 자체를 깨달았고, 그 복음이 그의 삶 전체가 되었다. 율법을 따르던 바리세인이었지만, 이제 그는 은혜에 붙잡힌 증인이 되었다. 율법의 자랑은 그에게 쓰레기 같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전부가 되었다.

바울의 시작은 실패처럼 보였다. 많은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았고, 제자들도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의 평판을 따라 역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들의 눈보다 깊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과거를 덮을 만큼 강력했다. 바울은 그 부르심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의 걸음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퍼졌다.

바울은 단지 회심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그날 이후로, 그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의 시간, 그의 말, 그의 고난, 그의 편지 하나하나가 복음의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사람의 흔적을 따라 복음을 배우고 있다.

 

 

 

2. 바울의 전도여행 – 지역과 사람을 향한 복음의 발걸음

바울은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복음은 그를 멈추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걷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안디옥을 거쳐 이방의 땅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바울은 그 흐름을 따라 걸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바울의 전도여행은 교회사의 사건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순종이 낳은 여정이었다.

그는 세 차례의 주요 전도여행을 떠났다. 처음은 바나바와 함께였다. 안디옥에서 파송된 그는 구브로 섬을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 더베 같은 소아시아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풀었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했다. 그러나 언제나 거절은 따랐고, 위협과 핍박도 함께였다. 복음이 자리를 잡는 곳마다, 저항도 함께 일어났다.

두 번째 여행부터는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함께했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빌립보에서 루디아가 회심했고, 감옥 안에서 찬송을 불렀고, 간수가 회개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핍박 속에서 도망쳤고, 베뢰아에서는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을 만났고, 아덴에서는 철학자들과 논쟁했다. 그 모든 지역마다 복음은 다른 방식으로 전해졌고,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 속에 자기 백성을 숨겨두고 계셨다.

세 번째 여행은 에베소에서의 긴 사역으로 중심이 잡혔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무려 세 해를 머물며 가르쳤고,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풀었고, 손수 일하며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은 단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치고, 세우고, 눈물로 건넜다. 편지를 쓰고, 사람을 보냈고,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도여행은 지도를 따라가는 행정이 아니라, 사람을 따라가는 마음이었다. 바울은 도시를 걷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람의 영혼을 붙들고 있었다. 그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건물을 짓지 않았다. 사람을 세웠다. 지도자 한 명을 양육하고, 공동체를 돌보고, 다시 떠났다. 그의 발길에는 늘 이별이 있었고, 이별 너머에는 다시 복음을 전할 자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복음은 멈추지 않았다. 바울이 머물렀던 곳곳마다 교회가 자라고, 사람들이 세워졌고, 편지가 오갔다.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의 전도여행은 단지 이동이 아니라, 복음이 한 도시에서 또 다른 도시로 이어져 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복음을 들고 예수님을 따라 걸었고, 그 걸음마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갔다.

 

 

 

 

3. 서신서로 교회를 세우다 – 갈라디아서부터 로마서까지

바울의 발은 떠났지만, 마음은 교회에 머물렀다. 복음을 처음 들었던 자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밤새 질문하던 성도들, 혼란과 다툼 속에서 흔들리던 공동체가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그의 서신은 눈물과 무게를 담은 목양의 음성이었다. 흩어진 교회들을 다시 복음 위에 세우기 위한 사도적 돌봄의 편지들이 바로 서신서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바울은 분노와 애통이 뒤섞인 마음으로 외쳤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누가 너희를 미혹하더냐?” 그의 단호한 선언은 교회를 복음 앞으로 다시 세웠다. 바울은 교회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외쳤다. 갈라디아서의 문장들은 복음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이었고, 율법 아래로 다시 돌아가려는 교회를 다시 복음 앞에 세우기 위한 호소였다.

한편,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들은 주의 날을 기다리며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바울은 말한다. “주의 날은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을 이겨낼 만한 논리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믿음, 사랑, 소망으로 세워진 교회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답게 깨어 있으라고 권면했다.

고린도 교회는 복잡했다. 은사는 풍성했지만, 그만큼 문제도 많았다. 분열, 음행, 소송, 우상 제물, 예배의 질서, 부활에 대한 오해까지. 바울은 깊은 탄식 속에서 두 통의 편지를 보냈다. 고린도전후서가 그들이었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복음 위에 다시 붙들어 세우려는 긴 대화를 나눴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복음은 단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선포였다. 교회는 그 복음의 질서 안에서만 건강하게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서는 복음 교리의 진수를 담은 편지다.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교회를 향한 가장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복음 설명서이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죄 아래 있음을 밝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음을 선포한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고,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며 은혜가 어떻게 죽음을 이겼는지 보여준다.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예정,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까지 다루며, 복음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말한다. 로마서를 통해 바울은 로마에서 서바나까지, 복음이 도달해야 할 지평을 바라보며 교회를 준비시킨다.

이 서신들은 한 도시, 한 교회를 넘어서 복음의 본질을 세대와 장소를 넘어 흐르게 만든 말씀의 강이었다. 바울은 가르쳤고, 책망했고, 위로했고, 다시 세웠다. 그 모든 글의 중심에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는 복음을 따라 세워지는 교회를 남기고자 했다.

