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핵심 본문 요약 (행 6:9–14)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하게 함
6:13: 거짓 증인들을 세워 말하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아니하도다"
6:14: 나사렛 예수가 이곳(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했다 하더라
2. 왜 그들은 단순한 ‘논쟁 실패’로 그치지 않았는가?
(1) 스데반의 메시지는 논리적 주장이 아닌, 정체성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자유민들이 볼 때, 스데반은 단지 교리적 논쟁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신앙 체계와 정체성의 핵심인 율법, 성전, 모세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신앙에서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자 민족적 자존심이었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이 친히 주신 언약의 표징이며, 유대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회 질서 전체를 유지하는 축이었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진리는 그들의 디아스포라 경험 모두를 무효화 시키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2)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자유민들)의 열심과 방어 본능 때문에
역사적으로 자유민들은 로마 사회 속에서 수많은 도전 가운데 유대 정체성을 지켜낸 자들이었다. 헬라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유대교적 정체성을 지키고, 세우고, 자녀에게 전수하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 모든 기반을 흔드는 말을 했고, 그에 대한 논리적 방어에 실패했다면, 스스로의 존재 기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 논쟁에서 진 것이 논점 하나를 놓친 사건이 아니라,자신들의 삶 전체가 위협받는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것다 (이것은 복음의 효과다. 복음은 기존 삶의 축을 뽑아버린다. 복음은 일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 안에서 과거의 모든 경험을 다 죽여버린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부활 생명으로 새로 살아나게 한다. 아예 새것을 만들어버린다).
(3) 논쟁에서 졌다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권위를 잃는 일이기 때문에
1세기 유대 사회, 특히 회당 중심의 헬라파 유대 공동체 안에서는 논쟁에서의 패배가 지적 패배로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공동체 내 권위 상실로 이어지는 패배였다. 자유민들의 지도자들이 논쟁에서 공개적으로 무너졌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회당에서 리더십을 잃게 될 것이었다. 다른 자유민들이 자신들의 권위가 아닌, 스데반의 증언을 듣고, 예수의 권위에 복종할 것이 뻔했다. 그들은 단지 “스데반을 반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 회중을 빼앗길 상황”이 두려웠을 것이었다.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논쟁할 때마다 그들이 “무엇이라 할 수 없더라” 하고 결국 죽이기로 결의하는 구조와도 유사하다 (눅 20:39–47).
3. 왜 자유민들은 스데반을 죽이려 했는가?
그들이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한 논쟁 패배는 자존심의 상처일 수는 있어도, 거짓 증인을 사서 죽이려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반응은 훨씬 더 격렬하고, 조직적이며, 체제적이다. 왜일까?
이것은 바로 복음의 효과때문이었다.
(1) 복음은 기존의 삶의 축을 뽑아버린다
자유민들, 즉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들은 로마 사회와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율법과 성전 중심의 신앙 정체성을 붙들고 몸부림쳤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모세는 토대였고, 율법은 보호막이었으며, 성전은 중심축이었다.
그런데 스데반은 말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 7:48)
이 말은 하나의 신학적 견해가 아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 선포였다. '그동안 너희가 의지했던 모든 기반, 너희 정체성의 중심축을 복음이 뽑아내고 있다는 선언이다.'
(2) 복음은 일부만 바꾸지 않는다 – 전체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하신다
자유민들은 ‘헬라화된 유대교’를 지켜온 사람들이다. 성전과 율법을 붙들며, 고난 속에서도 유대인으로 살았던 자긍심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이제는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있고, 그 외의 모든 의로움은 헛되다.”
복음은 인간이 자력으로 유지해온 모든 ‘의로움의 구조’를 무너뜨린다.
(3) 복음은 개혁이 아니라 재창조다.
복음은 기존것을 땜질하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는 낡은 옷에 새 천을 대어주는 분이 아니고,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붓는 분도 아니다 (막 2:21–22).
복음은 기존의 삶을 “죽게” 한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시키신다 (고후 5:17).
자유민들은 바로 이러한 "죽음"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에게 율법과 성전은 살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복음은 그것이 오히려 생명을 막는 벽이 되었다고 폭로한다.
