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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공간/헤브론성경통독_책

10장. 사복음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헤브론성경통독책 초안 쓰는 중)

1. 예수님의 제자화 – 부르고, 함께하고, 보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자신의 길로 함께 걸을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함께 사셨고, 세상 속으로 그들을 보내셨다. 복음은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이어졌다. - 증인들을 통해 이어졌다. - 성령의 사람... 오순절... 약속성취. 

복음서의 첫 장면들에는 갈릴리 호수의 냄새가 배어 있다. 그곳에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다.그들은 어부였고, 무명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부르심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라나섰다. 무언가를 깊이 깨달아서가 아니라, 그 부르심 안에 담긴 권세와 사랑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4-15)

함께 있음이 먼저였다. 전도나 귀신을 내쫓는 일보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이 부르심의 본질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걸었다.
혼자 기도하러 가시기 전에도, 무리들을 떠나실 때에도, 언제나 제자들을 곁에 두셨다. 삶의 작은 일상 속에서, 사소한 질문 속에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들려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셨다. 기적을 베푸신 것도, 비유를 말씀하신 것도 모두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다.
자신의 부재 이후에도, 복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제자들은 여전히 미숙했다. 때로는 서로 누가 더 큰가 다투었고,
때로는 믿지 못하고 물에 빠졌으며, 때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제자화는 삶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 부르심과 실망과 용서를 반복하며,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의 사람으로 세워졌다.

예수님은 오늘도 사람을 부르신다. 여전히 동행코자 하신다. 그리고 세상 속으로 보내기를 원하신다.

복음은 고요한 단어가 아니다. 복음은 발자국이다.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사람을 통해 살아난다.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우리는 함께 걷고 있으며, 우리는 이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2. 복음서가 만난 예수님 – 왕, 종, 인자, 하나님

복음서는 예수님을 네 방향에서 바라본 창이다. 빛은 하나였지만, 그 빛을 담는 창은 각기 달랐다.
그러나 그 차이는 진리를 왜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이 얼마나 넓으시고, 얼마나 깊으신 분인지를 보여주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보았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보를 따라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을 잊지 않으셨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선포한다.
“이분이 너희가 기다리던 왕이다. 다윗의 자손, 약속된 메시아다.”
그러나 마태가 전한 왕은 왕궁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분이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고, 조롱받고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침묵하신 왕. 그분의 통치는 사랑이었고, 그분의 권세는 용서였다.

마가는 예수님을 종으로 그린다.
그의 복음서는 ‘곧’, ‘즉시’라는 단어로 숨 가쁘게 움직인다. 예수님은 머무르지 않으셨다. 병든 자를 찾아가셨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사람들이 외면한 자들에게 손을 내미셨다. 마가는 구원의 이야기를 긴 설명이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 전달한다. 그분은 섬기러 오신 분이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오신 종.”
고난의 종, 고요한 순종 속에 십자가를 향해 나아간 예수님을 그는 기록했다.

누가는 예수님을 인자로 보았다.
인자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누가는 역사 속에 깊이 발을 담근 기록자였다. 그는 가난한 자, 잃어버린 자, 눌린 자, 여인과 아이들의 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기도하셨고, 우셨고, 안으셨다. 그분의 인자하심은 멀리 계신 신이 아니라
곁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의 눈물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오셨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선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으로 선포한다.
그분은 빛이셨고, 생명이셨고, 진리이셨다.
요한은 그분 안에서 모든 시작과 끝을 본다.
그분은 창조 때부터 계셨고,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고,
부활로 다시 영광을 회복하신 분이셨다.

왕이신 예수님, 종이신 예수님, 인자이신 예수님, 하나님이신 예수님.
복음서는 예수님을 찬찬히 돌려가며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이 모든 모습이, 그분 한 분 안에 있다.”