 

4. 연약한 교회, 끊임없는 돌봄 -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그곳에서 1년 반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가까이서 함께하며 지켜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교회는 다양한 문제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사는 넘쳤지만 질서는 무너졌다. 자유를 오해한 성도들이 방종에 빠졌다.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제자들이 서로를 판단하며 당을 나누기 시작했다. 바울은 떠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의 소식에 흔들렸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책망하고, 권면하고, 명령했다.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다시 나가도록 서신서를 보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기 위한 복음의 기준을 다시 붙든다. 분파로 갈라진 공동체 앞에서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교회는 쉽게 사람을 따르게 되고, 그로 인해 복음은 무색해진다. 그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하며, 교회가 그 위에 세워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성적인 문제와 소송 문제, 우상 제물에 대한 논쟁, 남녀의 예배 태도, 성찬의 혼란, 은사에 대한 오용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해 조목조목 복음의 원리를 다시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활의 확신으로 다시 교회를 세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고린도후서는 더욱 깊은 정서가 담긴 편지였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의심을 받고 있었고, 많은 고난을 겪은 이후의 상처도 고백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은 질그릇 같지만, 그 안에 담긴 보배가 복음이라고 말하며,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 그는 눈물로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고린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고, 참으며 다시 복음을 심는다. 고린도후서는 책망보다 간청이고, 논박보다 기도였다. 교회를 바로 세운다는 것이 단순한 교리 전달이 아니라, 마음을 주고 다시 회복을 기다리는 끈질긴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고린도 교회는 연약했지만, 바울은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복음도 그렇기 때문이다. 복음은 단번의 회심이 아니라, 반복되는 믿음의 회심이다. 복음은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며, 목양의 일은 건물을 보수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서진 사람들을 품고, 다시 복음 위에 세우는 일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통해 교회와 목양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죄인들의 연약함 속에 복음은 더 깊이 뿌리내렸다. 교회는 조금씩 교회가 되어갔다.

 

 

 

 

5. 감옥에서 쓴 복음 – 옥중서신과 교회를 향한 기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복음은 묶여있지 않았다. 그의 몸은 사슬에 매였으나 그의 복음 사역은 멈출줄 몰랐다. 그의 손은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가 쓴 편지는 교회를 자유롭게 했다. 옥중서신이라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바울이 갇힌 자로서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하며 교회를 위하여 드린 기도이자 권면이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여준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 머무는 자리다. 바울은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고, 그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세워져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삶,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로 공동체가 함께 자라나는 것---all of this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진리였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편지였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지만,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기쁨은 상황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들린 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그리고 겸손과 사랑의 모범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게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 낮아짐의 길을 걷고 있었고, 빌립보 교회도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길 원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선포한다. 바울은 이단 사상과 혼합주의가 퍼져가던 교회를 향해 말한다.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시며,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신다.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숨겨져 있고, 그분 안에서 교회는 이미 완전하게 되었다. 바울은 어떤 인간적인 철학도, 종교적 규례도 그리스도 대신에 설 수 없다고 말하며, 복음의 중심에 예수님 한 분만을 다시 세운다.

빌레몬서는 한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편지이지만, 복음의 본질을 담고 있다.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향한 바울의 간청은 단순한 중재가 아니었다. 그는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형제로 받아달라고 부탁하며, 복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복음은 단지 죄를 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너진 관계를 다시 연결하는 힘이다.

바울은 복음의 눈으로 전체를 내다보고 있었다. 감옥도 그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그는 어디서든 교회를 위해 무릎 꿇었고, 중보했고, 편지를 썼고,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가기를 도왔다. 그의 갇힘은 오히려 교회를 더 깊이 세우는 시간이 되었고, 옥중서신은 고난 중에도 복음이 얼마나 강력하게 역사하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6. 다음 세대를 세우는 복음 –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마지막 권면

바울의 걸음은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달려갈 길을 달렸다고 말했다.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복음은 그와 함께 끝나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 세대를 불렀다. 디모데와 디도는 그의 영적 아들들이었다. 믿음 안에서 낳은 자녀들이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 일만큼이나, 교회를 이어갈 사람을 세우는 일에도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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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웠고,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에게서 믿음을 물려받았다. 바울은 그를 일찍이 사역 동역자로 삼았고, 여러 지역을 함께 돌며 교회들을 섬겼다. 바울은 그에게 말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는 젊고, 병약하고, 자주 낙심했지만, 바울은 그 안에 있는 믿음을 믿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교회를 붙들기 위해 필요한 가르침들을 편지로 보냈다. 바른 교훈을 지키고,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며,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단련하라고 당부한다.

디도는 이방인이었고, 행동력이 강한 지도자였다. 바울은 그를 크레타에 남겨, 미완의 일을 정리하고, 장로들을 세우게 했다. 디도서에서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직분자들이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지, 교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되…” 디도에게 복음은 삶의 질서와 증거로 이어져야 하는 실제였다.

바울은 마지막까지 복음을 놓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도, 재판을 기다리는 중에도, 그는 사람을 복음화 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편지 끝에서 그는 외롭다고 고백하지만, 동시에 말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리고 그 뒤에 오는 말은 분명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복음은 사람을 통해 이어진다. 건물도, 제도도, 프로그램도 아니라, 사람.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통해 교회를 미래로 넘겨주고 있었다. 그들에게 단지 지식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본을 보였고, 권면했고, 끝까지 그들을 믿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다음 세대를 세운다는 뜻이다. 바울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교회는 계속되어야 하고, 복음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 일을 위해 바울은 마지막까지 복음의 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