(4) 논쟁에서 졌다는 것은, 삶 전체가 부정당했다는 것
자유민들의 분노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들은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통해 자신들의 모든 ‘종교적 수고’가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그들이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졌다는 것은 곧, 삶 전체가 부정당했다는 뜻이었다.
그들의 열심, 정통성, 헌신, 회당 생활, 문화적 정체성…복음은 그것들을 향해 말한다: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 말을 감당하지 못했다.
(5) 그래서 그들은 복음으로 인한 자기 부인 대신 스데반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논쟁을 통해 회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회개는 자기 부인이다.
복음 앞에서 진짜 회개란,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버리고, 예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부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스데반을 부인했다.
복음을 제거하려 했다.
그것이 자유민들이 거짓 증인을 세우고, 죽이려 했던 이유다.
4. 복음은 전부를 바꾼다
복음은 삶의 일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 안에서 과거의 모든 경험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부활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한다.
복음은 아예 새것을 만든다. 새 창조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자유민들은 그 새 창조를 거절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 스데반을 거절했다.
그것이 단순한 논쟁의 결과가 아었다. 복음의 전복적 본질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었다.
[신문칼럼글형식으로 바꿔 봄]
제목: 그들은 왜 스데반을 죽여야만 했는가? (행 6:8-15)
글 | 송준기목사
사도행전 6장에서, 스데반은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중 ‘자유민들’이라 불리는 헬라파 유대인들은 논리로 그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행 6:10). 하지만 이상합니다. 단순히 신학 논쟁에서 졌다고 해서, 거짓 증인을 세워 사람을 죽이기까지 할 일일까요?
그들의 반응은 감정적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격렬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효과였습니다.
복음은 기존 삶의 축을 뽑아버립니다.
"자유민들", 즉 로마 사회와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 중심의 신앙을 붙들며 자기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모세는 토대였고, 율법은 보호막이었으며, 성전은 생존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 7:48)
이것은 하나의 신학적 견해가 아니었습니다. 자유민들의 존재 이유, 정체성의 핵심을 그 근본에서 뒤집어버리는 진리의 선포였습니다. 복음은 그들이 평생 쌓아온 삶의 구조 전체를 통째로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일부만 바꾸지 않습니다 – 전체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들은 성전과 율법을 지키며 자신들의 헌신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선포합니다:
“이제는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있고, 그 외의 모든 의로움은 헛되다!”
복음은 인간이 자력으로 유지해온 모든 ‘의로움의 구조’를 해체합니다.
부분 수선이 아닙니다. 복음은 개혁이 아니라 재창조입니다.
예수는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어주는 분이 아니시며,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붓지 않으십니다.
복음은 기존의 삶을 “죽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전혀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자유민들은 바로 그 죽음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과 성전은 생존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이 오히려 생명을 가리는 벽이 되어 왔음을 폭로합니다.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졌다는 것은, 한 주장을 놓친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부정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열심, 정통성, 회당 생활, 문화적 정체성…
복음은 그것들을 향해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 말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대신, 스데반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논쟁을 통해 회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자기 부인입니다.
복음 앞에서 진짜 회개란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버리고, 예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복음을 전한 자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스데반을 부인함으로 복음을 지우려 한 것입니다.
복음은 삶의 일부를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삶의 중심을 부수고, 다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자유민들이 거절했던 것은 바로 이 전복적인 복음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죽이려 했던 것은,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모든 과거가 무너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삶의 축을 뽑아낼 때, 우리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 3:3)
ps. 성령의 역사로 인한 ‘두려움과 분노’의 결합
god 6:10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능히 당하지 못했다”고 기록. 여기서 핵심은 “성령”.
그들이 감당하지 못한 것은 단순한 논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터져 나오는 진리의 권세였음.
이는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회개의 촉구, 정죄받는 두려움, 자기방어 본능을 자극하며, 결국 분노와 폭력으로 전이됨.
이는 오순절 이후 복음이 선포될 때 감동받아 회개하는 자들과 격분하여 핍박하는 자들로 나뉘는 사도행전의 패턴 중 하나 (행 2:37 vs. 행 5:33,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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