3. 복음서의 마지막 명령 – 아직 끝나지 않은 부르심

예수님의 공생애는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다. 죽음을 이기신 그분은, 부활하신 몸으로 다시 나타나셨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주셨다.
각 복음서는 그 명령을 조금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방향은 같았다. “이제 너희가 가라.”

마태는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
이 명령은 제자 삼는 사역, 곧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세우게 만드는 사명을 예수님은 주셨다.

마가는 더 급박하게 외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막힌 곳은 없었다. 예수님의 명령은 담장을 넘고, 국경을 넘고, 차별을 넘는 명령이었다. 복음은 멈추지 말아야 할 길이었고, 전해야만 하는 생명이었다.

누가는 다르게 정리한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7–48)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명령은 회개와 용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죄인 하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이 마지막 외침에 그대로 담겨 있다.

요한은 조금 다르게 끝을 맺는다.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요 14:2–3)
요한복음은 보냄보다는 기다림의 톤이 강하다. 예수님의 약속, 다시 오실 그날, 그리고 그날까지 잊지 않겠다는 위로의 말씀이 요한복음 마지막 장면에 흐른다.

4복음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전한다.
어떤 복음서는 가라고 말하고,
어떤 복음서는 전하라고 말하고,
또 어떤 복음서는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나는 너희를 여기에 두었고, 너희는 이제 이 복음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끝나지 않았다.
공생애는 끝났지만,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은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4. 제자들의 삶과 죽음 – 복음에 생명을 건 사람들

예수님은 사람을 부르셨고, 그 사람들은 결국 복음을 위해 죽었다. 십자가를 따라갔던 이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걸었다.
복음은 글이 아니라 피로 써 내려간 이야기였다. 예수님이 부르셨던 제자들은 한 사람씩,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끝까지 붙들었다.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죽었다.사도 중 첫 순교자였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의 죽음을 감히 그대로 흉내 낼 수 없었다며, 자신은 거꾸로 죽겠노라 고백했다.

도마는 인도로 갔다. 그리고 창에 찔려 죽었다. 복음을 위해 길을 떠난 사람,
그 길 끝에서 생명을 내어준 사람. 마태는 에티오피아, 안드레는 그리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 한 명 한 명이 흩어졌고, 그 흩어진 자리마다 교회가 생겼다.

이들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들은 패배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을 꺾었지만, 그들이 증언한 복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피가 뿌려진 곳마다 복음은 뿌리를 내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들은 그 생명을 다시 드렸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이었다. 먼저 주어진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을 다시 내어주는 삶.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복음을 위해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는가?

복음은 증언하는 것이고, 때로는 그 증언이 내 삶 전체가 되는 것이었다. 제자들의 삶은 복음 그 자체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닮았고, 그 닮음은 생명의 끝까지 이어졌다.


5. 오늘, 나의 복음서는 써지고 있는가

복음서는 끝나지 않았다.
마태도, 마가도, 누가도, 요한도 복음의 시작을 썼다.
그러나 그 복음은 오늘 우리 삶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 그분은 사람을 부르셨고, 함께 하셨고, 죽으셨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 부활의 생명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가? 나는 지금 그분과 어떻게 동행하고 있는가? 내가 쓰는 복음서는 어떤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는가?

복음서, 그것은 내 삶에서 지금도 써지고 있는 말씀이다. 내가 용서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희생할 때 그때마다 복음은 또 한 줄 이어져 적힌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도 말씀하신다.
"너도 나를 따르라."
"너도 나를 증언하라."
복음서는 전해지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살아내야 하는 삶이다.

오늘도 복음은 내 걸음으로 기록되고, 내 선택으로 새겨지고, 내 고백으로 증거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내 삶을 통해 복음을 읽게 될 것이다. 내가 전하지 않아도, 내가 쓴 그 복음서를 그들이 먼저 읽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오늘 어떤 복음서를 쓰고 있는가?"
"내 삶은 예수님을 누구로 증언하고 있는가?"

복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복음서는 아직 진행 중이다.
그 여백을, 오늘 그대가 채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